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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2)
1991년 03월 02일 (토)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본론

김기동의 마귀론은 왜 이단인가?

제Ⅰ장
계시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필자는 이단논쟁을 계시론에서 시작해서 계시론에서 끝내고 싶다. 신앙생활 자체가 말씀에서 시작하고 말씀에서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Ⅰ. 성경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불과하다는 베뢰아.
 이단이 성경을 보는 자세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경계시만 충분한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 외에 이와 대등한 또는 이상의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다. 전자는 오직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 이단이 된 자들인데, 세분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면서 실질적으로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는 이단은 이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히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는 이단들마저도 가능한 성경만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려한다.

 실례를 들어보자. 통일교인에게 원리강론은 성경 외의 계시오, 성경 위의 계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표면적으로 성경을 경전으로 받고 있으며 원리강론은 성경에 대한 주석서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단은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또 다른 계시를 들고 있다. 또한 한 손으로는 성경으로 강조하고 또 다른 손으로는 성경을 경시하고 부정한다.

 이제 베뢰아의 계시론이 위의 사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김기동 씨는 한편으로는 성경을 대단히 강조한다. 1년에 성경을 42번 통독했다고 하고 61년에는 75독, 72년에는 108독 했다고 한다. 그가 성경을 강조하는 면을 먼저 살펴보자.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충분히 갖게해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음을 뚜렷이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압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많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며 믿음의 모든 능력을 보증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김기동, 영원한 삶, 서울, 1982년, p.125).

 성경은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했다. 성경을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고까지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알고 성령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성경을 모르면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모르면 성령 또한 모른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서울, 1986, 서문에서).

 이제 김씨의 다른 손을 보자. 한 손으로 강조한 성경이 무엇에 의해 무너지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제 성경으로는 예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말과 성경은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같다는 말에 유의하자.

 "성경도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는 이들이 느낀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고 과거에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리라 하고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기록의 좁은 그릇 안에서만 머물고 있기에 이보다 더 큰 많은 능력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보다도 더욱 많습니다. 성경에도 이미 밝혔듯이(요 21:25) 성령의 역사를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록되었으나 성도들의 부활은 아직 남았습니다. 현대의학의 고민이고 큰 문제인 암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없으나 이에 대한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보다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성령의 활동은 성경의 테두리를 초월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성경이란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옴 같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그 능력과 역사 가운데서 지극히 적은 부분이 비추인 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성경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더욱 알고 그 날에 가서 그를 더욱 알고 영원히 살면서 영원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심히 따지기보다 성령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 더욱 옳습니다."(김기동, 영원한 관계, 서울, 1983, pp.68-69).

 성경에 대하여 말할 때는 성경이 강조되나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는 성령을 강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경의 가치를 경시하고 있다. 성경의 좁은 그릇 안에 머물면 더 큰 능력들을(성경을 넘어서는)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고,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그렇고, 성경이란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 같다는 말이 그렇고, 현재 성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다.

 이같은 말은 사실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사역까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처럼 성령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김씨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것 같이 보인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와 모순될 수 없고 성경과 다른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음을 원칙론적으로 인정하는 것같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는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보다는 그 폭이 넓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구태여 그의 말로 꼬집자면 성경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만 매여 있으면 문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성령의 빛밖에 경험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이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말이다.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는가? 한마디로 그의 체험 때문이다. 그의 체험과 성경의 관계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강조하는 것 같으나 경험의 문제를 말할 때는(자신의 경험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있기 때문에) 성경의 능력과 가치를 제한해야 하고 심지어 성경으로 성경을 폐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경험주의요 신비주의의 길이다.

 성경을 66권으로 제한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해서 성경이 아니요 영감으로 기록된 것만 성경이다. 바울은 고린도서 외에 개인적인 편지를 고린도에 써 보낸 일이 있으나 영감된 글이 아니었다(고전 5:9).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성경을 66권으로 제한하셨을까? 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사복음서는 침묵하고 있을까? 왜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수님의 행적(요 21:25)을 기록하지 않으셨을까? 왜 사복음서는 헤아릴 수 없을 예수님의 기적들을 35건으로 제한하여 기록했을까? 더욱이 왜 성경은 귀신에 대해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을까?

 김씨의 말처럼 마귀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면 정녕 성경은 마귀에 대해 더 정확하고 확실한 지식들을 전해 주었어야 했을 터인데 왜 그렇지 않을까? 김기동 씨의 말처럼 66권 성경으로조차 어떤 경험을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게 되면 성령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영원한 관계, p.69)면 어떻게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더욱이 김씨의 귀신론과 같은 교리는 교회사에 없었고 예수를 아는데 마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구원론을 주장한 초대교회 교부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었을까? 김씨의 말처럼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이 새로운 역사인 베뢰아 운동은 왜 이제 나타났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김씨의 마귀론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불빛보다 더 밝은 성경 밖의 계시로 보아야 할까? 베뢰아의 가르침은 과연 성령을 제한하지 않는 성경 위의 계시일까?

 예컨대 성경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확실히 밝히고 있지만 우리가 더 알고 싶은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국지옥 계시를 위해 누구의 경험을 첨가시켜야 할까? 「내가 본 천국」의 저자 펄시 콜레의 경험일까? 「다가오는 미레의 저자 이장림 씨의 경험일까?

 김씨가 계시론에서 이단의 뚜껑을 열게된 것은 자기 경험을 성경과 일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다. 그는 성경은 해석을 하면 안된다고 하는 기상천외의 자가당착적 말을 하고 있지만(마귀론 상, p.10) 그는 자기경험의 합리화를 위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그릇 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성서란 가늠자를 통해 경험이란 가늠쇠와 맞추어 총을 쏘면 목표물에  맞는다는 도식(Ibid., p.10)은 얼핏 보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릇된 도식이다. 성서는 모든 경험을 비판할 수 있는 완전한 진리이다. 경험을 통해서만 진리를 보여주는 불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성서는 그것 자체가 진리임은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아도 하나님이심과같은 이치이다.

 여기까지에 김씨가 계시론에서 보인 이단사상은 그를 옹호하는 다른 신학적 기준에 의해 반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경험을 나타내고 그것을 성경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의 시도는 피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이단사상을 낳게 되었다.

Ⅱ. 김씨의 설교도 성서적 가치를 지닌다는 베뢰아

 김씨는 성경과 성서를 구분하다.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것인데 이는 계시이기 때문이요, 성서는 가감할 수 있는데 이는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은 율법과 복음인데 율법은 모세오경이요 복음은 공관복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이기, 민수기, 신명기)과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여덟 권은 성경으로 가감할 수 없으나 나머지 58권은 가감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의 간증이나 설교도 먼 훗날 증거로서 성서가 될 수 있다는 망령된 말을 한다. 이는 그의 테이프 24-1에 잘 나타나 있다. 직접 인용해 보자. 말로된 것을 그대로 옮기면 불필요한 말이 많기 때문에 수식어는 생략했으며 줄인 말은 괄호 속에 넣었다.

 "신의 계획을 가리켜 경륜이라고 합니다. 이는 피조물과 의논없이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신적 작정이라 합니다. 이는 피조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율법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기록한 책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다 이렇게 쓰셨지요? 율법 대개 구약에서는 모세오경이라고 하지요. 오경 자체가 모세가 고의적으로 성경을 위해서 기록했지요?"

 "아주 좀 냉정하게 율법을 성경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생애가 누가복음까지 삼복음, 공관복음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외에는 성경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기가 있다고 합시다. 또는 열왕기나, 역대기나, 다니엘서나 또는 많은 이런 책들이 있는데 욥기를 말하면 하나의 어떤 가정 이야기인데 그러나 이런 가정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율법을 증거합니다. 율법을 시인합니다."

 "율법을 시인해 주는, 율법을 증거하는, 율법을 보호하는 그러한 글을 가리켜 성서하고 합니다. 어느 역사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그 역사 이야기가 그런 역사를 통해서, 그 기록한 글이 이 내용 중에 아주 다분히 율법을 지지하는 면이 있을 때 이는 거룩한 글이 될 수 있어요. 그를 성서(라 해요)."

 "오늘날 설교집이나 간증집, 이런 것도 수백 년 후에는 성서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수 있어요. 지금도 이런 소리를 하면 욕을 먹으니까 말 못해서 그렇지요. 그것도 성서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어요. 다 여러분의 설교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증거나 그들의 글이 성경을 지지할 수 있는, 다분히 지지하는 그러한 내용의 글을 가리켜 성서라 합니다."

 "신약에 있어서 예를 들면 사도행전이나 기타 그런 편지들이 그것은 증인들에 의해서 그 예수님의 생애를 지지하는, 시인하는 다분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거야. 이를 성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이예요. 가감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생애도 가감할 수 없어요. 영원히 가감할 수 없지요. 그것 뿐이니까."

 "그러나 성서는 확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책을 더 늘려갈 수도 있다 이거야. 줄일 수도 있고 더 많은 책이 막 추가될 수 있다 이말이야. 성경이라고 하는 부분은 결코 가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분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가감할 수도 있다 이거야. 책을 그보다 더 추가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줄여버릴 수도 있고 하는 부분을 가리키고. 그것은 인간들이 신앙으로 우리 신앙으로 증거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이야기 듣고도 더 생각하면 성경이 얼마나 간결하고도 얼마나 뚜렷한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비판할 필요가 있겠는가? 없다고 여긴다. 소개하는 것만으로 앞에서 보인 계시론의 숨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약화시켰듯이, 성경과 성서를 구분하는 이단적 교리체계를 세운 것은 자신의 글을 성경적인 수준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에서 나왔음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종교개혁자의 말을 결론으로 삼자.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멎는 곳에서 멎자.


제Ⅱ장
신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김씨는 이 신론에서 이단이 되기에 필요충분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이를 증명하겠다. 베뢰아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둘째, 베뢰아는 예수님의 양성을 모두 부인한다. 셋째, 베뢰아의 성령은 허수아비다.

Ⅰ. 베뢰아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그동안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김씨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삼위일체론 문제에 대단한 반발을 보였다. 워낙 김씨가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삼위일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가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강조하고 믿는 삼위일체는 이단으로 정죄된, 시베리우스가 "동일한 본체인 세 형태"라고 주장하던 사역적 양태론인 것이다. 즉 세 분 하나님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요,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입니다. 그러니까 본질로서는 아버지요, 본체 곧 형상으로서는 아들이라 하고 영으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베뢰아 사람 제7권, 1988년 7월호, p.40).

 성령을 알자(베뢰아 도서출판, 1986)란 책에서, 또는 강의 테이프마다 같은 말이 수없이 반복된다.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시며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이십니다. 본질이란, 영이라는 말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이시냐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본질로서는 아버지 되시고, 보이는 곳에 나타나신 분, 곧 피조물들이 그를 확인하여 그의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본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형상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고 영이십니다. 그래서 본영으로서 성령이 되십니다. "

 "이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할 때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이 분이 나타나셨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에는 본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영들이 많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는 아버지이시고 우리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십니다."(성령을 알자, pp. 72-74).

 위의 말은 비교적 무슨 소리인지 선명하게 이해가 안될 것이다. 단지 인격이 하나요 나타난 모양에 따라 다르다는 사역적 양태론에 그 초점을 맞추며 다음 글을 보라.

 "하나님은 곧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 아버지가 되십니다(요 14:8).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있으면 성령이 되십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성령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삼위의 각각 개체의 인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장소에 따라 불리워지는 이름이 다릅니다. 이는 곧 세모꼴을 어디서 보나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서로 각각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은 오직 하나입니다. 각각 개체의 인격으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얼굴을 보는 방향에서 다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곧 성령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입니다."(T.P.9-2)

 이보다 완벽한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은 없다. 김씨를 옹호하는 어떤 자의 글을 보아도 김씨의 위의 주장을 양태론적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직 자료의 신빙성 문제에 대한 시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테이프를 들어보면 더욱 선명한 양태론주의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하신 기도는 예수님과 하나님은 인격이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라는 말은 이 때문에 나온 말이다. 절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시고 성령은 성령이시다. 김씨의 말처럼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있을 때 성령이 아니라 성령은 성도 안에 있든지 성도 밖에 있든지 성령이시며, 또한 성령이 아들 안에 있을 때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아버지이시다.

 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임을 보여주는 자료는 너무나도 많다(T.P.9-2, 29-2, 성령을 알자 등). 김씨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라 하며 여호와 증인을 실례로 들어 설명했다. 김씨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에게 쏜 이단 정죄의 화살이 결국 자신의 심장에 박히고 만 것이다.
 
Ⅱ. 베뢰아는 예수님의 양성을 모두 부인한다.

 김씨는 표면적이고 이론적으로는 인성을 인정한다. 아니 인성만 인정할 뿐이다. 그런데 그 인성마저도 정통교회 사상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오신 후에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신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단이라는 것이다. 정통교회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고 사람을 살리시는 등의 기적을 통해 신성을 주장하는 반면, 김씨는 그것은 우리 인간도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김씨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주장하는 성경적 증거는 바로 요한 2서 1:7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요이 1:7).
 먼저 김씨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신성을 살펴보자.
 테이프 9-2번의 내용을 가능한 그대로 적되 불필요한 수식어 는 생략했으며 줄임말은 괄호 속에 넣었다. 이어지는 29-2번이나 19-2번도 같은 방법으로 기록했다.

 "육체가 영이니까 영이 육체가 된 것이니까 썩지 않는 몸이니까 예수는 부활했더라도 그 상처, 못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오지만 인간은 부활 때 상처(가 즉) 얼굴이 얽었든간에, 무슨 못으로 찔렸든, 칼로 긁혔든간에 상처가 없지요. 그것은 상처는 흙으로 돌아갈, 그것은 흙이 상처를 가지신 것이지 영이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오직 영원히 상처를 가지신 이는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분 한 분 밖에 (없어요). 영원히 영원히 한 분밖에 없다, 이 말이예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이 그가 바로 성령이예요. 그래서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되시지요.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내가 너희 안에 있다. 그가 우리 안에 있을 때 또는 성령을 우리 안에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의 영은 내가 너희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내가 너의 안에 (있다)' 할 때 바로 이 육신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가 바로 우리 안에 있을 때,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 말이 생명이요 영이라고 했는데 생명이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 있을 때는 이는 보혜사예요. 증거하시는 이란 말이예요. 보혜사, 변호사라. 변호사, 증거하시는 자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는 것이예요(계 5:1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내 살을 먹어 너희가 영생이 있고 내 피를 마시는 너희에게 생명이니라. 예수의 피가 성령이 아니예요. 예수의 살이 성령이 아니예요. 영신(영의 몸이란 뜻: 필자 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를 흘린 것입니다. 영신입니다. 곧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는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곧 예수의 몸이요 말씀이시며 영이시란 말이예요. 그리스도 영, 여기에서 대개 많은 사람들이 혼돈하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누구시냐? 성령이시다. 성령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에서 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사람이 하나님이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임 : 필자 주)."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곧 그 안에 있는 이가 하나님 아버지시다. 우리 안에 있는 이가 곧 성령이시다. 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자꾸 인격을 따로 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아주 복잡하게 되고 (있습니다)."

 위의 "예수님은 영이 육신이 된 영신이라고 한 점과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하면 사람이 하나님이시라"는 항에 주의하며 다음 내용을 보자.
 이는 테이프 29-2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다. 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버지 안에 있지요. 우리 어린아이가 엄마 품 속에 있는 것과 똑같지요. 똑같애요. 그래서 우리가 아들 할 때는 영적 존재로 생각하는데요(영적으로 생각지 말라는 뜻 : 필자 주) 아들 할 때는 반드시 사람으로 오신 이를 말해야 되지. 그래야 인격이 되니까. 하나님의 아들 할 때요? 육신으로 오신 이가, 사람으로 오신 이가, 사람이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이신 그가 육신으로 오심으로 아들의 인격이 세상에 현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들이신데, 성령이 아들 안에 있을 때 아버지라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할 때 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사람으로 오신 이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끝으로 다음의 결정적인 내용을 들어보자. 이는 테이프 19-2번이다.
 "예수의 생애는 신의 생애가 아니고 사람의 생애입니다. 물 위를 걸은 것은 사람이신 예수가 걸은 것입니다. 사람이 걷는 것이니 보편적인 것입니다. 무덤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느 한 부분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김씨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면을 책으로부터 살펴보자.
 김씨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에게 존칭어를 쓰셨는데 이는 예수님은 사람 인자가 되셨기 때문에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성령을 말씀하실 때마다 '내가 가면 그가 오시리니' '오실 때에' '오시면' '너희와 함께 계시면'하여 존칭을 쓰셨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성령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존칭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에, 곧 피조물과 함께 하시어 피조물이 수태되는 것같이 사람 몸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땅에서 식물을 먹고 피곤하여 저녁에는 주무시며, 죽임을 당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곧 인자로 계셨기에 그 동안은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일체 되시지만 인자 예수가 받은 영광보다 성령은 더 크신 영광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성령을 알자, p.13)

 예수님이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신이 아니라는 말은 결국 신성을 부정한다는 말인데 정통신학을 한 자라면 이것만으로도 이단이 되고도 남음을 알 것이다. 교회사적 변증은 인성문제까지 취급한 후에 하도록 하고 간단한 성경적 변증을 먼저 해보자.
 도마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김씨의 말에 의하면 도마는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이단이 될 것이다. 또한 김씨에 의하면 바울도 이단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이단이 되어야 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러면 이제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예수님의 인성 속에 나타난 이단사상을 정리해 보자.
 요한2서 1:7에 의해 예수님은 인간이심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지만 신성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단이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인성마저도 역사적 기독교와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요한복음 1:1,14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6:63에 의해 곧 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을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로서 영은 항구적 존재이니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수준으로서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T.P.9-2).

 이같은 사상의 맥락에서 다음 책들의 글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이며 이는 진리요 생명이며 세상에 비치는 빛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말씀은 동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생명과 빛도 동격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가 빛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 말한 것입니다"(요 1:14).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은 말씀으로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패배를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 곧 빛 때문인 것입니다. 귀신도 이 진리와 생명과 빛 때문에 쫓겨나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23).

 "그러므로 사람은 생령이 아담이며 예수는 육신이 아담인 것입니다. 같은 아담인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아담이 된 것이며 사람은 영이 생령이 되었을 때 아담이 된 것입니다. 곧 사람은 올라갔고 주님은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은 항구적인 가치가 부여됨으로써 생령인 아담이 되었고 예수는 종의 형상을 입음으로써 아담이 된 것입니다. 같은 아담이지만 예수님의 육신과 우리의 영의 수준이 같기에 예수님의 육신의 죽음은 사람의 영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은 신령한 것이기에 썩지 않을 것이 순간에 몸으로 부활하여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장하지 마라' 부활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화장을 하든지 않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영이시기에 그 육신의 상처가 그대로 영원해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어 살다가 죽었다 할지라도 영이 절름발이가 아닌 이상 온전한 상태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Ibid., pp.90-91).

 "예수님의 말씀은 영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영입니다. 그의 흘리신 피는 영입니다"(베뢰아 사람 9권, 1989년 3월호, p.44).

 이제 비판해 보자.
 먼저 김씨는 요한2서 1:7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인성만 인정하면 이단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오직 그 당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던 가현설주의자(도케티즘)에 대해서 요한이 한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지 않고 영으로 오셨고 영으로 죽으셨고 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인성을 qwjd해도 이단이지만 반면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해도 이단인 것이다. 바로 아리우스가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다가 니캐아 종교회의 때 이단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양성문제는 중요하다. 초대교회 종교회의 대부분은 바로 이 예수님의 양성문제를 중심한 이단논쟁이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유사하나 하나님이 아리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된 때가 니캐아회의였으며(325년),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하던 아볼리나리스가 이단으로 정죄되던 때가 콘스탄티노플회의요(381 년), 그리스도의 양성이 완전히 독립되었으나 승천할 때 합해진다는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된 때가 에베소회의요(431년),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정하던 유디게가 정죄던 회의가 칼케돈회의(451)였다.

 그렇게 보면 이 양성 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어느 하나만 주장하든지, 어느 하나를 제한하든지, 아니면 둘 다 부정하든지, 둘을 혼합시키든지, 둘을 분리하든지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비혼합적이요, 비분할적이요, 비준리적이요, 비변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김씨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는데 그나마 주장하는 인성도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체는 항구적 존재로서 인격이 아니라고 하니 그리스도의 인성은 분명 우리와 같은 인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은 죄성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 것이다(고후 5:21; 히 4:15).

 이 점에 대한 신조들의 내용을 직접 살펴보자.
 먼저 니캐아 신조의 내용이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 앞에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빛이시며, 참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다음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대에 앞서서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피조자가 아니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양성문제에 있어서 특히 신성문제에 있어서 더욱 선명해지고 분명해진 것은 아다나시우스 신조이다. 살펴보자.
 "…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이시며, 인간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신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으며, 인간으로서는 성모 마리아의 본질로부터 나셔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칼케돈 신조에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그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신성에 관한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한신 그리스도-성자, 주, 두 가지 본성을 타고 나신 독생자를 인정하며, 이두 가지 본성이 혼성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김씨가 예수님의 양성문제에 있어서 이단의 화살을 피해 갈 역사적 성경적 길이 있는가? 한마디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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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목사가 쓴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기독교문화협회刊, 1990년 9월10일 발행)를 전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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