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이단&이슈 | 최삼경 목사 VS 지방교회 논쟁
       
윗트리스 리의 사상으로 한국에는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지상논쟁6-2 교회와신앙측
1998년 05월 01일 (금)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1. 일단 논쟁을 마치며
약속한 6회의 논쟁이 막을 내리게 됐다. 얼마나 유익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라고 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면에 힘을 많이 쏟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로 별다른 사고 없이 마지막회를 맞게 됨을 감사한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비판하면 세상법정에 제소하거나 심지어 협박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반하여 윗트니스 리측의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이렇게 충실하게 지상논쟁에 응해 준 데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

필자편에서 반성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 싶은 점이 있다.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필자는 본지 96년 8월호부터 지방교회측과 윗트니스 리가 이단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논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에 윗트니스 리측과의 논쟁 외에 안식교측과도 무려 10회에 걸친 논쟁을 함께 시작했었다. 안식교측과는 논쟁에 필요한 시간과 주제 등 방법을 선명히 정하고 시작했었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측과는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 오히려 짧은 논쟁을 길게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필자는 처음 몇 회에 소극적인 논쟁을 하게 됐음을 아쉽게 생각하고 이 점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더욱이 근자에는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측과의 전례 없이 치열한 논쟁을 함으로 인하여 이 논쟁의 마지막회를 여러번 연기하게 되었는데, 이 점에 대하여 독자들은 물론 윗트니스 리측의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에게도 사과와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제 지방교회측과의 논쟁이 일단 끝나지만 필자는 다시 논쟁할 뜻이 있음을 밝힌다. 그래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본 논쟁은 여러 가지 점에서 평형에 맞지 않은 논쟁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전에 서로 원고의 주제와 양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윗트니스 리측에서 더 많은 분량의 원고를 사용하게 됐다. 그리고 이 마지막 논쟁에서마저도 윗트니스 리측이 유리하게 됐다. 윗트니스 리측에서 필자의 원고가 마지막으로 들어가면 자신들의 입장이 불리하니 마지막 원고는 양측이 동시에 게재하자고 제의했다. 사실 윗트니스 리측의 요구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섬세하게 볼 때 그래도 역시 평형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윗트니스 리측에서 어떤 변증을 했는지 모르고 글을 쓰고 있고,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필자가 쓴 지난 변증에 대하여 글을 쓰다 보니 필자가 불리하게 됐다. 그러나 진리가 그런 순서나 양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필자는 지방교회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모르기는 해도 본 논쟁 후에도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물론 필자편에서 재변증의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동안 6회에 걸친 논쟁을 통해서 밝혀진 진리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서로가 미비하다고 느끼는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논쟁의 필요는 양쪽에 다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지난 논쟁이 너무나 삼위일체론 중심으로 진행된 감이 있다. 즉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아니다"를 말하다 끝난 것 같은 인상이 든다. 더욱이 평신도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난해하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평신도들에게 유익이 감소된 요소도 있다고 본다. 이것도 재논쟁의 필요 중의 하나이다.

다음으로 필자가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들에게서 이단사상을 더 깊이 느낀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저들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많은 이단들을 낳게 한 사상적 모티브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시간을 조금 보낸 다음에 재논쟁을 제의할 것이다. 윗트니스 리측에서 기꺼이 응할 것으로 믿는다. 그 때는 안식교측과의 논쟁 때처럼 주제와 양과 일정을 미리 정하고 논쟁 후에 양측 모두 그것들을 모아 단행본 책으로 출판할 수 있게 하고 시작했으면 한다.

본호에서는 역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에 대해 간단히 정리를 하고, 그의 인간관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틀렸는가를 더 깊이 취급하겠다. 그리고 지난 97년 11월호에서 취급했던 교회론과 관련하여,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은 정통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기 위한 수단일 뿐 윗트니스 리의 교회관에 의하면 정통교회는 바벨론 내지 음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선에서 본 글을 마치려 한다.

2.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이미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많은 논쟁을 하였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마지막회인 이번에도 지난 번의 필자 글을 근거로 또다시 삼위일체에 대한 변증을 분명히 했을 것으로 본다. 또 무엇을 어떻게 하여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며 필자가 삼신론 이단이라고 증명하려고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도 또다시 논쟁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본호에서 다음과 같이 필자의 입장을 재정리하려 한다.

① '영'이란 말과 '영적'이란 말은 다르다.  물론 영이란 말을 형용사적 의미 즉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또한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역시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히 양태론이다.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세 영이 아니요 한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과(하나님의 경륜, 16쪽), 그리고 삼위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과(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또한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그것이 옳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가졌다는 증거라고 본다.

②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심지어 유명한 학자들마저도) 인격이란 말을 본질의 단일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그것이 셋의 구별성을 의미하는지 하나의 단일성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인격이란 말의 의미를 혼돈하거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태론 삼위일체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③ 틀림 없이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은 수박 덩어리요, 아들 예수님은 조각난 수박 조각이요, 성령님은 우리 몸에 들어가는 수박즙이라고 말한 '수박 비유'를 보면 이는 분명히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이라고 비판하였더니(본지 96년 12월호, 136쪽), 처음에는 예화의 한계라고 하더니 후에는 그것도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언급하거니와 예화의 한계가 아니라 오류요 그리고 신인합일주의와 양태론 삼위일체관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예화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예화가 있는데 바로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에서 나온 예화가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집에서는 아버지요, 직장에서는 사장이요, 교회에서는 장로라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에 의하면 인격은 하나이다. 한 인격의 사람이 그 직능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진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의 수박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④ 필자는 삼신론자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변형된 양태론임에 틀림이 없다. 필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물론 본질의 단일성도 다 믿는다. 성경적으로 믿고, 신학적으로도 믿고, 경험적으로도 믿는다. 그러나 본 지상 논쟁의 한 초점인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인가 아닌가'를 밝히자는 곳에서 필자의 삼위일체관을 구체적으로 변증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공격이 최대의 수비란 생각 때문에 필자를 삼신론자로 몰아 세웠는지는 모른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이단자들과 그리고 이단들 편의 도움을 입고 살아가는 교계의 몇몇 언론인들이 바로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했던 그 내용으로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공격했다. 필자로서는 '초록은 동색이요 유유상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얼마나 삼위일체에 대하여 무지했으면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의 글을 무기 삼아 필자를 '양태론적 삼신론자'라고 공격했다. 그랬더니 한동안 PC 통신에서 어떤 이들은 뒤의 '삼신론자'란 말은 빼고 필자를 '양태론자'라고 공격한 상황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필자가 하나님을 세 인격의 하나님으로 정의하자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한 인격이라고 하면서도 단수로만 사용하지 않고 복수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만으로 그를 삼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가?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윗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1993년, 52쪽)라고 했다.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공격하는 식으로 하면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그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단어 하나를 어떻게 썼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윗트니스 리의 신학적 신앙적 구조 자체가 양태론적이란 말이다.

⑤ 그리고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의 경세적인 면을 강조하다 보니 양태론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적으로 보이고 있는 점은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경세적인 면을 강조해서 양태론적으로 보인다면 바로 윗트니스 리의 사상 속에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보든 경세적인 면으로 보든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3. 윗트니스 리의 인간론은 이단사상의 뿌리이다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모든 신앙적 신학적 구조는 철저하게 3분법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 즉 윗트니스 리의 경우 인간 구조의 삼분설이 무너진다면 그의 신학도 함께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의 인간 구조의 삼분설(영, 혼, 육)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것이며, 스스로 모순을 낳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단사상인지 입증해 보겠다.

먼저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의 핵심 사상을 살펴보자.
"육이 인간의 외부 실체를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성경은 결코 영(spirit)과 혼(soul)이 하나인 것처럼 혼동해서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혼과 육의 두 부분으로 분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을 세 가지 구분으로 즉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으로 나누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귀절은 온전한 인간이 3부분으로 분리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워치만 니, 정동섭 역, 영에 속한 사람, 생명의 말씀사, 34쪽).

"영과 혼을 분리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문제인가? 영혼의 분류 여부는 신자의 영적 생활을 엄청나게 좌우하기 때문에 이는 극히 중요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영의 영역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영적인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해가 없이 어떻게 성장이 가능하겠는가? 영과 혼을 분별하는 일은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위의 책).

"성경은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을 가진 세 부분으로 된 존재임을 제시한다(살전 5:23). 이 세 부분들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눅 1:46~47, 히 4:12, 빌 1:27). 몸이 있으므로 사람은 세상에 대한 의식을 갖고 물질 세계를 접촉할 수 있다. 혼이 있으므로 사람은 자아 의식을 가지며, 자아 의식은 사람에게 인격과 자아를 갖게 하며(마 16:26, 눅 9:25 참조), 생각하고 선택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한다. 영이 있으므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삼일 하나님을 접촉하고 영접하고 예배할 수 있다(요 4:24, 롬 8:16, 딤후 4:22). 영이신 하나님은(요 4:24) 사람을 지으실 때(창 2:7) 영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셨다(슥 12:1). 만일 사람에게 영이 없다면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을 것이다"(사람의 영, 윗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1986년, 서문).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에 들어오고 사탄은 우리의 육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에 들어온 하나님과 육에 들어온 사탄은 가운데 혼을 두고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수단이나 기관이 없는 것이다"(위의 책, 16쪽).
"우리 사람의 영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는 유일한 기관이다"(같은 책, 21쪽).
"우리 안에는 세 부분이 있는데, 사탄이 죄로서 우리의 육신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 안에 있으며, 자아가 우리의 생각으로 대표되는 혼 안에 있다"(같은 책, 94쪽).
"사람의 영이 하나님 자신을 확산시키는 기지가 되는 것과 같이, 사탄에 의해서 점령된 육신은 사탄의 일을 할 수 있는 기지가  된다. 사탄은 육신에 거처를 정하고 혼에 영향을 준 다음, 혼을 통해 영을 죽이려고 한다"(하나님의 경륜, 윗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1987년, 138쪽).

한 마디로 윗트니스 리에게 있어 영혼육의 삼분설이 무너진다면 그의 모든 신학의 구조는 흔들리고, 구원도 성장도 회복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영과 혼을 분류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성장은 물론 구원도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잘못인가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씩 살펴보자.

(1) 성경은 삼분설을 말하지 않는다.
① 먼저 히브리서 4:12의 말씀부터 살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을 지지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여기 '영과 혼'이란 말은 영이란 실체와 혼이란 실체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관절과 골수도 다른 실체로 보아야 한다.

즉 인간의 구조는 3분설이 아니라 4분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영과 혼이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임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즉 관절과 골수는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의 구조로 볼 때 분명히 하나의 육의 실체에 속하는 두 개의 부분이다. 그렇다면 비록 영과 혼도 언어상 나누어져 있지만 두 개로 나누어진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의 실체를 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육을 관절과 골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비유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 말씀이 우리 인간을 감찰하신다는 뜻이다. 육의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는 말이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면 이상한 논리가 생길 것이다. 마치 하나님 말씀이 저 병원의 수술대의 칼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인가?

② 다음으로는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말씀이다. 이는 삼분설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성구로 사용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영과 혼과 몸이라고 했기 때문에 삼분설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도 윗트니스 리의 삼분설을 지지하는 말씀이 아니다.

먼저 이에 대한 윗트니스 리의 말을 들어 보자.
"절대로 영을 혼으로, 혼을 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기독교 교사들은 영과 혼을 동의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볼 때 영과 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과 혼과 몸'에 '과'라는 접속사가 있기 때문이다"(윗트니스 리, 사람의 영, 한국복음서원, 1978년, 19쪽).

그러나 이 말씀은 바울이 인간의 구조를 설명하려고 하는 말씀은 아니다. 우리 성도들이 온전케 되기를 기도하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과 혼과 몸은 3개의 것으로서 복수인데, 거기에 따르는 동사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에서 '보전되다'라는 단어는 단수로 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의 전인적 실체 안에 기능을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위의 말씀을 가지고 인간 속에 영, 혼, 육 세 개의 실체가 있다는 증거로 삼으려 한다면, 다음의 말에 의하면 인간 속에는 4개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주님께서 우리가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내용이다. 윗트니스 리와 같이 한다면 우리에게는 마음, 목숨, 힘, 뜻이라는 4개의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똑같이 우리 인간의 전인됨을 말하고 있는데 앞에서는 3개로, 뒤에서는 4개로 구별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구조가 4개가 아닌 것처럼 3개도 아닌 것이다.

그보다 윗트니스 리의 말에 따라 앞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4:12의 말씀에 의하면 역시 인간의 구조는 4개가 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이 히브리서의 말씀보다 인간의 구조를 말하는 데 있어 더 일차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똑같이 같은 '과'에 의해서 히브리서에서는 4개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에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는 분명히 4개로 되어 있다.

물론 위의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말씀 하나만 떼어서 보면 인간의 구조가 영, 혼, 육 3개의 실체로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하나로 보지 말고 다른 성경 말씀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을 설정한 것들이 소위 교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교리 교리' 하다가 교리주의에 빠져서 성경 위에 교리를 두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또한 윗트니스 리측과 대부분의 다른 이단들처럼 '성경 성경' 하다가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입장도 따지고 보면 교리이면서 교리가 아닌 것처럼 하는 무지와 위선이 있고, 나아가 자신들의 성경 해석은 교리가 아니라 곧 성경이라는 사탄적 교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말씀들을 보면 더 선명하게 3분설이 잘못된 교리임을 알 수 있다.

③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히브리어로 '루하흐', 헬라어로 '프뉴마')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우리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혼(히브리어로 '네페쉬', 헬라어로 '푸쉬케')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영이 아닌 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면 윗트니스 리가 말하는 위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 만일 하나님도 혼이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혼과도 교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살펴보자. 다음의 성구들은 하나님을 혼으로 말하고 있는 성구들이다. 먼저 이사야 42:1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했는데, 여기 '내 마음에(my soul)'서 마음(soul)이 바로 '네페쉬'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 자신을 혼으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물론 뒤에 나오는 '나의 신'은 영 즉 '루하흐'로 되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영만이 아니라 혼으로도 표현되어 있다는 말이다. 윗트니스 리의 주장과 전혀 반대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예레미야 9:9에서 보자.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에서의 '내 마음'은 영인 '루하흐'가 아니라 혼인 '네페쉬'이다.

또 다음으로는 아모스 6:8에서 찾아 보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네페쉬'로 표현하였다. '자기를 가리켜'(by himself)라는 말이 바로 '네페쉬' 혼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영(루하흐)이시지만 또한 혼(네페쉬)이시다. 어째서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에게는 이 말씀이 안 보일까? 그것은 성경을 선입견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성경 성경' 하지만 사실은 비성경적인 사람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신약에서 찾아 보자. 히브리서 10:38의 말씀이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혼으로 표현하셨다. '내 마음'이 바로 영(프뉴마)이 아니라 혼(푸쉬케)인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만일 인간 구조와 하나님의 영에 대한 윗트니스 리의 정의가 맞다면, 먼저는 우리 영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유일한 기관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이 없는 타락한 인간도 얼마든지 혼이신 하나님과 혼으로 교통할 수 있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나아가 결국 하나님도 동물과 같은 존재라는 말도 되고, 동물도 하나님과 교제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영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④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경에서는 심지어 동물까지 영(루하흐)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윗트니스 리측의 사람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런 말씀일 것이다. 먼저 살펴보자.

전도서 3:21의 말씀이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인생의 혼'에서도 영 즉 '루하흐'를 사용하였지만 '짐승의 혼'에서도 영 즉 '루하흐'를 사용하였다. 다음으로는 요한계시록 16:3의 말씀이다.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는 말씀에 나오는 생물이 바로 영 즉 '프뉴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왜 그렇게도 입만 벌리면 영, 혼, 육을 찾는 윗트니스 리에게 이런 성구가 보이지 않을까? 비록 말로는 '성경 성경' 하지만 바로 성경을 성경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동물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동물의 '루하흐'는 사람의 '루하흐'와 다르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3분설을 포기하겠는가?

⑤ 성경은 주로 영 즉 '프뉴마'는 하나님에 대해서 주로 사용되고 혼 즉 '푸쉬케'는 그렇지 못하다. '프쉬케'는 인간편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반면에 '프뉴마'는 하나님편의 측면에서 사람을 나타내 주지만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외는 또한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영과 혼의 기능을 동일한 의미로서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죽음을 혼이 떠난 것으로 묘사된 곳도 있고(창 35:18, 왕상 17:21, 행 15:26), 반대로 영이 떠난 것으로 묘사된 곳도 있다(시 31:5, 눅 9:55, 눅 23:46, 행 7:59). 그리고 죽은 자들을 혼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마 10:28, 계 6:9, 히 12:23, 벧전 3:18~20).

또한 인간의 번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번민은 혼적 기능일 뿐 영적 기능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번민을 혼적 기능으로 말하기도 하지만(시 42:6, 요 12:27), 영적 기능으로 말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창 41:8, 요 13:21). 슬픔의 경우도 그렇다. 이는 영과 혼의 기능으로 성경은 말한다(삼상 1:10, 시 54:6, 행 17:16, 벧후 2:8).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영과 혼 모두에게 속한다(눅 1:46~47). 그리고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 혼 중심으로 말 할 때도 있고 또한 영 중심으로 말 할 때도 있다(약 1:21, 고전 5:5). 성경에서 영과 혼의 기능이 구별되지 않고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차기 논쟁에서 더 깊이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윗트니스 리처럼 영적 기능과 혼적 기능을 나누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의 3분법 자체가 전혀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사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2) 윗트니스 리의 말에는 스스로 모순된 점이 많다.
① 먼저는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많다.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물론 사탄도 분명히 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기에 인간의 육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에만 들어와 교제한다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영은 직접적으로 몸에 힘을 행사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중재자가 필요한데, 그 중재가가 영이 몸을 접함으로서 생겨난 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혼은 영과 몸의 중간에서 이 두 가지를 함께 묶고 있는 것이다. 영은 혼을 매개로 하여 몸을 복종(제어)케 함으로 하나님을 복종케 할 수 있다(하나님을 '복종케' 할 수 있다는 참람한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필자주). 마찬가지로 몸은 혼을 통하여 영으로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워치만 니, 정동섭 역, 영에 속한 사람, 생명의 말씀사, 41쪽).

"하나님편에는 영인 하나님의 영이 있으며, 우리편에는 사람의 영이 있다. 이 두 영이 서로 만날 때 신성한 관계가 있다. 신성한 영인 하나님과 우리 사람의 영이 서로 만남으로써 그와 같은 신성한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과 교통함에 있어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만큼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길이 없다. 같은 원리로 사람의 영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할 수단이나 기관이 없는 것이다"(윗트니스 리, 사람의 영, 한국복음서원, 1978년, 16쪽).

그렇다면 이상하다. 하나님은 영이기에 인간의 영에 들어온다면 사탄도 영이기에 역시 인간의 영에 들어와야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영이 아니고 육인가 아니면 다른 영인가? 영에 들어올 수 있는 영과 육에 들어올 수 있는 다른 영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하여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이제 해괴한 어떤 변증을 할 것인지 다음 논쟁에서나 기대해 보자.

② 다음으로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육도 별개의 인격이 된다. 필자는 앞에서 이미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혼만 인격일 뿐 영은 인격으로 보지 않는 점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97년 8월호). 그런데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그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어디로 가든지 논리적 신학적 모순과 함정에 빠질 것을 알고 피한 것으로 보인다. 인격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지만, 영이 인격이라고 해도,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해도 다 이단적이다.

그러나 만일 사탄은 육에 들어온다는 윗트니스 리의 말이 맞다면 육도 하나의 인격이라는 우스운 논리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인격이 아니고서는 인격체인 사탄의 영을 받을 수 없을 것이요, 그보다는 죄를 지을 수는 더욱이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비록 윗트니스 리는 혼만의 인격적 기능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 육도 인격이 되어야 말이 맞다. 그렇다면 인간 속에는 혼이란 인격 외에 육이란 인격이 따로 있는가? 윗트니스 리의 주장을 따르면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다.

사실 윗트니스 리측은 육도 인격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기에 죄에게도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상)'라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20)고 했다. 이것은 '죄'가 육체 안에 거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죄(Sin)는 육체 안에 거하고(롬 7:20절), 왕노릇하고(6:12), 주관하고(6:14), 살아나고(7:9), 기회를 얻어 속이고 죽인다(7:11). 이러한 것은 다 '죄'의 인격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본지 97년 9월호, 163~164쪽)라고 했다.

위의 말 중에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상)라고 한 말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고 한 말을 가지고 윗트니스 리측은 "이것은 '죄'가 육체 안에 거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성경을 아는 사람들인지 모르는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이 '죄'가 육체 안에 거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고린도전서 6장 15~19절 말씀에 따라 성령도 우리의 육체에 거한다는 말이 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라고 했지 않은가. 오히려 고린도전서의 이 말씀이 더 직접적으로 우리 육체가 성령의 전이란 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육 안에 있고 성령은 영 안에 있다고 한다면 성경을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만일 육도 인격이라면 죽은 시체에도 사탄은 붙어 있을 수 있을 것이요, 그리고 심판은 육만 받으면 된다. 영만 천국에 가고 육은 지옥에 가면 될 것이다. 바로 이 사상이 김기동 씨를 비롯한 귀신파가 주장하는 이론을 낳게 했다. 즉 영인 귀신이 우리 인간의 몸에 붙어서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상을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많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사상이 나오는데, 거듭난 영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성도 무너진다. 영에 들어가서 죄 없는 영을 만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왜 육에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점이며, 그리고 왜 혼과 육을 죄 없는 혼과 육으로 만들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③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영에 들어오고 사탄은 인간의 몸에 들어온다는 말이 잘못된 말이다. 죄란 전인이 짓는 것이지 육체가 따로 짓는 것이 아니며, 또한 죄란 우리의 마음을 좌소로 하는 것이지 육체를 좌소로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간음 같은 죄라도 그 시작은 마음인 것이다.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죄의 좌소는 육체요, 이 육체에서부터 시작한 죄가 마음과 영으로 간다는 말이 된다. 아니다. 죄란 육에서부터 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음에서부터 육체로 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살펴보자.

잠언 4:23의 말씀이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예레미야 17:9 말씀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마태복음 15:19의 말씀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누가복음 6:45의 말씀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이미 살인하였다고 말씀하였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신 것이다(마 5:21~2, 27~28).

성경에서 '육체의 소욕'(갈 5:17 등)이라 했을 때에는 육체가 짓는 소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있는 죄된 성품인 육에 속한 죄라는 말이다. '소욕'이란 말이 그렇다. 이는 마음의 욕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육이 인격이 아닌데 ?소욕?이 따로 존재할 수가 없다.

④ 윗트니스 리의 인간관에 의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말이 된다. 다음에 더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하지만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인간은 온전한 창조물이 아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거듭나야 한다고 하고, 거듭남은 우리의 타락과 상관이 없다고 한다(사람의 영, 23쪽, 45쪽). 그러나 문제는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말이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는 점이다. 구약의 인간은 타락한 후 영이 죽었고 살아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우리가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고 활동적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혼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우리의 영이 타락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었을 때 신성한 영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을 소생시키고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왔다"(사람의 영, 47쪽).

그렇다면 구약의 타락한 인간에게는 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겠는가?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면상 차기 논쟁에서 더 깊이 그리고 새로운 문제점들까지 다시 취급할 수 있을 것으로 믿겠다.

필자가 보기에 윗트니스 리는 성경은 부정할지라도 인간 구조의 삼분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윗트니스 리의 모든 사상은 이 삼분설 아래에서, 위에서, 그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삼분설이 포기된다면 윗트니스 리도 회복교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요, 구원도 성장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논쟁에서 더 깊은 논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4. 윗트니스 리측은 교회관에서 정직해야 한다
모든 이단들은 정통교회에 대하여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는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얼굴이요 다른 하나는 정통교회를 부정하는 얼굴이다. 처음의 얼굴은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받지 않으려는 뜻에서 만든 얼굴이요, 다음으로는 정통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만든 얼굴이다. 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는 것은 정통교회를 미혹하기 위한 정직하지 못한 거짓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윗트니스 리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정통교회와 같다고 말을 하며, 속으로는 정통교회와 다름을 알고 있으며,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필자가 '다르다' '같다'고 하는 말은 지엽적인 문제에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핵심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윗트니스 리측의 "우리는 정통적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동일한 성경적인 믿음을 존중합니다"(본지 96년, 8월호, 119쪽)와 같은 말은 자세히 따져보면 함정이 많은 말이지만 그러나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것 같은 말로 들린다. 그러나 본심은 그런 게 아니다. 정통교회는 음녀라는 것이다. 그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자세히 보면 보자기에 싸서 가시를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정통교회를 부정하는 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먼저, 우리는 어떠한 전통적인 성경 해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성경 위에 서 있습니다"(본지 96년, 8월호, 120쪽)라는 말에서 보면 전통적인 성경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 해석 방법이 다르면 그 결과는 반드시 다르게 되어 있다. 필자의 지난 글에서도(본지 97년 11월호) 밝힌 바가 많지만, 본호에서도 그 내용을 좀더 깊이 밝히려고 한다. 지면 관계상 구체적인 변증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정통교회 교인들은 지방(회복)교회 교인들이 정통교회를 보는 정직한 입장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미혹의 덫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① 이제 지방교회는 다른 모든 이단들처럼 정통교인들을 자신들의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는 모든 추구하는 믿는 이들이 교회의 이상을 보고 지금 거주하고 있는 각 지방 안에서 실제적인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오길 소망합니다"(본지 96년 8월호, 123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실제적인 교회생활이란 바로 정통교회에서 말하는 교회갱신이니 교회개혁의 말과 유사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다른 말이다. 실제적인 교회생활이란 지방(회복)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됨: 교회생활 안에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중점은 '하나를 지킴'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주님은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그분을 믿는 이들이 하나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를 힘써 지켜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은 '합일의 입장' 위에서 그 지방에 있는 모든 참된 믿는 이들로 이뤄진 지방교회들 안에서 표현됩니다. 우리는 하나를 주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는 분열을 거부하고 미워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님의 간증이 분열된 것은 어떠한 부끄러움이며 비난거리인지!"(본지 96년, 8월호, 129쪽)라고 했다. 이 말도 겉으로는 원론적이고 신앙의 내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숨은 뜻은 지방교회 안에서 하나이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가 얼마나 정통교회를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는지는 그들이 나눈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워치만 니가 윗트니스 리에게 보낸 편지를 윗트니스 리가 소개한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파의 분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았을 뿐 아직 교파의 제도 또한 잘못되었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윗트니스 리,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한국복음서원, 310쪽).

정통교회의 분열이 잘못되어 거기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제도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② 지방교회 교인들은 지방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교회로 보고 있음이 앞선 글에서도 나타났다.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처음에는 지방교회를 그냥 지방교회라고 표기했다(96년 8월호, 10월호, 97년 3월호, 7월호).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들의 교회를 말할 때마다 ?지방?이란 단어를 괄호 속에 넣기 시작했다(97년 9월호). 즉 '(지방)교회'로 표기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괄호 속의 단어는 빼고 읽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러한 표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음에는 지방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자세였다면, 후에 등장한 표기에는 지방교회만 교회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③ 무엇보다도 윗트니스 리가 정통교회를 바벨론 내지는 음녀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이미 필자가 지난번 글(97년 11월호)에서도 밝힌 바가 있지만 다시 더 보충적으로 살펴보겠다.

"계시록 17장에는 큰 성 바벨론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를 위주로 한 종교적 체계를 말한다. … 카톨릭교는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어떤 것에게로 갔다. 같은 원리로 타락한 개신교 교회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분이 아닌 다른 것에게로 갔다"(윗트니스 리, 주의 회복에 관하여, 1990, 12~3쪽).

실질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바벨론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지방교회 교인들이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말을 듣고 분노하지 않을 정통교인들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렇게 가련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개신교와 그밖에 이교와 연루된 모든 단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벨론인들이다. 음녀들의 어미의 천주교 교회는 큰 음녀요, 그 밖에 모든 바벨론 단체들은 그 딸들이다.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에 없다. 그분이 우상 숭배와 이교주의로 가득찬 곳에 거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1991, 94~95쪽).

한 마디로 오늘날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천주교가 큰 음녀요 개신교는 그 딸들이란 것이다. 그러고도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이란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한다면 가증스럽다.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윗트니스 리는 거룩한 공회 즉 하나님의 몸을 떠나 사탄의 가르침을 받은 큰 음녀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딸들이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이는 필자 최삼경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분열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우상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기독교는 전통으로 충만하다. 전통은 허위요 허위는 공허하다. 허위는 또한 일종의 우상 숭배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뭔가 헛된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오늘날의 기독교에 적용해 본다면, 기독교의 상황이 정확히 바벨론과 같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음녀로부터 나와서 예루살렘 곧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위의 책, 103쪽).

이것이 바로 지방교회 교인들이 정통교인들을 선교의 일차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유이다. 즉 음녀인 개신교에서 나와서 지방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두 무리의 것들이 적에 의해 연합되어 있다. 한 면에는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또 한 면에는 가증한 물건, 음행, 더러운 것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몹시 싫어하시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두 무리로 무서운 혼합체를 만들었다. 간교한 것은 기독교계가 새 예루살렘의 재료들로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꾸미고 있는 것들 속에 있는 실제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분별하는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나타난 것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핵심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기독교계에는 밖으로는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과 더러운 것이 있다. 이 두 범주는 한 사람, 한 여인, 한 악한 여인 안에 연합되어 있다"(윗트니스 리, 그리스도냐 종교냐, 한국복음서원, 1987년, 210쪽).

기독교는 밖으로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지만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과 더러운 것으로 차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윗트니스 리와 그를 따르는 교인들이 보는 정통교회이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동일하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떠한가? 죽어 있는가 아니면 살아 있는가? 오, 형제 자매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데 머무르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나는 주님의 백성들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너무나 무겁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죽어 있음 때문이다. 죽은 가르침들, 죽은 집회들, 죽은「교회들」, 죽은 지식, 죽은 메시지들, 죽은 책들, 심지어 죽은 「성경」!"(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년, 10쪽).

"오늘날 기독교는 죽어 있다! 그것은 죽은 종교이다. 우리에게는 계시록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까지도 사도 요한은 돌이켰다. 내가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등대를 보았는데(계1:12), 우리 모두에게는 돌이킴이 필요하고 돌이켜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기독교로부터 분별될 필요가 있다"(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년, 11쪽).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이 남자라면 여러분은 남자이어야 한다. 여러분이 여자라면 여러분은 여자이어야 한다. 그것이 말(馬)이라면, 그것은 말이어야 한다. 그것이 소라면 소이어야 한다. 그것은 일부는 소이고 일부는 말(馬)일 수 없다. 여러분은 일부는 남자이고 일부는 여자일 수 없다. 그러나 바벨론은 일부는 교회이고 일부는 세상이다. 그것은 그 종류대로가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계는 어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로마 천주교이다. 로마 천주교는 어미이며, 이 어미는 많은 딸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 딸들이 누구인지 알 것이라고 믿는다"(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쪽, 49쪽).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의 혼합이며, 이 혼합은 전적으로 불태워질 것이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바벨론이여」(계 18:2),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계 19:1~3)"(윗트니스 리, 일곱영, 1991년, 49쪽).

필자가 지난 96년 12월호에서 했던 말을 다시 기억해 보자. "양쪽이 객관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이쪽에서 볼 때 저쪽이 틀렸다면 저쪽에서 보는 이쪽도 분명히 틀렸을 것이다. 분명히 윗트니스 리가 보는 정통교회가 바벨론이요 음녀라면 정통교회가 보는 윗트니스 리는 이단일 것이요, 반대로 정통교회가 보는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라면 윗트니스 리가 보는 정통교회 또한 바벨론이요 음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회복교인들은 개신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고 있으면서 웬일인지 개신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신들이 볼 때 개신교회는 바벨론이요 음녀임에 분명한데 개신교회에서 볼 때 회복교회가 이단일 수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때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가 보인 위선적인 반응은 이러했다.

"둘째,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또는 음녀라고 부른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지난 8월호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지방교회 측은 기독교 안에 있는 참된 믿는이들에 대해 그분들이 어느 교파에 소속해 있든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하며 사랑한다는 점을 재차 밝혀둔다. 다만 성경의 진리를 말해야 할 경우(특히 성경을 해석할 때), 윗트니스 리는 기독교 안의 믿는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항상 '기독교의 비성경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최삼경 목사는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식의 언급을 중단하고 진리를 토론하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오기를 요청한다. 예장통합측의 77차 연구보고서는,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또는 음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윗트니스 리의 책들을 인용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이 연구보고서에서 윗트니스 리의 중심사상을 왜곡하여 독자들을 오도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의해 분명히 증명된다"(본지 97년 3월호, 136~137쪽)라고 했다.

누가 진실하고 누가 거짓된가? 이 얼마나 위선스럽고 가증스러운 변명인가? 만일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인정하겠는가 묻고 싶다. ?필자가 언제 지방교회나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를 이단이라고 한 일이 있는가? 필자는 지방교회 안에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형제로 여기고 있으며 존중하고 있다. 필자는 단지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하였으며, 단지 지방교회 안의 이단적인 상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는 거짓이요 위선이요 말장난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사실 윗트니스 리가 정통교회를 비판하는 위와 같은 표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서도 정통교회를 인정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필자를 역겹게 하고 가증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위의 말들은 최소한 최대한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정통교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고 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지방교인들의 상당수가 정통교인들로 이루어졌다는 제보의 의미를 알게 한다.

물론 지상 교회는 늘 부족함이 있다는 점과, 그래서 교회는 항상 개혁을 힘써야 한다는 점과, 그리고 선교 2세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 안에는 교리적 윤리적 부패가 심하다는 점에서 반성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고 본다. 그러나 결코 윗트니스 리가 말하는 기준에서는 아니다. 더욱이 이단자인 윗트니스 리에게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비록 성도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귀에게 송사를 받을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본호에서도 하나 하나 비판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성경 말씀으로 결론을 삼고 싶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5월호)

최삼경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엄무환 목사(가스펠 투데이)는 엉
“사랑하면 성관계 OK? 결코 아
왜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드는가?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
“교원임용권 자율성 보장을 촉구합
중세 철학과 신학의 정점, 아퀴나
호남 기독교 유적지 순례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