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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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만 인격이라는 윗트니스 리의 인간관에 나타난 이단성은 무엇인가?
지상논쟁4-4 교회와신앙측
1997년 08월 01일 (금)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Ⅰ. 지난 호에 대하여
윗트니스 리 편의 변증자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전호에서 필자에 대하여 변증했던 글 중에 필요를 느끼는 부분만 하나씩 소개하고 대답하겠다.

1. 필자가 ‘장로교신학‘이라는 파란 안경을 쓰고 이단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먼저 윗트니스 리 편의 말을 상기하여 보자.
“다시 말하면, 최목사는 자신이 ‘장로교신학‘이라는 파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장로교신학에 근거한 자신의 관점(몇 가지 경우는 칼빈과도 다른)은 소위 정통교회를 대변하는 것이고, 이 관점에 맞지 않는 가르침은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아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어떤 특정교리에 있어서 장로교신학과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독단이며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만일 칼빈주의에 근거한 장로교신학만이 정통이라면 장로교신학과 다른 가톨릭과 동방정교신학, 루터교신학, 침례교신학, 형제회신학, 감리교신학, 성결교신학, 순복음신학 등은 정통(장로교신학)과 다르니까 최목사 편에서 보면 모두 이단이 된다. 그러므로 최목사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님을 인식하고 절대적인 성경적 관점을 취해야 할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7월호, 159쪽).

필자는 세 가지로 대답하겠다.
첫째, 필자가 보편적인 기성교회 입장이 아닌 장로교신학을 기준으로 말한 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윗트니스 리 편의 말이 옳다면 필자가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를 기준으로 이단을 규정하지 않고 장로교신학에 근거한 교리를 기준으로 이단을 규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필자 편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런 요소가 없었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다음 호에는 필자가 쓴 장로교의 안경이 어떤 것인지 밝혀 주기 바란다.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신학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장로교신학을 우상으로 하거나 칼빈을 우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감리교인들이 감리교신학을 따르고, 루터교인들이 루터교신학을 따르고, 침례교인들이 침례교신학을 따르는 것도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인 점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인들이 혹 감리교신학을 비판하더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이단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상식 있는 목사라면 내 입장이 있어도 그것이 감리교신학인지 성결교신학인지 루터교신학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밝혀 가며 말을 하고 논쟁을 하는 것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윗트니스 리를 옹호하는 것은 윗트니스 리의 입장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런 점에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어쩔 수 없이 윗트니스 리의 신학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를 신격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윗트니스 리의 주장=성경‘이라고 생각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어쩔 수 없이 윗트니스 리의 신학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서로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필자는 장로교란 말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었고, 또한 필자 편에서 생각할 때 다른 기성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장로교신학을 기준으로 말한 일이 한 가지도 없는 것 같다. 사려 있고 상식이 있는 논쟁자라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인데 이렇게 구체성이 없는 모호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다음과 같이 짐작될 뿐이다.

우선, 장로교가 아닌 다른 교파의 사람들도 필자의 입장에 동의할  것이 두려워서 미리 연막술을 펴는 것으로 보인다. 어쩔 수 없이 기성교회가 이단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요소가 나올 때에 장로교인들에게만 이단이 되는 편이 자신들에게 유익하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그래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기성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인은 감리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침례교인은 장로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심지어 교역자가 사역지를 옮기는 경우도 있지만, 회복교회 교인들은 절대로 그렇게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책임성 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체성이 없는 이런 상식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다음으로는, 지난 논쟁은 거의 양태론과 신인합일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지난 세 번의 논쟁은 거의 삼위일체론에서 양태론과 신인합일주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만일 양태론과  신인합일주의가 다른 교파에서는 이단이 아니고 장로교에서만 이단이라고 했다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이 맞다. 그러나 양태론과 신인합일주의는 적어도 개신교의 모든 교단들이 공통적으로 이단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필자의 장로교신학을 기준으로 하면 가톨릭, 동방정교,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이 이단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래도 장로교의 입장에서 보면 윗트니스 리의 신관은 양태론적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로 들린다. 우리가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면 이단 논쟁에서 ‘장로교신학‘이니 ‘감리교신학‘이니 ‘침례교신학‘이니 말할 거리도 없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그리고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주장처럼 필자의 신관이 삼신론이라면 장로교에서 보아도 이단이 아닌가? 다음항에서 변증하겠지만 삼위일체는 학자에 따라서 또는 지역에 따라서 셋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를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어느 한계 안에서 그런 것을 가지고 이단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자의 신관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삼신론이라면 장로교신학으로 보아도 필자는 이단이다. 그런데 필자가 무엇에 대하여 장로교의 안경을 썼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2. 필자를 삼신론주의자라고 한 점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를 삼신론주의자라고 단정하였다. 하나씩 변증해 보겠다.

1) 먼저 불필요한 논쟁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삼위일체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과 밝혀진 부분이 있다. 신비로운 교리이기에 인간의 논리로 다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편으로 말씀을 통해 계속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고 인간의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겸손하게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알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떻게 한 인격이신 예수님 안에 신성과 양성이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은 채 함께 존재하고 있는지 아무도 인간의 논리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믿으면서도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교리임을 안다. 그런 점에서 본 논쟁에서 그 깊고 넓은 삼위일체를 다 말할 필요도 의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삼위일체에는 밝혀진 부분이 있다. 역사적 교회는 그 밝혀진 부분으로 이단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양태론이다. 그렇다면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이 양태론적인가 아닌가 하는 점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면 되는 것이 아닌가?

2) 필자는 필자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않았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를 삼신론주의자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까지 삼위일체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이 점을 알고 있다고 본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양태론을 이단이라고 보는 공통적인 전제하에서 필자와 윗트니스 리가 불일치하는 원인을 두 가지라고 지적했다.

그 첫째는 “(필자가)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 중 어느 한 쪽을 부인하기 때문이다“고 지적했고, 둘째는 “(필자가) 하나님의 세 위격의 상호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다“(교회와신앙, 97년 7월호, 159~161쪽)고 하였다. 위의 말은 아직 필자의 삼위일체 사상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도 필자의 삼위일체관을 삼신론이라고 단정한 것은 모르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는 필자가 윗트니스 리를 양태론적이라고 한 점에 대한 역공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삼신론적 사상과 양태론적 사상이 함께 존재할 수도 없지만, 또한 양태론이 아니면 삼신론이 되고 삼신론이 아니면 양태론이 되는 것이 아니다.

3) 필자를 삼신론자라고 단정하면서 필자가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 중 어느 한 쪽을 부인한다는 말과, 또한 하나님의 세 위격의 상호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모순된다.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을 강조하면 삼신론 내지는 종속론에 빠지게 되고,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면을 강조하면 일신론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렇다면 필자가 어느 면을 인정하고 어느 면을 부정하여 삼신론에 빠졌단 말인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가 말하는 삼위일체론의 경륜적인 면 때문에 필자에게 양태론으로 비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경륜적인 면이 강조 될 때 종속론으로 보이는 부분은 양태론적으로 비쳐지지만 오히려 삼신론 쪽으로 비쳐지는 부분이 큰 것이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에 의하면 필자가 본질적인 면에 치우쳐 있어 삼신론에 빠진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 반대이어야 한다. 경세적 삼위일체론(경륜적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인용했던 이종성 교수의 책 <삼위일체>(대한기독교출판사)에서 인용해 보겠다.

 “그러나 이 견해(경륜적 삼위일체론)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 그 이유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삼신론(tritheism)과 종속주의(subordinationism)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하고 경계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 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257쪽).

그런 점에서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을 강조하는 점이 양태론적으로 보이게 된 것처럼 하는 말은 바로 윗트니스 리에게 양태론적 요소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선 삼위일체는 경륜적인 면이냐 본질적인 면이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삼위 하나님은 어느 면으로 보든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경륜적인 면에서 보든 본질적인 면에서 보든 삼신론적으로 보여서도 일신론적으로 보여서도 안 된다. 어느 면으로 보든 ‘세 인격의 한 본질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삼위일체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행동은 그의 사람 됨에서 나오고 또 그의 사람 됨은 그의 행동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과 같다. 필자가 지난 글에서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과 본질적인 면이란 용어가 감각에 맞지 않다“고 한 말도 그런 뜻이다.

3.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나 윗트니스 리 편의 삼위일체에 대한 입장이‘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하는 데 일치한다고 했는데 그 말에서도 양태론적 모습이 있다.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최삼경 목사나 윗트니스 리는 똑같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이단교리로 배척한다. 또한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성경적인 삼위일체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왜 둘 사이에 불일치가 있는 것일까?“(교회와신앙, 97년 7월호, 159쪽)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세 위격‘이란 말을 한 일이 없다. 필자는 분명히 ‘인격‘이란 말을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하고 삼위일체를 ‘한 본질에 세 인격‘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삼위일체관에 있어서 필자가 정통교리에 무지하다고까지 말하면서(교회와신앙, 97년 7월호, 160쪽) 자신들은 전혀 정의되지 않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정통교회가 ‘위격‘이란 말과 ‘인격‘이란 말을 어떻게 사용했으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명확한 개념도 밝히지 않은 채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란 말로 삼위일체를 정의하였다. 물론 ‘세 위격‘이란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든지 양태론자의 입장으로  이해되기 쉬운 말이란 것이다.

얼마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무지한지 살펴보자. ‘인격‘(Persona)이란 말은 원래 서방교회에서만 사용한 단어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인격‘(Persona)이란 말대신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윗트니스 리는 계속해서 서방교회가 사용한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여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한 본체의 세 위격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본체‘란 말은 하지도 않은 채 갑자기 ‘위격‘이란 말을 하였다.

단지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냥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함으로 다분히 양태론적인 입장에서 ‘한 인격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양태론인 것이다. 필자는 분명히 ‘한 본질‘이란 말을 하였는데도 삼신론이라고 정죄하였다. 단지 자신들이 물어온 질문을 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합측에서 윗트니스 리를 변형된 양태론자로 규정한 것은 참으로 바른 것이었다고 본다.

4. 그래도 윗트니스 리는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가진 자가 아니다.
윗트니스 리의 삼일 하나님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관이 아닌 것을 세 가지로 증명하겠다.

1)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이 아니고는 삼위 하나님을 절대로 ‘한 인격‘이라고 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록 서방교회에서만 인격(Persona)이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양태론 주의자가 아니고서 정통신학자 중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절대로 ‘한 인격(Persona)‘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는 분명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윗트니스 리, 세 부부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1993, 52쪽). 만일 윗트니스 리의 말이 맞으려면 ‘삼신론도 옳고 양태론도 옳다‘고 하거나 ‘하나님은 삼신도 되고 일신도 된다‘고 해야 한다.

지금까지 삼위일체에 대한 말 중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용어를 설정하는 데 혼선도 있었고 개념의 차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를 말하는 부분과 ‘셋‘을 말하는 부분에 있어서 동방교회든 서방교회든 인격이란 말을 ‘하나‘의 개념으로 말하거나 이해하지 않았다. 즉 동방교회의 ‘우시아‘란 말이나 서방교회의 ‘서브스탄티아(susstantia)‘는 오직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오직 서방교회의 ‘페르소나(persona)‘에서만 인격이란 말이 나오는데 윗트니스 리는 바로 서방교회의 용어인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한 인격‘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양태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하여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윗트니스 리의 글에 의하여 변증해 주기 바라며 독자들의 선명한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2) ‘영‘과 ‘영성‘이 다르다고 했더니 그 말에 대하여 변증한 점에 대하여.
윗트니스 리가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일곱 가지의 놀라운 성분을 포함한 아들은 그 영 안에 계신다. 이 놀라운 성령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실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공급되는 것이다.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윗트니스 리, 하나님의경륜, 1987, 16쪽)고 하였는데, 필자가 여기 ‘한 영‘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 양태론임을 지적했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36쪽). 그랬더니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죤 캘빈도 ‘한 하나님‘은 주로 본질의 단일성을 가리키며 여기서 본질이란 ‘영성‘이라는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함으로(차영배, 개혁교의학신론, 227~228쪽, 총신대출판부) 윗트니스 리와 완전히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142쪽).

그래서 필자가 다시 “‘영‘이란 말과 ‘영성‘이란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게 ‘영성‘이 있다는 말과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영‘이란 말이 같을 수 있겠는같라고 지적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6월호, 165쪽). 그러자 다시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는 필자의 비판이 위격과 본질을 혼돈한 비판이라고 말하며 반드시 대답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기에(교회와신앙, 97년 7월호, 163쪽) 대답하는 바이다.

물론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윗트니스 리가 ‘한 영‘이란 말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한 말이라면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이 맞다. 필자가 각각 한 영이라고 한 말은 셋에 속한 부분으로서 한 말이다. 즉 아버지 하나님도 한 인격으로서 영이시요, 아들 하나님도 한 인격으로서 영이시요(물론 아들 하나님만은 육을 취하셨지만), 성령님도 한 인격으로 영이시다는 말이다. 그런데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한 영‘이란 말을 ‘본질‘에 대한 것으로 했는지 ‘인격‘에 대한 것으로 했는지 살펴보자. 윗트니스 리의 말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주장처럼 본질에 대한 말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라고 했다. 윗트니스 리는 지금 하나님의 ‘한 본질‘에 대한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위의 말이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각각 세 인격으로는 세 영들이지만 본질에 있어서 영적인데 하나이다‘라고 했다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차영배 교수도 캘빈의 글을 인용하면서 밝힌 것은 분명히 본질에 대한 말을 하고 있음이 명확하다. ‘본질의 단일성‘이란 말을 하고 있다.

즉 본질의 단일성에 있어서 영적이란 말이다. 그래서 필자가 ‘영‘이란 말과 ‘영적‘이란 말은 다르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말에는 ‘본질의 단일성‘이란 말이 없다. 그런 분위기도 없다. 더욱이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본질성을 말하고 있다면 결정적인 모순점이 있다. 그는 분명히 인격으로서의 단일성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 영‘을 말하다가 갑자기 그것이 인격의 하나님이신 ‘성령‘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이 놀라운 성령이 …“라고 말하였다. 바로 필자가 윗트니스 리를 양태론자로 볼 수밖에 없는 요소를 여기에서도 발견한다. 위의 ‘하나의 영‘이란 말이 한 본질로서의 ‘하나의 영‘이란 말이었다면 그 ‘본질로서의 영‘을 ‘인격으로서의 성령‘으로 혼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윗트니스 리는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성령 안에 아들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실 때 우리 속에는 세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즉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말처럼 ‘아들 하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만 계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 안에도 아들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계시고, 또한 아들 하나님 속에는 성령 하나님도 계신 것‘이며, 윗트니스 리의 말처럼 ‘성령 하나님 안에 아들 하나님만 계신 것‘이 아니고, ‘성령 하나님 안에도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 하나님도 계신 것‘이다. 문제는 ‘한 영‘이란 말을 ‘성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윗트니스 리는 ‘한 인격‘이란 말까지 사용하였으니 ‘한 영‘과 ‘성령‘ 정도를 하나로 보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3) 예수님은 부활을 기점으로 인성에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는 그것도 역사적 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명백한 반삼위일체 교리이다.
먼저 윗트니스 리의 말을 인용해 보자. “육신을 입기 전에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인성이 없이 오직 신성뿐이었다. 그는 육신을 입었을 때 그의 하나님 성분인 신성을 사람의 성분인 인성 안으로 가져왔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부활하기 전에 땅에는 하나님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을 다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의 하나님의 성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분이었지만, 그의 사람의 성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분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의 성분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들의 명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그에게는 부활이 필요했다.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 그는 부활 안에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다 지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독생자라면 그에게는 형제들이 있을 수 없다. 많은 형제들을 얻기 위하여 그는 맏아들이 되어야 했다“(윗트니스 리, 그의 영과 몸, 1985, 73~74쪽).

또다시 많은 논쟁을 하여야 하겠지만 지면상 생략하겠다. 단지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에게 바라는 것은 위의 사상이 인정될 수 있는 정통교회의 기독론을 소개해 주기 바란다. 니케아 종교회는 기독론 논쟁이었지만 바로 삼위일체 논쟁이었다. 마찬가지로 위의 기독론도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수용될 수 없는 이단적 삼위일체론임은 명백하다.

4) 수박 비유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예화의 한계가 아니라 예화의 오류이다.
필자는 여러 번 윗트니스 리가 설명한 삼위일체의 비유에서 수박 비유를 비판했다. 즉 아버지 하나님은 수박 덩어리요, 아들은 조각이요, 성령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즙이라는 말이다.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

… 하나님 자신인 이 말씀이 어느 날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우리 안에 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거하셨다. … 부활한 후 그는 밤에 부활된 몸으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모든 문은 닫혀 있었는데, 그는 몸을 입고 들어오셔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이 일을 이해할 수 없다. 주님은 너무나도 신기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오셨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숨이 바로 수박의 즙과 같은 성령이다. 그 때로부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가? 이 복음은 부활한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신 후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결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요한복음의 끝 부분에서 이 놀라운 분은 어디 계신가? 우리 안에 있는 수박처럼, 주님은 호홉인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신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1987, 55~56쪽).

참으로 망령된 말이 많다. 지면 관계상 문제점들을 그냥 열거만 하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우리 속에 들어오시지 못했고 또한 부활하신 후 어떤 변화가 예수님에게 있었기에 그 전에는 잠긴 문으로 들어오시지 못했을 터인데 들어오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의 승천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속에 수박즙으로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망령된 삼위일체관이 있는가?

그러나 양태론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요구한다. 만일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아니요 그리고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양태론을 옹호할 생각이 없고 또한 윗트니스 리를 신격화하지 않는다면 윗트니스 리의 수박 비유는 잘못임을 선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는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의 말처럼 예화의 한계가 아니고 명백한 예화의 오류이다. 어쩌다 사용한 예화가 아니다. 그 예화 속에는 신학적인 입장이 충분히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혹 예화 하나를 잘못 사용하였다고 해서 이단 운운하지 않겠지만 윗트니스 리는 다르다.

Ⅱ. 윗트니스 리의 인간관에 나타난 이단성은 무엇인가?
윗트니스 리의 사상 중에 인간관에서처럼 그 이단성이 밝히 드러나는 대목은 없다고 본다. 삼위일체론은 그것 자체가 가지는 난해성과 그리고 신비성 때문에 평신도들에게 그 이단성을 선명하게 이해시키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인간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제 윗트니스 리의 인간관에 나타나는 이단성을 살펴보자.

1. 윗트니스 리는 인간의 혼만이 인격일 뿐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한다.
윗트니스 리의 신학은 거의 다 워치만 니의 신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그의 신학의 연장선상에서 발전되었다. 윗트니스 리도 회복교회 교인들도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도 이 점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윗트니스 리의 인간관에서 더욱 그렇다. 필자가 볼 때는 바로 영,혼,육 삼분설에 의한 하나님과의 연합사상이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의 신학의 출발이요 핵심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윗트니스 리의 사상을 알려면 먼저 워치만 니의 사상을 알아야 한다.

워치만 니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편만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별로 읽을 책이 없었을 그 때에 워치만 니의 책들이 번역되었고 그것이 한국교회 안에 비판 없이 무분별하게 너무나 많이 읽혀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책들이 한국교회에 소개됨으로 한국교회의 이단을 만드는 데 부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워치만 니가 쓴 <영에 속한 사람>이란 책이 더욱 그렇다. 워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의 사상이 신비주의의 모체요 따라서 이단을 낳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즉 구원파 계열의 이단들(권신찬,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 귀신파 계열의 이단들(김기동, 이초석, 한만영, 이명범, 김광신, 김요한, 이태화, 류광수 등), 그리고 예태해 씨를 비롯한 기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 마디로 워치만 니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의 혼만이 인격이라고 하고, 윗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그 사상을 지지하며 그 사상 위에서 인간관을 발전시켜 갔다. 물론 이들의 영혼육 삼분설에도 문제가 너무 많다고 본다. 그러나 영혼육 삼분설 자체를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과, 또한 논쟁의 핵심을 흐리지 않기 위하여 본호에서는 영과 혼의 인격성에 대하여만 말하고자 한다. 필자는 본 논쟁이 끝난 후에라도 이들의 삼분설의 문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힐 날이 오기를 바란다.

먼저 워치만 니가 인간의 혼만이 인격이라고 하는 점을 살펴보고 이를 지지하는 윗트니스 리의 입장을 확인해 보자. 워치만 니의 대표작 <영에 속한 사람>이란 책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을 인간의 혼과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둘이 아니라 세 부분: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정한다“(영에 속한 사람, 워치만 니, 정동섭 역, 생명의말씀사, 1997, 34쪽).

“하나님의 기운이 인간의 몸에 들어 왔을 때 그것은 사람의 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영이 몸(body)과 반응했을 때 혼(soul)이 생겨났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과 혼적 생활의 원천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37쪽). “혼의 능력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하겠다. 영과 몸이 혼에서 융화되며 사람의 인격과 경향의 본거지가 이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혼의 힘이 완전히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 따라서 혼의 능력은 바로 영의 힘이었다. 영은 스스로 몸에 역사할 수 없고 오직 혼의 중매를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42쪽).

“반복해서 설명한다면, 혼은 인격이 머무는 곳이다. 인간의 의지(will)와 지능(intellect)과 감정(emotion)이 혼에 있다. … 혼에 인간의 인격이 거주하기 때문이다“(43쪽). “그 안에는 내면생활을 이룩하고 있으며 사람의 감정과 의지와 지성을 포섭하고 있는 인간의 혼(soul)이 있다“(45쪽). “우리의 인격의 기관(organ)이라고 할 수 있는 혼(soul)은 지성(mind)과 의지(will)와 감정(emotion)으로 구성되어 있다“(47쪽). “사람으로 하나님과 영교할 수 있게 하는 영 외에, 사람은 또한 혼 곧 자아의식을 소유하고 있다. 사람은 그 혼의 작용에 의하여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혼은 우리 인격이 거하는 곳이다. 우리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은 혼에 속한 것이다. 지능, 생각, 이상, 사랑, 감정, 분별, 선택, 결정 등은 혼의 여러 경험들에 불과한 것이다“(56~57쪽).

위와 같은 내용은 너무나도 많아서 더이상 살펴볼 필요가 없다. 우선 이 정도만 살펴보자. 그리고 이 워치만 니 사상이 윗트니스 리에 의하여 어떻게 지지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비판하도록 하겠다.

이 점은 윗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에 대하여 쓴 책이 있는데 거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윗치만 니>(윗트니스 리, 복음서원, 1992. 3. 15.)란 책이다. 바로 이 책에서 윗트니스 리가 소개하고 있는 워치만 니의 혼의 인격성에 대하여 직접 살펴보자.

“26. 사람의 세 부분, 니 형제님은 그의 그리스도인 생활 초기부터 사람에게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살전 5:23). 그는 혼은 사람의 인격이고 몸은 물질적인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바깥 부분이며 영은 영적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롬 1:9; 요 4:24)“(167쪽). 문제점이 무엇인가? 인간의 영이 인격이라고 할 때와 인격이 아니라고 할 때의 문제점이 각각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인간의 혼이 인격이라고 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제일 먼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의 혼이 인격이라면 영은 인격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가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단언하여 말한 곳을 찾아 볼 수는 없다. 단지 혼이 인격이라고 하고 있고 영은 인격이라고 말한 일이 없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영에 인격적 기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하지도 않았다. 영은 단지 양심과 직관과 영교의 세 기능이 있다고 말할 뿐이다. 먼저 살펴보자.

“이 영(spirit)은 우리의 혼과 같은 것도 아니고, 성령과 같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영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 양심과 직관(intution)과 영교(communion)가 그것이다. 양심이란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분별기관이다. … 직관은 인간의 영에 감각기관이다. … 영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혼의 기관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무력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의향(의도)에 의하여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으로써만 직접 알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은 영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영에 속한 사람, 50~51쪽). “이 영은 사람의 마음(mind)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영은 양심과 직관과 영교의 세 기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위의 책, 55쪽).

워치만 니의 글에서 영을 인격이라고 말한 곳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영에도 인격적인 기능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영이 한다는 세 가지 기능 즉 양심도 직관도 영교도 인격적 요소 중에 하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혼만이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하여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영도 혼도 각각 인격이라고 말할 가능성과, 반대로 영은 인격이 아니고 혼만 인격이라고 할 가능성과, 영과 혼이 합하여 인격이라고 할 가능성이 있는데 모두 문제점이 있다.

본 논쟁을 통하여 이 점에 대한 윗트니스 리의 입장이 선명하게 밝혀질 것으로 본다. 먼저 혼도 인격이지만 영도 인격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슨 문제점이 발생하는가? 영도 인격이라고 하면 한 인간 속에 두 개의 인격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이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은 영이 져야 하느냐 혼이 져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영도 인격이고 혼도 인격이라면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이 둘이라는 말이 된다. 그럴 때 우리 인간의 책임 기관이 둘이란 말이 된다. 책임이란 인격만이 질 수 있고 또 져야 한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물었을 때 개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개의 주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개는 인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미친 사람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친 사람의 인격은 고장이 났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도 인격이고 혼도 인격이라면 책임의 소재가 둘이 된다. 첫째는 영 인격의 책임이요, 다른 하나는 혼 인격의 책임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한 사람 속에 책임을 져야 하는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아무래도 윗트니스 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인격‘이란 말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에서도 세 인격의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또 한 인격의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고도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인격이란 구조를 말할 때는 지정의를 말하지만 인격이란 말의 정의를 내리자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가 둘이란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워치만 니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영은 주인(mistress)과 같은 존재이며, 혼은 청지기(steward), 몸은 종(servant)과도 같다고  말하면서도(영에 속한 사람, 70쪽) 또한 성경에서는 사람을 혼(soul)이라고 지칭한다고 한다. 즉 창세기 12:5은 사람들을 ‘혼‘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며, 창세기 46:27에서 “야곱집의 혼(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사람‘ 대신 ‘혼‘을 쓴 곳이 무수히 많은데 이는 인격이 거하는 곳과 인격의 본질이 혼이기 때문이란 것이다(위의 책, 57쪽). 이 말에도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영도 혼도 아닌 몸을 사람의 대표기관으로 부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다르게 해석할 것이지만, 로마서 12:1과 마태복음 6:5에서 말하는 ‘몸‘은 인간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말하였다. 로마서 12:1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몸은 영과 혼이 배제된 몸이 결코 아니다. 영과 혼을 포함하는 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너희 몸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몸을 인간의 대표기관으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고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영이 인격이 아니라면 영은 인간의 대표기관이 아니다.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가 그렇게 영을 강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이 인격이 아니라면 혼이 인간의 대표기관이란 말이다. 특히 이들이 영혼육을 나누는 이유는 영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즉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영적이어야 하고 그러기에 우리 영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2) 영과 혼이 합하여 인격이라고 할 때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윗트니스 리나 Daniel Towle과 조동욱 씨가 영과 혼을 합해서 인격이라고 말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전혀 배제할 수 없어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변증해 둔다. 만일 영과 혼이 합하여 인격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더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조는 영혼육 삼분설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이분설이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가 인격적 기능을 혼에 국한시켜 보았던 입장이 엉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영과 교제할 수 있다는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말한다면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혼과 직접 교제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의 모든 신학적 구조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3) 영이 인격이 아니라고 할 때 생기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영이 인격이라고 할 때보다 영이 인격이 아니라고 볼 때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① 인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는 말은 영이신 하나님도 인격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워치만 니도 윗트니스 리도 하나님은 영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은 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24). 더욱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으로만 직접 알 수 있는 분이요 영으로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두 사람이 강조하는 핵심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는 주장은 윗트니스 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위 귀신파 계열의 이단들이나 또는 구원파 계열의 이단들 중에 가장 편만한 사상이다. 즉 인간의 영은 인격이 아니요 혼이 인격이라는 말은 윗트니스 리는 물론 소위 귀신파 계열에서는 베뢰아의 김기동 씨, 레마선교회의 이명범 씨, 예루살렘교회 이초석 씨, 마산 산해원 교회의 이태화 씨 등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으며, 구원파에서는 권신찬 씨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씨도 그렇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는 인격이란 말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이며, 그보다는 영을 인격이 아니라고 해야 자신들이 체험하고 주장하는 신비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비판의 논리로부터 피할 수 있는 도피성이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도 영이며, 영이시기에 우리의 혼과 육과는 교제할 수 없고 영과 교제하시는 분이시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영도 인격이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점은 예장 통합측에서 권신찬 씨를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직접 인용해 보자. “권신찬은 ‘(사람들이) 영을 자기의 인격적 활동과 혼돈하여 인격의 일부인 이지(理知)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권신찬, 양심의 해방, 9쪽)고 주장한다. … 이는 성경이 말하는 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철학적이고 세속적인 삼분법적 인간 이해에 따라 영과 인격(혼)을 분리하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서 결국 이에 상응하여 영이신 하나님조차도 인격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것은 상식인데 만일 하나님이 인격으로서의 영이 아니라면 하나님에게는 지정의도 없다는 말이요 따라서 우리와 어떤 교제도 불가능할 것이다.

② 인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인간은 교제할 수 없다.
만일 여기서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가 하나님의 영은 인격이고 인간의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한다면 문제는 더 커진다. 우선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 성경에는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영도 인격임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스스로 여러 가지 모순이 생기게 된다. 즉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비인격인 우리의 영과 교제한다는 말이 틀렸다. 분명히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 외에 같은 사상을 가진 일련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과 교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만일 우리의 영은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은 인격이라는 말은 네모난 삼각형 같이 모순된 말이 아닌가?

마치 철과 나무를 서로 붙여 놓아야 전기가 통한다는 말과 같다. 우리 인간의 영은 인격이요 하나님의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나, 반대로 하나님은 영으로 인격이고 우리의 영은 인격이 아니라는 어떤 말도 도저히 논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허황된 사변에 불과하다.

그런데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 계열의 사람들 중에 오직 마산 소재의 산해원 교회 이태화 씨만은 인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고 할 때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인간의 영은 인격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영만으로 인격이라고 했다. 물론 인간의 영도 영이신 하나님도 인격이라는 주장보다 인간의 영은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은 인격이라고 하는 이태화 씨의 주장이 더 잘못된 말이지만, 그가 그런 소리를 유일하게 한 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그가 총회신학교라는 정통신학을 수학했기에 위와 같이 주장할 때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③ 인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는 말속에는 인간의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말이요 또는 적어도 인간의 영이 타락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물론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가 인간의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이 타락하여 죽었다고 주장한다. “에베소 2장 1절은 우리가 죄로 죽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고 활동적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혼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우리의 영이 타락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사람의 영, 윗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47쪽). 분명히 윗트니스 리는 영이 타락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보다 먼저 위의 말 중에도 그 죽음의 범위에서 육이나 혼을 제외하는 것도 틀렸다. 이 죽음의 범위에는 이미 혼도 육도 포함되는 것이다. 윗트니스 리의 말이 맞다면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도 오늘날 우리가 죽는 그런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말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죽음은 바로 타락의 결과이다. 그리고 타락으로 인하여 죽은 후에도 ‘혼 안에서 우리의 인격(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 생생하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틀린 말이다. 타락과 죽음 모두 다 전인적인 것이다.

이 윗트니스 리의 사상이 끼친 영향은 두 가지이다. 우리 영은 인격이 아니라는 주장이요, 그리고 나아가 우리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워치만 니나 윗트니스 리 계열의 사람들 중에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영향 속에서 나타난 정직한 모습이라고 본다. 즉 한국의 여러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레마선교회의 이명범 씨와 엠마오선교회의 예태해 씨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먼저 이와 같은 주장을 예태해 씨의 글에서 살펴보자. 그가 쓴 <속사람>(예태해, 목양세계선교부, 1993)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썩지만 속사람은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곧 더러워지지만 속사람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19쪽). “속사람은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속사람이 자리잡고 있으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속사람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벧전 1:4). 그 성품은 언제나 온유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벧전 3:4)“(21쪽). “성경은 사람의 영혼을 여호와의 등불 또는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에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구주로 영접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됩니다. 겉사람은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죄가 없으며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29쪽). “성령은 이렇게 죄가 없는 속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시며,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일터입니다“(34쪽).

예씨의 <속사람>이란 책은 거의 윗트니스 리의 사상적 영향 속에 쓰여진 것이다. 예씨가 ‘속사람 즉 인간의 영은 썩지도 더러워지지도 쇠하지도 않는다‘고 한 말은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말로서 그 뿌리는 바로 ‘영은 인격이 아니기에 타락할 수도 없다‘는 워치만 니의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이명범의 경우를 통합측의 그의 인간관에 대한 결의를 통해 살펴보자.
“(가. 영에는 인격적 직능이 없다고 한다.) 이 씨가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다는 삼분설을 바탕으로 혼에만 지?정?의의 인격이 있다고 한 것은(이명범, <경건생활을 위한 출발>, 9~11쪽, 1984년 5월 28일 테이프) 역시 김기동 씨의 사상으로 김기동 씨가 영은 인격이 아니라 항구적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한 것과 같은 것으로(김기동, <마귀론> 상, 80쪽, <마귀론> 하, 62쪽), 모든 인격적 기능은 혼에 있고 영은 단지 신과 교제하는 능력이라고 언어만 바꾸었으나(좧믿음생활을 위한 출발좩, 48쪽, 50쪽) 역시 김기동씨 사상이다. (나.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육체 구원만을 위한 것이 된다.) 이씨는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저주하신 것은 사탄이 인간의 지상영역(earth part)만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고 사람의 영은 건드릴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도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했는데(1984년 6월 18일 테이프), 이는 결국 범죄한 인간의 영 속에는 사탄이 못 들어 왔으니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탄의 지배 아래 들어간 흙인 육체만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모두 유사한 사상에 그 옷을 달리 입혀 놓았을 뿐이다. 영이 인격이 아니라면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직한 결과이다. 혹 영이 타락을 했다고 한다면 영이 타락의 주체는 아니다. 비록 윗트니스 리는 영의 타락이 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혼이 인격이라면 오히려 영의 타락은 인격체인 혼이 타락에서 기인했다고 해야 맞지 않겠는가?

④ 윗트니스 리가 말하는 영의 세 가지 기능 즉 양심과 직관과 영교는 인격적 기능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째서 양심과 직관은 혼의 기능에는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불신자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양심도 없고 직관도 없단 말인가? 혹 이는 ‘영적 양심‘, ‘영적 직관‘이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윗트니스 리가 말하는 혼에 속하는 ‘지?정?의‘의 인격적 기능 중에도 ‘영적 지식‘, ‘영적 느낌‘, ‘영적 의지‘는 세상 사람에게 없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적인 것은 구원받은 성령의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어떻게 지적, 정적, 의지적 요소가 배제된 영교(communion)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인격적 요소가 배제된 영교라면 성경 없이도 직접 영교하시면 될 것이다.

⑤ 하나님께서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에 들어 오신다면 왜 영인 사탄, 마귀, 귀신은 우리의 영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몸에 들어오는가?
분명히 하나님도 영으로 인격이요 그렇기에 또한 인격인 우리의 영에 들어온다고 해야 구조상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또 문제가 발생한다. 사탄의 문제이다. 즉 사탄도 영이요 인격인데 왜 사탄은 우리 영에 직접 들어오지 못하고 몸에 들어온다고 하느냐 하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윗트니스 리가 ‘사탄이 우리의 몸에 들어온다‘고 한 사상이 바로 오늘날 한국의 귀신파 이단들을 그렇게 많이 만들어 냈음을 알아야 한다. 귀신도 영이라면 우리의 영에 들어온다고 해야 맞을 것이고, 반면에 윗트니스 리의 말처럼 귀신도 우리 몸에 들어 온다고 한다면 영이신 하나님도 우리의 몸에도 혼에도 직접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윗트니스 리의 타락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점으로 보인다.

먼저 그의 타락관을 조금만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 동산에 만드셨을 때 중립의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생명을 나타내는 첫 번째 나무인 ‘생명 나무‘와 사망을 나타내는 두 번째 나무인 ‘선과 악과 지식의 나무‘ 사이에서 ‘생명 나무‘를 취하여 하나님과 연합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두 번째 나무인 ‘선과 악과 지식의 나무‘를 취하여 그 자신 속에 사탄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결국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흙인 자신 속에 받아들임으로 사탄이 흙인 아담 안에 뿌려졌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인간은 인간의 영 속에 들어온 하나님과 몸 속에 들어온 사탄이 혼을 놓고 전쟁을 하는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 자신을 확산시키는 기지가 되었고, 사탄에 의하여 점령된 육신은 사탄의 기지가 되었다고 한다(하나님의 경륜, 1987, 138쪽).

비판해 보자.
우선 스스로 모순된다. 구원은 영적으로 설명하면서 타락은 영적이기보다 육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아담의 영적 교만과 불순종보다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에 잘못이 있었던 것처럼 또는 그 선악과에 무슨 영적 독이나 들어 있어서 그것이 우리 인간의 육에 들어온 것처럼 하는 것은 타락을 육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증거다. 정통교회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교만으로부터 온 것으로 본다. 그래야 첫 번째 아담은 불순종의 대표자요, 두 번째 아담은 순종의 대표자란 성경 말씀이 맞는 것이다. 따라서 타락을 전인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나 그 선악과가 입으로 해서 몸 속으로 들어온 것이 사탄이 몸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결국 이런 잘못된 타락관이 결국 잘못된 구원관을 낳는 것이다.

⑥ 마지막으로 인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혼과 육만을 위한 것으로 제한받게 된다.
회복교회 교인들은 ‘오! 주 예수여‘를 반복적으로 암송한다. 온종일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기성교회 교인들이 ‘주여‘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오! 주 예수여‘라고 할 때 그 영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 영 안에 있게 되는 것이요, 그 영으로 채워지는 것이요, 그 영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요, 그 영에 잠겨지는 것이요, 그 영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요, 그리고 그 이름을 호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영이 인격이 아니라면 결국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말이요, 오직 타락한 것은 우리의 혼과 육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혼과 육을 위한 것이요 영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도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있는 ‘오! 주 예수여‘의 그 ‘예수‘는 정통교회에서 믿고 있는 예수와는 다른 예수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필자는 독자들에게 양해와 이해를 구하고 싶다. 필자가 그 동안 안식교 논쟁으로 인하여 윗트니스 리와의 논쟁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으나 남은 회수는 충실하게 진행하여 진리를 밝힐 것을 약속하며 글을 마치는 바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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