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이단&이슈 | 최삼경 목사 VS 지방교회 논쟁
       
윗트니스 리의 신관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관과 다르다
지상논쟁3-3 교회와신앙측
1997년 06월 01일 (일)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형식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단이란 말에 대하여
본지 지난 1997년 3월호에서 필자가 그 동안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전제하고 논쟁을 진행해 오는 점에 대하여 회복교회 편에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한 마디로 독자들로 이미 지방교회를 이단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게 함으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요 그리고 이단이란 말이 인신공격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우선 필자 편에서 볼 때 윗트니스 리 편에서 불필요한 논쟁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여 그냥 논쟁에만 열중하는 펀이 유익하다고 본다. 먼저, 이단이란 말은 윤리적인 면에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인 면에서 규정하는 말로서 인신 공격과는 관계가 없다. 인신공격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도 윤리적인 것이 아니요 교리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단이란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이지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명예 훼손의 의미는 없는 것은 상식이다.

다음으로는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은 교단에서 한 일로 객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필자 개인이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했다고 해도 그것은 필자의 자유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만일 교단이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규정한 일이 없다고 해도 필자의 주관적인 양심으로 이단이란 확신이 있다면 필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단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는 교단으로부터 이미 이단이라고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객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회복교회 편에서는 본 논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윗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이 잘못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일 것이요 필자 편에서는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하는 논쟁이다. 그러니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필자는 이단이니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단이란 말을 삼가 해 달라고 요구하는 데 쓸데없는 힘을 소비하지 말고 오히려 이단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힘을 쓰는 편이 본 논쟁에 임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야 할 몫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자가당착적인 말을 하고 있다. 윗트니스 리 편에서 필자의 삼위일체관에 있어서 정통성이 의심된다고 하였다. 그 말을 확대하자면 필자의 삼위일체관에 이단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말하였다. "최삼경 목사의 삼위일체관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지를 점검하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본지 3월호, 139쪽). 하나님의 사람은 자가당착적인 일을 하지 않을 만큼 지혜롭고 또 정직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만일 필자가 이단이 아닌 윗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면 윗트니스 리 편에서 보면 필자가 이단보다 더 악한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회복교회를 비롯하여 어떤 사이비 이단들로부터 윤리적인 면에서는 가능한 한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바가 있지만 그러나 결코 교리적인 면에서 좋은 평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는 회복교회 교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정통교회와 유사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정통교인을 효과 있게 미혹하기 위한 수단일 뿐 실제에서는 기성교회를 사탄시하고 또 미혹하고 있다. 결국 모든 이단들이 그렇듯이 회복교회 교인들 중에 상당수는 기성교인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한번 회복교회에 빠진 사람은 다시 기성교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복교회는 기성교회가 회복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한 공격을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성교회를 음녀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말에 대하여
먼저는 회복교회 편의 두 사람의 양심을 의심하는 바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주관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이단의 속성을 들어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안식교의 경우도 같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면상 따로 취급하기로 하겠다.

필자가 성구를 인용하지 않았다는 말에 대하여
성구를 인용했느냐 안했느냐보다 성구를 잘못 인용했느냐 바르게 인용했느냐, 또는 성구가 꼭 필요한데 인용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만일 필자의 글 중에 성구를 잘못 인용했거나 밝혀야 할 때 밝히지 않아서 문제가 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밝히면서 필자를 비난해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구를 인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보다 얼마나 정확하게 인용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통일교에서는 그들의 경전인 <원리강론>에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에 인용된 성구 못지 않게 많은 성구가 인용되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페이지마다 성구로 가득 차있다. 이 점을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통일교의 <원리강론>에 성구가 많이 인용되었으니 옳다고 하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성구를 인용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기 바란다.

필자가 성구를 인용하지 않은 것은 성구를 인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성구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윗트니스 리의 글만은 철저하게 인용하였다고 본다. 본 논쟁의 취지는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냐 아니냐를 밝히는 논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 논쟁에서 필자가 성구를 인용하지 않았던 점보다 윗트니스 리 편에서 윗트니스 리의 글을 정확하게 인용하지 않는 점이 본 논쟁의 성격과 목적에 비하여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지방교회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윗트니스 리 편에서 자신들이 물었던 질문에 대하여 필자가 답을 하지 않았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질문을 한 것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데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본 논쟁의 핵심은 필자의 신학사상을 밝히자는 것도 필자의 이단성을 밝히자는 것도 아니요 윗트니스 리가 이단인지 아닌지를 밝히자는 것이다. 여기에 논쟁의 초점을 맞추어야 옳다. 물론 혹 필자에게 이단성이 있고 그것이 윗트니스 리의 사상을 바르게 볼 수 없는 부분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 아니란 점만을 성실하게 밝히면 된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단성이 있다고 지적한 윗트니스 리 편의 지적은 가능한 지적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그 점에 대하여는 본지에서 다시 더 밝히려고 한다.

필자 편에서 볼 때 윗트니스 리 편의 질문이 윗트니스 리의 이단성 여부를 밝히자는 데 필요한 질문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논쟁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질문일 수 있고 또는 필자의 실력이나 사상을 확인하려는 요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대답하지 않는 것이 본 논쟁의 효과를 더 높이는 것으로 여겨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르는 문제나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단 논쟁을 할 수는 없다. 혹 필자가 윗트니스 리 쪽에서 알고 있는 어떤 부분을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하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냐 아니냐를 밝히려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윗트니스 리가 이단이라고 한 필자의 입장이 정통신학을 기준으로 할 때 잘못이 없지만 필자의 무지나 오해로 빚어진 일인지 아니면 오해는 없지만 윗트니스 리가 옳고 필자가 틀려서 이단이 아닌지를 밝히는 데 힘을 기울이기 바란다.

실례를 들어보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대하여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으로 인간의 논리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단의 신학보다 회복교회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의 측면에서 주관적으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신비로운 연합에 대하여 다 알고 있고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떻게 인성과 신성이 한 인격 속에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또한 혼합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게 함께 연합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양성 교리에 대하여 이렇게 신비로운 부분이 있고 따라서 모르는 부분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부분에서 이단이 제일로 많이 나왔고 또한 역사적인 교회는 이 교리에서 이단을 가장 많이 규정했던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 인성이 없다고 하거나 반대로 신성이 없다고 하거나, 또는 신성이 아버지 하나님과 다르다고 하거나 반대로 인성이 사람과 다르다고 하거나, 또는 두 성품이 하나로 혼합되었다고 하거나 반대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는 이단인 것이다. 이렇게 신비로운 요소가 있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부분에서는 이단 논쟁도 이단 규정도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곱셈을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덧셈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삼위일체 교리나 신인합일주의 교리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어떤 삼위일체관을 가졌느냐 어떤 연합의 교리를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모르는 것에 대하여는 겸손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리가 밝혀지기까지 기다릴 뿐이다. 우리 모두는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이나 신인합일주의가 이단이란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같다면 이해가 잘못되어 이단이 아니란 말이던지 다르다면 옳아서 이단이 아니란 말이다. 이 점에만 논쟁의 초점을 맞추면 될 것이다.

본 논쟁의 진행은 이렇게
이제 약속된 논쟁은 3회만 남았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호에서는 인간관에 대하여 그리고 그 후에는 윗트니스 리가 기성교회를 공격한 요소를 취급하고 마지막 호에는 정리했으면 좋겠다. 필자가 바라기는 윗트니스 리 편에서도 그렇게 응해 주기 바란다. 하나의 문제만으로도 10회를 사용해도 부족한 논쟁이라고 보인다. 추후에 다시 논쟁을 하더라도 지면을 그렇게 지혜롭게 활용했으면 하는 바이다.

윗트니스 리의 신관에 대하여
그래도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양태론이다
다행히 삼위일체 문제에 있어서 필자나 윗트니스 리 양편이 공지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즉 정통교회의 삼위일체관을 인정하고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부정한다는 말이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 하나님과 성령님 하나님은 인격이 셋이요 본질은 하나라는 것이 정통교회 삼위일체관인데 반하여 사벨리우스의 삼위일체관은 비록 삼위일체란 말을 하고 있지만 세 인격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인격의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이란 것이다. 즉 말로는 삼위일체란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삼위일체가 아니라 일신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분명히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필자 편에서는 윗트니스 리의 원문을 구해서 그의 사상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는 느낀다. 왜냐하면 한국에 나와 있는 윗트니스 리의 책들은 역본으로 원본의 출판 연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번 글이나 또한 윗트니스 리의 글을 통해 볼 때 회복교회는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어떤 형대로든 알고 있으며 그리고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이 이단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필자는 왜 윗트니스 리를 양태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는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이란 용어로 나누어서 자신의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은폐하고 있다고 보인다(본지 96년 10월호, 164-165쪽). 먼저 윗트니스 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이란 용어가 필자에게는 감각이 맞지 않지만 우선 그대로 사용하며 변증해 보겠다. 우선 삼위일체란 말은 본질적인 면이냐 경륜적인 면이냐를 구분해서 생긴 말이 아니다. 윗트니스 리 편의 말을 들어보자면 삼위일체란 본질적인 면에서는 세 하나님 같고 경륜적인 면에서는 한 하나님 같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경륜적인 면이란 결국 본질적인 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이 면이나 경륜적인 면이냐를 따질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어느 면으로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륜이란 것도 바로 본질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윗트니스 리에게는 실제적으로 경륜적인 면이 오히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요 실제라고 보여진다.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경륜적인 면을 말하기 위하여 본질적인 면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경륜적인 면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양태론적 모습이 보자기를 뚫고 나오는 밤 가시처럼 숨길 수 없이 나타난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어떤 신학적인 글에서는 '셋'과 '하나' 사이에 전치사 '안에(in)'를 삽입하여 '하나 안에 셋'이라고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셋-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셋-하나로서 그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그 분의 실제와 인격으로 하는 한 하나님이시다"(윗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1993, 한국복음서원, 52쪽).

"셋-하나로서 그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경을 그 분의 실제와 인격으로 하는 한 하나님"이란 말에 주의해야 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실제에 있어서는 한 인격의 하나님이란 말이다. 분명히 그는 인격이 셋이라는 말도 하고 또 하나라는 말도 한다. 더 인용해 보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같은 책, 52쪽)고 하였다.

비판해 보자.
우선 필자가 볼 때 윗트니스 리는 인격이란 말을 바르게 정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격이란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인격체에게만 지정의가 있고 또한 인격체와만 대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인격도 진정으로는 하나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그러나 인격이란 말은 그런 뜻이다. 아버지 하나님도 한 인격이시고 아들 하나님도 한 인격이시고 성령님 하나님도 한 인격이다. 만일 인격이 하나도 되고 셋도 된다면 이야말로 정통적인 삼위일체와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하나님 속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 속에서도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무슨 뜻인가?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점에서 97년 3월호에서 다니엘과 조동욱 씨가 변증한 내용 중에서 이 점을 더 확실히 해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 필자가 본지 96년 12월호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은 양태론적이라고 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라고 했다는 점이요, 둘째로는 삼일 하나님이 성육신의 과정을 통하여 세 인격이 하나로 발전되었다는 말이요, 셋째로는 그가 사용한 수박 비유이다(136쪽). 그런데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첫째에 대하여는 변호를 하였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에 대하여는 변호하지 못했다. 물론 그보다 앞에서 윗트니스 리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수박 비유에 대하여 예화의 한계라는 말을 하여 수박 비유에 문제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였다고 본다(본지 96년 10월호, 165-166쪽).

그러나 윗트니스 리 편에서 변호했던 첫번째 내용 중에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신관을 보여주는 요소가 있다. 필자가, 윗트니스 리가 '한 영'의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했다(본지 96년 12월호, 136쪽). 그랬더니 그 말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을 했다. "죤 캘빈도 '한 하나님'은 주로 본질의 단일성을 가리키며 여기서 본질이란 '영성'이라는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함으로(차영배, 개혁교의학신론 227-228쪽, 총신대출판부) 윗트니스 리와 완전히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라고 했다(본지 97년 3월호, 142쪽). 중요한 점이 있다. '영'이란 말과 '영성'이란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게 '영성'이 있다는 말과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영'이란 말이 같을 수 있겠는가? 전혀 다른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적해 두고 싶은 점이 있다. 윗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까지 윗트니스 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그의 영향을 받으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구원파의 권신찬, 귀신파의 김기동, 이초석, 이명범은 윗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다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기회가 나면 후론하겠다.

여기에서 필자는 묻고 싶은 점이 있다. 왜 회복교회에서는 정통교회가 '삼위일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삼일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가능성은 세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번역상의 문제일 수 있다. 둘째는 정통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신관을 말해 주는데 틀렸거나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는 아니면 정통교회와 차별을 두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첫째의 경우도 세번째의 경우와 상통한다고 본다. 만일 두번째의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그것 자체가 정통교회와 회복교회는 그만큼 다르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세번째라면 바로 이것도 실제적으로 이단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증거라고 본다. 회복교인들도 삼위일체관이 가장 어렵고도 신비스런 교리요 그러면서도 역사적으로 이 교리에서 이단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점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도 정통교회와 다르다는 하나의 증거 아니겠는가? 밝힐 필요가 있다면 다음호에서 밝혀 주기 바란다.

윗트니스 리의 신관을 따르면 하나님의 전능성도 불변성도 무너지고 만다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대량으로 생산할 것을 계획하시고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공급하시는 데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1단계인 하나님은 근본이요, 2단계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이요, 3단계인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에 전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하나님의 경륜, 11쪽).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단계는 아버지 하나님의 단계로서 아버지로만 계신다면 그 분은 사람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단계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이루는 데는 7가지 성분이 있는데 첫째 성분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요소요 본질이요, 두번째 성분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요, 세번째 성분은 인생이요, 네번째 요소는 그 분이 겪은 죽음의 체험이요, 다섯번째 요소는 부활이요, 여섯번째는 승천이요, 일곱번째는 보좌에 앉으심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단계가 필요한데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 그 영 안에 계신 것이라고 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승천이 있은 후의 성령은 구약 시대에 있던 하나님의 영과는 다르다고 한다. 즉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영에는 단 한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의 신성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만으로는 인성과, 인생과 죽음의 효능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의 요소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신약의 경륜에는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성분들이 영 안에 있고, 만유를 포함한 그러한 영이 우리 속으로 오셨고, 우리 위에 오셨다고 주장한다(위의 책, 12-15쪽).

아마 정통교회 교인들은 사용하는 단어도 사상의 전개 방식도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공급하시는 데 단계가 있다는 말도, 예수님에게 성분이 있다는 말도, 그리고 구약의 성령과 신약의 성령이 다르다고 하는 말도, 구약의 하나님에게는 신성만 있기 때문에 보좌에 앉으심도 없다는 말도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비판하기 전에 같은 내용을 더 쉽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더 소개하고 싶다. 직접 그대로 인용하겠다.

"승천을 통하여 주 예수님은 그 분의 과정을 완성하셨다. 그 분의 승천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 모두가 주님의 승천 안에서 완전히 완결되셨다. <최종 완성>이라는 단어는 일이나 혹은 과정이 완성되거나 끝났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음식을 요리하는 것으로 예시될 수 있다. 요리하는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식품은 날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요리된 후에 식품은 만찬으로 최종 완성된다. 성육신 전에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 신성만 갖고 계신 <날것>이셨다.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최종 완성되셨다"(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53쪽).

비판해 보자.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이를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면이 아니라 경륜에 속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변증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윗트니스 리에게 삼위일체의 본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가 말하는 경륜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는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단계를 거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신 분이시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날것'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신 영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에게 못 들어오시는 무능하신 하나님도 아니다.

결국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구약에 존재하셨던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신약의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다르다는 말이 된다. 즉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영에는 단 한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의 신성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만으로는 인성과, 인생과 죽음의 효능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의 요소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이 말에서도 "인성과, 인생과 죽음의 효능과, 부활과, 승천"이 없으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가능한 일로서 이해가 되지만 "보좌에 앉으심"이 없으시다는 말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보좌에 앉으시지 않고 보좌 밑에 앉아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런 점들이 윗트니스 리 편에서는 경륜적인 면이라고 말하겠지만 필자가 볼 때는 본질적인 면을 침해하고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그리고 윗트니스 리에 의하면 구약의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들어오시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말도 틀린 말이 아닌가? 다윗은 분명히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시 51:11). 필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구약의 성령과 신약의 성령의 사역이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하나님이나 그 전능성과 불변성에 있어서 같으시다는 말이다.

"성육신 전에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 신성만 갖고 계신 <날것>이셨다.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최종 완성되셨다"라는 말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구약의 하나님은 '날것'의 하나님이요,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의 하나님'이 되고 말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6월호)

최삼경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목회자 설교 준비 모임, ‘프로
‘여자 아빠, 남자 엄마’...
목회자 성범죄 매주 1건 발생 ‘
목사 은퇴금, 신임 목사 권리금으
‘기독사학’ 생존과 발전 방안은.
목표의 재설정이 필요한 교회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현장을 가다(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