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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성 논쟁 인식과 언론의 시각
1998년 03월 01일 (일)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원문호  목사(제자성장연구원 이단분별 제자화운동본부장)

1. 시작하는 글

한국 교회의 이단성 ‘논쟁의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전권대사’인가? 누가 의(義)의 일꾼임을 가장하고 있는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현재의 상황을 보면 많은 교계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루면서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단성을 옹호하는 기사와 광고의 기회가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연막전 언론’ 개입이다. 진리의 혼돈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논쟁에 따른 작금의 ‘언론 분위기’는 이단성의 진위를 가리는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언론은 역시 사실적 기록이 그 사명일 것이다. 어느 한 쪽에 편중하여 객관성을 결여한 것은 언론의 신뢰와 생명력을 상실한다. ‘거품 언론’이 잠시 잠깐은 그 효과를 낼지는 몰라도 항구적인 기대는 자기 착각이요, 이는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이에 필자는 이단성 논쟁에 관련한 언론의 객관성 있는 이해에 도움을 주려고 필을 들었다. 유익한 기대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다만 어느 당사자나 언론을 특정하자는 데 이 글의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요, 핵심적인 내용과 그 의미가 주요 논제인 관계로 실명을 들어 거론하지는 않기로 한다.

요즈음의 이단성 논쟁과 관련한 22개 교계 신문의 기사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과연 이럴 수가 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편중된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강한 인상이다. 한 마디로 이단성에 대한 지적을 심히 못마땅히 여기는 입장이며, 지적을 당하는 측에 대하여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은 과연 이단성을 지적하는 자의 우군인가, 아니면 적군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우군적 적군’이란 인상이다. 이단성이 아니라는 강한 입장을 표명하는 언론은 얼마나 깊은 연구와 증거를 가지고 ‘필검’에 힘을 주는지 모를 일이다. 과연 이단성에 대하여 그 동안 얼마나 연구한 실적이 있는가? 구체적으로 그 실적을 지상에 내어 놓고 사실 증명으로 질타함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러나 논쟁에 중립을 지키고, 제 삼자로서 지켜봄이 바람직한 것이라 믿는다. 그 개입의 시기는 이단성 시비의 결과가 나오는 때쯤이 좋으리라 본다. 논쟁의 초반에 어떤 판단을 내려 어느 한 편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성급함이 아닌가?

현재 언론의 분위기는 이단성 비판이 ‘부당하다’고 소리치는 상황이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단성에 대한 지적은 그리 쉽게 ‘옳다’ ‘그르다’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심한 연구 끝에 검증된 결과여야 함이 상식이다. 우리 모두는 지상(誌上)에 이단성을 지적하는 자의 입장도 한 번쯤은 배려하는 생각을 해보고, 피차 논쟁에 조명적 참여자로 자기의 위치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단성이 ‘교회와 성도의 영혼에 대한 창질’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근거에 따른 지적이라면 그와 관련하여 그  대상자의 반전을 권고함이 언론의 제 구실일 것이다. 이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쩌면 한결같이 이단성에 대한 옹호적 표현이 이구동성으로 그 맥을 같이하는지, 언론사에 그 개혁을 촉구케 한다. 이단성 논쟁에 따른 ‘이 소리  저 소리’, ‘거품 언론’은 사실 증거로 마치 ‘마마’의 흔적과 같이 ‘영원히’ 남을 것이다.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 역할은 사실적 보도와 논평에서부터 시작된다. 논평의 잣대 표준은 필히 ‘기독교적’이어야 한다. 그 결과는 공정하고 유익한 정보 제공뿐 아니라, 진리 수호의 책임 의식으로 가짜와 허위 비판 폭로를 견제하여 진리 확대에 이바지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진실과 객관 보도에 역행하는 발언은 정통 언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기독교 언론의 자유라 해서 결코 이단성 옹호까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 42:7). 그러므로 이단성 논쟁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 ‘우매한 대로’ ‘번제’ 드릴 형편에 놓일 자가 나타날 것이다. 필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단성 논쟁과 관련하여 일단 어느 한 편에 그 타당성을 주지 않는 제 삼자적, 판단보류적 입장에서 분석에 임할 것이나, 그 중립성이 흔들리는 부분이 있을 시에는 필자의 부족함으로 여겨 용납해 주기를 바란다.

2. 이단성 지적을 받는 자를 따르는 무리의 처신

이단성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자들은 맹종에 가깝고 폭력 성향적 행위로 일관한다. 그들은 표면적인 얼굴이 따로 있다. 겉으로는 순진과 겸손으로 동정을 구함에 능하며, 이는 자기 방어와 은폐의 머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목적 달성에 혈안이 되어서 ‘허위 사실 유포’ ‘음해 공작’ ‘명예훼손 불사’ ‘모욕적 인신공격’으로 신분을 위협하는  압력을 집단적으로 행사한다.

그런데 현금에 전개되고 있는 이단성 논쟁 과정에 이러한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열매이기 때문이다.

① “네가 하나님이냐! 누구를 정죄하냐! 정신 감정을 받아야 한다. 법정에 고소하겠다”는 등의 말로 위협한다.

이단문제의 전문가는 비판을 할 때마다 반드시 듣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네가 하나님이냐”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이해는 참으로 옳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는가? 이단성에 대한 지적을 하는 자가 하나님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이단을 연구하는 이들이 자신이 하나님이라 소리 높이는 일은 없다. 오히려 이단성에 속한 무리들이 ‘상습적으로 빗나간 정죄 인식’을 하는 데 따른 표현이다. 이단 연구에 따른 논쟁은 진리 수호로 영들을 분별하는 수행의 도구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또한 인신공격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이단 연구 이전에 정신 감정을 받아야 한다.” 이는 정신병자라는 뜻이다. 누가 이상한지는 논쟁의 최후 결과가 증거할 것이라 믿는다. 이 같은 대응 감정은 버리고, 이성을 회복했으면 한다.

그들은 때때로 명예훼손을 전제하여 법정 시비를 할 것이라 위협한다. 최후적으로 불가피할 경우라면 몰라도, 법정 송사가 최선은 아니다. 때로는 이것이 ‘자업자득’이 되어서 스스로 법적인 올무에 걸리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단성 지적에 대한 타당성은 법정의 시비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② 수준 이하, 가치 없는 기사라고 매도한다.
이단성에 대한 일반적인 지적을 수준 이하라고 빈정거린다는 것이다. 어떻게 수준 이하이며 그 가치가 없는지, 그렇다면 그 미치는 영향도 미미할 터인데 어찌 그리도 과잉반응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사이비 이단의 문제를 알고 있는지, 스스로 이단성 지적에 ‘반감적 행위’를 벗어 버리고, 수준 이상의 가치 있는 글로 이단성을 연구하여 지상에 공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러한 분들이 한국 교회에 많이 있기를 필자는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이단성을 지적하는 일에 어느 누구도 쉽사리 나서려 하지 않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이단성에 대한 지적이 시작되면 이단성을 옹호하는 소리는 이구동성으로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습성은 그렇게 소리가 요란하다가도 신상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되면 갑자기 잠잠해 지는 특성이 있다. 이들은 평소부터 ‘이단성에 대한 지적의 무가치론’으로 그 사명적 가치를 격감시키려던 세력이다.

③ 무분별한 이단 정죄를 바로잡는 사명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단성이 있다고 지적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한 지적이 ‘무분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무분별’에 관한 신뢰할 만한 증거를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필자는 본다. 따라서 이 말부터 오도적 발언이라는 인상이 짙지 않는가? 그렇게 해놓고 무분별한(?) 이단성 정죄를 바로잡는 사명을 갖는다는 말은 한편 생각하면 그럴싸하나 사실은 주제가 지나친 발언이라 믿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진실한 의미에서 무분별한 이단성 정죄를 바로잡아야 함에는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받고 있는 사실적 이단성 지적이 무분별한 것이 아닌 경우라면 어찌 하겠는가? ‘이단성에 대한 정당한 지적을 무분별이라는 말로 매도해 놓고 바로잡기 사명 운운하는 것은 논쟁 과정에 혼란을 야기하는 교란 작전’이라 이해되지 않겠는가?

④ ‘언론 플레이’로 자신의 이단성을 은폐하려고 신문 광고 등을 통해 이해를 구한다.
필자는 한국 기독교의 언론이 한국교회에 나름대로 공헌한 바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 이단성 논쟁 과정에서 모든 언론이 필자가 지적하는 대상인 것도 아니다. 몇몇 주요 정통 교단지와 일부 초교파지의 경우 매우 또는 비교적 객관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기독교적 가치를 벗어난 언론은 진실 보도에 역행한다. ‘언론 플레이’가 이단성에 연루된 경우는, 이단성 은폐 포장을 전제하는 요구에 따른 매개적 구실로써 언론이 불의에 종살이할 수도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광고는 ‘돈’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최근의 이단성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을 받는 자측의 반론적 전면 광고 및 집회 광고 등이 국민일보를 비롯하여 15개 정도의 교계 신문들에 도합 100회 남짓 집중적으로 게재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광고비용이 도대체 얼마나 될지 독자 스스로 계산해 보라. 이같이 막대한 돈이 근자에 교계 언론계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의 의도가 편향된 기사로 포장함에 쓰이거나 거짓을 유포하는 일에 작용했다고 한다면, 분명히 해당 문제를 취급한 언론은 사실을 기록하는 자로서의 원론적 속성에서 일탈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언론의 진실성 여부는 이 점에서 발견되는데, 한결같이 이단성을 지적하는 자를 ‘구체성도 없이’ 도에 지나치게 비판하고, ‘내용 검증도 없이’ 그 지적을 무분별하다고 단정하고, 반면에 지적을 받는 사람측에 대해서는 분석적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두둔한다면 그 언론의 진실성 여부는 그 자체로 이미 확인된 셈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원수의 무리들은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여 듣고 뇌물 공세를 한다. 그것도 돈을 많이 주며 부활의 소식을 잠재우려고 했다는 말이 당시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마 28:11~15).

이러한 방법의 대상에는 언론인, 정치인, 교단 정치인, 신학교 교수, 법조인 등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재정을 도에 지나친 일에 쓰는 자는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이 의문시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행위는 자기 방어 수단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금전 의존 이단성 해명 행위는 황금만능주의 뇌물 정신에 기인한 것이다. ‘돈’이 이단 분별의 기준이 아니다.

과연 본질을 떠난 언론이 만들어 내는 거짓 환경과 분위기가 진리 분별에 잣대로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단성에 연루된 언론 플레이는 ‘거품 언론’이라는 것이다.

⑤ 꾸며진 허위 사실로 중상모략을 하고, 그것으로 승부를 걸려고 한다.
“○○○ 목사의 설교 내용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체 정황을 보지 않고 한두 줄 때문에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은 이단 정죄밖에 되지 않는다”, “안수집사회는 지난 5일 기자 간담회를 갖고 이단성 문제가 제기된 것에 유감을 표명하고 교회 문제와 관련해 앞으로 교회 차원에서 일체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교단 차원에서 할 것이라고 밝혔다”(A신문 97. 9. 14).

이단성을 버리지 않은 채 중상모략으로 진위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단적 본질이 ‘복음적으로 반전했느냐’이다. 이단성 시비 때에 오가는 문서의 근거로 이단성이 해결되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논쟁의 과정에서 거짓은 낱낱이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는 ‘사필귀정’이다.

그리고 이단성에 대한 자료는, 서적이나 설교나 신앙의 뿌리와 그 열매가 근거이다. 이상에서 지적되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변명을 하여도 그 근거는 무시될 수 없다. 물론 이단성을 지적할 때, 전체 정황을 보지 않고 한두 줄로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된다. 이단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그 정도의 상식조차 없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그렇게 중상모략을 한다면 실소를 자아 낼 일이다.

전문가는 전체적 흐름과 본질적 핵심 사상에 대한 추적으로 그 의미를 전후 문맥에서 일관성 있게 다룬다는 것이다. 한두 줄이라도 이단성에 해당하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는 논쟁의 과정에서 변명할 수 없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단성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지적하는 자와 지적을 받고 있는 당사자의 시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진위 파악조차 진실하게, 내용성 있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관계된 교단은 일단 지켜봐야 한다. 그 결과에 따른 것을 근거로 총회 차원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옹호부터 한다면 그 후 처리를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당사자 ‘교회의 차원’에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교단적 차원’에서 대처할 것을 밝혔다면, 그 후에 이단성 지적을 받아도 그 교회는 잠잠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교단의 발표와 관계없이 그들의 교회 입장이 표면적으로 노골화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교단 차원’인가?

이단성 논쟁은, 쌍방간 시비가 일차적이요, 그 결과 후 교단적인 개입은 이차적이다. 이단성의 여부가 다 드러났을 때 교단에 소속한 교회 보호를 위함이 총회의 역할일 것이다. 논쟁의 시작점에서부터 나온 ‘교단 차원’이라는 말은 매우 정치적이다. 교단의 ‘정캄는 논쟁 결과의 공익을 위한 수단일 수는 있으나 이단성 분별의 성경적 기준은 아닌 것이다. 오직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다. 이것을 교단의 ‘정치 차원’이 대신할 수 있는가? 성경 이외에 그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단성 시비 양측간 어떤 묵계적 사전 약속이나 있는 양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안 된다. 이는 이단성 논쟁을, 돈이 그리워서 장사 속으로 흥정이나 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물론 타락한 인물의 경우, 이것 저것을 가리지 아니하고 챙기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어떤 묵계적 약속이 없음에도 이를 사실인 양 광고하여 여기 저기에 말을 흘리는 것이라면, 이는 의도적인 것으로 ‘음해성 교란’에 속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지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제시도, 어떤 해명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세만으로 독자들은 진실성 여부를 가늠할 것이다.

⑥ 위압적인 집단행동으로 의사표현을 한다.
“이들은 또 이단 논쟁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매주일 예배에 1천명, 2천명, 3천명의 교인이 항의 방문할 것이라고 공언했다”(B신문 97. 12. 13).

이단성에 예속된 이들은 집단행동으로 주변을 소란케 한다. 십자가 주변에 예수님을 못 박은 무리의 소행에 비교함에 무리가 없으리라 믿는다. 제아무리 논쟁의 중지를 항의 촉구해도 그것으로 중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단성이 있다면 성경의 조명을 받아서 깨달아 돌이켜서 이단성을 버리거나, 그렇지 않다면 성경적인 방법으로 그 진위를 밝혀 내야 논쟁 중단을 볼 수 있다. 이것 저것도 없이 논쟁의 ‘원천적 무효’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이 체력과 물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화를 공격의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아니하고, 신경질적인 말투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당신은 세상 소리 안하느냐”, “하나님의 신실한 종, 사명자를 엉터리로 모함하여 정죄하느냐” 하는 등이다.

혹이 이단성 지적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진리대로 행한다면 천하 무적이라는 사실을 믿고 어리석은 언어 발산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집단적인 행동으로 논쟁을 중지시키려는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것도 평상시가 아닌 예배 시간대에 찾아가 위압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행위는 성도의 자세가 아니다. 어떤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단성 시비와 관련하여 항의방문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논쟁으로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본인이 믿고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시간의 흐름을 통하여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명백한 이단성에 연루되는 경우는, 대부분 노략질하는 ‘이리의 속성’이 분출되는데, 스스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⑦ 자기들만의 소위 피해(?)를 말하며 이단성에 의한 개신교의 피해에는 무관심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양들의 영혼을 위해서 불철주야 헌신하는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잘못된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설교해 왔다. 구원을 위한 일회적 회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 성화를 위해 필요한 회개도 마찬가지다”(국민일보 전면광고). 

이단성 논쟁에서 지적을 받은 그들은 자신들의 피해가 크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자기들의 이단성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적지 않은 피해호소 사례에는 어찌 무관심하단 말인가?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함이 순리일 것이다. 그리고 불철주야 헌신하는 모습이 이단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양 말하는 기준은 비본질적이다. 이단의 무리가 그 얼마나 광신적이며, 열정적인지는 다들 아는 부분일 것이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본질에 의하여 그 행위의 진위가 분별되는 것이다. 분명한 이단성에 연루된 자라면 제아무리 열성적이라도 그것은 악령에 의한 열심이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따라서 열심을 말하기 전에 이단성에 관련된 본질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단의 조건 중 하나는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득의’를 부인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부인하는 경우이다. 구원을 위한 성도의 의로워짐이 행위가 아니다. 은혜에 근거한다는 확신이다. 그런데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설교하고, 성화에 필요한 회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이신득의를 말하는 것은 ‘자체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거듭나는 이신득의 구원에 은혜와 행위가 조화될 수 없음을 알자.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다. 이신득의는 행위론적 구원을 거부한다. 구원이 상황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일관성이 없는 자기 변명으로 양대 노선을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자는 이단성 규정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⑧ 극단적인 의분(義憤)으로 신자를 선동한다.
“무책임한 이단성 시비에 초신자들과 성도들이 울고  있다”(C신문 97. 12. 13). “한편 ○○○○교회는 ○○○ 목사에게 사과할 것과 목회를 제외한 공직에서 사퇴한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교회와신앙> 1월호에 게재할 것을 촉구했다”, “○집사는 <교회와신앙>에 ○○○ 목사 이단성 있다는 글을 게재한 후 ○○○ 목사에게 큰 명예훼손과 목회 사역에 지장을 주었다고 밝히고 무분별한 이단 사이비 논쟁을 즉시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교회와신앙> 측의 지나친 처사는 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히고 안수집사들이 사재를 털어서라도 무분별한 이단 시비를 10년이 걸려도 뿌리 뽑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다”(D신문 97. 12. 15). “○집사는 기자들에게 이단성 논쟁은 ○○○○교회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란 점을 알아 달라며 사전에 조율이 되려 했으나 ○목사 측에서 협의중에 12월호를 게재 교회에 피해가 오게 됐다고 주장했다”(E신문 97. 12. 15).

이단성에 걸림이 없는데 ‘의분’에 찰 이유가 있는가? 오히려 초신자를 격려하고 위로하여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함이 그들에게 모범일 것이다. 진리라면 무엇이 두려운가? 특히 이단성 논쟁에서 피해자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경우, 이단성으로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기왕에 터지고 있는 그 내용을 다 들어보는 일이 우선하는 것이다. 다 드러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지나친 처사니, 명예훼손이니, 목회에 지장을 주었다느니, 무분별한 이단 시비를 뿌리 뽑겠다느니, 교회에 피해가 왔다느니 하는 등으로 하는 말은 이단성 지적에 하등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누가 뭐라든지 그 결과에 따라 결백한 것으로 드러나면 지금까지 제기된 훼방적 이단성 지적은 수치를 당하고, 피해받은 것은 오히려 면류관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이단성 지적이 진실일 경우, 이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봤다고 온갖 호소를 해도 그것은 사탄의 참소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욥의 세 친구의 말이 욥의 말보다 정당하지 못함과 같기 때문이다. 이단성의 판정은 ‘정치적 조율’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업적 수단’으로 해결되는 것 역시 아니다.

⑨ 온갖 저질적인 언사로 공격을 한다.
“저희들은 ○목사가 ○목사를 이단으로 모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저희들 나름대로 ○목사의 진짜 동기를 알아 보았고 그 동기의 본심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어느 정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목사의 신상과 명예에 관계된 것이기에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을 것입니다”(F신문 98.1. 24). “이단 사교 집단도 아닌, 건전한 교회와 목회자를 자신이 운영하는 잡지의 판매 부수를 올리려고 이단 시비를 걸고 이단으로 모는 행위이다”(G신문 98. 1. 24)”. “무책임한 이단 논쟁은 피해야 한다”(H신문 98. 1. 14).
이단성을 지적하는 자에게 ‘저질적인’ 말을 하는 것은 모범이 아니다. 모든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고 은혜를 끼치는 말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단 시비의 ‘진짜 동기와 본심’이 개인의 신상과 명예에 관한 것이라서 밝히지 않는다고 말하나 자연스럽게 ‘잡지의 판매 부수를 올리려고 시비를 건다’는 말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인가 부도덕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이해되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단성을 지적한 자는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나, 필자가 확인한 바 전혀 사실 무근의 허위 주장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진위와 관련하여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단들은 개신교에 대하여 외식하는 ‘바리새인’, ‘권위주의’라고 비난을 서슴없이 한다. 그리고 문제를 지적하는 자의 신문이나 월간지의 창간 목적이 의문시된다며 폐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같은 논리 전개는 각 교단의 언론 정보를 폐하자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수 있고,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문제의 폐간 단행 요구는 이단 비판의 원천적 봉쇄를 시도하는 발언이다.
그리고 책임 있는 지적에 무지하여 ‘무책임한 논쟁’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진리의 사람은 이단성 그 본질이 무엇이냐에 관심을 갖고, 조급하지 말며, 사명 수행에 최선을 다한다. 무책임한 논쟁인지 여부는 그 결과가 말해 줄 것이다. 

⑩ 한국 교회로부터 대표권을 위임이라도 받았느냐고 억지스런 반문을 한다.
이단성에 대한 지적은 대표권 위임을 받아서가 아니라, 성도로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영들 분별’ 은사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단성 지적은 매장이 일차 목적이 아니라, 회개로 반전하는 기회를 제공함이다. 이단성에 대한 비판은 마본주의 사상을 매장하자는 것이다. 신실한 주의 종과 교회를 매장하는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단성을 따른다면, 그 사상과 더불어 자신의 목회가 매장될 것이다.

3. 이단성을 비판하는 사명자의 자세

비복음 이단성을 지적하는 일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IMF의 경제적 위기에  따른 불안 상황으로 매우 힘든 분위기이다. 특별히 이런 때에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사명감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일에는 고난이 따르고 순교의 아픔이 동반되는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사명자가 이 점이 두려워서 소심하게 처신을 한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이 일은 성령님이 요구하시는 ‘영들 분별의 역사’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순종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 수호에 사명적 수행을 하는 이가 사람의 눈치나 보며,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식으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것은 이단성 비판에 일차적인 장애물이다. 여하간에 이유를 불문하고 주어진 사명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자는 이미 자신에게 의존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성령님의 능력이 결여된 자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영원히 상실할 것이다. 아니면 시험에 들어서 사사로이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게걸이 들린 고등 거지’가 될 것이다.

이단성 논쟁은 매우 어렵다. 흔히 이 일에 음해와 모욕이 따른다. 인내로 감수해야 하는 영적인 싸움이다. 후일에 그 모든 음해의 흔적은 공로로 치적이 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모든 성도들은 인내함으로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논쟁은 그 결과를 내기 때문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온통 흐리게 만든다 하여도 언젠가는 잡히기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이단성은 사탄이 존재하는 한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교회사가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이단성 비판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 사명적 수행을 누가 막으리요. 변별종 이단성으로 성경을 도전하는 짓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를 바 없다.

① 사명수행으로 이단성을 지적하는 자는 먼저 교회를 사랑한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단성 비판은 교회의 영적인 혼란을 예방하는 전초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단성의 메시지 흐름이 지도자나 성도를 통하여 강단에 침투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마본주의 사상’으로 물들게 하려고 암약을 한다. 한국 교회에서 이단성으로 문제를 야기하는 집단을 보자. 그들의 영적인 영향은 과연 누구의 흐름인가? 그 족보가 이단자 동류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단 침투 예방에 영적인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참 문화 정착에 공조해야 한다. 반드시 교회는 이단의 사상을 배격해야 할 것이다.

② 양무리를 위임받은 주의 종을 귀히 여긴다.
필자는 이단 논쟁에서 사명 수행자를 매도하는 것에 의분이 찬다. 그리고 ‘이단 감별사’ 운운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사사로운 이권이나 권위주의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단성으로 지적받을 잘못이 없는데 ‘마구잡이’로 사냥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말이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당치도 않는 말이다. 이단성을 지적하는 사명 수행자는 누구 못지 않게 주님의 양무리를 위임받은 종들을 귀히 여긴다. 따라서 상대적 이단을 고의로 만들어서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언제나 절대적인 이단성 비판에 사명 수행을 다하고, 이는 성령의 명령이라고 영광스럽게 믿는 것이다.

이단성 논쟁은 주의 종들의 목양지에 침투하는 ‘가라지 잡초적 사상’을 토벌하는 것이다. 이는 현장 목회의 평안과 안정, 그리고 기독교의 장래성에 직결된다. 지금 당장 ‘소란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단성 침투로 신앙이 더욱 병들기 전에 퇴치하자는 것이다. 오염이나 전염이 되지 않도록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 것이다.

③ 다발적 피해 사례가 동기가 되어 연구하게 된다.
이단성 논쟁에 있어 발아기 상태를 예의 주시해야 한다. 그 때부터 싹이 노란 징조가 이미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숙기를 맞이하여 그 열매의 사실적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 피해의 사례가 연구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의 나쁜 열매는 이단성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성 비판을 공연히 할 일이 없어서 먹고 살려는 의도적인 행위로 보는 시각은 고쳐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제기된 비판으로는 대상자측에 어떠한 피해도 생기지 않을 것이니 일단 지적되는 것은 그 결과가 드러날 때까지 침묵으로 지켜보자.

④ 성경적으로 이단성이 짙어져 지적하기에 이른다.
이단성 메시지 흐름은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에는 교리 및 성경적으로 곧 선포자 신앙의 중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예배, 세미나 교육 등에서 흘러나오는 전반적인 흐름은 이단성 확인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단성 비판이 있을 시에 자기 표준으로 평가하여 ‘이단이 아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일이 아니다. 누구의 이단성을 지적하는 것은 이미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이다.

문제 제기가 있은 후, 해당 교단의 산하 교수 몇몇이 변호한 내용에 이상이 없는지, 울산의 아무개 목사의 규탄함이 어느 정도로 신임할 수 있는 것인지, 하여간 옳고 그른 것은 지켜보자. 그리고 언론은 어느 한 편의 반론 글을 게재해 주었다면, 이에 대한 반박의 골자만이라도 보도해야 형평에 맞는 처사이다. 그것이 ‘광고’라는 이유를 대며 이를 외면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짓이요, 독자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반언론적 태도이다. 독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는지를 보면 그 진실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인 ‘언론 플레이’는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클 것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이단성 옹호자 역시 이단성 비판자의 연구에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의 전반적 연구 증거를 제시함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⑤ 이단성 진위를 성경으로 풀기를 원한다.
이단 규정은 오직 성경이 판단의 기준이다. 성경의 검증 조명은 구체적인 교리로 세분함이 이해의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성경의 양면성 이유를 전제하여, 이단성에 대한 지적이 복음을 떠난 왜곡된 해석인 양 오도적 발언으로 유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비판일 경우를 말한다.

이단성 지지자들이, 성경이 ‘양면성 두 얼굴’임을 강조하며, 그러니 누구나 해석에 따라 이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함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이다. 성경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아니다. 짝의 원리 준용에서 이단적인 의미를 공유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본래의 뜻이 아닌 이단적인 해석이 그들의 도구로써 남용되는 것이다.

⑥ 이단성을 지적하는 자의 기대는 개정의 여지이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실수할 수 있음을 공감한다. 강단의 메시지 흐름에 표현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본질에 문제가 없는 것은 목회적 권고 사항이다. 돌이키면 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이단성 비판에 개정의 뜻을 보이는듯 ‘액션’을 취하고, 자기 변명에 일관성이 없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미 숨겨진 본질적 자아를 비롯하여 지적되는 핵심 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사는 길은 자기 변명의 타당성이 복음에 의하여 보장을 받아야 한다. 그저 상대적인 교리의 노선으로 ‘사각지대’를 삼는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이단성을 지적할 때마다 진행의 과정과 결과를 보자. 지적된 이단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그들의 속성이다. 이단의 교주가 돌아서는 예가 있는가? 없다. 오히려 논쟁의 사건을 인하여 믿음으로 선택받은 성도는 돌이키는 기회를 기대할 수 있으나 이단의 교주는 돌이키지 아니한다. 그러니 이단성 비판을 모면하는  길은 무엇일까? ‘물량주의 세력’을 배경으로 미련을 떨면 개정의 여지나 모면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단성은 교파간에 가지는 특성적 주장을 떠나서, 어느 교단을 무론하고 모델적 복음으로 인정되지 않아 배격된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이단 규정에 대한 각 ‘교단의 사례’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단성을 고집하는 무리를 지지한다면, 그리고 소속 교단이 지지자로 앞장 선다면 그 교단도 이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비판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이단성 없음이 명백하게 확인도 되기 전에,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개정의 기회를 상실케 하는 교만으로 그도 망하고, 교단도 지지 배경이라는 점에서 ‘초교파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⑦ 혹이 왜곡된 확대 해석이 될까 유의한다.
논쟁에서 경계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방어 수단으로 확대 해석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글의 표현이나 문서 작성 과정에서 교정의 사유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이 오도된 부분에 지적이 발생할 시는 즉시 사과하고 수정하는 신사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단성 비판의 전반에,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온통 잘못됐다고 호도하는 그 속성이 문제로 등장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도 분별에 참고 사항일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단성으로 지적되는 전체의 흐름에 있어 ‘본질적인 핵심 사상’이 무엇인지 그 중심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비판자는 이를 핵심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⑧ 공적인 반전이 살 길임을 인내로 권고한다.
이단성은 당연히 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비복음인 이단성의 선포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로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할 것이라 본다. 누구의 요구라기 보다 스스로 할 일이다. 그렇게 하기를 권면한다는 것이다.

⑨ ‘이단 대책 위원회’에 자료적 가치를 제공한다.
이단성의 발생은 개교회적으로 나타난다. 이단성에 대한 비판 역시 영들 분별의 은사자 어느 개인으로부터 그 사명이 수행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공인된 제도적 장치에 귀속되지 않았다 해도, 성경으로 검증된 연구의 참여일 경우, 그가 책임지는 행위란 점이다. 연구 전문가에 의하여 어떤 이단성 시비가 시작되면, 이 문제는 종종 각 교단으로 확산되어 ‘이단 대책 위원회’가 연구에 돌입하는데, 이는 전문가의 연구가 자료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정도의 형편에 놓이면 이단을 규정할 수 있는 ‘공인된 제도적 장캄의 역할을 각 교단에서 감당하게 된다. 이를 믿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불신하고 새로운 공인 기구를 요구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으나, 필자는 이 점에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각 교단은 이단의 규정에 대한, 본질적으로 상호간 모순되지 않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를 적용함에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공인된 제도적 장치를 ‘새롭게’ 만들자는 제안은 현재 기존하는 여러 교단들의 이단 대책 위원회와 전문 연구기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행위이다.

⑩ 동일 언론지에 반론권을 보장해 준다.
이단성 논쟁에는 쌍방간에 인격이 존중돼야 한다. 그뿐 아니라 반론권을 보장함이 바람직하다. 이는 공개된 논쟁으로 그 성실함이 표출된다. 그리고 독자는 객관성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언론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不協和音)을 제어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또한 주변의 언론은 그 추이를 지켜보고 진실한 정보를 보도하고, 그 사태의 진전을 위하여 선지자적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본질적 원인을 제공해야 한다. 반론권 보장은 역사에 길이 남을 책임 있는 행위라 믿어서 관심이 집중된다.

4. 이단성을 옹호해주는 자들의 소리

대분분의 경우에서 그러하지만, 특히 이단 논쟁이 생길 때 이단성을 지적받는 자에 대한 옹호적 세력이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마치 벌떼 같이 등장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식견 그리고 인간 관계의 끈끈한 정에 따라 자기의 소리를 높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단 연구 전문가에 의하여 이단성을 지적받게 될 경우 좀더 신중한 자세로 살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이 때 ‘자존심’이라는 ‘내적 교만’은 오히려 그 자신을 죽게 만든다는 점에서 절단내야 한다. 이는 복음 앞에 굴복하는 것으로서 결코 수치가 아니다. 주변의 분위기 세력을 믿고, 공연히 이단성 비판자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이웃들은 지적받은 그를 향하여 복음적인 권면을 받아들여 반전하라고 촉구함이 그의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흔히 겪는 일이지만, 일색으로 비판자를 매도하는 발언을 하고 동류가 되어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단성을 일방적으로 옹호해주는 그들의 소리를 알아보자.

① “100년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영력의 사람이다.”
사람을 칭찬한다는 것은 질 좋은 인격의 열매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칭찬으로 인해 때로는 탁월한 인물의 경우 추종자로부터 영웅적, 신적 대접을 받기까지 한다. 남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선택된 특별한 인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인물이 ‘이단성 연루’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과도한 칭찬과 호도에 대한 영적인 시각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이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조심스럽다.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은 없다. 특히 이단성에 의한 결과를 성령의 역사로 믿어서 그를 높이는 일이라면, 이는 이미 사단의 위장술에 속은 것이다. 의의 일꾼, 광명한 천사, 양의 옷을 입고 나아 오기 때문이다.

② “일방적인 매도로 시비하지 말라.”
“이런 막연한 제목의 고발은 마치 중세기 가톨릭 교회의 마녀 사냥처럼 누구든지 언제든지 표적이 될 수 있음으로 매우 위험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공연한 논쟁만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적지 않을 것이다”(국민일보 전면광고).

이단성을 지적받는 자는 물론이려니와 이단성을 옹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적을 ‘일방적 매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고발이요, 공연한 논쟁’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중세기 ‘마녀 사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아끼지 않는다. 
이단 규정이나 문제제기를 할 시에는 성경의 기준을 벗어나지 말고 정도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위와 같은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단성을 바르게 지적하는 자라면, 그런 업적이 있는 자라면 함부로 일방적인 매도라느니 고발이라느니, 공연한 논쟁이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은 논쟁의 결과가 증명할 것이다.

③ “무익한 이단 논쟁 그만 하라.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이냐. 누구에게 항복하라는 것이냐. 그는 누구이기에 자기 마음에 만족한 글을 요구하나. 그 양심이 천심인가 만능인가.”
이단성이 아닌 경우의 논쟁은 무익하고, 그러니 회개나 항복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이단성에 대한 논쟁은 유익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자는 회개해야 할 것이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지적을 받는 내용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아 안다면, 공연히 의분에 차서 자기 감정을 표출할 이유가 감소될 것이라 믿는다. 인간적인 끈끈한 관계와 이단성 논쟁의 본질은 최소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④ “비판 기준이 분명하지 않고 반론권 보장도 허구이다.”
“이단 시비에 대한 ○목사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관적인 잣대에 의해 박해를 받아 왔는지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충분히 경험해 왔다”, “만약 ○○○목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선 본 교단 사이비 이단 대책 위원회에서 검토해서 권고하고 시정할 사안이지 ○○○목사가 발행겸 편집인으로 있는 교회와 신앙이라는 잡지에 임의로 기사화할 문제는 아닌 것으로 분별된다”(I신문 98. 12. 5).  “반론권 보장이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두들겨 패면서 나중에 너도 나를 때릴 권리를 보장해 준다거나 아니면 지금은 우선 맞더라도 나중에 억울하게 맞았다는 것을 알릴 기회를 주겠다거나 지금 맞아도 나중에 치료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과 별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다”(J신문 97. 12. 15).

이단성을 지적하는 자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적인 잣대로 충분한 논거도 없이 가하는 박해라고 한다. 이것은 잡지에 임의로 기사화할 문제가 아니며, 반론권 보장은 허구라는 것이다. 과연 이 같은 말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논쟁의 결과가 말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끝까지 지켜 볼 일이다.
그런데 반론권 보장이 허구라는 주장이 다름 아닌 언론 스스로의 입을 통해서도 나온 말이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절대 주권에 의한 궁극적인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진리 수호와 교회 개혁 차원에서 각양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따름인지라,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는 있을지라도, 인간의 어떻게 함이 궁극적인 심판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단 아닌 자를 이단이라고 인간이 제아무리 정죄를 한다고 한들 그런 결과가 되는 것도 아니요, 도덕적인 흠집내기만으로도 치명상을 입혀 현실적으로 영구히 쓰러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단문제라고 하여 이런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특별한 것인 양 말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부여된 사명 수행에 최선을 다하되, 그 과정에서 나온 잘못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고쳐야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 언론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감시?계도적 사명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단문제까지도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잘못이 발생한다면 곧바로 정정?사과와 함께 필요시 법적 피해배상도 하고, 이런 경험을 자기 성숙의 밑거름으로 삼으면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든 이에게 입장표명에 필요한 기회를 주고, 언론 자신도 언제든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는 의미에서 ‘반론권’을 보장해주면 더욱 좋겠다.

그런데 우리 언론의 실상은 어떠한가? 당연히 해야 할 사명수행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자기 잘못에 대한 인정과 후속조치에 얼마나 진실해 왔는가? 명백한 오보를 날리고도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정정보도를 하더라도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구석에다 콩알만하게 기록하는 것이 솔직한 실상이 아니던가? 특별히 한국 교회의 그 많은 신문 잡지들 중에 ‘반론권’을 충분하게 보장하고 있는 언론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런 의지만이라도 있는가? 그러면서도 정작 ‘반론권 보장’을,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인내하면서, 제1의 편집방침으로 세워 지켜오고 있는 자를 향해 후안무치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반론권’ 자체의 가치를 해괴한 논리로 깔아뭉개 버리니 언론 스스로의 자기부정일 뿐이다.

⑤ “지식인의 글장난으로 신실한 종이 핍박받는다.”
“이단 논쟁에 가해자는 글 좀 쓸 줄 아는 지식인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 ○목사님께 드립니다”, “무릇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단 시비로 인하여 고난당하시는 ○목사님의 고난에 미력하나마 동참하기를 원합니다”(국민일보 전면 광고).
이단성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단 논쟁이 지식인의 글장난이라고 혹평을 한다. 그래서 그가 시비하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실없이 못되게 하는 짓과 같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사는 경건한 종이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대로 글장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옹호자에게는 위로를 더할 것이고, 당사자는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귀감을 삼아야 할 일로 평가되는데, 어찌하여 핍박받는 자의 태도를 벗어나는 행위로 일관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됨이 안타까운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진정 이단성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모든 옹호적 발언은 오히려 수치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 삼자의 경우, 구체적인 연구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논쟁을 끝까지 지켜봄이 바람직할 것이다.

⑥ “교리적인 논쟁에 불과하다.”
“흑백이 뚜렷한 것도 아닌 교리 문제를 정확히 가려내는 감별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양면성이 있어 그것의 해석의 차이가 교파 분열의 원인이기도 했고, ··· 어떤 교파에 소속된 감별사며 그 감별의 기준은 어디에 두고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다”(K신문 98. 1. 12).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이단 규정들이 교파간 해석의 차이를 기준으로 가려 낸 것인가? 그러면 상대적인 이단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피차간 모두가 이단이란 말인가? 참으로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이단성 분별의 기준이 없는가? 성경은 양면성이 있어서 흑백이 뚜렷하지 않은 이단성을 지금까지 문제를 삼고 있다는 말인가? 이단성으로 지적되는 분별의 기준이 의문이라면, 반론적 비판에 옹호하는 지지자는 어떠한 확실한 기준으로 이단성이 없다고 하는가? 어떠한 기준으로 연구한 실적을 가지고 의문시하는지, 지상에 공개함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의문시한다는 것은 신뢰성이 없는 말이다.

이단성은 각 교단이 가지는 지엽적인 특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단성은 결코 각 교단의 지엽적인 특성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이단성 시비에 걸린 이들은 교단이 가지는 특성을 들어 이단성을 은폐하려 한다. 이단성은 성경이 교훈하는 바, 결코 자기 정체를 숨길 수 없다. 이단성이 ‘지엽적 교리’라고 속이는 사탄의 위장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단성은 성경의 교훈인 교리의 차원을 벗어난 마본주의(魔本主義) 사상일 뿐이다.

⑦ “이단 감별사의 오만 방자함이다.”
이단 시비에서 어떤 이들은 비판자의 자세가 오만 방자하다고 탄식을 한다. 그 이유는 무죄한 자를 이단으로 몰아서, 일방적으로 회개문을 써주며 회개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인 양 행세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일 자체가 거짓으로 꾸며진 허위사실임이 여러모로 드러나고 있으니 진정으로 오만 방자한 자는 누가 되는 것인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도덕성과 신앙양심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단 감별사’, ‘신앙 감별사’라 비아냥거린다. 이런 감별사라는 명칭을 누가 만들어 냈는가? 연구가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호칭한 경우를 본 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별칭인 점까지 감안하면, 이단성 비판에 ‘반감적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할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이상한 이름을 붙여주고서는 한편으로 다시 비난하기를, “병아리 감별사와 같이 암수를 가리듯 교리를 그렇게 감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에 교리문제연구소장 쯤이라면 몰라도 흑백이 뚜렷한 것도 아닌 교리 문제를 정확히 가려 내는 감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언사는 성령의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이단성을 밝히는 일이 암수를 가리는 병아리 감별과 같은가? 본래 병아리 감별이란 병아리의 자웅을 가리는 것일 뿐이지, 병아리 중에 오리 새끼를 찾아내는 것과 같은 별종 분별이 아니다. 그러나 이단을 밝혀내는 일은 그 신분이 별종인 ‘마귀의 자식’을 가려내는 일이다. 이단성 논쟁은 미혹하는 영, 마본주의(魔本主義) 사상을 분별하는 과정인 것이다.

5. 이단성 논쟁을 지켜보는 바른 자세

사이비 이단성 비판에는 반드시 그를 향한 정당치 못한 참소가 있다. 이단 논쟁이 빚는 긍정적인 결과에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이는 어쩔 수가 없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므로 향후를 내다보며 더욱 기도함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본질적 핵심’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① 이단성 비판의 핵심이 무엇인가?
핵심적으로 무슨 내용을 지적했는지, 사실 근거를 바탕으로 지적했는지,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인지, 성경으로 검증하는 과정에서 해석상의 착오가 있는지 없는지, 비판에 이르기까지의 발단은 무엇인지 등을 잘 살펴봐야 한다.

② 이단성 해명의 내용이 무엇인가?
핵심적인 내용을 해명하는지, 사실 근거를 바탕으로 해명하는지, 성경으로 검증하여 타당한 해명을 하는지, 비판 내용 중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해명을 회피하는지, 자기 모순은 있는지 없는지 등을 잘 살펴봐야 한다.
이단성 논쟁에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한 편으로 편중하는 반론 태도는 옳지 못하다. 이단성 논쟁에서는 냉철한 자세를 고수하고, 지적되는 내용과 반론적 해명에 성경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궤변적 억지는 성경이 보장하지 않음을 명심하자.

③ 논쟁시 개입하는 인물들의 동태는 어떠한가?
이단성 시비는 그 사태 진행이 대부분 순조롭지 못하다. 영계의 씨름인고로, 양대 공조 세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그들과 함께하는지, 그 동류의 유형에 시선을 잃지 말아야 한다. 관심만 가지면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개입하는 이들은 다양할 수 있다. 이단성 있는 자는 아닐지라도, 무분별하게 어떠한 ‘정치적’ 관계나, 아니면 ‘반대급부’로 인해 등장하는 자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추종자도 있을 수 있다.

④ 언론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이단성 논쟁에서 성경을 의지하지 않고 주로 언론에 의존함은 옳지 못하다. 특히 지적을 받는 자가 언론으로 자신의 문제를 차단하려는 행위는 이미 선하지 못하다. 이단성 옹호 언론은 한결같이 사명 수행에 성실한 인물들을 매장하려는 발언과 흠집내기에 열을 올린다. 이러한 언론은 스스로 구체적인 연구도 하지 않은 채 ‘무분별한 이단연구’라는 단정적 보도를 일삼는다. 성도들은 여기에 동요되지 말아야 한다.

⑤ 논쟁 초반에 ‘언론 플레이’에 혈안이 되지 않는가?
언론의 힘이 간혹 사람을 매장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성경은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단성 논쟁에 있어 언론 플레이는 속 보이는 짓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매우 크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언론이 명심할 것은 그 진실성에 대하여 독자의 예리한 시각에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실은 ‘거짓 언론의 보자기’로 덮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두움의 언론은 빛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물러 가기 마련이다. 언론을 의존하여 이단성을 변명하는 것은 ‘돈자랑’에 불과한 것이라 믿는다.

⑥ 정치적 색깔이 농후하지는 않는가?
이단성은 ‘정치적 논리’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의 ‘교황적 행위’로 얼룩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따라서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교단적 시비의 사건으로 유도하는 일에 빠져서도 안 되며, 그런 일을 의도적으로 자행함 역시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

⑦ 각 교단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정통 교단은 소속 교회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단성을 밝혀 성도들로 하여금 경계토록 하는 권위 있는 기관이다. 따라서 이단성 논쟁에 대한 각 교단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이 때 이단성 당사자가 속해 있는 교단이 시종일관 객관적인 위치에 서려고 노력하는지, 그런 상태에서 타당한 절차를 따라 구체적으로 이단성 여부를 연구한 후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가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⑧ 어느 쪽이 신사적인가?
이단성 시비에 관련한 전문가들의 움직임을 통해 논쟁의 진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지적을 받은 자를 따르는 무리의 움직임을 보자. 어떠한 과격 행동을 하는지, 애초부터 시종 자중하는지 열매라는 점에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끝맺는 글

이단 시비가 발생할 때마다 이에 따른 ‘먼지’가 이 곳 저 곳에서 일어나 숨막히게 하기 일쑤이다. 이는 마치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타작 마당’을 연상케 한다. 곡식을 털어 풍채에 넣고 돌릴 때, 바람이 이리 저리 불어 먼지를 덮어쓰고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농부의 모습이 있고, 그 후에 반드시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결과가 있는 현장이 바로 타작마당이 아닌가?

그런데 추수 마당에 술이 과해서 식식거리며 일을 훼방하는 무절제한 인간이 종종 등장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단성 논쟁에서 이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의 종(일꾼)은 ‘알곡’을 위하여 일하고,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함이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의 신분과 명예와 직분’이 이단성 옹호에 이용당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누가 이단 시비의 대상이 되든지, 그에 대한 입장의 표명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단성 분별에 인정, 물정, 학연, 혈연, 지연을 떠나서 바르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이단성 논쟁의 과정에서 언론의 음해성이 많고, 그 행위가 날이 갈수록 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스스로 연구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면 객관적으로 지켜보고, 이단성 논쟁을 위하여 기도하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잃지 말고, 성령님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월간<교회와신앙>  199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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