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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의무가 아닌 선물
2005년 04월 27일 (수) 00:00:00 장경애 jka9075@empal.com

<용서의 미학> 중에서
루이스 스미다스 / 이여진
이레서원 펴냄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제한으로 용서하라고 권유하실지 궁금했다. 상습적인 거짓말쟁이가 나를 한두 번 속이고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용서했는데, 그 사람이 예전으로 돌아가서 또 나를 속였다. 그리고 다시 사과를 했다고 하자,

“예수님, 제가 몇 번이나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일곱 번이라든지 하는 숫자로 말해 주세요. 제가 그 사람을 일곱 번 용서해야 할까요?”

베드로는 가정하여 질문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정하여 대답하셨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라.”

베드로는 실없는 질문을 하고서 실없는 대답을 들었다. 핵심은, 점수 기록원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횟수를 따진다면 완전한 의미를 놓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엉뚱한 숫자를 제시하심으로써, 우리가 의무적으로 용서해야 할 횟수를 계산한다면 그 전체 치유 가정이 실패할 것을 그분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용서는 ‘우리의 한계’라는 물고기를 잡은 후에 미끼를 빼는 것과 같은 게 아니다. 흉악범들을 처음 두 번은 풀어 주지만 세 번째 범죄를 저지르면 영원히 가두어 놓는 재판관 같은 것도 아니다. 용서의 계산법에 횟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의무가 아니다. “몇 번입니까?”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이나 알고 싶어하는 물음이다. 용서는 누군가에게 나쁜 일을 당한 후에 우리 자신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일을 할 의무가 우리에게 몇 번까지 있는지 왜 고민하는가?

용서는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한 번 더 외치자. 이번에는 지붕 꼭대기에서 외치자.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는 짓을 관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용서는 우리를 물러터진 사람으로 변하게 하지 않는다.

용서는 가해자와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를 때린 자를 용서할 수 있다면 용서하라. 하지만 그 자와 함께 살 필요는 없다. 아이를 학대하는 남편을 용서할 수 있다면 용서하라. 하지만 그 남편을 집밖으로 쫓아낸 후에 용서하라. 그리고 그 사람을 내쫓을 수 없다면 도움을 구하라.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 동안은 남편을 아이들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고, 아무도 당신에게 ‘남편을 용서한다면 남편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하게 두지 말라.

내가 이 기본적인 사항을 재차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가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하는지 물을 때 통상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더 학대를 묵인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사람들은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관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용서와 관용은 멜론과 농구공처럼 완전히 범주가 다른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진정 물어야 할 것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당신이 그것을 어느 정도나 참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남편이 사소하게 괴롭히는 것이 위장된 학대라면, 당신은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왜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 그만둘 것인지를 대면하게 해야 한다.

일단 남편이 제정신이 들면 그 때 용서에 대해 생각해 봐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당신의 용서가 그의 이기적인 행동 방식을 용인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단 한 순간도.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미칠 것 같은 모습까지 수용할 능력이 당신에게 충분히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 시점에서는 유머가 끝나고 단호한 행동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당신이 쓸데없이 성가시게 하는 행동이 내게 심한 고통을 주니까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넘어 여덟 번째 일이 일어날 때까지 묵인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횟수의 문제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굳어진 과거에 누군가가 선명하게 새겨 놓은 상처의 기억을 치유하는 것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일단 그 학대를 중단시키면, 치유를 끝내기까지 몇 번이건 필요한 만큼 용서를 할 수 있다.

어시스트 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목사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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