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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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교인인가
안식교는 과연 이단인가 2
1994년 05월 01일 (일)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진리는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날수록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교의 이단성 유무를 성경적이고 객관적으로 밝혀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에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자도 없지 않으나, 그보다 안식교를 이단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단인지 잘 모르는 부류가 더 큰 것이 현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위의 취지로 본지 사이비이단문제 특별연구위원인 진용식 목사의 "안식교는 과연 이단인가-나는 왜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하는가"라는 글이 지난 2월호에 실린 후 안식교한국연합회 전도분과 소속 홍명관 목사로부터 4월호에 바로 변증을 해보겠다는 반응이 있었으나 한 달이 더 지나 원고가 본지에 도착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생각된다. 원고분량이 지난 2월호 진 목사의 글보다 훨씬 많아 양적 평형이 맞지는 않지만 원문 그대로 게재한다.

 비록 진용식 목사나 이번 글의 필자인 김상래 목사 사이의 개인적 논쟁같아 보이지만 내용상 다분히 대표성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며, 결국 안식교의 이단성 유무 및 그 구체적 내용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이 논쟁을 진행한다. 계속 되어질 이 논쟁에 많은 관심과 참여가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 주>

김상래 목사(사능교회)

기본 입장
첫째, 이 글을 쓰는 일차적 동기는〈교회와 신앙〉지 94년도 2월호에 실린 진용식 목사(이하 진 목사)의 '나는 왜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답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우선 본인은 진 목사의 글이 어떤 대표성을 부여받은 어느 단체의 공식적인 신학적 견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글은 '나는 왜…'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진 목사 개인의 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므로 본인도 '나는 왜…'라는 제목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인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또 그의 글에 대한 본인의 비판적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넷째, 본인은 진 목사의 지난번 글은 그 중요 용어와 문체에 있어 지금까지의 그의 글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그가 직접 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일단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므로 모든 내용을 그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하겠다. 다섯째, 이 글은 비록 일차적으로는 진 목사에 대한 응답이긴 하지만 결코 그가 제기한 문제에 답하는 것으로만 제한하지 않겠다. 그는 그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교리라고 생각한 것 중 몇 가지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종종 자기 비판의 논리적 근거를 생략한 채 그저 "정통 교회 입장에서 보면"이라고 말하고 있고, 더 나아가 그 매 교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거의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도 그의 질문 자체에 답하기보다 먼저 그의 입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그후 본인은 본인이 믿고 있는 바도 밝히고자 한다.(참고 :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영문 표기는 Seventh-day Adventist이며 영문 약칭은 Adventist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종종 [안식일 교회]라는 약칭으로 사용된다. 고로 이후에는 편의상 그 약칭을 사용하겠다)

여섯째, 본인은 이 글이 편집자들에 의해 아무런 여과나 수정 없이 실릴 것을 전제하고 이 글을 쓴다. 왜냐하면 〈교회와 신앙〉지의 편집자가 지난 2월호에서 분명히 "안식교 측에도 이 지면이 열려 있음을 밝혀 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일곱째, 본인의 글에 나오는 책의 인용은 공식적인 인용법을 따르지 않고 다만 저자와 서명을 알 수 있는 간략한 인용법으로 진행하겠다.

진 목사의 문제 제기에 대한 비판
모든 비판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정확한 자료 선정이다. 즉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과 동일시되는 자료를 선정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그 글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언론 매체에 발표될 때는 더욱 책임있는 연구를 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칼빈의 예정론 비판"이라는 글을 어느 잡지에 발표하면서 주 자료인 칼빈 자신의 글은 전혀 인용하지 않고, 다만 어느 장로 교회 신학자가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 쓴 간접 자료만을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용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형식 요건 자체를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일차적인 자료를 손에 넣고도 그 자료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즉, 그 자료를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본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전제된 결론에 그 자료가 걸림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전자는 무지한 경우이고 후자는 정직한 연구자의 자세가 아니다. 진 목사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진 목사는 본 교단의 어느 개인 신학자의 저술이 아니라, 본 교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공식적인 교리 해설서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기본 교리 27]이란 책을 분명히 손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책을 통해서만 안식교를 이해하면 이단 논쟁을 일으키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하면서 구태여 그 책을 피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책을 "가능한 한 이단 논쟁을 피할 수 있도록 축소 변형되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밝히건대, 그 책은 "축소 변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책 이전까지 본인의 소속 교단은 "24개 신앙 신조"라는 간략한 문장의 기본적인 신조만 있었다. 이 책은 그 신조들을 확대하고 발전시켜 "재림 교회의 신조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설서"(기본 교리 27, 8)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책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안식교가 이단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말은 마치 안식일 교회의 최신의(up to date) 권위있는(authoritative) 자료가 무엇이라고 하든 여하튼 안식일 교회는 틀렸다고 말하기를 미리 작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로 첫째, 그 책 이전에도 안식교의 교리가 있었다. 둘째, 안식교인 어느 누구도 안식교인들이 창시자라고 여기는 엘렌G 화잇의 책을 능가 할 수 없다. 셋째, 자신의 안식교 신앙 경험을 통해 안식교의 실체를 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논거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에서 그는 교리 발전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 자체가 교리 발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사도들과 교부들의 시대를 지나, 중세 그리고 종교 개혁시대을 거쳐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의 공헌을 통해 더욱 밝은 빛을 이해하게 되었다. 성경 자체가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잠4 : 18)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안식일 교회의 교리에도 발전 역사가 있다. [기본 교리 27]은 그 책 자체가 "재림 교회가 자라남으로 생긴 열매"(기본 교리 27, 7)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 목사는 구태여 이런 사실을 부정하려 하고 있다.

둘째, 그는 안식일 교회의 교리 이해에 있어서의 엘렌 화잇의 역할에 대해 매우 오해하고 있다. 우선 엘렌 화잇은 "성경,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신경, 유일한 연합의 매개체"(Selected Messages, vol. 1, 416)이며, "모든 가르침과 경험을 시험하는 표준이"(Great Controversy, 595)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도 증언을 성경보다 앞에 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Evangelism, 256)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글의 목적은 "새 빛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미 계시된 영감의 진리를 마음에 생생하게 새겨 주기 위해서 주어진다"(Testimonies, vol. 5, 665)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엘렌 화잇이 성경의 모든 진리를 설명하고 해석하였다고 믿지 않는다. 또 오직 그의 글을 통해서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더 이해할 수 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시대를 통하여 구속의 경륜 가운데 새롭고 풍부한 사실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우리들을 위해 더 밝은 빛이 필요 없는 그런 단계에 다다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Selected Messages, vol. 1, 403~404)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도들 중 누구도 그녀가 그 교회의 창시자라고 믿지 않는다. "재림 교회 창시자들은 성경 연구를 통해 기본 신조들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엘렌 화잇의 이상을 통하여 이런 교리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기본 교리 27, 213)

셋째, 진 목사는 그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누구보다도 안식교의 실체를 잘 안다고 자처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행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이전의 글과는 달리 본인의 신분을 정확히 밝힌 점이다. 몇 년 전 모 월간지에 발표된 그의 글들은 그것이 비록 편집자들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할지라도 마치 진 목사가 전에 정식 안식일 교회 목회자였던 것처럼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본 교회에서 공식적인 목회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또 그는 본 교회의 국내외 교육 기관인 삼육대학교나 그 자매 대학에서 단 한번도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진리란 제도적인 교육과 상관없이 깨달아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결코 본 교회의 목회자이었거나 혹은 그 목회자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본 교회의 제도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안식일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 해설서가 무엇이라 하든 나는 안식일 교회를 안다는 논거로 제시한 "나의 이해=안식교 교리"라는 확신이다. 이 확신이 얼마나 지나쳤든지 그는 "[기본 교리 27]의 입장에서 볼 때 본인의 글과 모순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 공격 목표는 본인만이 아니라 안식교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정말 놀라운 자기 확신이며 자기 확대이다. 그의 말은 "나의 글=안식교 자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안식일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마치 그의 글을 보면 다 될 것 같다는 어감이 든다. 정말 다시 한번 그의 엄청난 과대 확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에는 진 목사는 지나친 자기 확신을 조금 가라앉히고 "본인은 안식일 교회 신학을 제도적으로 배운 적은 없으나 모태 신앙과 28년 간의 경험을 근거로 적어도 아무런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는 체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라는 정도로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진 목사의 글에 대한 명예 훼손 고소 건에 대해
진 목사는 그의 글을 시작하기 전 전제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고 하면서, "안식교측에서 본인의 글에 대해 명예 훼손으로 고소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안식교측은 다음과 같은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의 네 가지 점을 제시하였다. 첫째, 교리 논쟁을 법정 논쟁으로 삼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둘째, 안식교가 정통 교회를 비판해도 정통 교회는 고소한 적이 없다. 셋째, 안식교도 글로써 본인에 대해 비판하라. 넷째, 고소하려는 것은 그의 글이 안식교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하는 비신사적 행위이다.

우선 여기서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그는 구체적으로 진행된 어떤 건을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말을 들은 것"을 가지고 이렇게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인은 왜 그가 단지 말만 들은 것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미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리고 이 전제 사항에 있어서도 진 목사는 대단히 편파적이고도 주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본인도 교리 논쟁은 법정 논쟁이 아니라는 그의 말 자체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교리적인 논쟁은 아예 사법부의 판결 대상이 되지도 않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세상 법을 다루는 법조인들에게 성경 진리의 판결 유무를 맡긴단 말인가? 문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결코 그의 글의 교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다만 "왜곡된 인용과 편집"으로 출판물에 의해 본 교단의 명예를 훼손한 부분이었다.

둘째, 진 목사는 본 교회가 "정통 교회"를 그렇게 비판했어도 "정통 교회"에서 고소한 일이 없다고 말한다. 우선 진 목사는 그가 말하는 "정통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느 교회를 말하는지 전혀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정통 교회는 어느 교회인가? 그가 앞에서 언급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인가?

그러나 본인이 알기로는 이러한 교회들의 교리상의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특별히 칼빈으로 시작된 장로 교회와 웨슬리로 시작된 감리 교회의 구원관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정통 교회"라면 도대체 그의 "정통" 판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척도로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는가? 또 만약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정통이라면 도대체 각각 다른 이름의 교단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진 목사는 종종 안식일 교회의 교리 중 몇 가지를 몇몇 본 교단 소속 개인 저자들의 책에서 인용한 다음, 그 교리들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 논거로 제시하지 않은 채, "정통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정통 교회"라는 개념이 무슨 자연법적 진리도 아닌데, 어떻게 정의도 하지 않은 "정통 교회의 입장"을 가지고 이단성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비판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파악과 더불어 비판하고자 하는 자신의 논거가 뚜렷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 목사는 자료 선정의 오류를 통해 안식일 교회가 무엇을 믿는지 여부를 정확히 설정하지도 않았고, 또 비판하는 자신의 논거도 정확히 설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사8 : 20) 맞는지 아닌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딤후2 : 15)라는 권면처럼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가르침을 바르게 비평하는 것 자체는 참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예수께서도 사단이 두 번째 시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시험하였을 때, "또 기록되었으되"(마4 : 7)라고 말씀하시어 사단의 성경 인용이 왜곡되었음을 증거하셨다. 종교 개혁도 잘못된 성경 해석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진 목사처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절을 개조하거나, 혹은 발행된 출판물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재편집하여 원 문맥과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한 교단이나 종교 법인체를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어떤 불법 집단과 동일시되도록 편집하여 그 교단의 명예를 훼손한 적은 결코 없다.

셋째, 본인도 글은 글로 나누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시 한 번 기대하는 것은 편집자측에서 어떤 조건도 없이 "안식교측에도 이 지면이 열려 있음을 밝혀 둔다"고 했던 공개 약속을 공정하게 지켜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넷째, 단지 말만 듣고 하지도 않은 고소건을 가지고 비신사적 행위 운운까지하는 과민 반응의 이유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왜 다른 교회 교인이 아닌가
본인은 여기서 진 목사가 제기한 순서대로 나의 논지를 전개해 가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글의 목적은 단지 그가 비판한 것에 답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밝힌 것처럼 본인은 먼저 "나는 왜 다른 교회 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다른 교회"란 일단 진 목사가 정의하지 아니하고 사용한 소위 "정통 교회"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면 된다. 물론 그가 "정통 교회"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설정을 하면 본인도 그에 따라 "다른 교회"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할 것이다.

종교 개혁 정신의 상실
본인은 비록 진 목사가 "정통 교회"의 개념을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가 말하는 "정통"에서 "가톨릭 교회"는 제외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의 현재 소속 교단도 소위 프로테스탄트 교단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란 종교 개혁을 통해 가톨릭에 저항하여 일체의 전승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관을 박차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을 구호로 하여 출발한 신앙인들을 말한다. 고로, 프로테스탄트는 진리의 기준으로 "성경"이외의 그 어떤 것을 받아 들여서도 안된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에 가톨릭을 박차고 나올 때, 그 순간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다 밝히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루터마저도 그의 95개조 반박문 중 제75조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고, 후에 그의 95개조 해설집에서 "거룩한 동정녀로부터 용서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루터 선집, 제5권, 80)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그들의 선구자들의 뒤를 이어 더 밝은 빛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머무르고 말았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미국을 향해 떠날 때, 그들의 담임 목사였던 존 로빈슨(John Robinson)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설교를 하였다.

"나 개인으로서는 개신교의 상태에 대하여 탄식해 마지않습니다. 그 교회는 한때 신앙적이었지만 개혁 운동을 일으킨 인물들 이상으로는 한 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형편입니다. 루터 교도는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은 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칼빈파의 신도들 역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결코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남긴 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밝게 비치는 빛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의 전부를 밝히 깨닫지는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저희가 처음에 받은 빛 이상의 빛을 받고자 갈망할 것입니다."(D. Neal, History of the Puritans, vol. 1, 269)

그들의 구호는 "오직 성경"이었으나, 로빈슨의 말처럼 그들이 모든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개혁자의 후예들은 그 이후 성경으로 밝혀지는 진리를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로부터 다음에 나오는 문제와 같은 곤혹스런 역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이란 구호 상실의 증거인 안식일 문제
현재 효성여자대학교 총장인 한국 가톨릭 교회의 학자 박도식 신부가 쓴 [천주교와 개신교-하나인 교회]라는 책은 1980년에 그 초판이 발행된 이래 이미 87년도에 13판이 거듭되고 있었다. 그 책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박 신부가 개신교 교인들에게 가톨릭을 설명하는 책으로서 송양이라는 개신교 아가씨와 박 신부와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송양 :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송영애라고 하는 직장 여성이고 저의 종교는 개신교입니다.
박 신부 : 예!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사제관까지 찾아 오셨습니까?"(박도식, 천주교와 개신교, 5)
이렇게 시작된 이 대화는 개신교 아가씨 송양에게 박 신부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송양 : 저는 그렇게까지 세밀히 성경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이외에 또 내려오는 구원의 진리를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하나 말씀해 보시면 좋겠어요.
박 신부 : 예. 먼저 하나 물어 보겠어요? 개신교에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고 있지요? 성경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안식일을 주장했고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어찌하여 성경에도 전연 없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까?

송양 : ? ! ? !
박 신부 : 성경에는 그런 말이 전연 없습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신약 시대의 중심일로 생각하고 사도들이 정한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가톨릭에서가 아니면 어느 종파에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상계서, 59)

이 책에 실린 송양의 마지막 질문은 "신부님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문제에 대해서 인데요 신부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상계서, 112)로 끝나고 있다. 그러므로 소위 개신 교회의 목회자는 이 가련한 송양에게 속히 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안식일과 관련한 박 신부의 논리는 간단하다. "오직 성경"만을 믿으려면 안식일을 지키고 어차피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가톨릭의 전통이니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안식일을 일요일로 옮긴 사도들은 전후 문맥을 보면 결코 성경의 사도들이 아니다. 그는 반복해서 일요일은 "전통"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왜 개신교는 이렇게 여러 판이 거듭되도록 답을 얻지 못한 채 두 번씩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가련한 개신교 아가씨 송양을 위해 가톨릭에게 답을 주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왜 이렇게 분명히 개신교의 신원에 대해 뿌리를 흔드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는가? 왜 "오직 성경"만을 믿는다고 하면서 일요일을 성수하여 박 신부로부터 그런 곤혹스런 질문을 받고 있는가? 박 신부의 질문이 틀렸는가? 아니면 박 신부에게 할 말이 없는가?

사실, 이 질문은 종교 개혁 직후에 있었던 요한 에크(Johann Eck, Enchiridion Locorum Communiun¨¨Adversus Lutheranos (Venice : Ioan. Antonius & Fratres de Sahio, 1533), fols. 4v, 5r, 42v)의 반종교개혁 논증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그때 에크는 종교개혁자들이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오직 성경"이란 구호와 모순되며, 일요일 성수야말로 교회가 성경보다 우위에 있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논증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증이 지금까지 그의 후예들에 의해 여전히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 적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한 종교 개혁 정신의 상실
루터, 칼빈, 멜랑히톤, 틴데일 등 종교 개혁 당시의 개혁자들은 소위 성경 예언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 원칙에 입각하여 다니엘서의 "작은 뿔", 데살로니가후서의 "불법의 세력", 요한일서의 "적 그리스도"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붉은 빛 짐승과 음녀"를 교황권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가톨릭의 예수회에서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일환으로 예언상의 적 그리스도 세력들을 교황군에 적용하는 해석을 파하는 새로운 성경 해석법을 개발해 내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회 소속의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cisco Ribera)의 미래주의 해석법과 루이스 데 알카자르(Luis de Alcazar)의 과거주의 해석법이다. 미래주의 해석법이란 적 그리스도는 어떤 제도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종말의 때인 먼 미래에 일어나 3년 반 동안 일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리하여 가톨릭은 예수의 승천 이후 중세 역사 속에서 행한 교황군의 타락과 배도를 가리키는 성경 예언의 화살을 미래의 어느 개인에게로 돌려놓아 버리는 데 성공하였다. 또 과거주의 해석법이란 A.D. 2~3세기의 이교 철학자 폴피리(Porphyry)의 사상을 되살려 놓은 것으로 성경상의 예언을 모두 A.D. 1세기에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예언상의 적 그리스도가 기독교 역사 시대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차단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반 종교개혁적 해석법은 최고의 효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면서 프로테스탄트는 상당수 이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거의 100% 이 이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보수적인 종말론은 거의 다 미래주의 해석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적 종말론은 과거주의 해석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특별히 미래주의 해석법은 존 다비(John N. Darby)로 대표되는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그 이론에 의해 소위 "휴거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종교개혁의 유산인 역사주의적 해석법을 공식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유일한 학파는 본 교단뿐인 실정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로 자처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종말론에 있어서 반 종교개혁의 이론을 따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안목을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톨릭은 그 유명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도 사실상 그들 스스로 바뀐 것은 '교리의 표현'(modus enuntiandi)일뿐 '교리'(depositum)는 불변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스트라렌,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해설, 제3권, 556). 가톨릭은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종말론을 따르고 있는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구원론의 난맥상
앞에서 진술한 것처럼 각 교단이 말하는 구원론은 결코 같지 아니하다. 그들의 구원론이 얼마나 뚜렷하게 다른지는 최근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가 발행한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라는 번역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책에는 성화와 구원에 대한 감리교, 장로교 개혁주의, 오순절 교회, 케직파, 세대주의 입장이 각각 그 교단의 대표적인 학자들에 의해 소개되고 있는데,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와인쿱의 지적처럼, 소위 극단적인 칼빈주의에 의한 예정론적 구원론의 폐해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사실, 극단적 예정론은 전도도, 믿음도, 선한 행실도, 심판도 모두 제거하여 버리고 만다. 더 나아가 마침내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지적처럼 "그리스도마저 제거되는 경향"("The Debate over Divine Election", Christianty Today. Oct. 12. 1959. 16.)이 있게 된다. 물론 "오늘날 칼빈주의 대부분은 아르마니안화한 칼빈주의다"(밀드레드 와인쿱, 칼빈주의와 웨슬리 신학, 49). 그래서 그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같이 주장하는 것이 필요함을"(멜빈 디이터 외 4인,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 8)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조금만 순종의 중요성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려고 하면 순식간에 "율법주의"로 몰아 부쳐 버린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한 절대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면서도 그런 경우에는 "오직 믿음"을 외친다. "오직 믿음"이란 그 원칙 자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오직 믿음"이라고 외칠 때의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구원론의 백서인 로마서의 서론(1 : 5)과 결론(16 : 26)에서 나타난 것처럼 "믿어 순종케"되는 구원의 인과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고 있는가? 또 참된 믿음의 정의라고 말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through love, NKJV"(갈5 : 6)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본인의 개인적 느낌으로는 값으로 헤아릴 수가 없어 거저 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값싼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월간지 [신앙세계]가 지령 200호 기념으로 행한 "비기독교인들이 보는 기독교인들의 상"이란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80% 이상이 매우 부정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마3 : 8)없어 당하는 지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 사람이 넘치는 이유는 교회가 사람들을 구원해서라기보다, 교회와 세상이 너무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종교 사회학자 밀턴 잉거(M. Yinger, 종교 사회학, 13~24)의 말은 정말 곰곰이 곱씹어 보아야 할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모든 이유들이 신도들로 하여금 넉넉히 천국 신민답게 살 능력을 '우리 안에'(in us)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만 '우리를 위해'(for us) 주시는 은혜로만 제한해서 전했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성경은 결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Once saved, forever saved)이라는 교리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 교리를 믿게 되면 범죄와 타락의 사실마저 부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것처럼, 한 번 창조되었으면 영원히 범죄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이루어진다면, 창조시의 은혜는 저항할 수 있는 부족한 것이었단 말인가? 인간은 타락하였고 범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원 창조와 그 은혜가 불완전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가 스스로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가 버린 것은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만 "강권하시"(고후5 : 14)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구원을 얻고 난 후에도 스스로 그리스도를 떠날 수 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양을 잡고(출12 : 6), 그 피를 자기 집 문에 바르고(출12 : 7), 아침까지 그 집 문 밖에 나가지 말아야 했던 것(출12 : 22)처럼 ,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믿고, 마침내 그 아침이 오기까지 성령의 감동을 따라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는 긴장이 있다.

그러나 그 긴장은 어떤 의미에서 "안식의 긴장"이다. 왜냐하면 밖에는 살육의 칼이 번득이는 중에도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피 바른 집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오스카 쿨만의 공식으로 표현하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이다. 그들은 '이미' 피 바른 집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안식과 긴장을 함께 느끼며 그리스도안에서 재림의 아침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전제로, 단지 그리스도인의 범죄는 "상급의 차이"를 가져 올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일요일 성수"나 "십일금 충성"을 외치는가? 그것은 단지 하늘에서 상을 많이 받기 위한 것뿐인가? 물론 구원은 결코 이런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지만, 참된 믿음은 당연히 그 믿음의 열매를 가져와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거름을 주"(눅13 : 8)고 기다려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마침내 "찍어버"(눅13 : 9)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단지 상급의 차이뿐이라는 말인가?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품꾼의 비유(마20 : 1~16)와 달란트 비유(마25 : 14~30)를 통해 일의 양과 상관없이 품꾼과 종에게 주는 보상은 동일한 것임을 천명하셨다.

왜 그들은 '우리를 위해'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꾸만 약화시키려 하는가?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을 때, 그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한 번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혹 예수를 떠나도 무조건 구원이 있다는 교리를 가장 좋아할 자는 아마도 사단일 것이다. 그것은 거짓 확신과 위안으로 예수에 대한 매일 매순간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속삭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그 뜻대로 살아야 하는 '주'가 되심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동시에 "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구원론의 핵심은 믿음이냐 행위냐가 아니다. 만일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 교파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이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했을 때, 과연 그 "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다른 교회의 형제들과 신앙의 대화를 하다가 거의 언제나 마지막으로 받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거의 공통적으로 "그럼, 그렇게 안하면 구원 못 받습니까?"라는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단히 안타까운 심정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질문은 마치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면 아무리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렇게 할 마음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필자가 거기에서 또 다른 인간의 이기심을 느끼게 되는 것은 지나친 반응일까?

흔히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孝)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부모가 무서워서 하는 효요, 둘째는 부모의 상속을 바라서 하는 효요, 셋째는 부모이기 때문에 하는 효이다. 물어 볼 필요도 없이 부모이기 때문에 하는 효가 진정한 효이다. 사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구원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것이 종교이어서 그렇지 또 다른 이기심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라 그렇게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 : 7)이 아니겠는가? 이런 면에서 순전히 본인의 주관적 느낌으로는 오늘날의 교회는 지옥도피형 믿음과 구원목적형 믿음을 너무 양산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구원론 중에서도 예정론적 구원론의 일부분에 대한 이해이다. 사실, 여러 교단의 공식적인 구원론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같은 교단의 이름으로도 수많은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본인이 다른 교회 교인이 아닌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는 교회관
프로테스탄트의 근본 정신이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이기 때문에 다양한 교단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성경 해석에 근거해서 생겨난 교회는 나름대로 뚜렷한 교회관의 신학적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각개의 교단들이 뚜렷한 신학적 근거 없이 발생되는 것이다. 아무런 신학적인 차이가 없다고 스스로들 주장하는 교단들이 오히려 법적으로 구별된 교단을 설립하여 교파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각 교단은 자신의 "신원"(identity)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그저 하나의 기능상의 효과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필연적인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다양한 상품 중에서 하나를 취사 선택할 수 있는 품질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본인이 그들의 교회관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종종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이 소위 모두 "정통 교회"라고 하면서도 점점 더 많은 교단으로 갈라지기만 하고 있는 모습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나뉘어지는 것이 신학적인 이유라면 분명히 개별 교단으로 존재해야 하는 필연적인 신학적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종종 신학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렇게 나뉘어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만약 그 이유가 전 총신대학 교수 김의환 박사의 말처럼 된 것이라면 정말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분열 …신학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일 때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역사가 보여준 이합 집단의 언저리엔 다분히 신학적이 아닌 지방색, 교권욕, 영웅심, 배타심, 독선적 교만 등의 요소들이 깃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김의환, 도전받는 부수신학, 92)

그대는 만일 한 교단이 아무런 신학적인 이유 없이 단지 정말 지방색이나 교권욕에 의해 파생되었다면 그 교단의 "정체성"(identity)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인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교단명 아래 60개가 넘는 다른 법적 등록 교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 교단의 교회관은 어떤 것인가? 또 만일 한 교단명 아래 나뉘어진 그 많은 교단이 신학적인 이유에 의해 나뉘어졌다고 한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신학적 바벨(혼잡)이요, 바벨론적 교회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본인은 우선 최소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이유로 다른 교회 교인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왜 안식일 교회 교인인가
우리는 한 개인에 대해 평가할 때도 할 수 있는데까지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을 객관적으로 또 종합적으로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이 믿고 따르는 한 법인체적 공동체의 인격을 평가할 때는 더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본인은 그동안 본인의 소속 교단에 대한 일련의 비판 기사들을 보면서 비판의 내용 이전에 비판의 자세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인격적인 접근을 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본인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를 비판한다는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자체를 정확히 소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몇몇 본 교회 비판 기사는 우리의 신앙 신조와는 전혀 상반된 입장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들도 있다. 이 정보 개명 시대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본인은 차제에 본 교회의 기본적인 신앙 신조를 정확히 밝힐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이것이 전제 되어야만 공정하고 정확한 비판 논쟁의 장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본인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교인인 이유를 가장 정확히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본 교회의 기본 신조 27개 항이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곧 구약과 신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기록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하여 신적인 영감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인간에게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오류(無誤謬)의 계시이다. 성경은 품성의 표준이요, 경험의 시금석이며, 교리들에 대한 권위 있는 계시자요, 역사 속에서 활약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곧 함께 영원하신 세 신격의 통일체이신 한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불멸하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항상 존재하신다. 그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시면서도 그분의 자기 계시를 통해 알려지신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히 경배와 숭배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아버지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의 창조주, 근원, 유지자, 통치자이시다. 그분은 공의롭고 거룩하며, 자비롭고 인자하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변함없는 사랑과 진실하심이 한량없는 분이시다. 성자와 성령 안에 드러난 성질과 능력들은 아버지에 관한 계시이기도 하다.

아들 하나님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이 계시되었고, 인류의 구원이 성취되었으며,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 영원토록 하나님이신 분이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생활하셨고 유혹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완전하게 예증해 보이셨다. 그분은 당신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이심이 증명되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자발적으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우리를 위해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구원하고 만물을 회복하고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성령 하나님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은 창조, 성육신, 구속 사업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활동하셨다. 그분은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능력을 충만케 하셨다. 그분은 인간들을 이끄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하시도록 성부와 성자에 의해 파송되신 그분은 영적 은사들을 교회에 부여하시며, 교회에 능력을 베풀어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시고, 성경과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창조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성경 속에 당신의 창조 활동에 관한 권위 있는 설명을 계시하셨다. 엿새 동안 주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물을 만드셨으며 그 첫 주일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께서 창조사업을 마친 것에 대한 영구적인 기념물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첫 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극치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을 다스리는 그것들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이 다 창조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었으며 "심히 좋았"다.

인간의 본질
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개성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부여받았다. 비록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각 사람은 육체, 정신, 혼의 불가분적인 통일체로서 생명과 호흡,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했으며, 하나님 아래에 있는 그들의 고귀한 지위에서 타락했다.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그들은 사망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성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통회할 때 그들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간에 사랑하며 자신의 환경을 돌보도록 소명되었다.

대쟁투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품성과 그의 율법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쟁투에 관여되어 있다. 이 싸움은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은 한 피조물이 자기를 높이려다 하나님의 원수 곧 사단이 되었을 때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하늘 천사의 일부를 반역하도록 만들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죄에 빠지도록 함으로 이 세상에 반역의 정신을 들여왔다.

이러한 인류의 죄는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그러지게 하고 창조된 세계의 질서를 파괴해서, 전 세계적인 홍수 때에 무서운 황폐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 세상은 모든 피조물이 지켜보는 우주적인 싸움의 전장(戰場)이 되었고, 이 투쟁에서 결국 사랑의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옹호받으실 것이다. 이 대쟁투에 가담한 그의 백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충성스런 천사들을 보내사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의 길에 서 있는 그들을 지원하신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한 유일한 속죄의 수단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완전한 속죄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성품의 자비스러움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우리를 위한 용서를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대리적, 보상적, 화해적 및 변형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의 세력을 이긴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요, 속죄를 받아들인 이들이 결국 죄와 죽음을 정복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 앞에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이 다 그 무릎을 꿇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원의 경험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자각하고, 우리의 죄악성을 인정하고, 허물을 회개하며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 대치물과 모본으로 믿는 믿음을 행사하게 된다.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거룩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오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며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얻는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고 성화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기록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능력을 받는다. 그의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현재와 심판 때에 구원에 대한 보증을 얻는다.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승하여 우리는 세상에서 불러내신 바 되었고, 예배의 친교, 말씀의 교훈과 성만찬의 거행, 온 인류에의 봉사와 전세계적인 복음의 선포에 동참한다. 교회는 그의 권위를 성육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받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교인들은 그분의 자녀로 입양되었다. 교인들은 새 언약의 기초 위에서 산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성결하게 하고 깨끗케 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신부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당신의 피로 사셨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모든 시대를 통하여 충성을 다한 영광스러운 교회를 맞아들이실 것이다.

남은 자손과 그 사명
세계적 교회는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마지막 시대 즉 배도가 만연한 시대에, 한 남은 자손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도록 불러냄을 받았다. 이 남은 자손은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전하고, 그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요한계시록 14장에 세 천사로 상징되어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심판하시는 사업과 동시에 일어나며, 땅 위에서 회개와 개혁 사업을 완수한다. 모든 신자들은 이 전세계적인 증거 활동에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
교회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 가운데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민족, 문화, 학문, 국적 등의 구별이나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간의 차별이 분열의 요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상호간의 하나의 친교에로 결속시키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

우리는 편견이 없이 솔직하게 서로 섬기고 또 섬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같은 신앙과 소망을 나누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별을 가지고 나아간다. 이러한 연합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삼위 하나님이 일체가 되신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침례
침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활을 살려는 우리의 의도를 나타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인정하여, 그분의 백성이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된다.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연합, 우리 죄의 용서, 성령을 받아들임에 대한 상징이다. 이 예식은 물에 잠그는 방식으로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죄를 회개한 증거가 확인될 때 베풀어진다. 침례는 성경을 가르쳐서 그 가르침들을 받아들인 후에 시행된다.

성만찬
성만찬은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는 믿음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그분의 몸과 피의 상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고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이러한 성만찬에 참여하신다.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쁨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성만찬 예식의 준비에는 자기 성찰, 회개, 고백이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정결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으로 기꺼이 서로 섬기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사랑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이 연합되도록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다. 성만찬 예식에는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수 있다.

영적 은사와 봉사의 직무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의 모든 교인들에게 영적 은사를 주사 교인 각자가 교회와 인류의 공동 유익을 위한 사랑의 봉사 사업에 사용토록 하셨다. 이 은사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분의 뜻대로 각 교인에게 나누어 주어졌으며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임무들을 수행하는데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재능과 봉사의 직무들을 공급해 준다.

성경에 의하면, 이런 은사들에는 믿음, 병 고치는 일, 예언하는 일, 복음 전도, 가르치는 일, 다스리는 일, 화목시키는 일, 동정을 베푸는 일, 백성들을 도와주고 격려하기 위한 자기 희생적 봉사와 사랑 등이 포함된다. 어떤 교인들은 봉사의 일을 위해 준비시키고, 교회를 영적으로 성숙케 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지식의 일치를 가져오는 일에 특히 필요한 목회 사업과 복음 전도 사업과 사도직과 가르치는 직무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성령의 은사를 받아 교회가 인정하는 임무에 종사하게 된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성실한 청지기로서 이러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할 때 교회는 거짓 교리의 파괴적인 감화로부터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육성 하에 성장하게 되고, 믿음과 사랑 안에 굳게 서게 된다.

예언의 선물
성령의 은사들 중에 하나는 예언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남은 교회임을 확인하는 표징이며,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봉사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의 저술들은 지속적이고도 권위 있는 원천으로서 교회에 위로와 인도와 교훈과 교정을 제공한다. 또한 그의 저술들은 성경이 모든 가르침과 경험들을 시험하는 표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율법의 위대한 원칙들은 십계명을 통해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예시되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 그리고 인간의 행위와 관계들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의 표현이며 각 시대의 모든 인류가 지킬 의무가 있다. 이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표준이 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다. 이같은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계발시켜 주며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증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은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힘있게 해준다.

안식일
자애로우신 창조주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후 쉬셨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창조의 기념일로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율법의 넷째 계명은 이 제칠일 안식일을 쉼과 예배와 안식일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교훈과 실천에 조화되게 봉사하는 날로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며 인간 상호간에 교제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구속의 상징이며, 우리의 성화의 상징이요, 우리의 충성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맺는 영원한 언약에 대한 영구한 표징이다. 이 거룩한 시간을 저녁부터 저녁까지, 즉 해질 때부터 해질 때까지 즐겁게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행위를 경축하는 것이다.

청지기 직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간과 기회와 재능과 재산과 세상의 축복들과 그 자원들을 위탁받은 그분의 청지기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정당하게 사용해야 할 책임을 그분께 지고 있다. 우리는 그분과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성실하게 봉사하며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분의 교회를 유지하며 발전시키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청지기 직분은 자애로운 품성을 계발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충성됨의 결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러 오는 축복들을 즐거워한다.

그리스도인의 품행
우리는 하늘의 원칙들과 조화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경건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우리 주님의 품성을 재창조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생애에 그리스도와 같은 순결과 건강과 기쁨을 낳게 될 일들에만 관계한다. 이것은 우리의 오락과 여흥이 그리스도인의 취향과 아름다움의 최고 표준에 맞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문화적인 차이점들은 인정할지라도, 우리의 의복은 단순하고 정숙하고 산뜻해야 하며, 그들의 참된 미가 외양을 꾸미는데 있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부드럽고 유순한 정신을 가꾸는 데 있는 자들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육체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명하게 돌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적절한 운동 및 휴식과 더불어 가능한 한 건강에 가장 유익한 음식을 취해야 하며 성경에 명시된 부정한 식품들을 삼가야 한다. 주정 음료, 담배 및 마약과 마취제의 무책임한 사용은 신체에 해가 되므로, 우리는 그것들도 삼가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육체가 우리의 건강과 기쁨과 선량함을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훈육에 부합되게 하는 일에는 무슨 일에나 참여해야 한다.

결혼과 가정
결혼 제도는 에덴에서 신성하게 제정되었으며,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사랑의 교제로 맺어지는 평생 동안의 연합임을 예수님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 서약은 배우자에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서약하는 것이므로 동일한 신앙을 가진 남녀 간에만 결혼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간의 사랑과 신의와 존경과 책임은 결혼 관계의 바탕이 되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교회 사이의 사랑과 신성함과 친밀함과 영원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혼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음행 외에 배우자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비록 어떤 가족 관계가 이상에 못미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배우자들은 성령의 인도와 교회의 훈육을 통하여 사랑의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축복하시며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도와 완전한 성숙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부모는 그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본과 말로써, 그리스도는 그들로 당신의 몸인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자애롭고 관심을 베푸시는 사랑의 훈육자이심을 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가족간의 유대를 향상 시키는 것이 마지막 복음 기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하늘에는 성소, 곧 여호와께서 지으시고 사람이 짓지 아니한 참 장막이 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당신의 속죄의 희생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효력을 나타내게 하신다. 그분은 승천하시자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시고 중보의 봉사를 시작하셨다. 그분은 2천3백 주야의 예언 기간의 끝인 1844년에, 그분의 속죄 봉사의 두 번째요,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모든 죄의 최종적 처리에 해당되는 조사 심판의 사업이며, 고대 히브리 성소가 대속죄일에 정결케 되는 의식으로 예표되었던 것이다. 이 예표로서의 의식에서는 동물의 희생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가 정결케 되었지만, 하늘의 것은 예수님의 피와 완전한 희생으로 정결케 된다. 조사 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의 주민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러므로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승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충성해 온 자들이 하늘 나라를 얻을 것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이 봉사가 끝나면 재림 전에 인간을 위한 은혜의 기간도 끝난다.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회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위대한 복음의 절정이다. 구주의 오심은 실제적이며, 직접적이요, 가시적(可視的)이며, 세계적이다. 그분이 오실 때, 죽었던 의인들은 부활하여 살아 있는 의인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은 죽을 것이다. 세상의 현실적 상태와 함께 거의 모든 예언들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재림의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권면을 받고 있다.

죽음과 부활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유일한 불멸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 날이 되기까지는 죽음도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식 상태가 된다.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 있는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 올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부활, 즉 불의한 자들의 부활은 1천년 후에 있게 될 것이다.

천년기와 죄악의 종말
천년기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이 첫째와 둘째 부활 사이에 하늘에서 1천년 동안 통치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 죽은 악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지구는 완전히 황폐되어 산 거민들이 없고,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거처할 뿐이다. 그 기간의 끝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도들과 거룩한 성과 함께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그 때에 죽은 악인들이 부활하여 사단과 그의 사자들과 함께 그 성을 포위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그들을 태우고 지구를 정결케 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주는 죄와 죄인들에게서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

새 땅
의가 거하는 새 땅에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들을 위한 영원한 본향과 하나님 면전에서 영원히 살고, 기뻐하고, 배울 수 있는 완전한 환경을 마련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실 것이며, 고난과 죽음은 사라질 것이다. 대쟁투는 끝나고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만물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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