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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자본주의 스포츠 바람
골프·볼링·비치발리볼 인기
2003년 05월 21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외교팀 기자

북한 스포츠에도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골프장과 볼링장이 등장한 데 이어 텔레비전에서 프로복싱이 중계된다. 또 우리의 프로축구와 유사한 형태의 축구리그전이 펼쳐진다. 여자축구까지 선을 보였다. 이런 모습들은 이제 북한의 중앙TV 등을 통해 별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지난해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에 경제관리개선조치로 불리는 실리주의 노선이 도입된 이후 거세지기 시작한 자본주의 바람은 이제 스포츠계에도 번지고 있다.

평양에 나이키(NIKE) 스포츠 용품이 유행하고 있다. 언뜻 믿겨지지 않는 얘기지만 북한이 발간하는 선전화보인 <조선> 3월호는 흰색 ‘NIKE’ 글자와 붉은색 상표가 뚜렷한 털모자를 쓰고 연을 날리는 어린아이 사진을 게재했다. 이에 앞서 북한의 중앙TV는 지난해 2월 한 소학교의 운동회 소식을 보도하면서 나이키 상표가 부착된 모자를 쓴 학생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해 부산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한 여성응원단도 나이키 운동모와 트레이닝복을 착용해 눈길을 끌었다. 제국주의의 상징인 미국의 나이키사 제품이 운동선수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속속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선수들이 단체로 필라(FILA) 제품을 입거나 이용하는 것은 이젠 공공연한 사실이 됐다.

스포츠 분야의 자본주의 바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골프장이다. 평양과 남포직할시(우리의 인천과 비슷한 수도인근의 항구도시) 사이에 위치한 태성호 주변에 위치한 평양골프장이 주역이다. 전장 7km에 모두 18홀을 갖추고 있으며 지난 87년 문을 열었다. 물론 초기에는 북한을 방문하는 재일 조총련 상공인들과 북한주재 외교관, 상사원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북한의 고위 당정 간부들과 함께 방북한 일부 남한 인사들에게까지 개방되고 있다. 남포시에 진출한 통일교 계열의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은 최근 방북에서 북한당국과 남한측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는 골프대회를 이곳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가장 자본주의적이라고 북한이 지적하고 있는 골프붐을 일게 한 이 골프장의 건설을 지시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란 점이다. 김정일은 골프장 건설을 지시한 이후 건설 관계자들이 ‘비생산적인 사업’이란 이유를 거론하며 공사에 늑장을 부리자 직접 조기건설을 독려하기도 했다는 게 북한언론들의 보도다.

몇 해 전 호주의 <오스트레일리언 파이낸셜 리뷰>는 평양발 기사에서 김정일의 골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다뤄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골프를 매우 즐기고 있으며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평양 골프장 소속의 한 북한 프로골퍼는 “평양골프장은 잭 니클로스나 그랙 노먼 같은 세계적인 프로골퍼들도 공략이 쉽지 않을 만큼 어려운 코스지만 김정일은 버디를 쉽게 잡았다”고 주장했다. 이 골퍼는 “김정일이 18홀을 돌면서 홀인원을 5개나 기록했다”고 허풍을 떨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북한의 골프용어는 대개 우리말로 순화시킨 게 많다. 그린을 정착지로, 클럽은 채, 카트는 전동차, 벙커는 방해물로 부른다. 하지만 캐디들이 멋진 샷을 지켜보면서 “나이스 샷” 하고 외치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북한의 골프장은 그린의 관리상태나 부대시설 면에서 골퍼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된다는 게 이 곳을 다녀온 골퍼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이 곳을 외국인들이나 방북교포를 위한 위락시설로 여기고 이를 통한 외화벌이에도 적극 나서겠다는 입장이어서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예고된다. 남북경협 논의 등 북한 사업파트너와의 만남을 위해 평양을 방문할 때는 골프장비를 챙기고 부킹을 잊지 말아야 하는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볼링도 북한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94년 2월 평양에 등장한 ‘평양 보링그장’도 이제 제법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모두 40개의 레인을 갖춘 이곳은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북한언론의 보도다. 1만4천300㎡의 건축면적에 식당·오락실 등을 갖춘 이 볼링장이 마땅한 레저수단이 없던 주민들을 사로 잡았다는 것이다. 종합레저시설인 평양의 낙원관 건물에도 볼링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볼링을 ‘보링그’로 표기하며 “체육종목의 하나로서 길이 16m, 너비 약 1.5m인 긴 평판대 위에 축구공과 비슷한 크기의 공을 굴려서 맞은편 끝에 세운 10개의 병모양의 나무봉(핀)을 넘어뜨려서 얻은 점수를 가지고 승부를 가르는 경기”라고 소개하고 있다.

북한 스포츠가 이처럼 자본주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93년 4월 평양에서는 처음으로 프로권투 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공화국 프로권투 선수권 대회’라고 이름 붙여진 경기에는 모두 9개 팀이 출전했다. 매 라운드마다 한복을 차려입은 라운드 걸이 등장한 것도 이채로웠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TV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중계됐다. 평양에서 열린 빙상대회에서 페어 종목에 진출한 북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이 팝송 ‘예스터 데이’에 맞춰 연기하는 모습이 중앙TV를 통해 방영된 것도 이때쯤이다.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종목은 씨름이다. ‘텔레비전 민속씨름경기’란 이름으로 개최되는 경기는 남한에서 한때 고조됐던 천하장사 씨름대회의 열기를 방불케 할 정도다. 특이한 점은 모래판이 아니라 파란색 매트 위에서 경기가 치러진다는 점이다. 또 체중이 90kg이 넘는 선수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우승자에게는 황소가 주어지고, 2위와 3위에게는 송아지가 부상으로 수여되는 것은 전통민속을 살리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남한의 프로축구와 유사한 ‘축구연맹전’도 인기리에 치러지고 있다. 연초부터 수개월 간에 걸쳐 열리는 이 경기에는 남녀 각 6개 팀이 참석해 모두 8차례의 리그전을 치러 우승팀을 가린다. 우리와 같이 ‘홈 어웨이 방식’으로는 치르지 못하고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만 경기를 갖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특히 여자축구는 인기가 폭발적이다. 북한의 여자축구는 86아시안게임의 정식종목 채택을 계기로 집중 육성됐다. 88년부터는 북한의 전국체전격인 전국인민체육대회에서 야구와 함께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북한의 여자축구가 국제무대에 첫선을 보인 것은 89년 12월 홍콩에서 열린 7회 아시안컵 여자 축구대회였다.

북한에서는 과거 농구에 대해 “한 골을 넣으면 공이 두 개가 돼서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 비생산적인 운동을 하느냐”는 비판 아닌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북한 언론은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로 농구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중앙TV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농구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넣어야 한다’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사실까지 거론하며 “가장 인기 있는 대중체육 종목인 농구는 인민의 건강증진과 혁명적이고 낭만적인 사회 분위기 조성에 적극 이바지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김정일이 농구경기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면서 “농구경기에 관한 100여 회의 지침을 비롯해 10여 차례 경기장을 찾아 경기를 관람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여름에는 해수욕장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경기를 진행하는 관계로 북한에서는 ‘퇴폐적인’ 스포츠로도 인식될 수 있는 비치 발리볼을 <노동신문>을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신문은 국제배구연맹에서는 지난 89년 8월 이 종목을 전 세계에 보급하고 발전시킬 목적으로 첫 세계대회를 창설했으며, 이후 “세계적 범위로 보급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이 ‘모래터 배구’라고 부르고 있는 비치 발리볼의 공식적인 대회는 아직 열린 적은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살펴본 것처럼 이제 북한 스포츠에는 서방세계의 훈풍이 새어들고 있다. 국경이 없는 스포츠가 남북분단의 벽을 허물고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하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핵 문제와 경제난으로 대표되는 체제위기 등을 넘어 북한이 우리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하는 데 스포츠가 한 몫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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