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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항쟁·굴욕… 지금은 고요만
가볼 만한 곳 - 역사의 언덕 강화산성
2002년 09월 18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종선 기자

   
서울의 서북방에 위치한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문화유적이 많은 고장이다.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시대의 수도였던 서울의 서쪽 관문으로서 강화도는 당연히 외국문물의 접수창구이자 외세와의 완충지대 역할을 맡아야 했다. 때문에 강화도는 우리나라 전란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며 섬 전체가 전쟁시설로 꾸며져 있다. 그 중에 하나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휘감아 도는 2km짜리 석성이다.

강화산성이 처음 건립된 것은 고려 고종 때(1232년)로 당시에는 흙을 쌓아 만든 것이었다. 몽고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14년 동안이나 토성 안에서 대몽 항쟁을 계속했다. 강화산성 안에는 고려궁터가 아직까지 남아있고 당시에 유래된 지명도 여러 곳이 있다.

하지만 고려 고종 때 쌓았던 토성은 몽고와 화친하면서 그 협약에 따라 모두 헐었고 지금의 것은 조선 숙종 때(1711년)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완성했다. 둘레가 1천947m이고 4개의 대문과 2개의 수문, 9개의 성곽과 4개의 성문 장청이 있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북문과 남문, 그리고 서문 등 3개의 대문과 성곽 700여m. 동문은 조선조 말에 소실돼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남문은 조선 숙종 때 건립된 것인데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형식의 누각이다. 바깥쪽에는 강화 남문, 안쪽에는 인파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문 양쪽으로 야트막한 석성이 200m쯤 연결돼 있다.

사적 제132호로 지정돼 있는 서문 역시 강화읍 시가지에 있는데 48번 국도를 따라 강화읍을 벗어나는 서문삼거리의 오른쪽에 있다. 서울의 남대문이나 수원화성의 북문처럼 높고 장쾌하지는 않지만 단아하고 정결한 건축미가 빼어난 누각이다. 축성 책임자였던 강화 유수 민진원이 직접 쓴 첨화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서문 오른쪽에는 큼지막한 느티나무가 하나 서있다. 남문과 서문과는 달리 강화산성의 북문은 강화도 남산(일명 송악산)의 서부 능선에 있다. 관청리 삼거리에서 고려궁지를 끼고 돌아 3분 정도 차로 달리면 북문이 길을 가로막고 나서는데 작고 아담한 성문이다. 서문과 남문보다는 튼튼해 보인다. 강화 주요 국방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에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진송루라는 현판을 바라보며 서문 밖으로 나서면 두 개의 오솔길이 나온다. 성문과 언덕, 그리고 갈참나무 숲이 어우러져 가끔씩 사극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북문 역시 누각 양편에 기다랗게 성벽을 거느리고 있는데 특히 성문을 빠져나와 오른편 오솔길을 따라가면 월곶 돈대와 연미정, 그리고 북한의 헐벗은 산들이 내다 보이는 근린공원이 있고 조금더 가면 오읍 약수터가 나온다. 산성 밑을 거닐며 오래된 강화도의 역사를 음미해 볼 수 있을 뿐더러 북한 땅을 바라보며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느낄 수도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볼 만한 곳이다.

북문에서 내려오다 보면 승평문이라는 또 하나의 대문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고려궁궐의 정문이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긴 고종 19년(1232년)부터 원종 11년(1270년)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던 궁궐이 강화도 남산자락에 있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당시 무신정권을 장악했던 최우가 이령군(입대한 지 2년된 군졸들을 모은 집단)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정궁, 행궁, 이궁, 가궐 등의 궁궐이 있었는데 승평문이 있는 이곳은 정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돼 1977년 발굴조사가 실시됐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궁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 몽고의 요구로 모두 헐렸다. 하지만 조선조 중엽 인조 9년(1631년)에 이곳에다 또 다시 행궁을 건립해 전각과 외규장각, 강화유수부 등을 세웠는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약탈로 건물이 소실되고 귀중한 문화재들이 반출됐다. 지금은 강화 유수부의 동헌인 명위헌과 이방청, 그리고 강화부종각이 남아있다.

강화부종각에 있었던 강화동종은 숙종 37년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만들어 옮긴 것으로 보물 제11호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종과는 달리 맨 아래에 넓은 꽃무늬 띠를 돌린 것이 특징이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강화동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무거워서 배에 싣지 못해 갑곶리의 토끼다리 근처에 놓고 돌아갔다는 실화가 유명한 동종이다. 하지만 강화동종은 최근에 균열이 심해져 타종이 어려워졌으며 지금은 강화역사관에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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