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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성 속 합일’이 우리 시대 과제
한국사회 불안의 역사적 교훈과 오늘의 위기
2003년 05월 14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13회 신촌포럼이 지난 5월 1일 신촌교회(이정익 목사)에서 열렸다. ‘오늘의 한반도: 무엇이 위기인가?’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날 포럼에는 한국 사회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위기상황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전개됐다. 이에 본지는 주최측의 동의를 얻어 ‘한국 사회불안의 역사적 교훈과 오늘의 위기’를 주제로 발제한 박종화 목사(경동교회)의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지난 반세기의 한반도는 적대적 남북대결 속에 분단사회를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으로 키워왔다. 세계 여러 분단국가들과는 달리 한국전쟁으로 인해 적대적 대결의 골이 깊게 패어 있어 분단의 아픔이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국제 정치상의 지도가 동구 사회주의권의 총체적 붕괴로 탈냉전 구조로 바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여전히 냉전대결의 저류가 흐르고 있는 것도 바로 분단 비극의 참상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오늘의 남한 현실에서 “친미는 곧 반북”이고 “친북은 곧 반미”라는 무비판적 극단주의가 우리의 의식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비극이다.

문제는 그것이 국가이익 내지 민족이익이라는 넓은 의미의 정치적 고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차원에까지 심화되어 있는 점이 위기의 진면목이다. 나아가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공조냐 외세공조냐의 택일 강요 문제도 비이성적인 극단주의의 단면이다.

민주사회의 강점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책임과 참여의 고조에 있다고 본다. 예컨대 국가안보의 경우만 하더라도 무기나 군의 안보력 못지 않게 국민적 자부심과 자율적 안보인식 능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적대적 대결이라는 사고방식은 인식과 발상의 차원만이 아니라 생활방식으로 깊게 자리하고 있기에 단시일 내에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임에 틀림없다.

예컨대 ‘남북기본합의서’ 1장 1조에 합의 명시된 “상대방 체제를 상호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명제가 실제로 얼마나 수용되고 있는지 겸허하게 평가해 봐야 한다고 본다. 상호인정과 존중은 예컨대 북쪽체제를 북한의 현실적 통치지배 체제로 인정하고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지 북쪽체제를 남쪽에 수용한다거나 그에 맞게 남쪽체제를 변경시킨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북쪽이 남한의 체제나 이념을 자기 체제 속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아님과 같다. 말하자면 쌍방간의 상이한 체제와 이념의 실재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잠정적이기는 하나 꼭 필요한 단계인 “평화적 공존”을 지켜가자는 것이다.
 
이런 평화적 공존의 틀이 없는 한 남에 의한 북의 “흡수통일”이나 북에 의한 남의 “적화통일” 정책만이 기승을 부릴 것이며, 그 방법은 누구도 원치 않는 무력통일 곧 전쟁방식일 것이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리로서 전쟁의 비극적 참화를 반복하고 싶지도 않지만, 전쟁의 방식으로 어떤 형식이든 통일이 이루어질 수 도 없을 것이기에 싫든 좋든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한반도의 평화는 상호간의 실체인정에 바탕을 둔 평화적 공존일 것이라고 본다.

민족분단이 한국사회 불안의 구조적 틀임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불안과 악의 근원이 분단에만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말하자면 한반도 불안의 원죄가 분단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가 없으며, 분단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만 내비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단이 가져다준, 아니 분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발현된 긍정적인 가치도 크다는 생각이다. 먼저 민주화 열망의 성취이다. 오랜 시련을 겪으면서 북한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북한체제와 외피를 닮은 독재체제 강화가 아닌, 북한체제와는 정반대의 자유민주체제 강화가 승리의 길임을 인지하고 헌신적 노력을 기울인 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남북간의 생산적 체제경쟁에서 불안감이나 위약감을 느끼는 국민은 없으리라 본다. 쌍방의 체제 인정과 존중이라는 남북 기본 합의서가 채택되고, 국민이 이를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심리적 배경은 그 만큼 자신감 있는 민주의식이라 생각한다.

또 하나의 긍정적 요인이 있다.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이 만큼의 엄청난 경제성장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잘 살아보세”의 자율적 의욕과 생산적 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본다. 여전히 사회주의적인 중앙통제와 배급체계가 지배하는 북한과는 달리 선의의 경쟁과 스스로의 부지런함이 합일된 한국인의 생산성과 창의성이 분단의 위기 상황에서 크게 돋보이게 표출된 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 있다고 본다. 일종의 벤처형 사고와 생활방식이다. 이것은 창의력 향상과도 연관이 있다. 획일주의적 사고를 벗고 다양화된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전문성을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고양하고 터득하는 열정이다. 더구나 전문성과 자질향상의 문제는 한국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엄청난 교육열풍과 더불어 더 이상 Korean Standard(KS)가 아니라 Global Standard(GS)에 맞추어 가려는 선진국형 노력과 열성이 크게 일고 있는 점도 긍정적 요인이다.

다만 이런 긍정적 요인과 관련하여 우리사회 내부에 내재하고 있는 세대간의 잠재적 갈등이 염려된다. 문명과 문화의 속도만큼 의식과 인식구조에 있어서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터라 예컨대 남북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세대간의 갈등은 쉽사리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전쟁의 상처와 이산가족의 아픔을 곱씹으며 상대적 대북 적대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세대와 탈 이념, 탈 냉전, 탈 빈곤의 과정에서 세계화 경쟁물결을 타고 성장한 세대는 남북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가치체계 형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이미 살펴 본대로 한국사회의 불안요인은 다양하다. 냉전과 탈 냉전의 변화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시급히 극복해야할 과제가 바로 다원성을 바탕삼아 지혜롭게 합일점을 찾아가는 민주방식의 생활을 착근시키는데 있다고 본다.

냉전의 틀이 배태하고 있는 인식의 틀은 “적과 동지”, “흑과 백”,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심화이다. 외형적으로 냉전대결의 구도를 탈피하는 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마인드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를 흔연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의 정치사회는 가장 낙후된 구성체에 속한다고 본다. 여·야의 대결은 성숙한 정책대결이나 선의의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흑색비방의 연속이거나 아니면 밤에 이루어지는 더러운 결탁으로 여전히 점철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특성이라 할 “타협”은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채 유치한 타락의 면모만 보이고 있다.
 
예컨대 서구 민주주의처럼 절대과반수가 못되어도 연합정부를 구성해 선의의 타협과 합의로 정부를 구성하는 지혜는 찾기 어렵다. 선과 악의 이분법대신 “악과 덜한 악”(R. Niebuhr)으로 겸손하거나, 상호인정과 존중이라는 민주적 바탕하에서의 평화적 공존의 길을 삶의 방식으로 터득해야 진정한 다원사회의 민주질서가 가능해 지리라고 본다.
다원성 속의 합일 과제 중에 우리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역시 지역주의라는 암세포라 본다. 지역주의의 원인을 여기서 별도로 살필 여유는 없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지역주의는 현실적으로 이념 그 이상이고, 신앙 그 이상이고, 인간의 집단적 가치 그 이상임은 누구나 인정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지역주의가 없는 나라도 사회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라파의 경우 지역주의는 “지역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인사문제가 나올 때마다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지역적 몽매주의는 한국사회가 지니고 이는 병폐라 생각된다.

단 국가문제나 민족의 문제에 있어서 만이라도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틀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차라리 지역분권화를 강화하여 지역의 생산적 특성을 최대한 발휘시킴이 지역차별을 극복하는 방안이라고 본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중앙정치는 지역정부나 지역정치의 연방형태로 만들어 감으로 지역주의를 상승적으로 극복함이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교회의 경우도 사회 구성체로 볼 때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본다. 신학적 진보와 보수로 교파가 나누어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내부에 지역간의 갈등과 대결이 똑같이 극심하다.

그리고 진보나 보수를 관통하여 신학적 교리적 강조점의 차이를 넘어 지역간의 연대 또한 강하다. 선거 때만 되면 이런 현상이 수면위로 등장한다.

차라리 한국교회의 일치는 지역단위별 연합교회로 만드는 것에서 출발하면 좋으리라 생각된다. 탈 냉전 이후 신학적, 교회적 해석을 중심으로 진보와 보수의 거리는 상당히 좁혀졌다고 생각한다.

이단 시비나 적대적 대결은 거의 찾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물론 극단적 입장에 더 이상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대다수의 교회들 입장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다만 여전히 기승하고 있는 지역갈등을 해소하면서 동시에 선교와 봉사 공동체로서의 지역단위별 일치를 위해서는 오히려 ‘지역단위별 연합교회’를 형성하고 중앙에는 지역 연합교회의 연합체를 구성함이 현재의 교파별 연합보다는 훨씬 더 다원사회에 효율적인 연합구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십의 형태 변화라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이제 그 위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정치사회에서 “제왕적 대통령”이나 “제왕적 당 총재” 리더십이 설자리를 점차 그러나 큰폭으로 잃어가고 있고, 경제영역에 있어서도 문어발식 재벌의 “황제경영자”가 퇴락의 길을 걷고 있는 현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사회 각 영역과 분야에서는 크게 돋보이며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다원사회가 요구하는 기존적 형태의 리더십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종교, 특히 기독교의 경우 이러한 리더십 형태 변화가 교회 권위의 도덕성과 위상의 흔들림과 맞물려 불안을 만들어 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세습제”논란에 담겨 있는 권위주의의 몸부림은 우리를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도덕성에도 치명적이다. 오히려 “아름다운 세습”의 예외적 칭송의 길마저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적 모순이요 구조악일 수 있다.

오늘의 리더십은 심포니 지휘자 같은 형태의 것이라 본다. 소속된 집단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각자 자기 나름의 악기소리를 가장 충실하게 내도록 지휘한다. 소리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소리의 진면목 발휘가 중요하다.
 
하지만 다양한 소리는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화음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지휘자는 기독교 신앙으로 말하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오케스트라 연주의 대본으로 삼고, 지휘자와 단원들이 합의하는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심포니가 아름답게 울려 펴져야 한다. 연주자와 지휘자, 청중에게 모두의 기쁨과 행복을 선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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