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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 ‘저주 종결’ 진리의 신학적 적용
정훈택 교수의 ‘가계저주론’반박에 대한 이윤호 목사의 재반론(3)
2003년 07월 23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들어가는 말

필자는 지난 주 글에서 정훈택 교수가(이하 반론자) 갖고 있는 잘못된 성경 해석방법론이 야기시킨 부분적 진리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필자는 반론자의 신학의 극단성을 ‘종말론 긴장’이 없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오류성을 지적하였다. 반론자의 이런 신학은 “신자는 더 이상 저주아래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계의 저주를 포함한 모든 저주는 이미 끊어졌다”는 또 다른 잘못된 결론을 유출하였다. 이제 필자는 반론자의 이런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변증하고자 한다: 1) 정통적 구원론과의 불일치; 2) 신자의 성화 과정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 3) 종말론과의 불일치(괄호[  ])안의 인용문은 반론자의 주장이다).

갈라디아 3장 13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가계치유’의 지지파나 반대파 모두 본문의 말씀을 논리적 근거로 삼는다. 반론자는 본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서 ‘가계치유’의 필요성을(혹은 ‘가계의 저주’) 부인한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족성을 논증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족성에 다른 어떤 추가적 사항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는 단호한 진술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반론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족성을 전적으로 믿는다. 그런데, 반론자는 본문의 배경인 갈라디아 3장 1~15절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신학적 오류를 범했다. 본문의 배경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다른 것을 첨가하려고 하자 이러한 움직임을 신랄하게 책망한 것이다]라는 반론자의 견해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주의자들(Judaizers)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를 통해 유대인이 먼저 되고, 그 후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소위 ‘이단계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이미 주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사도 바울은 이어서 창세기 15장 6절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믿음의 예를 들어 율법의 준수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  3:6). 사도 바울은 반론자의 주장과 달리 갈라디아서 5~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방종을 방조하는 ‘무율법주의’가 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3장~4장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justification by faith alone)’는 교리를 변증하는 말씀이다(갈 3:6,11).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보다는,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해 저주를 받으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말씀에서 ‘저주로부터 구속’을 확증하는 근거를 찾아야 한다(마 27:46; 막 15:34; 요 17:4, 19:30; 엡 4:30). 왜냐하면, 본문의 말씀은  여러 가지 형태의  저주의 최초의 원인이 된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의 ‘죄’를 언급하기 않았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3:16~19). 이런 의미에서, “갈라디아서 3:13에서 언급된 ‘율법의 저주’는 신명기 28장에서 열거된 ‘저주목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는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고든 피박사의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The Disease of the Health and Wealth Gospel>, 18면). 이제 왜 반론자의 주장이 비성경적인가를 검토해 보자.

1. 정통적 구원론과의 불일치

반론자의 잘못된 신학은 구원론의 오류에 기인한다. 반론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가계의 저주와 같은 개별적 저주를 포함한 하나님의 보편적 저주는 칭의, 성화, 영화의 구원론과 종말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필자는 이미 칭의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정도와 관계없이 영화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자의 성화된 삶의 정도가 현세의 구원의 축복과 내세의 상급을 결정하는 데 주요 요인이 되기 때문에, 구원의 점진성 진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후 저주를 선포한다. 이 저주는 아담과 이브가 전 인류를 대표하기 때문에, 전 인류에 대한 저주이다. 창세기 3장 16~19절에 언급된 저주목록은 포괄적이라기보다는 몇 가지 일례에 불과하다. 구원은 죄로 인해 영, 혼, 육에 임한 모든 손상된 결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치유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저주는 인간의 죄로 인한 모든 결과를 포함한다. 그런데, 구원은 칭의, 성화, 영화의 단계를 거치는 신자의 과거, 현재, 미래적 경험으로써 점진적이다(롬 13:11; 히 6:9). 따라서, ‘성화의 구원’이 점진적이라면, 죄의 결과로부터의 회복, 즉 저주로부터의 완전한 구속은 계속 연속되는 과정에 의해 이루어간다.
반론자의 구원론의 오류, 특히 성화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는 많은 오해를 야기시킨다.

2. 신자의 성화 과정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

반론자의 구원론의 오류는 [신자들은…완벽한 구원을 이미 얻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함께 신자들의 구속받은 신분과 상태가 과거형으로 말해지고 있다]라는 그의 주장에 잘 반영되 있다. 만약, 이런 반론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새로운 피로물이 된 신자들이 왜 여전히 이전의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가?”(고후 5:17); “‘하나님께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가?”(요일 1:8~10; 3:6,9); “신자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는데, 왜 계속해서 죄 고백을 해야 하는가?”(요일 1:9); “신자는 ‘의인’인데, 왜 바울은 말년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지칭했는가?”(딤전 1:5); “왜 바울은 ‘십자가에 이미 죽었다’고 했는데, 또한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는가?”(갈 2:20; 고전 15:31) 이런 상충적인 문제는 메릴 엉거교수가 설명하는 대로, 신자가 이미 거룩하게 된 것은 ‘신분적/법적’ 진리이고, 이미 거룩하게 된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경험적/상태적’ 진리로 설명해야 한다(<What Demons Can Do to Saints>, pp. 35~41).

반론자는 요한복음 3:18,36, 5:24 등 몇 몇 구절들을 인용하여, [신자들이 온갖 저주 아래 살고 있다는 주장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다는 성경의 진술과 너무나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반론자는 신자의 칭의나 신분을 언급하는 구절들을 사용할 뿐, 신자가 자신의 행실을 따라 받는 하나님의 현재 및 미래 심판을 말하는 모든 구절들을 배제시켰다(고전 5:5; 고후 5:10; 엡 5:6; 골 3:6). 반론자는 성화의 구원을 칭의의 구원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신자의 실제적 상태를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반론자의 이런 신학적 오류는 “신자들이 저주 아래 살고 있다”는 필자의 의도를 왜곡하였다.

이는, 반론자가 ‘저주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신자의 법적 혹은 종말론적 신분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필자가 말하는 ‘신자의 현재 상태’란, 예를 들면, 인간의 죄로 인한 육체적 죽음, 질병, 가난 등의 보편적 저주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저주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서 이미 완전히 제거되었는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문 85~86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죄의 결과인 저주로 인해 ‘육체적 사망’과 ‘본성의 부패’로 고통하고 있는 신자들의 현실적 경험을 확증한다. 신자들은 내재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저주 가운데 살지 않는다”는 주장을 감정상 수용하는 소위 ‘느낌표 신학’ 대신에, 성경 및 삶의 현실성에 근거한 ‘사실 신학’을 수용하며 살아야 한다.

3. 종말론과의 불일치

반론자의 주장과 달리 구원론과 종말론은 가계치유론(혹은 저주종식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신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구원론의 ‘영화’와 종말론은 중복되는 교리이다.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구원은 죄의 결과인 저주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고, 저주의 종결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고난의 저주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고 가르친다(롬 8:18-25):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the creation itself will be liberated from its bondage)(롬 8:21). 본문의 미래형 시제를 주목해 보라! 성경은 또한 신자들이 몸의 구속, 곧 영화를 기다린다고 증언한다(롬 8:23,25).  이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때에야 비로소 신자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계시록 22장 3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다시는 저주가 없게 된다(No longer will there be any curse).” 따라서, [빌립보서 3장 20-21절,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 요한일서 3장 2절은… “모든 저주로부터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증언하는” 구절이 아니다]라는 반론자의 주장은 조직 신학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잘못된 견해이다(Erickson, <Christian Theology>, 999~1002면).

맺는 말

필자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근거해서 “가계의 저주가 이미 끝났다”는 반론자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분석하였다. 반론자의 주장은 성경의 구원론 및 종말론과 불일치할뿐더러 신자의 성화 과정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신자의 실제적 상태를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필자는 다음 글에서 교회사적 자료를 포함한 성경해석 공동체를 통해 ‘복과 저주’에 대한 진리를 확증하고자 한다. 또한, ‘복과 저주’의 진리를 실생활에 적용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필자의 입장을 천명하고자 한다(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가계의 복과 저주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필자의 책과 <목회와 신학> 2001년 6월호에 실린,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를 성서적/신학적으로 입증한다”는 필자의 글을 참조하시고, 본고에 대한 토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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