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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파적 성경 해석이 유출한 부분적 진리의 위험성
정훈택 교수의 ‘가계저주론’반박에 대한 이윤호 목사의 재반론(2)
2003년 07월 16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윤호 목사가 ‘가계저주론’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본지에 다시 보내왔다. 본지 39∼42호에 게재된 이 목사의 반론에 대한 정훈택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의 반박이 43∼46호에 나가자 재반론을 편 것이다. 4회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필자는 지난 주 글에서 정훈택 교수(이하 반론자)의 성경해석학의 오류에 대해 지적하였다. 필자가 반론자가 사용한 성경해석의 오류성을 지적한 이유는 그 자체보다는, 이로 인해 신자들에게 미치는 위험성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필자가 이미 전술한 대로, 반론자는 ‘가계의 저주’는 고사하고 ‘가계의 복’까지 부인하고 있다. 또한, 반론자는 구약에 대한 신약의 점진성과 비연속성(혹은 다양성)을 주장함으로써 신구약 및 신구약 시대의 단절이라는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반론자는 신약의 주요 주제인 하나님 나라에서 ‘종말론적 긴장(eschatological tension)’을 배제시킨 또 다른 환원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필자는 반론자가 주장한 신학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자 한다(괄호([ ])안의 인용문은 반론자의 주장이다).

‘가계의 복’이 없다면, ‘가계의 저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는 [가계, 가계의 축복, 가계의 저주란 신약시대에는 아무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반론자의 주장을 평가하고자 한다.
다수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부모로 인해 자손들이 받게 될 (축)복, 즉 ‘가계의 복’에 대해 누누이 강조해 왔다. 그들은 또한 해마다 추수감사절이면 오늘날 미국의 부강을 청교도들의 신앙덕분이라고 설교해 왔다. 만약, 반론자의 주장이 옳다면, 이런 주장을 한 목회자들은 거짓 선지자(?)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반론자는 ‘가계의 복’을 실제적으로 경험한 수많은 신자들의 체험적 진리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또한 반론자의 주장은 조상으로부터 건강, 지능, 부 등 하나님의 다양한 일반 은총을 유전 등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물려받은 후손들이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는 비과학적인 견해이다. 이런 반론자의 오류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데 기인한다. 따라서, 반론자는 교회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상식적으로 수용된 ‘가계의 복’의 진리를 부정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죤 스타트가 주장하는 대로, “저주하는 하나님보다 축복하는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교회사적으로 ‘가계의 저주’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갈라디아서 강해>, 94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계의 복’이 존재한다면 ‘가계의 저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 명제이다.

사실상, 신구약의 중요 주제는 ‘복과 저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축복하셨다(창 1:28). 반면에, 아담과 이브의 타락 후 하나님은 인간과 땅과 뱀을 저주하셨다(창 3:14~19).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복과 저주에 대해 언급한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2:2; 3:9; 4:6).  한편, 신약 특히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복과 저주(혹은 禍(화))에 대해 각각 41번, 34번 언급했는데, 이는 신약 성경 전체에 등장하는 복과 저주(혹은 화)의 48%와 63%에 각각 해당된다.

특히, 예수님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달리 누가복음에서 4가지 복과 저주를 각각 말씀한 것은 주목할만하다(눅 6:20~26).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은 복과 저주에 대해 언급한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22:3,7,14). 다시 강조하거니와 ‘복과 저주’는 성경 전체의 주요 주제로서, ‘가계의 복이 존재한다면, 가계의 저주 역시 존재한다’는 명제만으로도 신학적 정당성이 충분히 입증된다.

성경은 사랑과 공의, 은혜와 법, 용서와 심판을 함께 선포한다.

필자는 [신약시대는,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우리 시대는 복과 저주가 대비되거나 저주나 심판이 사람을 위협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 사랑, 은혜가 나타난 때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니 이제 저주는 없다!]라는 반론자의 주장을 고찰하고자 한다. 반론자는 그 자신의 성경해석 방법에 따라 신약/신약시대와 구약/구약시대를 정확하게 구분했다. 따라서, 반론자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하는 오류를 범했다. 반론자는 [신약시대는,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우리 시대]에 만나는 하나님을 사랑과 은혜와 용서라고 설명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면만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필자가 기술한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은 서로 신구약간에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이런 견해는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강조하는 ‘복음’과 공의와 법과 심판을 강조하는 ‘율법’과의 조화를 역설하는 교회사적 전통에 지지를 받는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23~240면; <소요리 문답>, Vol. I & II, 170~174면).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J. 로드먼 월리암스 역시 이런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으로,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흔히 묘사하는데, 이는 부적절한 이해이다. 왜냐하면, (구약은 하나님은 - 필자 첨부) 신약의 하나님과 똑같은 거룩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룩하다’라는 말씀은 레위기 11장 44절과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 동시에 적혀진 말씀이다”(Renewal Theology, Vol. 1, 60면). 반론자의 신학은 ‘either-or’의 이분법 신학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말하는 성경 전체의 의도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시편의 말씀은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시 85:10)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 사랑, 은혜가 나타난 때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니 이제 저주는 없다!]는 반론자의 논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논리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성경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사이에 있는 종말론적 긴장을 증언한다.

반론자는 [하나님의 축복은 자동적으로 저주가 없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주와 심판의 끝을 뜻하기 때문이다. 복과 저주는 함께 가는 개념이 아니다. 빛이 나타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사탄의 나라는 이미 정복되었다]라고 주장했다. 반론자의 이런 신학은 세대주의적 신학적 산물인 동시에 신약의 주요 주제인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사탄의 나라는 이미 정복되었다]는 반론자의 주장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주기도문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땅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반론자의 주장은 또한 미국에서 발생된 9.11사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새들백교회 릭 워랜(Rick Warren) 목사의 견해와 배치된다. 반론자의 주장은 예수님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지만’(요일 3:8), 왜 이 세상에 마귀의 일이 계속 있음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죤 브라이트(John Bright)가 설명하는 대로, 반론자는 ‘이미’와 ‘아직’ 혹은 ‘D-day’와 ‘V-day’사이에 살고 있는 신자의 ‘종말론적 긴장’을 배제하고 있다. 반론자의 잘못된 견해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미래성’과 ‘현재성’을 혼돈하는 데 기인한다. 반론자는 또한 ‘하나님의 완성’과 ‘인간의 미완성’을 혼돈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마 6:10)와 ‘다 이루었다’(요 19:10)는 말씀은 하나님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지, 인간의 구원의 완성이 ‘현재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 역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미래적 완성과 필연성(혹은 당위성)을 말하지 것이지, 구원받은 성도의 현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신자들은 단순히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만 말해지지 않고 완벽한 구원을 이미 얻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함께 신자들의 구속받은 신분과 상태가 과거형으로 말해지고 있다]는 반론자의 주장이 옳다면, 예수님께서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요일 3:5) 신자들은 죄인이 아니라 신분 및 상태로서 의인이 되어야 한다. 반론자의 이런 신학은 ‘신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결론을 유출하게 된다. 다음 주에 이 문제점에 대해 상론하겠지만, 반론자의 견해는 또한 “신자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흡사하다. 반론자의 이런 주장은 본회퍼(Bonhoeffer)가 개탄하는 ‘값싼 은혜(cheap grace)’를 선호하는 신자들에게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맺는 말

필자는 반론자가 갖고 있는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론이 야기시킨 부분적 진리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반론자는 신약/신약시대와 구약/구약시대를 양분화함으로써 신약과 구약의 하나님을 양분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특히, 반론자는 신약/신약시대를 구약/구약시대에 우선함으로써 세대주의 신학을 대변하였다. 반론자는 ‘사랑과 공의’와 ‘이미와 아직’이라는 ‘both-and’의 진리를 ‘사랑과 이미’라는 ‘either-or’의 진리로 축소함으로써 성경의 총체적 진리를 편파적 진리로 변질시켰다.

필자는 반론자의 신학의 극단성을 ‘종말론 긴장’이 없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오류성을 지적하였다. 필자는 다음 글에서 본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는 “신자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계의 저주를 포함한 모든 저주는 이미 끊어졌다”는 반론자의 주장을 성서적/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평가할 것이다(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가계의 복과 저주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필자의 책과 <목회와신학> 2001년 6월호에 실린,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를 성서적/신학적으로 입증한다”는 필자의 글을 참조하시고, 본고에 대한 토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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