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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비적, 영적 해석으로의 복귀인가?
이광복 목사의 「해석학의 실제」에 대한 비평
2001년 03월 01일 (목)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오광만 교수

교회사 20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성경을 이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강구되어왔다. 최근 복음주의 진영에 있는 교회나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는 교회 모두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대체적으로 본문의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문법적 의미란 언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전달할 때 사용되는 언어의 통상적인 의미를 가리키고, 역사적 의미란 본문이 나오게 된 당대의 상황에 대한 탐구이다.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 전체의 메시지의 통일성 여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으로 추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세 방법이 조화를 이루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약간은 고전적인 분류이긴 하지만 위의 세 가지 관점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의미 이해의 통상적인 방법을 찾는 것을 일반해석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 각 책의 특수한 문학 양식이나 단어나 구절의 문학적 표현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이 특수해석학이다.1) 통상 해석학 교과서는 일반 해석학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특수해석학 분야에는 지면을 덜 할애하는 것이 보통이다. 본문의 문법적, 언어적 탐구가 본문 해석에서 기초적이면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2) 반면, 그 동안 특수 해석학 분야로서 뒷전에 두었던 문학 양식과 비문자적 분야의 탐구가 본문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이 부각되면서 이에 대한 전문 서적이 나올 정도이다.3) 이 두 극단의 책과 비교하여 균형 잡힌 교과서도 있다.4)

여기 이광복 목사의 「해석학의 실제」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을 다룬 책(바인더 교재)인데, 이 책은 저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최선의 해석을 추구한 것을 소개한 것이라고 장담을 하였지만(86쪽), 엄밀히 말해서 특수 해석학 분야에 속하는 '상징'해석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앞에서 소개한 문학의 한 표현 요소로서 상징이나 일반 해석학을 전제로 한 특수 해석학은 아니다.

저자는 총 583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그의 해석학적 입장인 '성경적 상징주의'를 설명한다. 이 책은 통상적인 서론으로서 해석학사를 조망하면서 그의 입장의 정당성을 밝힌 전반부(1-132쪽)와 이 책의 중심 부분인 후반부로 나뉘어지는데, 후반부는 상징주의 해석(133-174쪽), 상징주의 해석의 개요(175-222쪽), 성경적 상징주의 해석의 원리223-546쪽), 성경적 상징주의의 여러 의미(547-583쪽)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상징주의 해석의 원리를 상징, 모형, 비유, 예언, 요한계시록에 각각 적용하였다.

저자는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이 개혁주의 전통에 있다는 것을 모든 장에서 언급하면서, 그것이 성경 해석사적으로 입증된다는 것을 주지시킨다(9-86쪽). 그러나, 사실 그런 언급을 지나 조금만 더 저자의 글을 읽어보면 저자의 입장은 개혁주의 해석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고 만다. 저자는 이것을 개혁주의 해석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런지는 이제 밝혀질 것이다.

저자의 입장은 한 마디로 말해 풍유적(알레고리화), 신비적, 영적 해석을 지향하는 해석이다. 이 용어들에 대해 저자는 개혁주의 신학을 옹호하는 진영에서 거부감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기에 자주 상징주의 해석을 알레고리가 아니라고 누누이 변명한다(87-132쪽).

그렇다면, 저자는 본인이 주장하다시피 해석학 방법의 한 분과인 상징 해석에 대한 내용을 보다 충분히 설명하고 또 개혁주의 성경 해석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고, 그런 내용이 이 책에 잘 반영되었을까? 이 책을 슬쩍 훑어보기만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책은 상징주의 일변도로 해석하지만 여기에 큰 함정이 숨어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1. 저자의 성경적 상징주의는 과거의 풍유적 해석이나 영적 해석과 동일하다.
저자의 성경 해석의 중심은 성경적 상징주의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 즉 제 3의 요소인 신비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165, 168, 171, 138쪽). 그런데, 필자는 이것을 풍유적 해석의 말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싶다.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이 풍유적 해석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풍유적 성경 해석과 영적 해석은 새삼스레 여기서 거론할 만한 새로운 해석 방법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당당하게 그 이름을 거론해 가면서 성경 해석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다양한 표현 양식을 사용하여 전달되었고, 그 중에 풍유나 알레고리와 같은 표현법이 사용된 것 또한 사실이다.5)

하지만, 그것은 분명하게 알레고리로 사용된 특정 본문에 한해서만 적용해야 하는 것이지 모든 본문에 적용할 수는 없다. 대체적으로 한국 독자들이 알레고리나 영적 해석 이 두 명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저자는 겉으로는 자기의 해석이 위의 두 해석을 거부하고 자신은 그것들과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89, 95, 125쪽).

그러나, 저자의 글 속에서도 자신이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여지를 남기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실제로 성경을 보는 시야와 그의 본문 해석에서 그의 방법론이 풍유적 해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우선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말을 들어보자.

"성경적 알레고리는 영적인 진리를 주기 위하여 본문 자체가 해석하거나 해석의 분명한 암시를 주는 데 비하여, 헬라 문화권에서 유입된 우화적인 해석법은 해석자의 편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 하지만 신앙에 유익을 주는 풍유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풍유적인 해석을 요구하고 복음적이며 신앙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125쪽).

그런데 헬라적 우화와 신앙에 도움을 주는 우화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런 구분은 하지 않은 채 저자는 애써 이런 자신의 입장을 비켜가기 위해 용어를 '성경적 상징주의'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131쪽). 그리고는 계속해서 이 성경적 상징주의를 본문의 내용을 "깊이 있게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신비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며(172쪽), 이것은 "어느 한 부분의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성경에 걸쳐 있다"고 주장한다(174쪽).

결국 저자는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풍유적) 해석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율배반적이며 양면성을 드러내었다.
예를 들어보자. 그의 책 280쪽에 민수기 21:8-9의 구리 뱀과 요한복음 3;14-16의 예수님의 높이 듦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불에 녹여 만든 구리는 불같은 고난과 환난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변의 색깔 구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불변함을, 강하고 튼튼하고 영구성을 지닌 구리는 무너뜨릴 수 없는 구원을, 부식되지 않는 구리는 썩을 수 없는 주님을, 눈부신 황금색의 구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각각 의미한다."

저자는 이것이 본문에 대한 극대 해석이라고 지칭하면서 스스로 이 극대 해석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쪽에서 저자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레고리 해석은 배척할 것이지만 상징과 모형의 극대 해석을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으로 인식하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면서, "극대 해석을 개혁주의 해석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하여 연구 발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발언을 하였다.

여기서 저자의 상징주의적 해석이 헬라 철학과 실제로 다른 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이 헬라적이든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개혁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성경 본문에서 비유법으로서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설명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본문의 알레고리화(化)인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3:14-16에서 의도하신 것은 구리 뱀이나 자신이나 들린다는 것과 그것을 쳐다보든지 믿으면 나음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앞으로 벌어질 그분의 운명과 그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설령, 백 보 양보하여 여기서 더 깊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지적한 것 중에 물체의 성질을 잘못 알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주관적인 생각을 여기에 덧붙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많다. 이런 것을 우리는 첨해(eisegesis)라고 한다. 우선 구리의 색이 불변하는가? 구리가 부식되지 않는가? 필자가 아는 한 쇠붙이 중에서 가장 먼저 색이 변하고 시퍼렇게 동녹이 스는 것이 구리이다. 구리는 절대로 눈부신 황금색이 아니다. 칙칙한 자주색이다.

성경 해석사에서 영적 해석이라고 하는 알레고리 해석을 거부해버린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알레고리 해석이 본문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통상적인 언어의 의미를 묵살한다는 데 있다. 의미 전달은 문맥이나 글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는데 성경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써 그분의 뜻을 전달하시는 한 성경 본문의 의미는 문단과 문단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한다. 당대 저자와 독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 해석에서 역사적 상황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6) 이 원칙을 깨뜨렸을 때 나오는 결과가 성경에 영적인 의미를 부과하거나 도덕적으로 해석하고 심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7)

알레고리는 그 이름이 풍유라는 명칭으로 소개가 되든 영해(영적 해석) 또는 신비한 해석으로 소개되든 간에 기본적으로 본문의 표면상의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문자라는 껍질 속에 숨겨졌다고 생각하는 좀더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이다.8) 심지어 그 문맥에서 어떤 상징적인 언어를 찾을 수 없을 때 문자적 의미를 제쳐두고 다른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 경우, 이미 알려진 문자적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며 이 때에 풍유 해석자들은 자기들의 해석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상투적으로 상용하는 말이 바로 "이중 의미가 원래 본문 안에 의도되었고 본문 안에 주어진 것이라"고 둘러댄다.9)

제임스 사이어는 이런 해석학적 경향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신비적 해석은 … 해석자 자신이 성경의 참된,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라고 자칭하면서, 심각하게는 그것이 상징적으로써 오직 신비를 전수 받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졌다고 믿는다."10) 사이어는 계속해서 아퀴나스를 인용하여 풍유적, 도덕적, 신비적 의미를 비판하면서, "이 모든 것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즉 단어가 보통 가리키는 의미에 기초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즉 성경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은 채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우는 없다"고 지적한다.11)

대부분의 해석학도들이 주지하고 있다시피, 현대의 풍유나 알레고리 해석의 기원은 오리겐과 그가 나온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리겐은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이 궁극적으로 신비적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애썼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상징의 언어로써만 말해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랜트는 오리겐이 성경을 상징적 언어로 이해하여 천편일률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주도하는 이유를 "당대 상징적 언어의 문학적 분석을 알 수가 없던 사람들이 은유, 예화, 비유까지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에 대한 반발"로 알레고리로 해석한 것이라고 이해하고는 그래서 오리겐은 "성서의 모든 낱말과 분절에 이르기까지 전체 성구의 배후에 숨겨진 것이 있다고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데서 찾았다.12)

그후 알레고리 해석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으로 "해석의 규범인 신앙의 규율을 사용하는 데 열의가 없었고 공동 견해의 일치보다는 개인의 연구나 지성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결국 해석자가 해석하는 자료(본문)에서 본문의 의미를 끄집어내기(exegesis)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읽어내는 결과(eisegesis)를 낳게 되었다.13) 이런 해석은 다분히 '주관적'인 성향을 지닌다. 이런 해석은 문맥 전후 관계를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자신의 유별난 생각을 발휘하면서 심오한 진리, 성경의 본래 의미라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랜트는 이런 경향이 바로 '영지주의적인 특징'이라고 못을 박았다.14)

그렇다면, 오리겐은 자기가 알레고리 해석을 하면서 그가 이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맥카트니는 오리겐이 "성경의 말씀이 관념론적이고 선험적이며, 상징적인 것을 기대했지 자신이 알레고리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오리겐은 단지 "하나님께서 본문 가운데 의도하셨던 것이라고 확신했던 내용을 밝히 보여주려 노력했을 뿐이었다."15) 착각 속에 살았던 것이다.

이광복 목사의 「해석학의 실제」 전편에 깔려 있는 해석학적 경향이 바로 이런 특징을 지닌 알레고리이다. 저자가 '신비적 해석', '성경의 상징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가 사용하는 용어를 개혁주의 신학을 외치는 몇 사람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여 마치 그들에게서 신학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하지만 그들과 다른 생각을 하면서 단지 단어를 빌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거의 모든 성경에서 한결 같이 알레고리화 한 본문 해석을 함으로써 본문의 정당한 이해보다는 본문의 신비적 의미를 찾게 하고, 그리하여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본문의 의미를 더 어둡게 하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마 15:14). 저자는 자신이 성경 해석의 기본인 문법적 역사적 기초 위에 그의 해석학을 정립했다고 주장한다(83쪽). 그런데 그의 책 어디에서도 이 해석법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진지하게 그것을 논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저자가 예로 든 모든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이 문맥을 무시하기 일수이다. 맥카트니는 해석학에서 문법적, 역사적 이해의 중요성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했다.16)

첫째 성경의 특성인 하나님께서 인간 언어를 통해 주셨다는 사실을 적절히 강조한다는 것, 둘째 교회 전통이나 개인적,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 셋째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에 민감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적 요소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 가지 사실을 무시하고 혼자 서는 법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해석학의 기본을 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2. 저자는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이용하지만 그 저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글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의 상징주의 해석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벌코프와 박형용을 수시로 인용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이 저자가 주장하는 성경적 상징과 '성경의 신비적 의미'를 지지한다는 것이다(94, 137-139, 216-218쪽). 그러나 저자가 대부분 다른 학자들을 인용할 때 저자들의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앞뒤 문맥을 끊고 필요한 단어, 어구, 문장만을 달랑 끌어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벌코프에 대한 저자의 인용을 보자. 저자는 벌코프가 지적한 제 3의 해석으로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면서 마치 저자의 용어가 벌코프에게서 나온 것처럼 그것을 벌코프가 사용한 용어를 본 따서 '신비적' 해석이라고 명명한다(218-220쪽).17)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 3의 방법으로서 신학적 해석과 '신비적'이라는 용어의 의미이다. 저자는 "성경적 상징주의 해석을 벌코프의 주장과 비교하면 제 3의 요소(신비적 해석)에 해당된다.

따라서 본 저자가 설정하고 있는 성경 해석학의 위치도 개혁주의 성경 해석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고 썼다(218쪽). 그러나 동시에 저자는 벌코프의 견해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의 해석법은 기본적 토대인 문법적 역사적 해석 위에 있으면서 "이 방법을 좀더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219쪽). 그리고 그가 발전시킨 상징주의는 기존의 것과는 달리 "적극적이고 광범위하며 필수적이고 기존의 것 위에 영적 해석을 가한 것"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는다(220쪽).

다시 말해서 상징주의적 해석은 신비 해석으로서 거의 대부분의 본문에도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것이며 이 해석이야말로 영적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겉으로 자기의 신학적 입장이 벌코프와 같은 것처럼 독자를 속이고는 실제적으로는 벌코프와 결별하는 저 나름대로의 신학을 개진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저자의 입장이 벌코프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벌코프는 해석의 여러 방법중의 하나로서 제 3의 방법을 소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의 두 방법인 문자적 역사적 해석과 아울러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며, '신비적'이라는 단어의 언급과 관련해서도 벌코프는 '어떤 부분'은 신비적 의미'도' 있다는 중간 입장을 취하는 '학자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18) 그러면서 그는 "그러한 경우에 신비적인 의미는 이차적인 뜻이 아니라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단서를 달았다.19) 벌코프가 부분에 대해 언급한 것을 저자는 전체에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박형용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성경은 신적이면서 인적인 신비한 책"이라고 말한 것에서 성경의 두 맥을 찾아 "신적인 것을 영적인 맥으로, 인적인 것을 육적인 맥으로 본다"고 하여 마치 그의 영해의 정당성을 박형용 교수가 지지하는 것처럼 쓰고 있다(192쪽). 이렇게 하여 저자는 성경을 "육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과 영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으로 구별하면서, 육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은 "교훈과 윤리적인 차원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만 영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고 성경 해석의 이원론을 용인하였다(193쪽). 여기서도 저자는 그의 입장을 위해 박형용 교수를 업고 들어 왔으면서, 실제로는 박형용 교수와 전혀 다른 입장을 개진하였다. 과연 이것과 박형용 교수가 언급한 신적 인적 요소가 관련이 있는가? 물론 아니다.

박형용 교수의 글을 조금만 더 읽어보더라도 박형용 교수는 성경의 신적, 인적 속성이 함께 있다는 성경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비'라는 용어를 사용했지 본문의 의미를 캐내는 데 신비적 해석을 사용하라는 의미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20)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저자를 통해 나왔으니 "본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인간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주장한다.21) 과연 성경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 Vern Poythress는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 저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이므로 본문 이해를 위해서 가능한 한 충분히 인간 저자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22)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성경 해석에 신학적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신학적 해석은 제 3의 해석이라고 해서 선택해야 할 해석 방법이거나 또는 다른 해석 방법 위에 있는 고상하거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문법적 역사적 해석과 아울러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해석이다. 신학적 해석은 영적 해석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간의 통일성에 초점을 맞추어 계시의 상호 관계, 특히 신, 구약의 관계 문제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23) 성경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기록된 시기에 있어서 넓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각 본문간의 관계, 통일성 여부를 가깝게는 동시대의 다른 본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멀게는 구약 본문과 신약 본문을 가로지르는 계시 전체의 흐름과 조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도 있다. 이처럼 성경의 통일성을 살펴서 설명하는 것이 신학적 해석이다.24)

이 점에 있어 적어도 저자가 인용한 벌코프의 글에 의하여 '신비적 해석'을 '신학적 해석'과 동일시하고 그래서 저자의 독특한 성경적 상징주의적 해석을 시도한다면, 저자는 분명 '신학적 해석'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벌코프는 '신비적 해석'을 신학적 해석과 동일시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학적 해석 방법의 한 부분, 한 요소에 해당할 뿐임을 설명하였다.25)

벌코프가 제시하는 신학적 해석으로써 성경의 통일성을 찾는 방법에는 '신비적 의미' 이외에 다섯 가지나 더 있다.26) 첫째 신구약 관계, 둘째 상징과 모형, 셋째 예언과 성취, 넷째 시편이 신약과 관련되는 방법, 다섯째 암시적인 본문에서 통일성을 찾는 방법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본서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고 동의할 마음도 없으면서 다른 저자들의 글을 아전인수격으로 갖다 인용하여 자기의 신학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우를 범하였다.

3. 상징 해석의 문제점
저자의 해석에서 상징이 어떤 문학적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영해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했다. 그래서 저자에게 있어 상징은 말하기의 또 다른 방법이거나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모형과 함께 여느 문학적 기교-비유, 은유, 연상, 직유, 예언, 암시적인 것, 풍유, 예표 등등-를 포괄하는 용어이다(180쪽).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그의 책 226-265쪽에서 시도하였다.

저자는 상징을 "어떤 사물 속에 진리를 나타내거나 감추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징표"라고 정의한다(226쪽). 사실 이것은 벌코프의 글과 신성종 목사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이 정의가 저자의 관점에 얼마나 일관되게 작용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즉 저자는 이 정의가 나오게 된 상징의 특징에 충실하지 않고 성경을 결국 알레고리로 해석해버린다. 즉 저자에게 있어 상징은 신비적인 의미, 영적인 의미와 동의어이다.

뱀을 상징으로 이해하여 의미를 밝힌 뱀에 대한 저자의 상징 해석을 보자. 먼저 사탄을 뱀으로 묘사한 요한계시록 12:9을 해석하면서 저자는 뱀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상징적 의미를 통해 사탄의 정체를 이렇게 밝혔다. 뱀의 턱뼈와 사탄의 유사한 점은 뱀이 턱뼈가 발달하여 먹이를 통째로 삼키듯이 사탄은 사람을 통째로 삼킨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뱀의 이빨, 뱀의 혀, 뱀의 눈, 뱀의 귀, 뱀의 민첩한 행동, 심지어 뱀의 걸음걸이를 사탄의 행동과 연결시켰다(232-234쪽). 과연 이것이 요한계시록 12:9에서 염두에 둔 뱀과 사탄의 모습인지 의문이 가며, 일반적으로 사탄이 뱀으로 묘사될 때 사탄에게 뱀의 이런 특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있는지-아니 하나라도 정확히 일치하고 성경 저자들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는지-지극히 회의적이다. 아무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왕 언급한 김에 저자가 뱀의 긍정적인 면을 언급하면서 교훈한 뱀 상징에 대한 해석을 보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마 10:16)고 한 것에서 저자는 뱀의 먹이 저장, 허물 벗기, 뱀의 시야, 온도 적응, 머리 보호 등에서 뱀의 지혜를 볼 수 있다고 한다(234-235쪽). 이것이 뱀 상징이 지닌 의미인가? 일단 필자는 이광복 목사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가 열거한 그 어느 것도 '뱀'이 사용된 문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의미들이다. 결국 문맥을 무시하면서 성경적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저자 자신의 생각을 첨가한 것이다. 실체와 상징의 말도 안 되는 상응을 이용하여 상징을 설명한 예를 열거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상징에 있는 신비하고 심오한 의미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고 있다.

상징은 물론 성경 저자들이 즐겨 사용한 언어 사용의 한 예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의미와 언어의 일상적인 용법이 아닌 비밀이나 암호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스테렛은 상징이 진리를 나타내거나 감추기 위해 사용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상징이 사용되고 해석되는 것과 관련하여 스테렛은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경우 진리가 감추어지지만 본질적으로 상징은 진리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27)

상징이 보편적인 의미에서 추가된 어떤 의미를 암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징이 사회에서는 의미 전달에 전혀 무리 없이 사용되는 것이므로 상징은 우리에게 "의미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학적 표현들처럼 우리의 뇌리에 영상이 더 오래 남도록 하기 위해 사용된 것들이다"는 카이저의 말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진리이다.28) 결국 상징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진리의 의미를 가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징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것은 상징이 문학적 특성상 의미를 진술하기보다는 그것을 암시하는 하나의 신호(sign) 내지는 표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은 설명이 필요하고, 상징이 설명되지 않거나 지나치게 간략하게 설명된다면 해석자는 주관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거나 설명이 보장되는 것보다 더 깊이 상징 속에 들어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피하는 방법은 결국 해석자가 상징이 원래 주어진 문화적 상황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29) 상징이 역사적 배경과 구체적인 문맥이 있는 만큼 상징은 그것이 사용되는 문맥에서 그 각각의 요소들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상징이 사용된 취지만 알면 그 자체 명확한 신빙성이 있는 것이 상징이기 때문이다.30) 다시금 확인하지만 상징 해석의 정당성은 결국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중요시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31)

상징 해석에서 문맥이 중요하다는 것을 카이저는 세 가지 유형으로써 설명한다. 대개 상징들은 (1) 당대에 기록자를 통해 문맥에서 명확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있고, (2) 문맥에서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는 그 배경인 구약에서 유추하여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으며, (3) 설명되지 않은 것은 그 시대의 이방 나라나 문화적인 배경을 참고하여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32) 이런 원칙은 심지어 아직 현실 가운데 나타나지 않거나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미래에 속한 성경 예언에 포함된 상징의 경우에서도 공히 적용된다.

카이저는 그 상징이 "메시지를 듣던 첫 독자들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던 문학적 표현이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상징들 중에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성취의 시기가 임박하여 그 상징의 의미가 밝혀지지 않는 한 누구도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있어 "판단 중지"를 내릴 수밖에 없고, 그 점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양심적이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모호한데 자신만 그 신비한 의미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줍지도 않은 태도인 것이다. 그런 내용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특정한 개인만을 겨냥해서 준 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이다(신 29:29).

4. 모형 해석의 문제점
모형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어떠한가? 저자는 장을 달리하여(266-337쪽) 모형을 유사성 원칙에 의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과 모형이 지니는 역사성, 미래적 의미를 잘 지적하였다(267-269쪽). 그리고 상징과 모형의 차이, 절기, 숫자, 물건, 인물, 사건 등 모형의 예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그의 영해는 계속된다. 모형은 계시의 역사성과 점진성,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을 다룬 것이다. 여기서 모형은 그것이 성취될 원형간의 상응이 중요한데, 그것은 비슷한 패턴으로 감지된다. 두 실체간의 유사성을 파악하는 것이 모형 해석에서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저자는 이런 것을 찾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이 그의 모형 해석에서 드러난다. 그의 모형 해석 중에서 기절초풍할 만한 해석이 있어 소개한다.

법궤의 모형론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법궤를 모셨다가 복을 받은 오벧에돔의 집에 대해, "법궤가 예표하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곳이라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307쪽). 이것은 비록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여기서 지적할 것은 저자가 모형론적인 의미를 설명하면서, "상징한다"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저자 자신이 사실은 상징과 모형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과 각각의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예에서 우리는 저자가 모형을 마치 모든 상황에 일대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버클러는 '상징'과 '모형'의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모형이란 구원 역사에 있어서 나중의 인물, 사건, 제도와 상응하는 관계를 지닌 미리 정해진 어떤 사건, 제도를 말하는데, 이것은 구원 역사에 있어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33) 그리고 계속해서 "상징은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것에 대한 표시이며, 이 경우에 실체와 표시 사이의 유사점을 지닐 필요가 없지만 모형은 유사점을 지닌다"고 지적하였다.34) 모형은 시간적으로 선후가 분명할 뿐 아니라 "성경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느 것도 모형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35) 이것이 핵심이다. 모형에 대한 이런 이해에 근거해 볼 때 모형 역시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저자 이광복 목사의 모형 해석은 숨겨진 의미를 찾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의 책 어디에서도 모형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설명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고펠트의 「모형론」에 서문을 쓴 E. Ellis는 모형론의 특징에 대해 "모형론은 구약을 더 깊은 의미를 숨기고 있는 은유적인 책으로 보지 않고 본문의 의미가 바로 드러나는 역사적인 사도들이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이며,… (신, 구약간의) 일대일 평행이 아니라 역사적 상응과 단계적 확대라는 두 측면에서 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36) 그러므로 모형론적 해석의 정당성은 오직 이 역사적인 상응 관계가 있는 신약의 성취에 비추어 볼 때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모형이 기상천외한-당사자들은 '심오하고 신비적인'이라고 말하겠지만-해석을 추구하는 알레고리와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37)

5. 예언 해석의 문제점
본서의 예언 해석 지침은 392-425쪽에서 다루어졌는데, 다른 주제에 비해 비교적 적은 분량의 지면이 할애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예언이 당대의 의미와 근접한 미래와 종말의 그리스도에게 성취된다는 등 예언의 다중적인 성취를 염두에 두면서, 삼중적 또는 이중적 해석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취의 다중성을 인정한 면에서는 옳지만 그  해석이 일관되게 신비적, 영적 해석으로 치우친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런데 저자가 소개하는 해석 방법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낯설 뿐만 아니라 신, 구약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들로 되어 있다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416-419쪽).

예언의 일차적 의미인 율법적 해석과 이차적 의미인 복음적 해석 그리고 삼차적 의미인 예언적 해석이라고 한다. 이런 구분도 낯설고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저자 자신도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실 저자에게 있어 이 세 가지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인상을 누구나 받는다. 전체가 묶여 영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예언의 영해라는 것이 가관이다. 몇 군데에서 예를 들어보자.

스가랴 3;2의 여호와께서 사단을 책망하시면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선언한 부분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불은 환난을 상징하고, 그슬린 나무는 환난을 통과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하면서(398쪽), 이 나무의 모습에서 세 종류의 신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생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 고통을 겪지 않은 모습을 상징하고, 타버린 나무는 환난 고통에 넘어가버린 모습을 상징하고, 그슬린 나무는 환난 고통을 이기고 벗어난 모습을 상징한다는 것이다(399쪽).

이 어찌 경탄을 금치 못할 대발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런데 이게 예언의 의미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저자는 철저하게 본문의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배격한다. 심지어 자신이 제시한 삼중적 의미인 본문 당대의 의미, 가까운 미래 성취, 그리스도에게 성취되는 패턴을 찾을 수가 없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다. 저자 자신도 자가 당착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

에스겔 5;1-3에 언급된 머리털과 수염을 자르는 행위에 대한 해석은 어떤가? 여기서 저자는 터럭의 의미, 털의 의미, 수염과 머리털을 깎는 행위, 날카로운 칼로 깎는다는 사실, 깎은 머리털을 저울에 단다는 것 등 우리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해가면서 본문의 의미를 설명한다(405쪽). 저자는 비록 설교가 랑게를 인용했지만 본인이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이런 주석을 인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분명 저자 자신이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저자의 해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낸 셈이다.

'중복적 해석'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논하지만(506-546쪽), 그것 역시 계시의 역사적인 발전을 통해 계시의 점진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보다는 알레고리 해석의 다른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언 해석의 특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해석이다.

6. 요한계시록 해석의 문제점
요한계시록 해석(426-471쪽)은 저자의 영적 해석의 백미에 해당한다. 보다 자세한 저자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저자가 쓴 다른 책 「성경 종말론」, 「요한계시록 강해」시리즈, 「계시록 설교 노트」를 보면 된다.

여기서는 본서에 나온 것만 가지고 저자의 요한계시록에 대한 입장을 지적하겠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철저한 미래적 해석에 상징의 해석을 위주로 한다. 미래적 해석이야 색다른 것은 아니지만 상징의 해석은 통상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해석과 구별해야 한다. 저자 자신은 상징적 해석을 무천년설 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라 거부하고 자신은 '상징의 해석'이란 용어로써 저자의 독특한 입장을 표명한다(427, 428, 431쪽).

저자는 '상징의 해석'에 대해 "상징의 단어들을 상징이나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상징의 단어가 주는 의미를 찾아 종말에 될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전반부의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정작 저자의 말은 "종말에 될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상징의 해석"이란 의미로 사용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저자는 종말론적 해석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저자의 종말론적 해석이란 통상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이중 구조에 따라 성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선언하는 것에서 찾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 '영적'이란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시간과 관련하여서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아직 밝혀지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 것을 저자 자신만이 아는 비법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에서 '종말론적 해석'(472-505쪽)이라는 제목으로 이 해석의 예를 실제로 보여준 이 부분에서 저자의 입장을 살펴보자. 저자는 처음에 늘 그렇듯이 종말론에 대한 개혁주의 학자(예컨대 안토니 후크마)의 입장을 밝히고 친절하게 도표까지 그려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시종일관하게 저자는 이 도표나 종말론에 대한 이해에서 그의 생각의 교정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통관 의례에 불과하다. 또다시 저자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본문에 실어 넣는 알레고리화를 자행하고는 그것을 영적 해석과 종말론적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종말론적 해석을 종말 이전에 주어진 계시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완성되고 성취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신약의 용어를 빌어 알레고리화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룻기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그 땅에 흉년이 든 것(룻 1:1)을 영적으로 말씀의 기근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고(494쪽), 룻기의 나오미가 고향을 떠나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것을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에 영적 죽음이 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 것이 그것이다(495쪽). 여기서 성도가 나오미를 가리키는지 그의 남편과 두 아들을 가리키는지 애매하다. 성도가 고향으로 상징된 교회를 떠나는데 왜 자신은 피해를 입지 않고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지, 이것이 영적인 죽음과 무슨 상관인지 저자의 설명으로는 판단하기 어렵고 룻기를 읽으면서도 밝혀지지 않는다.

이건 그렇다 치더라도 연이어 저자는 나오미가 "교회의 모형을 상징한다"고 설명하는데(496쪽), 앞의 주장대로라면 가나안을 떠난 것에서 교회를 떠났다고 해석한 저자의 해석에 비추어 볼 때 나오미는 성도를 가리켜야 한다. 이처럼 저자 자신이 이 해석에서 자가 당착에 빠진 것은 매번 자신의 편의대로 성경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해석 어디에서도 '종말론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의미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 해석자가 해야할 중요한 임무인 본문의 당대의 의미를 밝히는 데 저자는 조금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런 몽환적인 해석-감히 이렇게 부르고 싶다-은 요한계시록에서 절정을 이룬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철저하게 미래적으로 이해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현금의 미래적 학파는 물론이거니와 극단적 세대주의보다도 더 미래적이다. 심지어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를 '교회의 일곱 시대'를 예언한다고 볼 정도이다(438쪽). 그런데도 버젓이 그것을 1:19의 도식에 따라 '현재'를 가리키는 도표에 넣고는 "예언적으로 교회 시대를 의미하므로 현재"라고 하여 저자의 현재 개념이 1세기만 아니라 재림 직전의 전 교회 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의 삼세대론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4장 이후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미래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 대한 저자의 '미래적 이해'란 요한계시록의 거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의 재림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저자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방식이니까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재림과 관련된 내용들을 저자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과연 그의 해석학적 입장에 맞추어 일관된 논의를 하고는 있는가? 저자는 여기서도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의 해석은 결국 '상징의 해석' 일변도이며, 이번에는 친절하게 그것이 '영적 해석법'과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부연하였다(429쪽).

요한계시록의 '상징의 해석'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요한계시록 4:2-7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에서 저자가 "벽옥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홍보석은 하나님의 공의성을,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성을, 녹보석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한 것(461쪽)은 그런 대로 애교로 봐 줄 수가 있다. 그런데, '번개를 신속성, 음성을 말씀 권, 뇌성을 권위성'으로 해석한 것(462쪽)에서는 저자의 상상력의 탁월함을, 네 생물을 설명하면서 사자는 용맹성을, 송아지는 희생성을, 사람은 지혜성을, 독수리는 신속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한 것(463쪽)에서는 짜맞추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5:8에 나오는 "향이 가득한 금 대접, … 이 향은 성도의 기도"를 해석하면서, 저자는 향의 배경, 향 만드는 법, 향의 세 가지 재료, 재료와의 배합, 향의 크기, 향의 보관 장소, 향의 목적 등을 나열해 가면서 본문을 설명하는 저자에게서 필자는 솔직히 말해 이젠 인간적으로 눈물날 정도의 안쓰러움을 느꼈다.

어떻게 이다지도 철저히 알레고리화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저자의 일관된 모습을 보이려고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혹시 이런 해석을 미리 열거해놓은 사전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자료를 제시하려고 저자는 그의 탁월한 영성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성도의 기도의 성격이 향과 관련된 이런 내용들을 염두에 두었는지 성경 어디에서도 암시를 받을 수 없다! 저자의 해석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 내지는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계속 이어지는 본문 설명에서 드러난다.

저자는 특히 향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고 하는 향의 세 가지 재료에서 신비한 의미를 끄집어낸다. 소합향은 인내의 기도를, 나감향은 자신이 부숴지는 기도를, 풍자향은 진실한 기도를 각각 가리킨다고 한다(465쪽). 도대체 정체 불명의 자료이다. 나는 이것을 감히 방자한 성경 해석이라고 부르고 싶다. 또한 향 재료를 배합하는 데 있어 거기에 '유향'을 섞어야 하는데, 그것은 "유향이 젖 유(乳) 자에 향기 향(香)이며", "젖은 말씀을 상징하므로 말씀에 따라 드려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해석하였다(466쪽).

저자의 무식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도대체 저자는 이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실제로 유향은 우유(milk)와 관련된 향이 아니라 "감람과에 속한 열대 식물인 유향수의 분비액"을 말려 만든 수지(樹脂) 즉 나무 기름의 향이다. 저자가 만일 이 사실을 알았다면 "감람유 기름은 성령을 가리키므로 성령을 의지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해석했을지도 모르겠다. 성경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편리한 대로 마구잡이로 해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전혀 없는 책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필자가 아는 한 오랫동안 요한계시록을 많이 연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고 많은 책을 쓴 저자의 해석학적 입장을 밝힌 책이다. 그의 책에도 한서(韓書)라는 제한된 범위의 책이긴 하지만 많은 양의 도서가 열거되어 있고 그밖에 저자가 시사, 정치, 역사 등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문드문 발견된다. 그런데 많은 지식이라도 잘 사용되지 않는다면 본문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모호하게 하고 저자를 믿고 배움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눈을 더욱 어둡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가 학계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 독창적인 해석학을 내놓은 것은 성경 해석에 대한 근본적인 결함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저자의 성경관이 잘못되었거나 저자가 해석학 방법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석학은 방법론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관점, 세계관이기 때문이다.38) 본서에서 저자는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동일한 노선에 서서 개혁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한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아주기를 원했으나, 시종일관 그의 해석학적 방법론과 그의 성경관을 나타낸 것은 '성경적 상징주의' 이름으로 표출된 '신비적 해석' 또는 '영해' 그리고 '풍유적 해석'을 표출하였다.

의식 있는 독자라면 본서가 성경의 의미를 밝혀주기보다는 더욱 모호하게 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책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진리로 이끄는 길잡이가 아니라 저자의 자의적인 해석과 탁월한 상상력뿐이다. 독자들로서는 여느 책을 읽을 때에도 그렇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최대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이제는 가볍게 생각 없이 읽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밝혀주는 양서를 골라 읽는 습관을 기를 것을 권한다. 우리 주위에는 정독하기만 하면 그분의 깊은 뜻과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도와주는 책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 오광만 교수: 총신대 졸업(B.A),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M.A.R., M.Div.),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Th.M. 과정 이수, 총신대 합동신대 강사 역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역임.

주-------------
1) 루이 벌코프, 버나드 램, 노튼 스테렛 등의 해석학 교과서들.
2) Peter Cotterell & Max Turner, Linguistics & Biblical Interpretation, IVP, 1989. 이 책은 의미론, 단어 연구, 단어의 문법, 문장과 문장 구조, 담화 분석에 11-292 쪽을 할애하고, 비문자적 언어에 기껏 293-328 쪽만을 할애하였다.
3) 고든 피, 더글라스 스튜어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 유니온, 1988; Leland Ryken & Tremper Longman, III. A Complete Literary Guide to the Bible, Zondervan, 1993.
4) Grant Osborne. The Hermeneutical Spiral: A Comprehensive Introduct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 IVP, 1991. 이 책은 19-148 쪽에서 문맥, 문법, 의미론, 구문론, 역사적 문화적 배경의 문제를 다룬 후, 149-260 쪽에서 장르 분석을 장르 별로 소개하고, 261-365 쪽에서 적용 측면에서 해석학의 문제를 다루었다.
5) 모세 실바 교수는 성경에 문자적 의미만이 아니라 비유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공존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오리겐에 대한 재인식까지 제안하였다. Moises Silva, Has the Church Misread the Bible? (Zondervan, 1987), pp. 58-75).
6) Vern Poythress, "하나님은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성경 무오와 해석학], 간하배 편 (엠마오, 1992), p. 130-131.
7) 권성수, [성경 해석학 I], (총신대출판부), p. 35.
8) 레온하르트 고펠트, [모형론], (새순출판사, 1987), pp. 51, 60.
9) 고펠트, p. 63.
10) 제임스 사이어, [비뚤어진 성경 해석], (생명의 말씀사, 1983), p. 144.
11) 사이어, p. 145.
12) R. M. 그랜트, [성서 해석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1969), p. 71.
13) 그랜트, pp. 72-73.
14) 그랜트, p. 65.
15) Dan McCartnery, "신약의 구약 사용," [성경 무오와 해석학], 간하배 편 (엠마오, 1992), p. 151.
16) McCartney, p. 148.
17) 벌코프, [성경해석학] (개혁주의 신행협회), p. 163.
18) 벌코프, p. 164.
19) Ibid.
20) 박형용, [성경해석학], (합동신학교출판부), p. 183.
21) 박형용, pp. 102, 103.
22) Poythress, p. 120.
23) 헨리 버클러, [성경 해석학], (도서출판 연합, 1994), p. 141.
24) 버클러, p. 177.
25) 벌코프, pp. 163-165.
26) 벌코프, pp. 156-187.
27) 노튼 스테렛, [성경 해석의 원리], (성서유니온, 1978), p. 94.
28) 월터 카이저, [성경과 하나님의 예언], (여수룬, 1991), p. 48).
29) 버클리 마이켈슨, [성경 해석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 343.
30) 마이켈슨, p. 344.
31) 에드먼드 클라우니, [설교와 성경신학],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p. 134.
32) 카이저, pp. 49-54.
33) 버클러, p. 212.
34) 버클러, p. 213.
35) 버클러, p. 214. 장두만 교수도 모형의 특징을 두 사물간의 유사성과 모형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 미래의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을 모형의 특징으로 열거하여 버클리와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장두만,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 (요단, 1986), p. 192. 또한 클라우니, pp. 130-137도 상징과 모형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대조를 하였다.
36) 고펠트, p. 23.
37) D. L. 베이커, [구속사적 성경 해석학], (엠마오, 1989), pp. 213-241. 특히, 213, 217쪽을 보라. 그리고, 고펠트, p. 48.
38) McCartney, p. 149.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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