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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 성경 해석에 근거한 부분적 진리의 오류성
정훈택 교수의 ‘가계저주론’반박에 대한 이윤호 목사의 재반론(1)
2003년 07월 09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윤호 목사가 ‘가계저주론’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본지에 다시 보내왔다. 본지 39∼42호에 게재된 이 목사의 반론에 대한 정훈택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의 반박이 43∼46호에 나가자 재반론을 편 것이다. 4회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먼저, 필자는 ‘가계저주론’은 반대자들이 비판을 위해 임의로 사용한 용어임을 밝히고 싶다. 왜냐하면, ‘가계의 복과 저주’의 말씀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저주받지 않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정한 논쟁을 위해서는 ‘가계저주론’이 아닌 ‘가계치유론’이나 ‘가계축복론’이라는 용어를 써야 할 것이다. 필자는 정훈택교수(이하 반론자)의 반론에 답변하되, 지면 관계상 주요 논쟁 주제만 다루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반론자의 주장을 괄호([ ])로서 직접 인용했는데, 이는 반론자가 명백하게 피력한 견해에 대해서만 필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함이다.

‘복과 저주’에 대한 기본 전제

필자는 반론에 대한 답변에 앞서, 반론자와 동의하는 부분을 언급하고,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는 [저주란 …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이다… 축복이 하나님의 통치 행위인 것처럼 저주도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속한다]라는 반론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복과 저주가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 없이 하나님의 ‘일방적’ 혹은 ‘전적’ 통치 행위만으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 설명된 ‘복과 저주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즉,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이 ‘복의 원천’(1~14절)과 ‘저주의 원천’(15~68절)임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복과 저주’는 구원받은 언약백성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천명하기 때문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 28장 2절과 15절 비교). 신명기 28장은 또한 ‘내 몸의 소생’(4, 11, 18, 32, 41, 46, 59, 62, 68절)에 임할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에 대해 증언한다. 필자는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에 대해서는 성경해석 방법과 더불어 다시 논의하고자 한다.

둘째, 반론자는 [복과 저주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 즉 상호보완적 개념이라는 설명도 잘못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우선, 필자는 [둘은 상호보완개념이 아니라 반대개념]이라는 반론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반면에, 반론자는 ‘복과 저주가 동전의 앞, 뒷면 같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라는 필자의 의도를 왜곡했다. 필자는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행위인 ‘복과 저주’는 원칙적으로 구원받은 언약백성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필자의 주장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두 가지 진리가 하나의 진리이듯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저주(혹은 화)를 받게 된다’는 두 가지 진리는 동전의 앞, 뒷면같이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다. 신명기 30장 19~20절의 말씀은 이런 진리를 재천명한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15~18절 참조). 한편, 필자는 [복이 있는 곳에는 저주가 없고, 저주가 있는 곳에는 복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자동적으로 저주가 없음을 뜻한다]는 반론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종말론적 긴장’과 ‘하나님의 나라’ 신학에 관점에서 동의하지 않는다(이 주제를 두 번째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또한  ‘가계의 복’이 존재한다면(한국교회가 계속 주장한), ‘가계의 저주’ 역시 존재한다는 신학적 명제에 대해 반론자가 명확하게 답변을 못했음을 지적하고 싶다. 더욱이 필자는 반론자가 자신의 성경 해석관에 따라 ‘가계의 복’ 조차도 정말 부정하는가를 질문하고 싶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결론을 도출한 반론자의 성경해석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자의적 (혹은 편파적인) 결론을 유출한 성경해석 방법의 문제점

필자는‘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는 신, 구약 성경 전체가 지지하는 진리라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계의 복과 저주’의 비판자들이 신,구약 성경의 연속성 및 통일성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이런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이에 대한 반론자의 주장에 주목해보자: [구약에 대한 신약적 해석은 가능하지만, 신약에 대한 구약식 해석은 모순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것이 된다… 불연속성을 부정하는 연속성이나 다양성을 망각하는 통일성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필자는 전술한 반론자의 주장에 대해 답변하고자 한다.

반론자는 “나는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마태복음 5장 17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완성하러 오셨기 때문에 신약시대를 구약시대 그대로의 연장, 구약성경 그대로의 연속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의 ‘완성’은 구약 성경과 서로 상반되거나 구약성경을 파기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보완하거나 보충하는(complementary/supplementary) 역할을 한다. 즉,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파기하지 않는 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신약시대에도 역시 유효할뿐더러 더욱 강화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역시 이런 주장을 지지한다:

"이 율법의 요구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장소, 어느 시간을 막론하고 역사상 유효하지 않은 적이 결코 없었다… 도덕법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토록 구속력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에 복종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도덕법의 이 같은 의무를 폐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키신다… 율법의 용도는 복음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조화된다” (223~240면; <소요리 문답>, Vol. I & II, 170~174면).

이미 전술한 [신약에 대한 구약식 해석은 모순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것이 된다]는 반론자의 주장을 성서적으로 평가해 보자. 목사, 유아세례, 십일조 등 성경의 주요 개념을 반론자의 이론에 적용해 보면, 이런 주요 교리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유아세례는 장로교의 공식적 입장과 같이, “유아세례의 시행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백한 성서적 증거는 없다”(James J. Cook, ed. <The Church Speaks>, 60면).  신약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구약을 통해 유아세례를 신학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목사 역시 에베소서 4장 11절에 은사로서 신약에 단 한번 언급되었다. 목사에 대한 교리를 구약에 자주 언급된 제사장과 선지자 개념으로 더욱 쉽게 신학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의 예를 들어 보자. 십일조는 구약에 28번, 반면에 신약에 7번(마 23:23; 눅 11:42, 18:2; 히 7:5,7~9) 언급된다. 그러나, 신약에서 헌금에 대한 집중적 가르침이 제시된 고린도후서 8장~9장은 십일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목사, 유아세례, 십일조의 교리는 구약에 근거한 신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비성서적 교리로 취급될 것인가? 대답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소요리 문답강해>가 주장하는 것처럼,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Volume I & II, 177~178면). 따라서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과 연속성보다 점진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이 현대의 신자들에게 유용하지 않는다고 믿는 세대주의자들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Hal Lindsey, <Satan Is Alive and Well on Planet Earth>, 168~169면). 이런 세대주의자들의 오류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와 ‘십계명 같은 율법을 마땅히 지켜야 하는 신자의 의무,’ 두 가지 진리를 혼돈하는 데서 기인한다.

다시 반론자의 해석론에 대해 평가해 보자. 성경해석학자인 버나드 램은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한다: “성경해석자는 신약의 의미를 구약의 의미로 강요하지 않는다… 성경해석자는 ‘시대를 분별하고 성경을 조화하는’ 어거스틴의 성경해석 원리를 지표로 삼아 신약의 도덕적 수준 혹은 교리를 구약 본문에 강요함으로써 성경 안에서 모순을 발생시켜서는 안 된다”(103~104면). 조직신학교 밀라드 에릭슨도 이런 견해를 동의한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 간에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기대를 가지고 두 책을 접근해야 한다”(<Christian Christology>, 69~70면). 이는 신, 구약의 모든 구절이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신학 정립의 기초로 삼는 칼빈의 신학적 확신과 일치한다(Bernard Ra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174면 각주 7번 참조).

맺는 말

필자는 ‘복과 저주’에 대한 기본 전제를 부연 설명을 하였다. 필자는 또한 반론자가 갖고 있는 신학적 전제의 오류 및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론을 지적하였다. 필자는 반론자가 “가계의 복이 존재한다면, 가계의 저주도 존재한다”는 본 논쟁의 주요 쟁점에 적절하게 답변하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반론자의 이런 성경 해석에 근거한 부분적 진리는 ‘가계의 복’ 조차도 부인하는 위험한 결론을 유출하였다. 필자는 다음 글에서 ‘종말론적 긴장(eschatological tension)’을 무시한 반론자의 신학 체계가 갖는 위험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할 것이다(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가계의 복과 저주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필자의 책과 <목회와신학> 2001년 6월호에 실린, “가계의 복과 저주의 진리를 성서적/신학적으로 입증한다”는 필자의 글을 참조하시고, 본고에 대한 토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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