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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전 씨의 인간관은 이단이다
1999년 09월 01일 (수)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서론: 반론권을 보장한다
먼저 윤석전 씨 자신은 물론,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반론권을 보장한다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그에게 이단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이나 심지어 이단성이 있었지만 이제 회개하였다고 보는 사람들 누구에게도 반론권을 보장한다. 그 동안 본지는 창간 이래 반론권을 보장해왔다. 이런 일은 어떤 언론에도 그 유래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일로서 본지의 특성이다.

그런데 굳이 필자가 이렇게 반론권 보장을 전제하며 글을 시작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필자가 이렇게 다시 그의 이단성을 밝히는 것을, 윤석전 씨 자신은 물론 그 교단 책임자들과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 모두가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 감정적 대응을 해 올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필자가 일차적으로 윤석전 씨의 이단성을 밝혔을 때 윤석전 씨의 대응은 거짓된 것이었으며, 기침 교단의 대응은 ‘팔 안으로 굽기 식‘ 대응이었으며, 기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이제부터 필자가 다시 윤석전 씨의 이단성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조치를 취했던 것과 상관없이 아직 윤석전 씨가 이단이라는 소신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동안 국내외적으로 집회를 통하여 강의 때마다 이를 밝혔으며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필자가 오랜 동안 지면을 통하여 윤석전 씨의 이단성을 밝히는 일에 대하여 침묵하였지만 이제 다시 본지를 통하여 계속 밝혀갈 것이다.

이제 필자의 글에 대하여 윤씨측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윤석전 씨의 거짓된 언론 플레이가 될지, 아니면 또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 다시 쳐들어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집단행동을 다시 할 것인지, 아니면 뒤에서 정치적 음모를 자행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윤씨나 기침 교단 책임자들이나 그를 옹호하는 어떤 사람이든 자신들의 입장이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필자가 이렇게 공정하게 제공하는 지면에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윤씨측에서 굳이 본지가 싫어 다른 언론을 통해서 논쟁을 하기 원한다면 필자는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밝혀둔다.

필자는 전에도 항상 그랬듯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며 그리고 매일 기도하며 이 일을 진행할 것이다.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다시 시작되는 필자의 글에 대하여 윤씨는 전처럼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말고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대응해 주시기를 바란다. 지난 번에 윤석전 씨가 보인 거짓되었던 자세를 생각한다면, 그가 이번에는 인격적으로 대응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1. 윤석전 씨의 이단성을 다시 취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필자가 본지 1997년 9월호부터 윤석전 씨의 이단성을 취급함으로, 그후 윤씨측의 저항으로 인하여 교계는 상당히 소란했었다. 특히 양동생 씨(전 대우조선 노조 위원장, 연세중앙교회 집사, 현재 목사)가 이끄는 연세중앙교회 신도들이 수차례(500명, 1000명, 2000명) 필자가 목회하고 있는 빛과소금교회를 항의 방문하여 예배당을 점거하고, 경찰 병력과 대치하는 등의 일이 있었고, 일간지를 비롯해 교계 신문에 본인에 대한 허위 사실에 근거한 광고를  무려 100여 회 이상 게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한국교회 역사에 없었던 일이며,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결국 윤석전 씨는 국민일보를 비롯해 기독공보 등에 허위 사실에 근거하여 본인을 비난하는 광고를 게재한 사실과, 본인이 목회하고 있는 빛과소금교회에 찾아와 예배당을 무단 점거하고 집단행동을 한 점에 대하여 사과문를 내었고, 양동생 씨는 직접 빛과소금교회를 방문하여 사죄했으며, 본인은 이를 수락하는 것으로 그의 이단논쟁은 일단락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본인은 다시 윤석전 씨의 이단성을 다시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필자의 입장을 부정적인 면에서 그리고 다음으로 긍정적인 면에서 그 이유를 밝히겠다.

1) 필자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윤석전 씨의 이단성을 다시 밝히는 것은 아니다
첫째, 복수심 때문이 아니다.
그 동안 필자는 윤석전 씨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모두 그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그 때마다 윤석전 씨가 필자에게 보인 자세는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했다. 그러나 면전의 자세와는 달리 그후 그가 다른 경로를 통해 보인 자세는 그 반대였다. 그야말로 정반대였다. 윤씨는 영적으로 성령의 사람이기는커녕 윤리적으로 믿을 수 없는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너무나 쉽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설교할 때마다 거짓말 등의 윤리적인 죄에 대하여 지옥을 운운하던 그의 기준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 동안 윤석전 씨가 허위 사실에 근거하여 벌인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입은 필자의 피해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복수심으로 다시 윤씨의 이단성을 밝히려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성도가 하나님의 큰 은총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란 점을 인정한다면 개인적인 복수심에 의하여 누구를 이단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성도로 할 일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상업적 이유 때문에 그의 이단성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혹자는, 필자가 윤씨의 이단성을 밝히려는 이유가 상업적인 데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까지 소위 ‘책 장사‘를 위해 이단이 아닌자를 이단이라고 하거나 이단성을 확대 또는 축소한 일이 없다. 어느 누구의 이단성을 밝히는 일로 책 판매에 영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결과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윤씨에 대하여 상담이 많았고 그리고 연구해 본 결과 그에게 이단성이 있었기에 그것을 밝힌 것이다. 필자가 책을 많이 팔려는 상업적인 이유에서 윤씨의 이단성을 취급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윤씨가 이단이냐 아니냐에 대한 핵심적 관심을 흐리게 하고 결국 윤씨를 옹호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의 모습이 더 상업적일 것이다.

2)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의 이단성을 밝히려는 것이다
첫째, 윤석전 씨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석전 씨를 옹호하는 사람의 입장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그에게 이단 사상은 없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단사상이 있었지만 그가 회개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에게 문제가 있으나 그것은 일반적인 문제로서 필자가 윤석전 씨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문제를 삼은 것은 장로교의 입장으로 알미니안주의자인 윤씨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란 것이요, 후자는 윤씨에게 이단성이 있으나 그가 회개를 했으니 이제 그 회개를 받아 주자는 것이다. 하나씩 비판해 보자.

먼저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모순된다. 이단이 아니라면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이단이 아닌 자를 이단이라고 한 필자가 많은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단이 아니란 말과 이단인데 회개했다는 말이 동시에 가능한가? 그런데도 그를 옹호하는 사람은 이 두 가지 모순된 말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윤씨가 이단이냐 아니냐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느냐 안 했느냐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용이 어떻든 무조건 윤석전 씨를 옹호하고 보호하자는 사람들의 모순된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윤석전 씨가 이단이 아니기를 바라는 사람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본다. 그 자신과 그에 속한 교인들을 이단으로 몰아내지 말자는 뜻일 것이다. 이 점에는 필자도 부분적으로 이해와 동정심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라면 먼저 그의 이단성을 선명히 알고 난 후 그의 진실된 회개와 함께 그를 선도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일 것이다.

다음으로 윤씨가 회개하였으니 이제 이단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도 그를 옹호하려는 사람들의 억지 주장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윤씨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교리적인 입장을 회개하였다고 말한 일이 없다. 오직 필자 앞에서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윤석전 씨가 회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회개하였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 점을 두 가지로 입증해 보겠다.

먼저 그가 필자를 만나 자신의 교리적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문까지 국민일보와 기독공보에 게재한 일이 있는데, 그것으로 윤씨가 교단 내에서 입장이 난처해졌다고 한다. 그러자 윤씨는 자신이 필자에게 사과한 것은 교리적인 잘못 때문이 아니라 윤리적인 잘못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필자의 교회에 500명, 1000명, 2000명씩 찾아와 집단행동을 했던 점에 대한 사과였고, 또 윤씨의 요구에 의하여 필자가 그에게 모범 회개문을 써주게 되었는데 그것을 필자가 일방적으로 써서 요구하였다며 그것을 근거로 국민일보를 비롯 교계 신문에 무려 100회 이상 광고를 내고 필자를 비난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명백하게 윤석전 씨 자신은 교리적인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인정한 일이 있다. 그가, 필자가 속해 있는 예장통합 사이비이단 대책위원회에 보내온 문서에 의해 자신의 사상은 알미니안주의적 사상으로 장로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잘못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것이 필자가 윤씨의 이단성을 다시 밝힐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인 것이다.

어떤 이단자가 자신의 사상으로 많은 영혼을 미혹케 하고 쉽게 회개할 수 있는가? 그리고 회개한 선례가 교회사적으로 얼마나 있는가? 회개할 수 있다면 어떻게 그 죄를 회개할 수 있느냐에 대한 점은 더 깊이 논의해야 하지만, 문제는 윤씨가 회개한 사람이 아니란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 역사에 이단사상을 회개하겠다는 사건은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하나는 실패한 경우요, 다른 하나는 그 결과를 더 지켜보아야 하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는 이삭교회 유재열이요, 후자의 경우는 산해원교회의 이태화 등이다. 전자는 완전히 실패하여 오히려 이단자에게 정통교회 이름만 붙여준 결과가 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아직도 그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는지 시간을 두고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전 씨는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회개했으니 용서하자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먼저 전후 사실관계를 잘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앞에서 자신의 교리적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부인하는 윤씨는 ‘거짓말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했던 자신의 수많은 설교 내용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그에게 더 밝혀야할 이단성이 있기 때문이다.
윤씨에게는 그 동안 필자가 밝히지 못한 더 깊은 이단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번 밝힌 것처럼 윤석전 씨의 이단성은 여러 교리에 있지만 특히 그의 마귀론과 인간관에서 더 두드러진다. 본 호에서는 윤씨의 인간관을 비판하고, 다음에는 그의 마귀론을 새로운 자료 제시와 함께 다시 심층적으로 비판하고자 한다.

윤석전 씨가 필자를 처음 찾아왔을 때(1997년 9월 4일) 필자가 물었다. 김기동 씨의 ‘베뢰아‘를 수학한 일이 있느냐는 점과, 창세기 1장의 인간과 2장의 인간이 다르다는 소위 ‘이중아담론‘을 가르친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윤석전 씨가 베뢰아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리고 이중아담론 등을 가르쳤음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그의 마귀론은  김기동의 마귀론의 영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가르침이 많았다. 결국 그는 거짓말을 하였다. 자신의 말을 기준하여 볼 때 지옥에 갈 죄를 짓고 만 것이다.

다음에는 그가 가르친 마귀론에 대하여 밝히면서, 윤씨가 소속한 교단이요 그에게 이단성이 없다고 발표한 교단이요 그가 가르침을 받아 목회를 하겠다고 한 기침교단에서 김기동 씨를 이단으로 규정한 그 기준과 내용으로 윤씨의 이단성을 밝혀 보려고 한다. 그리고 왜 윤석전 씨는 이 부분에서도 진실하지 못했는가도 살펴보겠다. 

이 거짓말에는 일반적인 거짓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윤석전 씨는 “피의 혈통을 통하여 죄가  유전된다“는 식으로 주장하였는데 이는 통일교 문선명이나, JMS 정명석이나, 천부교 박태선이나, 만민중앙교회 이재록과 같이 하는 참으로 무서운 이단사상인데, 차후에 비판하도록 하겠다.

셋째, 그를 옹호하는 교단이나 사람들은 연구 없이 정치적으로 면죄부를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단문제에는 언제든지 정치적인 문제도 함께  발생한다. 물론 정치적인 문제도 중요하다. 어떤 사람의 이단사상을 연구한 후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처리하는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로 남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정치적인 것도 이용하시어 이단문제를 해결해 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적 선이 배제된 정치적 선이요, 다음으로는 편협되고 그릇된 정치가 문제다. 윤석전 씨의 경우 그가 속한 교단이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의 이단성 자체를 연구한 흔적이 없다.

무조건 이단이 아니라고 하기에 급급하고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 균형 있게 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실례가 그에게는 이단성이 없다는 말과 그가 회개하였으니 이단이 아니라는 모순된 말이 동시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 동안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모순에 대하여 자세히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넷째, 윤석전 씨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계속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전 씨 사상에 대한 상담이 필자에게 많았다. 이것은 성도들이 윤씨에게 문제를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으로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윤씨는 필자에게 사과문을 내고 자숙하기는커녕 마치 문제가 없는 목사처럼 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 동안 이단연구에 관여해 오면서 윤리적 문제를 밝히는 일은 가능한 자제를 해 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단연구의 핵심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요, 다음으로는 그것은 필자가 할 사명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한국교회 선교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석전 씨의 사상이 들어가면 신앙의 갈등이 일어나고, 나가던 교회를 옮기게 되며 그것이 교회문제가 되고 또 가정불화를 일으키게 되는 데 무엇 때문일까? 필자가 보기에 윤씨로 인하여 그가 속한 기침 교단은 물론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계속 그를 지켜보고 또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2. 기침 교단 책임자들에게 묻는다
필자는 필자가 속한 교단이 아니라도 구원관이 같은 교단들을 거룩한 공회로 인정하고 그 공회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는 비록 필자가 속한 교단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됨을 양지하고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답을 해 주길 바란다.

1) 귀 교단은 누구의 이단성을 연구할 때 당사자에게 물어서 해결하는가?
귀 교단에서는 윤석전 씨에게 이단사상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윤씨에 대해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해보았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객관적인 조사보다 장본인에게 물어서 그가 이단인지 아닌지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윤석전 씨가 필자에게 윤리적 사과를 한 것이지 교리적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기침교단측에서 그것을 필자에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더욱이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윤씨를 감싸려는 일에만 급급하였다는 것이다.

2) 윤석전 씨의 윤리적 죄에 대하여는 그 책임을 물었는가?
귀 교단에서는 윤석전 씨의 말처럼 윤씨가 필자에게 사과한 것이 교리적인 사과가 아니라 윤리적 사과였다는 점을 믿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이 교리적 사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둘째 문제로 두더라도 다음의 두 가지 조치는 취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윤리적으로 잘못했다는 윤씨에게 그 윤리적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했다는 것이다.

허위사실에 근거하여 필자를 비난하는 광고전에 성도들의 값진 헌금을 이용하여 기독교 역사에 없는 일을 저지르고, 더욱이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폭도들처럼 쳐들어와 점거하고 경찰 20개 중대가 동원되는 일까지 자행하였던 윤씨에게 무슨 윤리적 책임을 물었는지 알고 싶다. 책임을 묻기보다 오히려 ‘윤씨 높이기‘ ‘윤씨 감싸기‘에만 급급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얼마전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씨의 교인들이 MBC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린 사건이 그렇게도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귀 교단에서는 성도들이 세상 방송국에 쳐들어간 것과 거룩한 공회인 교회에 쳐들어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죄가 된다고 보는가?

혹시, “참 다행이다. 교리적 사과를 하지 않고  윤리적 사과를 했으니 됐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귀 교단에서는 윤씨의 비윤리적, 비성경적인 행동에 대해서 교단 입장의 어떠한 사과나 유감의 뜻을 필자에게 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일반 직장생활에서도  하급직원이 잘못하면 상급자가 해당하는 책임을 지지 않는가. 귀 교단에는 처음부터 교단의 책임성 있는 어떤 사람도 필자를 찾아와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한 일이 없었다.

3) 귀 교단에서 윤석전 씨에게 이단성이 없다는 연구가 정당한 것이라면, 그리고 진정으로 이단이 아님을 연구에 의하여 확인했다면 왜 본인의 연구에 대하여 내용적인 확인이나 변증을 피하는가? 기침 교단에는 학자도 있고 양심 있는 목회자도 있는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로 필자의 연구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촉구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내용 있는 공적 검증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귀 교단에서는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을 알미니안주의로 이해하고  귀 교단 교리로 용납하는가?

본론: 윤석전씨의 인간관은 이단이다
1. 이단사상은 어떤 교리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2천년 동안 신학은 기독론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사도신경의 대부분이 예수님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단사상은 모든 교리에서 발생할 수 있다. 마치 우리 몸의 부분부분이 모여서 생명을 이루고 있고, 그 중에 어느 한 부분에서 발생한 병이라도 생명을 잃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본지 98년 2월호에 윤석전 씨가 게재한 글의 이단 정의 및 기준은 미흡하고 잘못된 것임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본지, 98년 3월호, 130~131쪽).

물론 이단성이 더 많이 발생하는 교리가 있고 적게 발생하는 교리도 있지만 이단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될 교리는 없다. 그리고 온 몸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 병이 저 병을 일으키듯이, 교리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교리에서 발생했든지 그것은 전 교리에 번져 결국 다른 구원을 만들고 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단이다.

2. 인간관이 다르면 구원관도 달라진다
윤석전 씨의 말처럼 구원 문제가 구원론에서만 나타난다고 한다면 죽을 병은 심장에만 걸리고 다른 곳에는 안 걸린다는 말과 같다. 사람은 위병으로도 죽고, 폐병으로도 죽고, 신장병으로도 죽고, 또 다른 병으로도 죽는 것은 우리가 아는 건강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관은 인간 문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구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관에서 어느 하나만 정설이고 다른  것은 다 이단이란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자는 인간의 구조에 있어서 삼분설은 문제가 많은 학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삼분설을 취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얼마든지 한계 안에서 자유가 있다. 구원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예정론을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말하지는 않으며, 침례냐 세례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따지지는 않는 것과도 같이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인간관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구원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는 ‘인간의 영은 인격이  아니요 영에는 죄가 없다‘며 비성경적인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즉 삼분설로 하면 죄는 혼과 육에만 있다는 말이요, 이분설로 하면 육에만 죄가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점이 구원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바로 구원관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이 제한되고 만다. 만일 영혼에 죄가 없다면 주님은 우리의 타락한 육체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 타락하지 않은 영혼을 위해서는 죽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실 이유도, 더욱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똑같이 믿는 예수요 십자가 같지만 인간관 하나가 잘못되면 그 예수와 십자가의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 점을 먼저 예태해 목사의 글에서 살펴보자. 그가 쓴 <속사람>(목양세계선교부, 1993)이란 책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썩지만 속사람은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곧 더러워지지만 속사람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19쪽).
“속사람은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속사람이 자리잡고 있으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속사람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벧전 1:4). 그 성품은 언제나 온유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벧전 3:4)“(21쪽).

“성경은 사람의 영혼을 여호와의 등불 또는 ‘속사람‘이라고  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에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됩니다. 겉사람은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죄가 없으며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29쪽).

“성령은 이렇게 죄가 없는 속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시며,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일터입니다“(34쪽).
이제 예장통합측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이명범의 인간관을 살펴보자. 다음의 내용은 통합측에서 그를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이다.

“(가. 영에는 인격적 직능이 없다고 한다.) 이씨가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다는 삼분설을 바탕으로 혼에만 지, 정, 의의 인격이 있다고 한 것은(이명범, [경건생활을 위한 출발], pp. 9-11., 1984년 5월 28일 테이프) 역시 김기동 씨의 사상으로 김기동 씨가 영은 인격이 아니라 항구적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한 것과 같은 것으로(김기동, [마귀론 상], p. 80, [마귀론 하], p. 62), 모든 인격적 기능은 혼에 있고 영은 단지 신과 교제하는 능력이라고 언어만 바꾸었으나([믿음생활을 위한 출발], p. 48, 50) 역시 김기동 씨 사상이다. (나.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육체 구원만을 위한 것이 된다.)

이씨는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저주하신 것은 사탄이 인간의 지상영역(earth part)만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고 사람의 영은 건드릴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도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했는데(1984년 6월 18일 테이프), 이는 결국 범죄한 인간의 영 속에는 사탄이 못 들어 왔으니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탄의 지배 아래 들어간 흙인 육체만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윤석전 씨의 인간관에 이단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소개하고 이를 확인해 보자.

3. 윤석전 씨의 인간관은 철저하게 이원론이다. 이는 죄는 육체가 짓는 것으로, 결국 인간의 영에는 죄가 없다는 말이 된다
윤석전 씨는 육신을 말할 때, 온갖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지옥 보내는 사탄적인 실체로서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할 원수라고 한다. 물론 윤씨에게 있어 육신은 정욕(3정: 인정 애정 감정, 3욕: 물욕 성욕 명예욕) 즉 육체의 소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육체(body)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범죄함을 말할 때 육신과 영혼을 철저하게 이원론적으로 분리시켜, 육신이 범죄한다고는 말하지만 영혼이 죄짓는다는 말은 결코 없다(필자가 분석한 윤씨의 책과 수백 개의 테이프에서).

이제부터 그의 인간관에 대하여 직접 인용해 가며 필요한 부분마다 비판을 하겠다. 일단 그의 책에서, 그리고 두 종류의 테이프에서 소개하고, 다른 곳에서 한 설교 속에 나타난 이단적 인간관은 그의 반응을 보고 다음에 더 소개해 가며 그리고 더 심도 있게 비판하고 싶다. 먼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윤석전, 요단출판사, 97년 5월 26일 발행)란 책에서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먼저 밝혀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필자가 오래 전에 그의 인간관에 나타난 이단성을 밝히는 글을 썼었는데 그가 회개한다고 하여 어떤 경로를 통하여 윤씨측에 글만 전달되고 본지에는 게재하지 않았었다. 그 후에 윤씨측에서 필자의 본 글에 의하여 나름대로 책을 수정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는 우선 수정된 책을 인용하지 않고 수정되지 않은 책을 인용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그가 자신의 사상은 알미니안주의 입장으로 잘못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책을 수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밝힌 바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윤씨는 정직하게는 스스로 이단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물론 필자의 면전에서) 회개 없이 적당히 해결하려는 비양심적이고 비성경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 영혼들을 미혹시키고 그 사상으로 교회를 부흥시켜 행세를 하려는 것이 성령의 사람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금도 그의 잘못된 사상은 책보다 그렇게도 많은 테이프에서 더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가 잘못을 공적으로 시인하고 회개하기까지 그의 사상은 철회되지 않은 것이며 그리고 지금도 그의 사상이 담긴 테이프들이 돌아다니며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이단사상이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사상이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는다. 하물며 이단사상으로 목회를 하고, 영혼을 죽이고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할 때 그 사상이 그렇게 쉽게 해결되겠는가? 사탄이 그를 그렇게 쉽게 놓아주겠는가? 독자께서는 필자가 밝히는 그의 구체적 사상들을 들어보면 그것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단자들 중에 혹 본인은 진실하게 해결하려고 했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이단사상 100 중에 10이나 20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하나씩 열거하고 비판해 보겠다.
<윤석전 씨의 말>
“적이 없는 군사는 군사가 아닙니다. 적이 있는 군사가 바로 올바른 군사입니다. 그럼 가장 큰 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당신의 ‘육신‘입니다“(14쪽).

<비판>
분명히 그는 육신(body)을 적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육신은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이라는 영지주의적 사상이 나오고 따라서 금욕주의도 나오게 된다. 그렇게도 악한 육신이라면 가능하면 안 먹이고 가능하면 핍박하고 괴롭혀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윤석전 씨의 말>
“좋은 군사가 되려면 먼저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 누구를 위하여 충성하는 것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요, 결국에는 당신의 육신이 당신의 영혼에 대한 충성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내 영혼에게 충성을 할 수 있도록 내 의지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내 육신아, 위로는 하나님께 충성하라. 그것이 내 영혼에 대한 충성이니라.‘ 자기 영혼에게 육신이 충성하는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기업이 있습니다“(72~74쪽).

<비판>
철저하게 이원론적이다. 이 말이 맞으려면 그 영은 죄가 없어야 한다. 충성의 대상인 영혼에 죄가 있다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죄 있는 육체가 죄 없는 영혼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충성의 대상으로 하나님과 영혼을 동일시 한다는 점이다.

“누구를 위하여 충성하는 것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요, 결국에는 당신의 육신이 당신의 영혼에 대한 충성입니다“라는 말에서 보면 우리 영혼에 대한 충성이 곧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 된다는 점이다. 절대로 우리 영혼은 충성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과 하나님은 동격이 될 수 없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 육신이 우리 영혼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던가? 이는 다 이단자 윗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은 김기동의 사상의 영향 속에서 나온 말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윤석전 씨의 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듣는 귀가 복되어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썩어빠질 육신을 악착같이 사랑하면서 정작 사랑해야 할 영혼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고깃덩어리를 아무리 사랑한들 이 고깃덩어리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145~146쪽).

<비판>
고깃덩어리란 바로 육신(body)을 의미하는 것임이 선명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육이 육체 즉 고깃덩어리를 말한다면 그것은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고깃덩어리 자체가 어떤 인격적 기능을 따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육체를 철저하게 먹지 못하게 하고, 자지 못하게 하고, 쉬지 못하게 하고, 결혼하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이요, 나아가 죽여 버리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윤석전 씨는 성도들로 하여금 금욕주의적으로 살도록 종용하고 있다. 윤씨 자신도 그렇고 그 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은 절대로 우리 육신을 미워하라고 하지 않았다. 육신을 우상시하는 것도 죄악이지만 그러나 육신을 죄악시하는 것도 역시 죄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성도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 말씀과 윤석전 씨의 인간관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윤석전 씨의 말>
“그래서 육신은 내 영혼을 지옥도 보내고 천국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과연 내 생각과 내 이목구비가 영혼에게 손해를 끼친다면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적을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 육신을 굴복시키는 유일한 능력이 바로 성령뿐입니다“(170쪽).

“자기 육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육신을 많이 사랑하는지, 아니면 영혼을 많이 사랑하는지 잘 검토해 보십시오. 7, 80년 살면서 죄만 평생 짊어진 영혼의 방해꾼이 바로 이 육신입니다. 육신이 평생 동안 죄지은 것을 영혼이 회개하지 않습니까? 육신이라는 놈이 평생 동안 죄지은 것을 영혼은 영원토록 책임져야 합니다“(201쪽).

<비판>
이 말처럼 윤씨의 인간관을 선명히 보여 주는 말도 없다. 이 말에 의하면 죄는 육신이 짓고 회개는 영혼이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발생하는  이단성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① 먼저 윤석전 씨는 우리 한 인간 안에 두 개의  인격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즉 죄를 짓는 인격을 육체라 하고, 회개하는 인격을 영혼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육신을 별개의 인격으로 보지 않는다면 윤씨의 위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의 소욕이란 우리 영혼이 배재된 고깃덩어리 즉 육체의 인격적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죄란 육체가 짓는 것이 아니다. 전인(全人)이 짓는 것이다. 죄가 거하는  좌소는 육체가 아니다. 이는 이단으로 규정된 귀신파 김기동 씨를 비롯하여 구원파(권신찬,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를 낳게 했던 역시 이단자 윗트니스 리가 주장하는 교리로서 잘못된 것이다. 죄의 좌소는 육신이 아니라 마음인 것이다.

② 그보다 이 인간관에 따르면 그 육체만 지옥에 보내면 된다. 또한 영혼만 천국에 가면 족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윤씨는 우리의 영혼만이 천국에 간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이 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신학에 무지하며 그러면서도 인간의 영혼을 해롭게 하는 독버섯 같은 사상을 가졌는지 알 수가 있다. 직접 들어보자.

“법대로 달려가라 이 말이요. 도무지 육신의 법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끝까지 도망가라 이 말이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압니까? 달려가서 성공자가  되라 이 말이요.
마지막 주의 나라에 딱 이를 때, 내 영이 하늘나라에 딱 들어간 날 육신은 밖에서 썩어버릴 것이요, 쫓아오다 쫓아오다 썩어버릴 것이요, 내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놈의 육신의 법에 만약에 붙들리면 내 영은 하늘나라의 문턱에까지 갔다 해도 거기서 붙들려 버리면 이제는 하늘 문은 닫혀 버리고 이 육신은 내 영혼을 지옥에 토해내고 이 놈은 한 줌의 흙으로 가버린다 이 말이요.

이 놈은 마지막 하늘나라 문턱까지 가서 기어이 나를 붙들어다가 내 영혼을 지옥에 몰아 넣어야 속이 시원한 녀석이 이 녀석이니까. 이 녀석을 대단한 존재로 보지 말고 내 신앙생활의 적으로 알라 이 말이요. 아멘 해! 아주 내 신앙생활의 원수로 알아야 돼요, 이 녀석은. 아멘 해! 이제 이 녀석을 어떻게 잘 다스려서 사로잡느냐 이 말이요.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이요. 이해가 됩니까?“(윤석전, ‘죄에 대하여‘ 12번 테이프).

“다같이! ‘성결한 사람은 없다.‘ 성결한 사람은  없어요. 육신이 성결해 졌다면 육신도 하늘나라 가야지. 맞죠? 이 놈은 못 가요. 왜 못 갑니까? 부정하기 때문에 못 갑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바로 금방 숨이 넘어가 ‘꼴딱 꼴딱, 하늘나라 간다, 하늘나라 갖 그래도 이 놈은 못 가요. 영혼만 딱 가지, 이 놈은 못 가요. 영혼만 딱 가지, 이 놈은 그냥 부패돼야 해요. 왜 그럴까요? 이 놈은 하늘나라 갈 만한 아무런, 이 놈은 아주, 의가 없는 녀석이요. 아주 지금까지 내 영혼이 하늘나라 가는 데 방해 의사만 표명한 놈이 이 놈이요. 반대만 한 놈이 이 놈이요.

마지막 영의 법에 반대를 받지 않고 육신의 법을 땅에 떨어뜨리고 출발할 수 있는 아주 매력 있는 분리입니다. 다같이! ‘매력 있는 분리다.‘ 아주 매력 있는 분리요. 그래서 우리는 이 분리될 때 육신이 쫓아오다 쫓아오다 지쳐서 거꾸러져 자빠지는 꼴이 바로 죽는 꼴이요. 아멘 합시다! ··· 이 놈(육신)이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없어요? 못 가는 원인은, 이 놈은 의가 없기 때문이요. 그런데 이 놈을 의로 정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 놈을 상당한 존재로 착각하지  말자 이 말입니다. 이 놈은 하늘나라 가다가 좌절하고 가지 못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간다 이 말입니다“(윤석전, ‘죄에 대하여‘ 12번 테이프).

윤석전 씨의 말에 의하면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먼저는 이 다음에 천국에 가는 우리의 육체는 이 육체가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리고 이 다음에 천국에는 우리의 육체는 가지 못하고 영혼만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성경의 육체관도 정통교회의 육체관도 아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2-54). 우리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고전 15:23).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육체로 부활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윤씨의 영혼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천국에 가고, 영혼과 육체가 함께 지옥에 간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했다.

그리고 윤씨의 사상은 역사적 교회의 신앙고백과 다르다.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침례교에는 비록 사도신경을 암송하지는 않는 교회도 있지만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정한다면 이단이다. 바로 윤씨의 사상은 역사적 교회의 인간관과도 전적으로 다르다. 이에 대하여 윤석전 씨는 무슨 변명을 할지 지켜보겠다. 윤씨는 이번에도 반드시 본지의 반론권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전에 처럼 반론권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지 말고 말이다.

③ 그리고 윤씨의 위의 말이 가능하려면 회개하는 그 영혼은 죄가 없어야 한다. 죄 있는 영혼이 육신을 위해 회개할 수 있다는 말은 모순된 말이다. 마치 죄 있는 인간이 다른 죄인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윤석전 씨가 영도 죄를 짓는다고 임기응변적으로 말을 할지 모르겠다. 지난 번에 필자가, 윤씨가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한 것을 비판했더니 자신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알미니안주의 입장을 취한다는 임기응변적 변명을 한 것처럼 말이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고 그 때 가서 밀도 있는 비판을 하겠지만, 먼저는 위의 말들이 잘못된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순된 소리가 된다. 만일 영혼도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영혼의 죄는 누가 회개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영혼의 죄는 이제 육신이 대신 회개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 주의 나라에 딱 이를 때, 내 영이 하늘나라에 딱 들어간 날 육신은 밖에서 썩어버릴 것이요, 쫓아오다 쫓아오다 썩어버릴 것이요, 내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란 말과 “영혼만 딱 (천국에) 가지, 이 놈은 못 가요. 영혼만 딱 (천국에) 가지“란 말과 “여러분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 이 말입니다“는 말과 모순된다.

바로 이 잘못된 인간관이 구속관을 다르게 만든다는 말이다. 윤석전 씨가 믿는 예수의 의미와 정통교회가 믿는 예수의 의미가 다르게 되는 것이다. 윤석전 씨가 믿고 있는 십자가란 육체의 죄만 위한 것이요 영혼을 위한 것이 아닌 결과가 된다.

이래도 윤석전 씨에게 이단성이 없다고 한다면 필자는 그를 이단이라고 하겠다. 더 살펴보자.

<윤석전 씨의 말>
“좋은 군사는 어떻든 자기 육신을 사랑하는 것을 이겨야 합니다. 그것 못 이기면 좋은 군사가 되지 못합니다. 육신은 당신의 영혼을 먹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누가 지옥 보냅니까? 여러분의 육신이 지옥 보냅니다. 육신이 예수믿기 싫어하니까 지옥 가는 것입니다. 육신이 내 영혼이 하자는 대로 안하니까 지옥 가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평생 싸워야 할 원수입니다“(203쪽).

<비판>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우리 육체가 결코  아니다. 간다면 우리의 전인적인 죄로 인하여 가는 것이지 육체의 죄만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의 육체는 지옥에 갈 존재가 아니라 저 천국에 함께 갈 존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윤석전 씨의 말>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 망하지 않기 위하여 영혼을 죽이는 원수와 육신이 끝날 때까지 전투합니다. 육신은 밖으로부터 오는 죄를 서슴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에서 일어나는 죄를 절제할 능력이 없는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육신은 영혼을 죽이는 원수 같은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 오해해서 육신이 곧 나인 줄 알고, 내 속에 영혼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육신은 내 영혼이 입은 작업복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바로 내가 육신이라는 작업복을 입은 것입니다.

새들 중에는 1주일만에 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껍데기를 보고 ‘나‘라고 합니까, 아니면 그 안에서 나오는 새가 ‘나‘입니까? 껍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바로 그 안에 있는 새 새끼가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육체는 하나의 목숨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육체를 혼동하는데, 이 생명은 육신의 때에 가장 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252~253쪽).

<비판>
육체가 우리의 고깃덩어리를 의미한다면 사실은 우리의 싸움은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먼저는 우리가 승산이 없는 싸움을 싸운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육체를 입고 있는 날 동안에는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원수가 바로 육체인데 죽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 육체와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란 말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다. 그러나 윤석전 씨는 혈과 육을 대상으로 싸우고 있는 꼴이다.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을 어느 때는 영혼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육체로 표현하기도 한다(롬 12:1-2). 즉 윤씨의 말처럼 영혼만이 내가 아니라, 영혼도 나이지만 육체도 나라는 말이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합하여 이루어진 전인격인 것이다.

<윤석전 씨의 말>
“그래서 성경은 좋은 군사는 법대로 경기하는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42.195킬로미터는 마라토너들이 한 번 달리는 거리입니다. 100리가 조금 넘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법대로 달렸습니다. 골인 라인을 1미터 앞두고 넘어졌다면 그는 42.195킬로미터를 달린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법대로 하여 최후 승리를 얻을 때까지 달려야 합니다. 때문에 반드시 법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원수인 육신을 이겨야 합니다“(305~306쪽).

<비판>
마라톤 비유를 통해 마치 골인 지점 1m 전에라도 쓰러지거나 잘못하여 골인을 하지 못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위태하게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오직 믿음 하나로 사탄의 모든 권세를 다 물리치고 우주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주권이 이 육체 때문에 바로 무너질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롬 8:38-39) 그 큰 구속의 사랑이 우리의 육체로 인하여 쉽게 무너져 버릴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것이 복음인가,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구원인가? 이것이 성경과 역사적 교회가 주장하는 구원인가?

<윤석전 씨의 말>
“육신은 우리가 보존하고 이 땅에서 잘 간수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늙으면 결국에는 죽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간수하고 보존해도 죽습니다. 어차피 썩고 사라져버릴 것이라면, 좋은 군사가 되어 육신을 전쟁을 하는 아름다운 탄환으로 사용하시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392쪽).

<비판>
우리 육신은 보존하고 이 땅에서 간수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윤석전 씨의 인간관이야말로 전혀 보존하고 간수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상이다.

이제 윤석전 씨가 연세중앙교회 철야집회에서 했던 “죄에 대하여“(시 51:1-19)라는 설교에서 살펴보자. 위의 책에서 나타난 사상이나 테이프에서 나오는 사상은 대동소이하다.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된다. 그런 점에서 더 깊이 비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필요에 따라 비판을 하지만 내용 확인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위의 비판을 참조하기 바란다.

<윤석전 씨의 말>
“육체는 평안하면 평안할수록 내 영혼은 견딜  수가 없고, 내 영혼은 내 육체의 그 평안한 가라지에 눌려서 얽매여 갈망하며 울부짖으며, 내 영혼은 내 육체 속에서 가장 잔인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육체야! 내 영혼을 위하여 살아다오‘ 소리치는 내 영의 진실한 애원과 갈망하는 요청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 바로 성경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들어야 된다 이 말이여. ··· 마지막에 순교의 자리 가서도 죽음 직전에 놓여서 이제 1분만 참으면 죽을텐데 이 놈의 육체가 ‘죽지마, 아파서 못 견디겠다. 불어라. 그만두자. 예수 안 믿는다고 말해라.‘

이 놈이 마지막 1분 후의 죽음을 남겨두고 내 영혼을 완전히 죽여버리고 예수를 부인하고 제 평안대로 돌아간다 이 말이오. 이 놈이 얼마나 내 영혼에 잔인한 놈이오? 이 놈이 얼마나 내 영혼에 잔인한 놈이오? 그런데 이 놈을 상당한 존재로 생각합니까? 우리 청년들이여! 육신을 잘 관리하시길 바라고(아멘), 요놈은 아주 죄의 덩어리 푸대요, 내 영혼을 타살하고 학대하는 아주 못된 놈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놈은 아주 못된 놈이라는 것을···“(8번 테이프).

<비판>
철저하게 철저하게 육체를 학대하고 있다. 마치  칼을 들고 그 육체를 갈기갈기 찢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육체관이 아니다. 이런 육체관으로 하면 헌금을 거두고, 세상의 삶은  경시하고 교회의 삶만을 강조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성직자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나 주부가 가정에서 빨래를 하고 기저귀를 빠는 것 모두 하나님 앞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윤씨의 말에 의하면 식욕을 느끼는 것도 죄악이고, 성욕을 느끼는 것도 죄악으로 보인다. 윤씨는 인정, 애정, 감정이라는 3정과 물욕, 성욕, 명예욕이라는 3욕을 죄악시 한다. 이는 철저한 금욕주의을 낳게 한다.

<윤석전 씨의 말>
“하나님과 내 영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어요? 무엇이? 이 놈의 육체가 가로막고 있다 이 말이요. 내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육체가 방해꾼이라 이 말이요. 이 놈이 방해꾼. 이 놈이 방해꾼이요. 내 영의 소원을 하나님께 그토록 상달시키고 싶은데 이 놈의 육신이 언제나 반기를 들고나선다 이 말이요. 그래서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가 영계 속에 들어가고,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가 은사를 받고,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가 영안도 열리고,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가 신령한 것을 안다 이 말입니다.

··· 그래서 육체라는 것이 영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 말이요. 이 놈은 절대 영이 원하는 것은 안 들어 줘요. 기도하자고 해 보세요. ‘야, 기도하자‘(그러면) ‘야, 화장실 좀 갖다와서‘(하자고) 하고, ‘야, 무릎 꿇었으니 무릎 아프니까, 일어났다가 눈 뜨고 한 바퀴 돌고 하자.‘ ‘물 좀 한 모금 먹고 해라‘···. 육체라는 녀석은, ··· 이 놈은 일단 방해꾼임을 알고 이 놈을 적대시하고 경계하고 시작하시라 이 말이요“(11번 테이프).

“육신은 죽는 짓 하는지 모르고 건방진 놈이다. 감히 누구에게 대들어, 지금? 성령에게 대드는 녀석. 이거, 보통 놔둘 놈이 아니요, 이 놈이. 이걸 여러분이 그냥 보통 관리할 녀석이 아니야, 이 녀석이. 이 녀석이 그렇게 무서운 녀석이라는 것을 여러분 잘 알아야 해요. 다같이! ‘육신은 건방지고 죽는 짓 하는지 모르고 막 덤비는 녀석이다.‘ 이건 누구에게 덤벼? 성령을 거스리면 오는 세대가 또 와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 말 있죠? 용서받지 못할, 그 분에게 아주 죽을 각오하고 칼 들고 엎어지고 화약 지고 불 속에 들어갈 결심하고 대드는 녀석이 이 놈의 육신이니까.

이 놈의 육신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법으로 막아 줘야 여러분은 산다 이 말이요. 이 놈이 만약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 계속해서 대적하는 날이면 오는 세대가 또 와도 용서받지 못하여 죽을 것이니 용서받지 못할, 죽을 일을 결심하고 이 놈은 성령에게 대들고 있는 놈이니까. 이 놈이 얼마나 불안한 놈이요, 이 놈이. 다같이! ‘불안하다.‘ 이 녀석이 아주 불안한 녀석이요. 그래 이 녀석을 잘 지켜야 해요“(12번 테이프).

“법대로 달려가라 이 말이요. 도무지 육신의 법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끝까지 도망가라 이 말이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압니까? 달려가서 성공자가  되라 이 말이요.

마지막 주의 나라에 딱 이를 때, 내 영이 하늘나라에 딱 들어가는 날 육신은 밖에서 썩어버릴 것이요, 쫓아오다 쫓아오다 썩어버릴 것이요, 내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놈의 육신의 법에 만약에 붙들리면 내 영은 하늘나라의 문턱에까지 갔다 해도 거기서 붙들려 버리면 이제는 하늘 문은 닫혀 버리고 이 육신은 내 영혼을 지옥에 토해내고 이 놈은 한 줌의 흙으로 가버린다 이 말이요. 이 놈은 마지막 하늘나라 문턱까지 가서 기어이 나를 붙들어다가 내 영혼을 지옥에 몰아 넣어야 속이 시원한 녀석이 이 녀석이니까. 이 녀석을 대단한 존재로 보지 말고 내 신앙생활의 적으로 알라 이 말이요. 아멘해! 아주 내 신앙생활의 원수로 알아야 돼요, 이 녀석은. 아멘 해! 이제 이 녀석을 어떻게 잘 다스려서 사로 잡느냐 이 말이요.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이요. 이해가 됩니까?“(12번 테이프).

“다같이! ‘성결한 사람은 없다.‘ 성결한 사람은 없어요. 육신이 성결해 졌다면 육신도 하늘나라 가야지. 맞죠? 이 놈은 못 가요. 왜 못 갑니까? 부정하기 때문에 못 갑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바로 금방 숨이 넘어가 ‘꼴딱 꼴딱, 하늘나라 간다, 하늘나라 갖 그래도 이 놈은 못 가요. 영혼만 딱 가지, 이 놈은 못 가요. 영혼만 딱 가지, 이 놈은 그냥 부패돼야 해요. 왜 그럴까요? 이 놈은 하늘나라 갈 만한 아무런, 이 놈은 아주, 의가 없는 녀석이요. 아주 지금까지 내 영혼이 하늘나라 가는 데 방해의사만 표명한 놈이 이 놈이요. 반대만 한 놈이 이 놈이요. 마지막 영의 법에 반대를 받지 않고 육신의 법을 땅에 떨어뜨리고 출발할 수 있는 아주 매력 있는 분리입니다.

다같이! ‘매력 있는 분리다.‘ 아주 매력 있는 분리요. 그래서 우리는 이 분리될 때 육신이 쫓아오다 쫓아오다 지쳐서 거꾸러져 자빠지는 꼴이 바로 죽는 꼴이요. 아멘 합시다!··· 이 놈(육신)이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없어요? 못 가는 원인은, 이 놈은 의가 없기 때문이요. 그런데 이 놈을 의로 정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 놈을 상당한 존재로 착각하지 말자 이 말입니다. 이 놈은 하늘나라 가다가 좌절하고 가지 못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간다 이 말입니다“(12번 테이프).

<비판>
같은 말이 반복돼서 따로 비판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역시 우리 육신은 천국에 못간다는 말이다. 성경과 다르고 정통적인 신앙과 다르다. 비록 우리 주님이 신령한 몸으로 바꾸어 주시겠지만 그러나 다른 실체의 육체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몸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다. 윤씨의 주장대로 하면 아마 그의 육체는 천국에 못 갈 것이고, 혹 가는 육체가 따로 있다면 그 육체는 다른 육체일 것이다. 이는 성경이 주장하고 역사적 교회가 믿고 있는 부활관과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사도신경의 부활관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도 이단성이 없다는 말인가?

<윤석전 씨의 말>
“내 육신이 영혼을 타살하지 못하도록 잘, 성령으로 영혼관리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육신은 거북한 녀석이여, 이 녀석(아멘). 아주 이 녀석, 여러분은 죽기 싫어하지만, 죽기 싫어하는 자체가 죄로 머물러 오래 살고 싶은 결심이요. 그저 두려워하는 자는 바로 죄를 낳나니, 다같이! ‘죄는 두려움을 낳나니.‘ 그러니까 여러분이 죽기 싫어하는 것은 내 영혼이 천국 갈 자신이 없으니까 죽기 싫어하지. 자신만 있어 보세요, 오늘이라도 팍 깨져 버리고 싶죠(아멘). 그렇지 않습니까? 계란이 병아리가 되면 절로 깨져서 나오듯이 내 속의 영혼이 생명이 충만하면 절로 깨지고 싶어지는 거요. 나는 요, 이 땅에 있을 마음 없어요“(15번 테이프).

<비판>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것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이지 우리의 육체가 밉고 육체가 싫고 육체를 빨리 벗고 싶어서가 아니다.

<윤석전 씨의 말>
“목을 매달아 육신을 끌고 다닐 수 있어야 돼요. 내 속에서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게 하고, 일찍 가고 싶으면 일찍 가고, 참고 싶으면 참게 하고, 무릎 꿇고 싶으면 무릎 꿇게 하고, 찬양하고 싶으면 찬양하게 하고, 충성하고 싶으면 충성하게 하고, 이 놈을 바짝 목을 얽어서 내 영혼이 하고 싶은 대로 부려놔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 사람이요. 다같이! ‘영적 사람.‘ 이것을 부려먹지 못하면 내 영혼은 벌써 육신에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돼요. 죽느냐, 사느냐 라고 하는 생사를 걸고 여러분은 하나 하나를 움직이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15번 테이프).

“우리는 부패한 육신은 살릴 수 없어요. 아멘 합시다! 여러분의 영혼이 주님으로 거듭나서 영원히 살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패한 육신은 매미처럼 껍데기를 벗어 놓고 우리는 가버려야 된다 이 말이요. 북망산의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 이 말이요. 이것이(육신이) 영원히 살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부패하게 될 거기 때문에. 부패했기 때문에. 두 법이, 하나님의 법은, 오직 내 영혼의 법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육신의 법은 그토록 죄를 사모한다, 부패한 것은 썩었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 나오고, 내 영혼은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있으니 여러분 모두 다 하나님의 법을 사모함으로 부패된 육신을, 영혼의 때를 위하여 알뜰하게 굴복시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할렐루야! 그러니까 내 마음으로는 그토록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는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좇고 있구나. 나도 모르게 좇고 있어 어느 순간에, 어느 순간에 좇고 있어. 그러므로 육신이 있는 한은 절대로 죄의 법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육신이 있는 동안은 절대로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 할렐루야!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몸부림치다가도 육체의 소욕을 따라 범죄하면 즉시 회개해서 그 죄가 내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겁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을 죽이지 않게 한다 이 말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다같이! ‘예수 안에 있는 자,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은 육신 안에라는 말이 아니오. 어차피 나와 여러분의 육신은 이제는 영혼을 관리할 모든 능력을 상실했어요.

그래서 주님은 여러분 속에 성령을 보내고 예수 이름을 보내고 주님의 피 공로를 보내서 여러분의 영혼을 예수 안에 두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은 절대로 예수 안에 있는 영혼 되어야 해요. 할렐루야!“(16번 테이프).

<비판>
특별히 더 비판할 가치가 없다.

이제 전국청년연합하기성회(흰돌산기도원)에서 했던 “청년아 영원한 플러스 인생을“이란 주제의 설교 속에서 그의 인간관을 살펴보자.

<윤석전 씨의 말>
“나는 내가 내 눈으로 봐도 저것들은 저거 천국 못 가겠다 싶은 것들은 못 갈 거 같아요. 내가 봐도, 정말로. 여러분 보세요. 영혼을 위하여 사는 몫과 70년, 80년 살다가 죽어야 하는 육신을 위해서 사는, 투자하는 프로테이지(비율)를 보세요. 거 프로테이지를 봐. 육신을 위해서는 얼마나 투자하며 영혼을 위해서는 얼마나 투자하는지 이 프로테이지를 보라니까. 영혼을 위해서는 얼마나 하늘 나라를 사모하며 썩어빠진 정욕을 위해서는 얼마나 사모하는가, 이건 여러분 자신이 보면 알잖아. 보면 알잖냐 이 말이요. 응? 보면 잘 알잖냐 이 말이요. 응? 벌써 육의 사람은 못 가. 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어. 영의 사람만이 가. 육의 사람이라는 것은 육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요. 육의 사람이란 말은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요. 육의 사람이란 말은 육신이 왕이 된 거요.

이 놈의 육신 때문에 새벽기도도 못 가고, 이 놈의 육신 때문에 기도도 못하고, 이 놈의 육신 때문에 삼일예배도 못 나오고, 이 놈의 육신 때문에 저녁 예배도 못 나오고, 이 놈의  육신이 좋아하는 텔레비 주말의 명화 보고, 이 놈의 육신 때문에 아주 못된 짓 하고, 아주 이 놈의 육신 때문에 전부 인생을 다 날리고 영혼을 위해서는 살 날이 없다 이 말이요. 당연히 영혼의 때를 준비하지 않는 당신이 어떻게 영혼의 때를 만나겠소. 우리는 육신이 있는 때에 우리 영혼의 때를 준비해야 해요“(2번 테이프).

<비판>
역시 위의 인간관도 틀렸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이 복음의 ‘복‘자도 모르는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이다. 우리는 먹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먹어야 하고 영화를 보는 것도 주님을 위해 보아야 한다. 성도는 영화를 보아서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연세중앙교회 교인들이 필자의 교회에 찾아와 첫번째 집단행동을 할 때(97년 12월 7일) 필자가 TV 보는 얘기를 했더니 그것을 비난하는 연세중앙교회 교인들이 있었다. 주일날 그 먼 길을 이동하여 남의 교회에 쳐들어 와 집단시위는 할 수 있는 안식일관인데 TV는 볼 수 없는 안식일관이 이해가 안 된다. 아마 윤씨의 율법주의적인 안식일관에 의하면 필자의 교회에 와서 집단시위를 한 사람들은 지옥에  갈 죄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윤석전 씨는 그토록 원수 같은 육체에 어떻게 밥을 먹이는지 모르겠다.

<윤석전 씨의 말>
“이 놈의 육신이란 놈은 살 것에 신바람이 안나. 왜? 살려고 하면 힘들어. 교회 가기 힘들지, 앉았는데 힘들지, 설교 듣기 힘들지. 그냥 그러니까 이 놈의 육신은 매사에 나의 영혼에 유익된 것은 싫은 거요. 어? 이 놈의 육신이 얼마나 깡패같이 못된 놈이냐? 실컷 죄짓고 못된 짓 다 하고 지가 짊어진 쓰레기 같은 죄악은 전부 다 영혼에게 딱 맡겨 두고 저는 뒈져서 북망산 한 줌의 흙으로 가서 쭉 뻗어져서 가만히 쉰다니까. 나쁜 놈이요, 이 놈이. 영혼은 육신이 저지른 죄를 짊어지고 지옥에 가서 그냥 몸부림을 치고, 육신이 이거 나쁜 놈이요. 이건 깡패 중에 깡패요, 이 놈이. 알았습니까?

다같이! ‘죄는 육신이 즐거움으로 짓고 기분 좋아 짓고, 형벌은 영혼이 죽을 고생하며 담당한다.‘ 아주 이 놈 나쁜 놈이요. 이 놈. 이 놈 아주 죽여 버리고 싶은데 죽으면 신앙생활도 못해 또. 어쩔 때는 죽여 버리고 싶어 이 놈의 새끼 이걸 그냥. 이거 정말로, 이거 그냥. 이거 그냥, 이거 그냥. 이거, 으응. 왜 하필이면 설교 듣다가 화장실 가고 싶은지 몰라. 이 놈의 새끼 정말로 죽여 버리고 싶어, 정말로. 이거 정말로“(11번 테이프).

<종합적 비판>
① 필자는 윤석전 씨의 영향 아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얼마나 육체를 미워하게 하는가? 이것이 기독교인 줄 알고 있을 청년들의 삶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니 불쌍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저들이 이중생활을 할 가능성이 크고, 또는 잘못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고, 또는 세상의 삶을 피하거나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 충분히 세상에서 법관이 되거나 교수가 되겠다는 등의 목표를 가진 자들이 이 영향 아래 포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윤석전 씨의 영향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기쁨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늘 육체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 육체를 미워하고 학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으면서 죄악시 하고, 인정을 베풀면서 죄악시 하고, 심지어 감정 자체를 죄악시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② 이런 신앙관에 의하면 틀림없이 가정과 직장과 학업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필자에게는 윤씨의 영향으로 가정에 문제가 발생한 상담 사례가 있다.

③ 그리고 위의 인간관에 의하면 헌금을 많이 거두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전 재산을 몽땅 처분해서 헌금을 해도 육신의 때에 영혼을 위해 투자했으니 감사할 것이요, 예배당을 구입하기 위해 눈과 신장을 바쳐 헌금하는 것도 죄덩어리 육체를 드렸으니 오직 영광스러울 것이 아닌가?

④ 분명히 윤석전 씨가 간다는 천국은 그의 영혼만 가는 곳일 뿐 육체가 함께 가는 곳은 아니다. 육체는 원수이기 때문이다. 윤씨의 천국은 영혼만 가는 곳이든지, 아니면 영혼은 이 땅에서의 영혼이지만 육체는 이 땅에서의 육체가 아닐 것이다. 이는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이 아니요 정통교회가  믿는 육체관도 천국관도 구원관도 아니다.

⑤ 육신이 지은 죄를 영혼이 어디까지 회개해야 영혼이 천국에 가는지 알 수가 없고, 반대로 육신이 지은 죄를 영혼이 어디까지 회개하지 못하면 지옥에 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논리적으로 보면 어차피 육신이 죄를 짓고 결국 그 육신은 지옥에 갈 터이니 사실 영혼이 육신의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더욱이나 육신은 나 자신이 아니오 단지 나 자신을 담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윤씨의 사상이지 않는가.

⑥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윤씨의 인간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가 육체만을 위한 것이 되고, 그러니 다른 구원관을 낳는다는 점이 가장 무서운 이단성이다.
사실 이 점을 윤씨는 알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에게 처음에(97년 11월 7일) 써 주었던 글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임기응변적인 말로서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낳게 됨을 윤씨는 모르는 것 같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짓인가?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내가 ‘영혼의 때‘를 강조한다든지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은 듣기에 따라서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으로 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했을 때 그들의 육신만 범죄하고 영은 범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범죄는 전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영혼의 때라든지 영적인 것을 강조한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땅의 삶보다 천국에 소망을 더 두라는 의미이다“(본지, 98년 3월호, 65-66쪽).

그러나 위의 말은 우선 자신의 인간관에 이단성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윤씨는 또 다른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모순되는 말이다. 절대로 전인적인 타락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인간관을 가질 수가 없다. 이는 필자의 비판을 받고 자신의 이단성을 스스로 느끼게 됨으로 급히 만들어낸 변명이다. 복음과 율법을 함께 두면 복음은 그 빛이 퇴색하고 만다. 밥에다 모래를 뿌렸다면 그 밥은 깨끗한 밥이 아니오, 깨끗한 물에다 더러운 물을 넣었다면 이는 더러운 물인 것과 같다. 전인적인 타락을 믿는 사람이라면 죄는 육신이 짓고 회개는 영이 한다는 네모난 삼각형 같은 소리는 절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윤석전 씨에게 “육신의 때와 영혼의 때“는 핵심 사상이다. 그는 이 사상 위에서 모든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고 가르친다. 이것이 포기되려면 한 번 죽고 다시 살아야 하는 만큼의 어려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윤석전 씨는 더 의기 양양하게 반성의 빛도 없이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묻고 싶다. 그가 성령의 사람인가? 결코 아니다.
(월간<교회와신앙> 199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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