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이단&이슈 > 윤석전(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의 거짓된 이단성 변명을 비판한다
1998년 03월 01일 (일) 00:00:0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자신의 이단성 문제에 대하여 대응하지 않겠다던 윤석전 목사의 입장이 필자가 일으킨 논쟁에 대하여서는 돌변하였다. 변명하지 않겠다던 그는 변증을 통해 많은 말을 하였다. 하나씩 그가 한 말을 따라 비판하겠다.

1. 이단이 무엇인지 그 기준을 밝혀야 한다는 말에 대하여

윤석전 목사가 가장 먼저 들고 나온 문제는 필자의 이단 비판기준의 문제였다. 먼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첫번째로 드러난 문제점은 이단시비에 대한 최목사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목사 자신은 비판기준의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비판기준의 객관성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비판할 자료를 확보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목사는 남을 이단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단에 대한 분명한 정의와 그 기준을 밝혔어야 한다. 사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주관적인 잣대에 의해 박해를 받아 왔는지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충분히 경험해 왔다. 도대체 이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정말 타당한 것인가? 최목사가 이와 같은 질문에 의해 검증된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단시비는 그 자체로 무의미한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최목사가 이단시비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꼭 밝혀야 할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변증하겠다.
① 우선 위의 말에 의하면 이단성 시비에 대한 필자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윤목사는 같은 글에서 필자가 칼빈주의적인 것이라고 했다(그 내용에 대한 변증은 후론하겠다). “따라서 최목사의 기준은 여전히 칼빈주의적인 것이므로, 그의 이단시비는 대단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본지 98년 2월호, 154쪽)라고 했다. 언제는 기준이 없다고 하더니, 다시 ‘칼빈주의‘를 비판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하니 서로 모순된다. 아마 앞의 소리를 할 때는 뒤의 소리를 생각하지 못했고, 뒤의 소리를 할 때는 앞의 소리를 잊었나 보다. 임기응변적인 변명이란 증거일 것이다.

② 그리고 윤석전 목사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바로 그에게 이단성이 많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필자가 이단의 기준도 말하지 않고 내용만 밝혔을 뿐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단성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더욱이 그런데도 윤석전 목사측에서 이렇게 엄청난 광고전과 집단시위까지 할 정도라면 바로 윤목사 자신의 이단성이 선명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단 문제라도 일반 평신도라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사상이 있는가 하면, 비록 목회자라도 구별하기가 어려운 사상도 있다. 예를 들어 귀신론이나 종말론 같은 데서 나타나는 이단성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종말론이나 귀신론은 정통신학이 어두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윤목사의 이단성은 평신도도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말이다. 윤목사의 말이 맞다면 필자의 글에 연세중앙교회측에서 보인 반응 자체가 스스로 이단성을 크게 느낀다는 역설적인 증명이라고 본다. 기준도 없이 쓰여진 글에 단지 “비판할 자료를 확보한 것에 불과“한데도 그렇게 집단시위를 해야 하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광고전을 함으로 한국교계를 소란케 하고 있으니 말이다.

③ 윤목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구원론과 목사관에서 하는 말 같다. 이 부분에서는 특별히 밝혀야 할 기준이랄 것도 없다. 예배에 불참한다고, 예배시간에 존다고, 교회 봉사중에 불만 불평을 한다고, 여성도가 짧은 치마를 입음으로 남성도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한다고, 십일조 및 철저한 헌금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목사에게 절대적 순종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고, 심지어 교회 일과 관련하여 성도가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목사에게 상의하려 하는 것조차 사탄의 역사로 간주하며 지옥가야 한다는데 무슨 기준이 필요하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기독교 신앙의 상식 수준 아닌가.

④ 그리고 윤목사는 필자에게 준 “월간 교회와신앙 9월호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힌다“라는 글에서 필자의 이단분별에 대하여 동의했다(본호, 논쟁 및 사건일지, 12번). 그는 이단분별의 기준에 대해서 “최삼경 목사는 ‘말씀대로 사는지 입만 하나님을 찾는지 잘 구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말씀대로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내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참과 거짓은 행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잘 모릅니다‘라고 한 나의 말에 대해 입으로 알 수 없듯이 사실은 행동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목사의 지적에 대해 필자 역시 동의한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은 하되 마음에 없는 위선된 행동을 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진실은 바뀌지 않는 것인데 왜 이렇게 진실이 변했는지 모르겠다.

2. 필자가 윤목사의 글이나 말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고 유추하는 성급함을 보였다는 말에 대하여

먼저 윤목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둘째는 최목사는 한 사람의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성 여부가 가려질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을 그 사람의 글이나 말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고 유추하는 성급함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제는 최목사의 이단시비가 극히 위험한 감정적인 것으로서, 이른바 ‘말 앞에 수레를 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에 끌어 맞추기 위해 억지로 논리를 전개하는 오류를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모든 사고의 원인도 마귀로 보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유추해 보자면 윤목사는 모든 질병이 마귀에게서 온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최목사는 나의 마귀론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최목사는 내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유추‘하여 나를 이단으로 몰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엄밀성이 결여된 최목사의 태도에서 나는 그에게 정말 이단을 시비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본지 98년 2월호, 144쪽).

다음과 같이 변증하겠다.
① 윤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렇게 유추해야 맞다. 그리고 분명히 그 유추는 타당한 유추이다.

② 그리고 필자는 분명히 유추라고 밝혔다. 학문에서도 유추는 중요하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검다“는 단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고, 또는 “희다“는 소리를 한두 번 했다고 해도, 그가 “검다“는 말을 주로 하고 다닌다면 충분히 “그의 사상은 검다고 보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더 들어 보자면,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했다고 해도,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다녔다면 그의 주된 사상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③ 그런데 윤목사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을 유추했다고 비판하는 그 짧은 글 속에 얼마나 많은 유추가 있는지 모른다. 남에게 모순이라고 공격하려면 자기 모순이 없어야 상식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가 얼마나 논리적 평형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인지 살펴보자.

윤목사가 자신의 마귀론에서 변증하기를 “최목사는 이른바 ‘귀신파‘의 대표적인 이단성을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왔다‘는 사상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위의 책, 145쪽)고 했다. 필자는 소위 귀신파의 시조격인 김기동 씨를 비판할 때에도 그의 귀신론에서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왔다“고 했기 때문에 이단이란 말을 한 일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김기동 씨를 이단으로 규정한 많은 교단의 내용도 모든 질병의 원인을 마귀에게 돌리는 것이 잘못인 점은 인정하나 그것으로 이단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윤목사는 그런데 그런 “것 같다“는 말로 필자의 사상을 왜곡 유추하고 있다. 그의 반론Ⅱ에서도 “최목사의 관점은 너무 교리 중심적이다. 마치 교리 지상주의를 대하는 것과 같다“(위의 책, 148쪽)고 하여 똑같은 왜곡 유추를 하고 있다.

그의 같은 잘못은 계속된다. “최목사가 계시와 영감과 조명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영감이라는 말을 내 자신에게나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사용한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나의 계시관에 문제가 있으니 역시 윤목사는 이단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일종의 모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얼마나 세 단어의 관계를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겠는가? 전문적인 신학적 견해가 다소 다르거나 혹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내친다면, 이 땅에 이단 아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사실 많은 목회자들은 영감과 조명을 서로 혼용하여 쓰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결국 이 문제는 사도 시대가 지난 이 시대에도 병고치는 은사가 가능한 것인가를 시비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문제는 하나의 신학적인 입장 차이이지, 결코 이단의 시비를 가릴 성질의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146~147쪽)라고 하였다. 역시 필자는 그의 계시관의 잘못을 소개하고 있을 뿐인데, 필자가 그것을 가지고 이단시비를 일으켰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것은 유추가 아니라 유추성 왜곡단정이다. 이렇게 윤목사는 가상의 최삼경이를 만들어 놓고 그를 비판하고 있으니 진짜 최삼경이야말로 할 말이 없다.

윤목사는 계속해서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목사는 ‘윗트니스 리는 교회관에서도 이단이다‘는 글에서(<교회와신앙>, 97년 11월호), 자신의 논쟁은 ‘성경적으로 적극적인 논쟁을 하지는 않았다‘고 고백했으며, 그 이유를 ‘필자가 따르고 있는 정통교회의 교리 자체를 성경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62쪽). 하지만 그는 계속 이어지는 글에서 자신은 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신학과 성경을, 교리와 성경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신학자들을 신뢰하지 않고 인용하지 않는 이유가 어째서 신학과 성경이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그의 논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적어도 전통과 성경의 차이를 부인함으로써 성경의 권위와 전통의 귄위를 거의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한 발언을 한 셈이다“(위의 책, 149쪽).

정통교단에서 이단으로 보고 있는 윗트니스 리와의 논쟁을 끌어들이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이는 유추의 수준이 아니라 허위사실 유포에 가깝다. 이렇게 무지한 독해도 있는가? 필자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 것은, 성경으로 논쟁을 하자고 해 놓고 주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한다면 성경으로 하는 논쟁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윤목사는 “신학자들을 신뢰하지 않고 인용하지 않는 이유가 어째서 신학과 성경이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그의 논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이라고 하여, 필자가 마치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양 왜곡했다. 독자들은 다시 필자의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아무리 보아도 윤목사는 자기가 판 우물에 자기가 빠져 죽는 격이요, 자기가 걸어논 밧줄에 자기 목을 매는 격이다.

④ 필자는 분명히 유추했고 그리고 유추에 의한다고 밝혔으나, 그 유추를 근거로 하여 윤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한 일은 없다. 그의 마귀관에 이단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모든 질병이 마귀에게서 왔다고 하면 이단인가? 그렇게 말할 성경적, 교회사적, 교리적 증거가 없다. 그리고 윤목사가 “질병 가운데는 마귀가 준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도 있고, 인간의 잘못으로 얻은 질병도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기본 입장이다“(위의 책, 145쪽)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질병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병을 주셨고, 그 질병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반대로 마귀가 준 병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가? 그렇지도 않다.

그리고 필자가 윤목사의 마귀론에 이단성이 있다고 한 것은, 그 사상이 구원론에 미치는 영향을 향해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직접 필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

“윤석전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귀신‘ ‘마귀‘ ‘사탄‘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귀신‘이나 ‘마귀‘란 말을 많이 한다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의 교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이냐는 것이요 특히 구원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먼저 그의 마귀에 대한 사상을 점검해 보고 비판해 보겠다“(본지 97년 9월호, 135쪽).
윤목사의 마귀론에 나타난 이단성은, ‘죄를 회개하면 죄의 책임이 마귀에게 전가된다‘는 사상이다. 즉 성도가 마귀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것이 회개인 양 말하는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비록 윤목사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3. 성도가 마귀의 잘못을 대신 회개하는 것이 회개인 양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점에 대하여
여기에는 섬세한 논리적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윤목사의 변명을 들어보자.
“또 그는 이단성의 근거로서, 내가 죄와 마귀를 연결시키고, 죄의 책임을 마귀에게 돌리며, 그 결과 우리의 회개는 마귀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최목사의 주장은 또 다시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최목사의 주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윤목사의 회개관은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우리가 져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결국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138).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다. 최목사가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인용한 나의 글은 다음과 같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지탄을 받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배후에는 마귀가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모릅니다.‘ 나는 그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했지, 그것이 마귀의 죄라고 하지 않았다“(본지 98년 2월호, 145~146쪽).

독자들은 섬세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윤목사가 무엇을 시인했고, 무엇을 부정했고, 무엇이 문제인지 놓치기 쉽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선 그의 중요한 변명 중에 “최목사의 주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윤목사의 회개관은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우리가 져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결국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138).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다“고 한 부분에서 보면, ‘우리가 회개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 돌아간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고, ‘결국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던 필자의 평가와 같은 말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변명이 사실관계상 다소 불분명하다.

그리고 “최목사가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인용한 나의 글은 다음과 같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지탄을 받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배후에는 마귀가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모릅니다.‘ 나는 그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했지, 그것이 마귀의 죄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에서 보면, 그가 ‘사람이 짓는 죄의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말했던 것은 시인하나, ‘그것이(성도가 짓는 죄가) 마귀의 죄‘라고는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단 윤목사의 변명 중에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윤목사가 그의 변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가 회개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 돌아간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마귀론에 나타난 이단성이 집약된 말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회개할 때에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죄가 마귀에게로 돌아가 마귀는 쑥대밭이 됩니다“(윤석전, 제천연합성회, 96. 11. 5~8, 10번 테잎). “마귀는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해요, 우리가 회개하는 순간 그 죄는 마귀에게 가서 마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것은 죄를 마귀에게 전가해서 마귀를 멸하는 최고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윤석전, 제천연합성회, 96. 11. 5~8, 13번 테잎).

죄에 대한 책임을 마귀에게 전가하는 것이 회개라는 주장을 분명히 했던 윤목사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필자가 이미 본지 97년 9월호에서 근거로 제시한 내용이다(136~137쪽). 따라서 윤목사가 “최목사의 주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윤목사의 회개관은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우리가 져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결국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138).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다“고 변명한 바에서 그의 취지는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회개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로 전가된다‘고 주장했던 바까지 없다고 하는 변명이라면 윤목사는 최소한의 진실도 없는 사람이 된다.

이제 문제는 선명해졌다. ‘사람이 짓는 죄의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말했던 것은 시인하나, ‘그것이(성도가 짓는 죄가) 마귀의 죄‘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윤석전 목사가 하고자 했던 변명인 것이다. 즉 인간이 마귀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 말이 얼마나 임기응변적인 거짓말인지 살펴보자. 다음과 같이 비판하겠다.

① 사실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를 하면 그 책임이 마귀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그 죄의 일차적인 책임이 마귀에게 있다는 뜻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단정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했다. 그가 말한 내용을 다시 인용하여 깊이 살펴 보면 이 점이 선명해 진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지탄을 받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배후에는 마귀가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모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만류한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술수입니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용서받을 수 없으나 성경에 죄는 마귀가 짓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 앞에서 마귀는 쑥대밭이 됩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부터 범죄한 자입니다. 죄가 거기서부터 나옵니다. 인간의 죄짓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결코 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들어날수록 형량은 없어집니다. 회개할 때에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죄가 마귀에게로 돌아가 마귀는 쑥대밭이 됩니다“(윤석전, 제천연합성회, 96. 11. 5~8, 테잎 10번).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니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다고 하는 말은 마귀가 죄를 짓게 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고 그래서 알지 못하고 지은 것이란 말이다. 다음의 말 속에 우리가 지은 죄는 마귀가 짓게 한 죄라는 주장이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을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 놓고 예수 못 믿게 하는 것이 처절하게 도적질(하게 하여) 죽이게 하는 것은 마귀의 일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온 것은 이 일을 끊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없이는 살아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종횡무진 죄인들을 죽이는 원수 마귀를 정죄하고 없애려고 왔습니다. ··· 사람을 붙들고 죄를 짓게 한 마귀를 벌 갚게 합니다. 그럼 누가 죽였습니까? 마귀(입니다.) ··· 마귀는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해요, 우리가 회개하는 순간 그 죄는 마귀에게 가서 마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것은 죄를 마귀에게 전가해서 마귀를 멸하는 최고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윤석전, 제천연합성회, 96. 11. 5~8, 테잎 13번).

그러니 이런 논리가 된다. “인간에게 죄가 있다. 그런데 그 죄 뒤에는 그 죄를 짓게한 마귀가 있다. 그래서 회개하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 전가된다.“ 이것이 윤목사가 인정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일차 책임이 마귀에게 있고, 회개를 하면 그 죄의 책임이 마귀에게 전가되는 것이라면, 결국 마귀의 죄를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② 그렇지 않다면 그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지탄을 받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배후에는 마귀가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모릅니다“라고 한 말 중에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지탄을 받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라고 한 말과 모순된다. 죄를 지으면 그가 지탄을 받아서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윤목사의 주장은, 마귀가 죄를 짓게 했기 때문에 마귀를 지탄해야지 죄 지은 그 사람을 지탄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뜻이 아니였다고 하는지, 무슨 해괴한 변명인지 모르겠다. 한다고 다 말이고, 쓴다고 다 칼이 아니지 않은가?

③ 이 점에 대해서 윤석전 목사를 옹호하고 있는 도한호 교수도 윤목사의 잘못을 부분적이나마 시인했다.

“(2) 죄의 책임을 모두 마귀에게 돌려버린다는 주장에 대하여 ··· 단지,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죄를 마귀에게 전가해서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 조금 이상하다“라고 했다(본지 98년 2월호, 158쪽).
문자적으로 이상하다는 말이 참으로 이상하다. 필자의 유추를 꼬집을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어찌하여 이렇게 이상한 비판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잘못을 일부분이라도 인정한 셈이다.

④ 더욱이 놀라운 점이 있다. 정작 윤목사 자신은 필자에게 직접 주었던 글에서는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점이다. 얼마나 윤목사가 거짓된 사람인가를 알게 하는 말이다. “죄를 회개하면 죄가 마귀에게 전가된다는 지적에 대해(137쪽). 이 부분은 전적으로 필자가 잘못 말했음을 인정한다“(본호, 논쟁 및 사건일지, 12번)고 했다. 그런데 신문광고와 본지에 보낸 반론문에서는 아무 것도 시인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윤목사는 여기에 이단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실은 항상 같아야 한다.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고 했다. 어떻게 필자 앞에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가 이제 광고 등의 반론문에서는 전혀 자신의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윤석전 목사의 이름으로 나온 광고문을 보고 윤목사가 직접 쓴 글이 아닌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됐다. 그것은 그는 자신에게 신학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제 신학적인 변증을 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를 직접 만났을 때에는 진실해 보였는데 글에서는 거짓말을 너무나 잘하기 때문이다.

⑤ 필자는 또다시 윤석전 목사의 마귀론에 나타난 이단성을 더 선명하게 밝히겠다. 본호에서는 지면관계상 그의 새로운 이단성을 더 밝히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하나 더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다음에 제시하는 말은 누가 보아도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마귀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윤목사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지은 어떤 죄도 마귀가 시켜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 죄의 책임은 마귀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상이 ‘인간의 죄에 대한 회개는 바로 마귀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것이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음에 제시하는 윤목사의 주장으로 이를 확인해 보자.

“교회에서 제 뜻대로 하는 자는 이미 전부 다 마귀에게 속해서 마귀의 밥이요. 오늘날 교회에서 마귀 얘기를 잘 안해요. 성경은 출발부터 마귀로 출발했어요. 마지막에 마귀는 지옥 보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 천국가요. 마귀와 함께하는 자 지옥가요. 그런데 시작이 마귀와 함께 출발, 마지막 끝에 마귀와 함께 역사가 일어나는데 마귀를 말하지 않아요. 왜 말하지 않느냐? 마귀를 잘 몰라서예요.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는 거예요. 공중의 권세잡은 악한 영들과의 대항이라. ··· 칼을 쥐고 사람을 팍 찔러 죽였어요. 칼이 징역가요 사람이 징역가요? 사람이 징역가지! 그러면 그 칼 갖다가 훌륭한 일 했다고 잘 모셔 둘까요?

그 칼은 범죄하는 데 사용당했다고 그는 전시해서 그 칼을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하고 버리고 말아요. 이와 똑같이 속에서 내 생각과 마음을 이용해서 죄는 마귀가 인간을 통해서 짓고 인간은 도구처럼 사용되어서 마귀가 죽을 때 함께 죽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할 것 없어. 잘못했으면 그 속에 악한 마귀 역사가 당신을 죄를 짓도록 썼다는 증거요. 그래서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겠느냐, 의의 병기로 사용되겠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죄를 짓는다는 것은 내 의지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의지를 완전히 마귀에게 맡기기 때문에 짓는 거요“(윤석전, 구정축복성회, 흰돌산기도원, 96. 2. 19~22, ‘영적 생활‘, 4번 테잎).

윤목사가 “결국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한 필자의 평가를 부정했는데, 위의 글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변명인가를 알게 할 뿐 아니라, 위의 말을 스스로 부정한다는 점이 바로 마귀론에서 그가 이단성이 짙다는 것을 또한 스스로 인정하는 말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찔러 죽인 어떤 사람의 손에 들려진 칼과 같은 존재란 말이다. 단지 칼은 칭찬을 듣고 훌륭한 일을 했다고 잘 모셔놓지는 않지만 정작 감옥에 가는 것은 칼이 아니라 찌른 사람인 것처럼 죄에 대한 우리와 마귀와의 관계도 같다는 것이다.

다시 인용해 본다. “칼을 쥐고 사람을 팍 찔러 죽였어요. 칼이 징역가요 사람이 징역가요? 사람이 징역가지! 그러면 그 칼 갖다가 훌륭한 일 했다고 잘 모셔 둘까요? 그 칼은 범죄하는 데 사용당했다고 그는 전시해서 그 칼을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하고 버리고 말아요. 이와 똑같이 속에서 내 생각과 마음을 이용해서 죄는 마귀가 인간을 통해서 짓고 인간은 도구처럼 사용되어서 마귀가 죽을 때 함께 죽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할 것 없어. 잘못했으면 그 속에 악한 마귀 역사가 당신을 죄를 짓도록 썼다는 증거요. 그래서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겠느냐, 의의 병기로 사용되겠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죄를 짓는다는 것은 내 의지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의지를 완전히 마귀에게 맡기기 때문에 짓는 거요.“

아무래도 윤목사가 거짓말의 영을 받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필자는 앞으로 본호 후에 윤목사의 마귀론에 나타난 이단성을 더 깊이 밝힐 것이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의 이단성이 짙어만 가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에게 이단성을 보이는 내용이 많다. 지면 관계상 다음에 또다시 밝히겠다. 이 마귀론에 이단성이 없다고 하는 학자나 목사가 있다면 그가 이단일 것이다.

4. 윤목사가 자신의 구원관을 문제 삼으려면 구원관을 설교하는 본문에서 문제를 삼아야 한다고 했던 점에 대하여.

윤목사는 필자가 자신의 구원관에 문제를 삼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원의 문제를 교회생활이나 기도생활에 국한시킨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가 교회생활이나 기도생활을 신앙문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구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구원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것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최목사는 기본적인 비판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적어도 나의 구원관을 문제 삼으려면, 내가 구원관을 설교하는 본문에서 그 문제점을 발견해야 한다. 성화된 삶을 강조하고,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목적인 본문에서 구원관의 문제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해석의 기본원리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회개와 신앙생활의 부분들을 구원과 연결시킨 데 있을 것이다. 최목사가 지적한 것처럼, ‘기도도 해야하고, 거룩한 교회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하고,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예배시간에 졸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원과 연결시킨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적인 것이다‘(141)는 말에는 다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목사는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그런 행위들을 구원관과 연결시킨 것이 문제였다고 그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 비약하여 나의 구원관이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이니, ‘복음을 폐하는 사탄적인 행위‘시하며, 나의 구원관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논평은 나의 구원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직접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본지 98년 2월호, 146쪽).

누가 기본적인 비판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인지, 누가 신학의 기본적인 원칙도 모르는 사람인지 살펴보자. 필자는 윤목사가 신학을 한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다음과 같이 변증하겠다.

① 우선 위의 글만 보아도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맞지 않다. 앞에서는 “최목사는 기본적인 비판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구원관을 문제 삼으려면 구원관을 설교하는 본문에서 문제를 삼아야 한다“고 했다가, 또 뒤에서는 “‘기도도 해야하고, 거룩한 교회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하고,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예배시간에 졸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원과 연결시킨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적인 것이다‘(141)는 말에는 다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어느 말이 맞는가 모르겠다. 문제를 삼아서 안 될 것을 문제 삼았는데 다소 일리가 있다는 말은 무슨 소리인가? 위에서 간경화를 찾아냈는데 어느 정도 옳을 것은 무엇인가?

②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윤목사의 말이 상황에 따라서 달라졌음을 알게 한다. 97년 9월 4일에 필자를 처음 찾아 왔을 때는 ‘성도의 성화적 삶을 강조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했고, 97년 11월 7일에 만나서 준 글에는 자신의 잘못을 보다 더 심도 있게 인정했고, 이제 필자가 “기본적인 비판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는 말까지 첨가하여 “구원관을 문제 삼으려면 구원관을 설교하는 본문에서 문제를 삼아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그의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인지 모르겠다. 아마 모두 진심이 아닐 것이다.

③ 위의 말이 객관적으로 맞지 않다. 구원은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좁은 의미에서는 거듭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성화와 영화를 포함하여 구원이라고 한다. 윤석전 목사의 말에 의하면 구원론 외의 다른 교리에서는 이단사상을 제기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이단이란 궁극적으로 구원의 문제인데, 구원론에서만 이단성을 제기할 수 있다면 다른 교리에서는 이단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무지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윤목사의 말에 의하면 92년 10월 28일 시한부종말을 주장한 이장림 씨는 절대로 이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장림 씨는 기독론, 신론, 인간론, 성령론, 그리고 사도신경에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윤목사의 말에 의하면 성화론에서는 구원에 대한 문제를 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비록 성화론에서 구원론을 침해해도 그것은 성화론일 뿐이요, 그러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신론에서는 신론만 문제를 삼고, 인간론에서는 인간론만 문제를 삼으라는 말이 아닌가? 이 말은 마치 죽을 병은 심장에만 생긴다는 말과 같다. 윤목사는 아마 위에나 간에나 뇌에나 장에서 죽을 병이 들었다고 말하면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다.

④ 역시 그의 진심이 의심스럽다. 필자에게 97년 11월 7일에 준 글을 직접 인용해 보자.
“구원론에 이단성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139쪽). 최목사는 지적하기를 내가 모든 문제를 지옥과 연결시켜 말한다고 한다. 돌이켜보니 그 지적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구원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는 것이 변할 수 없는 소신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목사의 지적대로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이 각각 다르고 신앙기질들이 다른 만큼 설교시에 존다든지 주일성수를 안한다든지 등등의 문제를 지옥간다고 표현한 것은 잘못되었다. 오직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목회일념에서 나온 발언이지만 당연히 내가 시정해야 될 일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나의 구원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밖에는 없다“(본호, 논쟁 및 사건일지, 12번).

이 말이 맞다면 저 말이 거짓이고, 저 말이 맞다면 이 말이 거짓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는 처음부터 윤목사는 진심을 따라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고 본다. 사실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시인했던지, 아니면 그의 중심에는 시인한 것보다 더 큰 죄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회개할  영적 진실과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나님과 그 자신만이 알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진심은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⑤ 그리고 윤석전 목사의 구원관에 의하면 안식교는 이단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안식교도 구원관에서만은 ‘믿음‘의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에 따라서 나오는 결과는 율법적 구원관이다. 윤목사의 말에 의하면 안식교의 율법주의적 구원관이 구원관이라고 밝힌 곳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시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만 구원관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교리도 구원관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얻었다고 해도 잃었다면 얻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결과이기 때문이다.

5.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한 점에 대하여
예배에 불참한다고, 예배시간에 존다고, 교회 봉사중에 불만 불평을 한다고, 여성도가 짧은 치마를 입음으로 남성도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한다고, 십일조 및 철저한 헌금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목사의 명령에 절대적 순종을 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교회 일과 관련하여 성도가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목사에게 상의하려 해도 지옥에 간다고 하는 윤목사의 주장에 대해 필자가 이단성이 있다고 하였더니, 윤목사가 대답하기를, 성화를 강조하다가 그렇게 되었는데 잘못이라고 시인하기도 하고, 또는 성화된 삶을 강조하고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목적인 본문에서 구원관의 문제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기도 하더니, 급기야 이제는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설교해 왔다. 구원을 위한 일회적 회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 성화를 위해 필요한 회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입장은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견인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임을 알고 있다“(본지 98년 2월호, 154쪽).

“침례교의 한 신학자는 구약에서는 민족적 배교 행위, 배교에 대한 예레미야의 관심, 신약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나 바울 서신에서 갈라디아서 1장만 제외하고 다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경고가 있고, 목회서신과 옥중서신,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히브리서, 요한서신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교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할 정도다. 따라서 최목사의 기준은 여전히 칼빈주의적인 것이므로, 그의 이단시비는 대단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위의 책, 154쪽).

① 우선 윤석전 목사가 잘못이 있다고 한 말과 모순된다. 그가 지옥을 운운한 것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라면 앞에서 절대로 잘못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윤목사는 분명히 “그러나 최목사의 지적대로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이 각각 다르고 신앙기질들이 다른 만큼 설교시에 존다든지 주일성수를 안한다든지 등등의 문제를 지옥간다고 표현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시인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장로교 교리가 어떻고 침례교의 교리가 어떻고 할 것이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교리적인 입장을 고수하면 된다. 

② 그보다 윤목사는 스스로의 깊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도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졌다. 왜냐하면 그는 필자가 그의 구원관에 이단성이 있다고 했더니, 필자가 기본적인 비판의 원칙을 무시했다는 말과 함께, 구원론을 설교하는 내용에서 구원론을 문제 삼아야지 성화론을 말하는 내용에서 구원론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성화론에서 구원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윤목사의 변증이란 것이 얼마나 임기응변적이요, 비논리적이요, 비신학적인가를 알게 한다.

③ 그보다 윤목사는 예정론에 대한 장로교의 입장과 알미니안 주의의 입장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배교시에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교리가 아니다. 그런 교리는 감리교나 침례교 어디에도 없다.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은 장로교냐 침례교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배교라고 할 수 있는가? 예배에 불참한다고, 예배시간에 존다고, 교회 봉사중에 불만 불평을 한다고, 여성도가 짧은 치마를 입음으로 남성도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한다고,  십일조 및 철저한 헌금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목사의 명령에 절대적 순종을 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교회 일과 관련하여 성도가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목사에게 상의하려 한다고 그것을 배교라고 생각하는가?

다음에 그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입으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보고 싶다. 사실 예정교리에 대하여 감리교와 장로교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단논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정신이 온전한 목사라면 장로교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감리교인도,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장로교인도 없다. 필자는 장로교 목사로 성도의 견인을 믿고 있지만, 그러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한다고 그를 이단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그렇게 한 일은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필자의 글 중에서 그런 부분을 본 일이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윤목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겠다고 하다가 그 진실을 버리고 회개 없이 적당히 살려고, 누군가의 급조된 도움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도망간 피난처가 바로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인데, 그 곳이 오히려 지뢰밭이 아닌가?

6. 이단 규정 기준이 교리중심적이어서는 안 되며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말에 대하여
필자가 지금까지 이단자들과 논쟁을 할 때마다 공교롭게도 대부분 이같은 말을 들었다. 대표적으로 안식교측이 그랬고, 지방교회측도 그랬고, 김기동측도 그랬다. 그런데 지방교회측과의 논쟁을 가지고 필자를 공격하고 있는 윤석전 목사도 유사한 주장을 하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먼저 그의 말을 살펴보자.

“교리적으로 잘못되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교리만을 이단척도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교리가 성경과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본지 98년 2월호, 148쪽).

“최목사가 성경의 말씀을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있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분명 이단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최목사는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이런 비논리적, 비양심적, 반기독교적, 그리고 비인격적 왜곡유추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 주). 그에게는 적어도 이단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성경보다는 우리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교리가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위와 마찬가지 수준의 유추라고 본다: 필자주)“(위의 책, 148~149쪽).

“주님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하나됨과 화해를 원하신 분이다. 그런데 교리적인 입장에서 이단의 기준을 세분할 때는 교회간에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고, 함께 패망의 길로 달릴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위의 책, 149쪽).

“이단의 기준점이 성경이냐, 아니면 역사적 교회의 교리와 전승이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성경이 아닌 역사적 교회의 전승과 교리가 이단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그 이단 판별의 기준에 보편성이 결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교파와 교파간의 교리적 논쟁으로 발전하여 무익한 투쟁으로 서로의 정력을 소모하는 양상이 되고 말 것이다“(위의 책, 149~150쪽).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가 무엇이냐에 있다. 도대체 개신교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기본 입장을 어디서 어떻게 찾겠다는 말인가? 이런 관점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가 이와 같은 이단논쟁사가 된 것이 아닌가?“(위의 책, 150쪽).
“최목사는 이단을 판별하는 데 적어도 성경보다는 역사적 교회의 교리에 더 비중과 유용성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의 입장과 역사적 교회의 입장이 동일한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반대로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면 최목사의 이단시비 관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보다는 교회 전통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위의 책, 150쪽).

“교회 역사 속에서 행해졌던 이단 시비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각종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단의 문제를 공동 대처했던 과거의 경험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서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종교회의들의 결과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정립하고 수호해 나갔으며, 이단의 정체를 우리에게 밝혀 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 반대로 종교회의의 지상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모든 종교회의가 다 올바른 것은 아닐 수 있고, 그 종교회의의 결정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신중한 비판의 시각도 만만찮다“(위의 책, 152쪽).

“따라서 최목사가 지나치게 교리 중심적으로, 역사적 교회의 교리 전통에 의존하여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직된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사가 증명하듯이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위의 책, 152쪽).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① 우선 윤석전 목사는 필자의 사상을 엉뚱하게 추측함으로 비판을 시작했다. “최목사가 성경의 말씀을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있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분명 이단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최목사는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더니, 이제 “그에게는 적어도 이단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성경보다는 우리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교리가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유추하더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이 아닌 역사적 교회의 전승과 교리가 이단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그 이단 판별의 기준에 보편성이 결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더니, 마지막으로는 단정하여 “최목사는 이단을 판별하는 데 적어도 성경보다는 역사적 교회의 교리에 더 비중과 유용성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의 입장과 역사적 교회의 입장이 동일한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반대로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면 최목사의 이단시비 관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보다는 교회 전통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본인더러 “성경보다는 교회 전통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아예 단정을 한 것이다.

이런 유추에도 변증할 가치가 있는가? 만일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윤목사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윤석전 목사는 도둑놈은 아니다. 그런데 도둑놈일 가능성도 있다. 아마 윤석전 목사는 도둑놈일 확률이 높다. 아니 분명히 윤목사는 도독놈임에 틀림이 없다.“
말이 되는가? 이런 비논리적이고 비윤리적인 사람과 논쟁을 해야 한다는 점이 한심하다.

② 윤목사가 추측으로 논리를 전개시켰는데, 오히려 필자가 볼 때 그는 성경을 말하며 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윤목사는, 자신의 성경에 대한 해석적 입장은 교리가 아니라 곧 성경이라고 보는 것 같다. 만일 이단 비판의 기준을 교리라고 하면 틀렸고 성경이라고 해야 맞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위험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교리라 생각하지 않고 곧 성경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해석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교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마다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단들이 “성경“ “성경“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적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들이 가진 교리만이, 그것이 성문화된 교리였든 성문화되지 않은 교리였든,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예를 들어 분명히 안식교와 윗트니스 리에게 있어 그 교리는 각각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그런데 둘다 자신의 입장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둘다 성경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 땅에 사는 사람마다, 체계화되었든 되지 않았든, 모두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있듯이 모든 성도마다 자기 교리를 가지고 있다. 윤석전 목사가 비록 목회자요,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마귀론이 없다고 하지만, 그에서도 마귀론은 물론 다른 부분에까지 자기 교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 아닌가?(“오늘날 교회에서 마귀에 대하여 가르치니 않는 것은 마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그것이 바로 윤목사의 교리인 것이다.

③ 그리고 필자가 이단 비판의 기준이 교리라고 말할 때는 성경과 대치의 측면에서 한 말이 아니다. 윤리적인 면과 대치된 측면에서 한 말이다. 종교학자들의 입장으로나, 진보화된 신학으로는 이단문제를 교리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윤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 진다. 윤리적인 문제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모두가 이단이 될 수도 있고, 다 이단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윤리적으로 선하면 이단이 아니란 말이 된다. 비록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리적인 문제 속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일반적인 범죄에 속할 뿐 이단 문제는 아닌 것이다. 사이비 이단들의 금품갈취나 가정파괴는 일반인들에게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윗같은 성군도 살인죄와 간음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단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예컨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이 되었던 아리우스의 경우, 그는 윤리적인 잘못이 없었으며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단이 되었다.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④ 그리고 윤목사는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가 무엇이냐에 있다. 도대체 개신교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기본 입장을 어디서 어떻게 찾겠다는 말인같라고 하여 진짜 이단적인 소리를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이단문제라는 제한된 측면에서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윤목사는 이단을 논할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은 자신의 교단 즉 기침 소속 목사들만이 아닌 범 개신교 목사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면서, 필자에게는 장로교 교리를 기준으로 자신을 이단시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윤목사는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의 기준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개신교끼리는 교파가 다르고 또 각 교단마다 교리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면서도 서로 교제하고 서로를 이단으로 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예컨대 윤목사는 니케아신조(A.D. 325)의 삼위일체나, 콘스탄티노풀신조(A.D. 381)의 성령론이나, 칼케돈신조(A.D. 451)의 기독론 및 세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부인하는가?

⑤ 여기서 윤목사의 막힌 귀를 뚫어주고 싶다. 남의 글을 인용하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도,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면 안 된다. 윤목사는 필자가 오래 전 <교회와신앙>에 쓴 글에서 “이단문제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교리적인 문제“라고 한 말을 인용해서 비판했다. 본지의 창간호(93년 10월호)까지 찾아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또 필자가 교리는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늘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교조주의가 된다고 한 말도 인용을 했어야 한다. 직접 보자.

“먼저 무엇보다도 보수주의자에게 교리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교조주의(doctrinism)라고 합니다. 즉 성경에서 교리가 나왔지만 교리도 성경 앞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의 경우, 성경에서 나온 교리가 성경 위에 올라가 심지어 성경보다 더 절대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교리는 성경을 바르게 보는 안경이요, 이단을 막는 기준이요, 신앙을 바르게 인도하는 근거요 길이지만 교리도 성경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리와 성경을 이원화하자는 뜻에서가 아니라 교리는 변해도 성경은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본지 94년 8. 9월호, 110쪽).
그런데 윤목사는 왜 이 글은 보지 못하였는가? 일부러 막은 눈과 귀인가, 스스로 막힌 눈과 귀인가?

⑥ 여기서 이 문제를 통해 윤목사의 또 다른 모순을 증명해 보자. 윤목사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전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말이지만, 바로 그것이 교리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것도 더 놀라운 점은 바로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 교리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음은 또 다른 모순이 아닌가?

사실 필자에게 내재된 교리는 있으나, 윤목사를 비판할 때 직접 교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일이 없다. 무슨 신조 하나라도 인용했는가? 구체적인 언급을 한 일이 없다. 그런데 필자가 장로교인이라고 한 점 하나로 그런 유추를 하고 있는 것이다.

7. 필자의 기준이 칼빈주의적이기 때문에 주관적이란 말에 대하여
윤목사는 계속해서 필자가 언급한 일이 없는 장로교를 말하면서 필자의 기준이 칼빈주의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따라서 최목사의 기준은 여전히 칼빈주의적인 것이므로, 그의 이단시비는 대단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본지 98년 2월호, 154쪽).

위의 사상과 같은 말이지만 간단히 대답하겠다.
① 윤목사는 필자가 장로교의 기준을 가지고 이단을 비판했다고 하는데, 앞에서 그가 했던 말, 즉 필자의 지적은 비판할 자료를 제공(확보)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지 비판기준의 객관성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느니, 필자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느니 하는 말과 모순된다. 자기가 하는 말도 자기가 모르고 하는 것 같다.

② 그리고 윤목사는 필자의 장로교 사상이 무엇인지, 그것이 역사적 교회의 보편적인 교리와 상치된 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 없다. 단지 안개속에 감추어진 귀신집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 동안 왜 이들이 필자를 공격하지 않았겠는가? 대서특필하여 비판을 했을 것이다. 묻는다. 이단비판을 함에 있어 필자의 어느 사상이 장로교에만 해당되고 침례교에는 해당되지 않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그 답을 목메이게 기다린다. 그런 것이 있다면 당장 시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③ 혹 윤목사가 그렇게 느끼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면, 아마 자신이 말한,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그의 구원관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가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했던 주장이 알미니안주의의 사상이라면, 필자가 거기에 이단성이 있다는 비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알미니안주의가 아니다. 그것이 알미니안주의라고 한다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칼빈주의니 알미니안주의니 말할 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이단적일 뿐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 점에서도 장로교의 교리를 기준으로 말하지 않았다. 윤목사가 그렇게 유추하고, 그렇게 단정하고,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알미니안주의도 아닌 것을 알미니안주의라고 하여 스스로 만든 종이 보호벽일 뿐이다.

8. 이단 판단의 기준에 대하여
윤석전 목사는 필자에게 이단에 대한 정의를 밝히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이단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밝혔다. 요약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직접 인용해 보자.

“(교리적 측면) 그러므로 이단의 첫째 조건은 자기를 사신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불신을 일으키는 것으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모든 사상들과 그분의 구원의 완전성을 손상시키는 그릇된 신앙관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유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에비온주의자들과, 근대에 들어와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자유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본지 98년 2월호, 151쪽).

“먼저 이 미혹케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를 말한다 ··· (요이 1:7) ··· 이런 종류의 미혹자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관련이 있다. 이 사상은 영과 육의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고대 헬라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위의 책, 151쪽).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를 미혹의 영이라고 말한다(요일 4:6)“(위의 책, 151쪽).
“이처럼 성경의 핵심사상은 이단의 실체를 단순히 성경 해석상의 차이 정도에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이런 제한된 이단 규정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이단 시비를 벌여 왔던 이단감별사들의 월권 행위에 귀감이 되어야 한다“(위의 책, 151쪽).

“(사회 윤리적 측면) 미혹케 하는 자들은 허탄한 자랑을 일삼으면서 육체의 정욕에 빠지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벧후 2:18)“(위의 책, 151쪽).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자들을 미혹된 자들이라고 규정한다(벧후 2:15)“(위의 책, 151쪽).
“미혹하는 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들이 주를 섬기지 않고 자기의 배만 섬긴다는 데 있다(롬 16:18)“(위의 책, 151쪽).
“적어도 성경에는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실수하는 차원이 아니라, 본래부터 거짓된 자들이며, 택한 자를 미혹케 하려는 악한 자들이었다“(위의 책, 152쪽).

① 사실 윤석전 목사가 정직한 사람이고 객관적인 안목을 가졌다면, 필자가 지방(회복)교회측과의 논쟁에서 한 말을 가지고 그가 이단에 대한 정의를 논할 때 그 논쟁 중에 필자가 밝힌 이단의 정의가 있음도 알아야 했고 또 그 내용도 밝히고 필자를 비판했어야 한다. 그런데 윤목사는 그렇지 않았다.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인용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하는지 독자들은 알 것으로 믿는다. 본지 97년 11월호 165쪽에서 밝힌 이단의 정의를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펴보기 바란다.

② 윤목사가 위에서 열거한 내용은 분명히 성경에서 찾아낸 말씀들이지만 또 다른 해석을 요하는 것으로 다시 정리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위의 말로 지금까지 정통 교회 속에서 개신교가 인정하는 종교회의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있었던 이단논쟁에 대하여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위의 말에 의해서만 이단을 구별한다면 이단문제를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 교리가 생긴다. 위의 말로는 종말론, 인간관, 계시론, 그리고 성령론 등의 교리에서는 이단논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③ 그리고 여기서도 재미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위의 말을 윤목사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면 자신에게 이단성이 있다는 자인의 뜻이 들어 있다. 무엇이 그러한가 하면 소위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대한 문제이다. 즉 위에서 그가 말하기를, “이런 종류의 미혹자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관련이 있다. 이 사상은 영과 육의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고대 헬라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본지 98년 2월호, 151쪽)고 했다. 그런데 그가 97년 11월 7일에 필자에게 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영혼의 때‘를 강조한다든지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은 듣기에 따라서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으로 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라고 한 것이다. 어느 정도 자신에게 이단성이 있음을 느끼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게 보면 필자가 윤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옳은 지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④ 그리고 윤목사의 소위 이단 정의라는 것으로 하면 기침 교단이 모순에 빠지게 된다. 기침 교단은 88년 김기동 씨를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위의 원리 어디에 걸려서 김기동 씨를 이단이라고 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윤목사의 기준으로 하면 김기동 씨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기침 교단의 결의가 잘못됐음을 먼저 시인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기침 교단에서 88년 8월 29일에 김기동 씨를 이단이라고 규정하여 발표했던 전문을 제시하겠다. 결의를 보면 성서론, 성령론, 창조론, 악령론, 그리고 천사론에서만 이단이라고 했다.

“(1) 성서론: 김기동 씨는 자신의 체험과 주장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의적 해석을 가하고 있읍니다.
그 예로:

① 성서적 근거보다는 자신의 축사 경험과 귀신들의 실토하는 말들을 종합하여 “마귀론“ 신학을 정립하였으며,
②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오로지 사탄 박멸이라는 소극적 측면에만 국한시킴으로써 보다 중요한 구원, 교회, 하나님 나라라는 적극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고,
③ 가령 창세기 3:8의 경우 하나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씀을 문화를 인식하여 추위를 피해 움막을 지으려고 나무 사이로 들어간 것이라고 해석하는 등의 자의적 해석이 많다는 점 등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침으로 “오직 성경만이 그리스도인 신앙과 실천의 최고 권위임“을 믿는 모든 개신교인의 입장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라는 성경의 완전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읍니다. 이는 개인의 체험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려는 위험한 착상이며, 성령의 초월성을 마치 기록된 계시의 말씀에 대한 초월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무지의 소치로 인해 자신의 체험을 정당화하려는 위험한 시도라 아니할 수 없읍니다.

그 예로:
① “성경도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은 이들이 느낀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고 과거에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리라 하고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의 좁은 그릇 안에서만 머물고 있기에 이보다 더 큰 많은 능력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영원한 관계」p. 68)
② “성령의 역사는 성경보다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있느냐 ··· 어디에 있느냐 ··· 하면서 추궁하는 것은 보수적이라기 보다는 지나치게 옹졸한 태도입니다.“(「영원한 관계」p. 68)
③ “성령의 활동은 성경의 테두리를 초월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성령으로 그 이상을 알게 되고 성령으로 성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영원한 관계」pp. 68~69)
(2) 성령론: 김기동 씨는 삼위일체 중 한 분이신 성령과 피조물인 천사를 혼돈하고 있읍니다.

그 예로:
①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눈에 보이던 불이나 바람 같은 소리는 성령이 아니라 바로 성령을 수행하는 천사들인 것입니다.“(「마귀론」p. 134)
② “구약의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를 말합니다.“(「마귀론」p. 70)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천사를 혼돈하는 것은 성서 전체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3) 창조론: 김기동 씨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성서의 대전제를 부인하고 있읍니다. 김 씨는 “아담은 ··· 땅에 충만한 수 중에서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마귀론」pp. 84~85)이라고 말했읍니다. 이와같이 김기동씨는 창세기 제 1장의 창조에 대한 기록 이전에 이미 땅 위에 인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읍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창조의 목적은 타락한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며 그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단을 형벌하려고 만든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읍니다(「하나님의 의도」p. 29;「신앙문답정신 」p. 8;「마귀론」p. 4)

그 예로:
① “죄짓고 오는 인간에게 상까지 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은 마귀를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위한 사전의 안내자였기 때문입니다.“(마귀론 74페이지)
② “인간은 사단을 정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인간은 그가 오실 길을 위해 봉사한 것입니다.“(마귀론 74페이지)
③ “창세기 1장 27절의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할 때의 이 남자와 여자는 지금 말하는 인격적인 사람이라기 보다는 남자와 여자라는 곧 암컷과 수컷이라는 하나의 자웅을 구분하는 이치로서의 표현입니다.
④ “이들 역시 몸과 혼을 합해 완전한 인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이 있는 동안 이들에게는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었으며 또 문화도 있었읍니다. 다만 영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죄지은 자들은 내세가 없는 자들이기에 더 행복할는지 모릅니다.“(마귀론 81페이지)

⑤ “결국 아담은 선택된 자요, 나머지 문화적 존재인 네피림은 버림받은 탈락자입니다.“(마귀론 55페이지)
⑥ “이와 같이 땅에 충만한 수의 사람 중에서 아담 하나를 뽑았으니 그 아담이 얼마나 개화된 인간이었겠읍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한 사명자를  불러 이 기존적인 인격 위에 함구적 가치를 부여하심으로써 생령이 되게 하셨읍니다.“(마귀론 83페이지)
⑦ “아담은 몇몇 사람 중에서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땅에 충만한 수 중에서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입니다.“(마귀론 84페이지)

⑧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부터 시작했으나 아담은 충만한 수의 사람 중 하나를 뽑아 경건한 자녀를 얻기 위해 분리시킨 것입니다.“(마귀론 8페이지)
그러나 성서는 세상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지으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축복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창 1장). 또 인간 창조의 목적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요 아담 이전의 어떤 형태의 인간 창조도 부인합니다.

(4) 악령론: 악령에 대하여는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신자의 사후 존재가 곧 귀신이라는 등 무속신앙으로까지 전개하고 있읍니다.
그 예로:
① “저는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는 것은 저의 학설이며 이론입니다.“(「마귀론」p. 179)
② “천사가 지위를 떠났을 때 이를 혁명이라 합니다. 바로 사단이란 말은 혁명가란 뜻입니다.“(「마귀론」p.37)
③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 할 때 불신자의 영이 귀신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귀신으로 동일하게 취급합니다.“(「마귀론」상 p. 179)

④ “자연 수명이 백살의 을이라는 사람이 암으로 60살에 죽었다고 합시다. 그는 자연 수명에서 60살에 죽었기에 아직 40살이 남아 있읍니다. 이때는 무저갱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음부에서 자연 수명이 차기까지 40년간을 마귀와 그 사자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마귀론」상 p. 187)사람(불신자)의 영이 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는 주장은 전통적인 정령 숭배 사상에서 나온 미신일 뿐,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은 신자건 불신자건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떠난 영혼은 즉시 신자는 낙원으로 불신자는 음부로 들어가서 다가올 심판의 날을 기다리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읍니다. 이 사실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가운데서 분명하게 설명되었으며(눅 16:19~26). 십자가 우편의 강도에게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신 말씀도 이를 증명하고 있읍니다.

또한 성경은, 마귀는 타락한 천사의 일부로서 무저갱(벧후 2:4;유 1:6)에 감금되지 않고 세상에 풀려나온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읍니다(엡 6:12).

(5) 천사론: 그는 천사는 지금까지도 타락되는 과정에 있다는 비성서적 주장을 하고 있읍니다.
그 예로:
① “신자에게 도우라고 보낸 천사는 신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변되어 미혹의 영이 된다“(「마귀론」 상 p. 141).
② “미혹의 영인 천사는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그는 불신자들을 찾아 미혹의 영으로 괴롭히는데 가변된 천사는 없어지지 않는다“(「마귀론」상 p. 142).
③ “신자가 혈기를 자꾸 내기 시작하면 천사를 가변시키는데 예를 들어 혈기 내게 하는 미혹의 영이 들어 있으면 이를 능가하려면 더 많은 천사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마귀론」p. 141).
④ “신자의 불의를 따라 그의 천사가 가변되기 때문에 천사를 구제해야 한다“(「마귀론」중 p. 170).

이와 같은 주장은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자의적 해석에 의한 것이며, 자신의 주관적 체험에 바탕을 둔 편협된 착상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이외에도 김기동 씨의 가르침 안에는 교리적 과오가 수없이 많으나 일일이 찾아서 바른 견해를 제시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상식 이하의 신앙행위(거울을 보고 자신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는다든가, 귀신을 쫓기 위해서는 욕 잘하는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등등)는 그의 불건전한 신앙태도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읍니다. 따라서, 본 총회는 이와같은 김기동 집단을 이단으로 규정한바, 본 교단뿐 아니라, 온 한국교회가 성서 위에 굳게 서서 그릇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유광석 목사.“

9. 자신이 교주와 유사하지 않다는 점에 대하여
이 세상에 이단이라도 이단이란 말을 좋아할 사람이 없고, 교주라도 교주란 말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먼저 윤목사의 주장을 살펴보자.

“최목사는 ‘윤목사의 목사관에 의하면 그는 신격화된 교주와 유사하다‘고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유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최목사는 그 근거로 목사의 권위가 너무 지나치다, 성도들에게 폭력을 사용한다. 목사의 손에 성도들의 생사권이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등을 들고 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신격화된 교주의 모습으로 나를 둔갑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교인들에게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때로는 성도들을 때려주기도 한다.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의 생사를 책임지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신격화된 교주가 되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순종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신앙을 멀리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가 제 자식을 매로 다스리는 것을 보고 마치 불량배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왜곡 아닌가?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서 성도들은 그 영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 어찌 목사의 역할이 중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일개 윤목사의 실권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윤목사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인 것이다. 어찌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곡해하는가? 그런 면에서 다소 나에게 지나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을 일이다. 이 문제를 신격화된 교주니, 이단이니 하는 문제로 비화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본지 98년 2월호, 147쪽).

다음과 같이 비판하겠다.
① 우선 그가 시인한 말 속에도 정상적인 목자상이 아닌 요소가 들어 있다.
“때로는 성도들을 때려주기도 한다“,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의 생사를 책임지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서 성도들은 그 영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 어찌 목사의 역할이 중하지 않겠는가?“
바울은 사도로서도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는다고 했던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② 도한호 교수도 윤목사의 목회관이 침례교의 정체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필자가 알기로는, 윤목사의 목회방식은 신자들에게 절대순종을 요구하고, 교회의 제직도 모두 직접 임명한다고 한다. 이것은 민주적 회중정치를 표방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권고하는 침례교회의 정체와는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본지 98년 2월호, 160쪽).

③ “절대 순종을 요구한다“는 말을 윤목사 스스로도 했고 도교수의 말로도 확인됐다. 그렇다면 윤목사에게 절대순종을 요구할 어떤 권위와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교주적이다. 실제로 그렇다고 본다. 왜냐하면 윤목사가 그냥 교인을 때리고 또는 절대순종을 요구한다고 해도 잘못인데, 바로 그 순종을 천국 지옥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윤목사에게 절대순종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이것은 목사관이니까 여기서는 구원관을 말할 수 없다는 귀신같은 소리를 할 것인가? 맞아서 구원받고, 목사에게 성도를 때릴 권리가 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맞아 죽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절대 순종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외에는 요구할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윤목사는 이단이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지면관계상 본호에서 윤석전 목사의 이단성에 대하여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분석되어 있는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윤석전 목사의 이단성을 밝히는 새로운 자료들이 필자에게 접수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그의 마귀론에 나타난 이단성 중에서 이중아담론을 가르친 내용이다. 다음에는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의 인간관에 나타난 이단성은 무엇보다도 짙은데, 독자와의 약속대로 그것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필자는 지금까지 밝힌 내용 외에 다른 것은 이미 교단적으로 시작된 연구(예장 합동, 통합)에 어떤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뒤로 미룰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기도하면서, 그리고 윤석전 목사의 회개를 기다리면서 결정하겠다. 분명한 것은 그의 이단성은 옅은 색이 아니라는 점이다. 짙은 색이다.

필자가 염려하는 점이 또 있다. 윤석전 목사가 필자의 변증으로 자신의 입장이 불리하면 이제 또다시 변증하지 않겠다고 변신할까 염려스럽다. 이단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면 변증을 하다가도 불리해지면 ‘변론은 무익하다‘는 해괴한 논리로 중단해 버리기 일쑤이다. 윤목사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으로 믿어 본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3월호)

최삼경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목회자 설교 준비 모임, ‘프로
‘여자 아빠, 남자 엄마’...
목회자 성범죄 매주 1건 발생 ‘
목사 은퇴금, 신임 목사 권리금으
‘기독사학’ 생존과 발전 방안은.
목표의 재설정이 필요한 교회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현장을 가다(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