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요한 목사(황창연) / 선교사

주를 따르기 위한 전제 조건

본회퍼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를 심도 있고 강력하게 서술합니다. 그는 누가복음 9장 57-62절에 나타난 예수 따르기에 실패한 세 부류의 제자를 언급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지 않으셨고, 두 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부르실 때 따르기는 하되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치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먼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주님은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마저 저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며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합당한 제자의 자세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떤 삶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둘째 부류는 주님이 부르셨음에도 부르심에 대한 순종보다 더 우선시하는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부류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정도, 그 시기도 자기가 정하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는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언급하며 제자도에 대해 좀더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해 요구하기 이전에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야 주님은 비로소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 수난 예고는 성경에 총 네 번 나옵니다. 첫 번째 예고는 지금처럼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나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이 시기는 공생애 3년 차이므로 적어도 제자들이 주님께 2년간 제자훈련을 받은 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에서 ‘십자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제자도에 해당합니다.
 

예수의 제자훈련의 과정을 간략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요구받을 수 없으며, 십자가를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제자도 이전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면 누구든지 그는 종임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데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현재 생활을 그대로 영위하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아무리 인원이 많아도 교회 안 진정한 새 생명의 변화가 없습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아실현이 아닌 자기 부인
 

주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하는 자기 부인은 첫째로, 자아실현의 꿈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아실현은 휴머니즘의 가장 근간이 되는 명제이자, 심리학의 중요 전제입니다. 기독교 심리상담도 자아를 중시하고 상처받은 자존감을 치료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가족 역시 확대된 자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녀는 심리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되기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지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따르는 제자는 자아실현보다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것을 요구받습니다. 이는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생활, 나아가 자기 생명을 버리라는 요구입니다.
 

한편, 자기 부인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태도라면, 권리 포기는 자기 부인의 가치관이 밖으로 표현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당신은 어떤 권리를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내가 마땅히 누리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십자가 영성을 지닌 제자의 삶의 특징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알리고 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주장할 것을 부추기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의 조류와는 정반대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십자가 정신을 직접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18절에서 바울은 넉넉한 생활, 결혼, 후원을 받아 사역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복음 전도자들이 생계비를 지원받는 것은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9:14).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할 때 다른 사도들이 공궤를 받으며 가르친 것과 대조적으로 교회에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틈틈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어 생계비를 마련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에서 그는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는 이유를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b)
 

그리고 나아가 바울은 복음 때문에 자신이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주님께 받을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
 

자아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자, 즉 십자가 영성으로 살아가는 제자는 복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으며 자기 권리를 다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하소연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마땅한 대우와 사례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정당한 권리조차 다 쓰지 않는 것을 오히려 상급으로 여깁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9:16-17).
 

예수께서 보여 주신 권리 포기의 극치는,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종의 자리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실 분인데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가장 낮은 자리로 자처하여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빌 2:6-8). 이는 모든 인류보다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믿을 수 없이 크고 위대한 사랑입니다.
 

십자가 영성으로 살아가는 제자는 사역을 하면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거나 주인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3-9절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 교인들에게 개척자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한 모습으로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과 다른 이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분별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3-9).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은 더 큰 것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말해 주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것을 가지고 주변 사람을 먹일 때는 겨우 한두 명 나눠 먹을 수 있겠지만, 주를 위해 우리의 것을 내어놓았을 때 주님이 축사하시면 5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 복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 쏭상지에(宋尚節, 1901~1944)는 젊은 시절 미국 유학길에 올라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처음 유학 갈 때는 신학을 하려 했으나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에 실망하여 전공을 바꾸어 일반 학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귀국길에 오를 때 그의 마음은 번민으로 가득 차 괴로웠습니다. 결국 그는 귀국하는 중 배에서 성령의 강한 감동을 받고는 자신의 박사학위 증명서를 바다에 던져 버리고 그 후 온전히 복음 전도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중국뿐 아니라 대만, 동남아에서 수많은 복음 전도 집회를 열었고, 쉬지 않고 중보기도 사역에 헌신한 결과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부흥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였습니다. 43세의 나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지금까지도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도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사는 동안 권리 포기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첫째로 ‘목사’, ‘선교사’라는 호칭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아버지가 목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호칭에는 그에 걸맞은 대우가 따라옵니다. 한국에서는 ‘목사’라는 직분이 제 정체성과 같이 느껴졌는데, 선교지에서는 ‘선생님’, ‘아저씨’로 불리고 교회에서는 ‘형제’라고 불리니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얼마나 높아져 있었고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칭 문제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 높아진 자아를 깎아 버릴 것을 주님은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를 포기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전화 통화나 선교 편지를 보내는 일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어서 인편이 있을 때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때가 되면 편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선교사라는 신분으로 사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늘 공안의 감시를 의식하느라 많은 인간관계와 사역에 제약이 있었지만, 덕분에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비본질적인 사역에서 벗어나 더욱 주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또한 자유를 제한당하는 경험을 통하여 그간 당연하게 누렸던 많은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