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는 하위렴(William B. Harrison)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현재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를 다룬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에 이어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을 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를 연재한다. 백종근 목사 /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군산의 개항과 침탈의 시작
 

1899년 5월 군산이 개항되었다. 옥구, 익산 그리고 김제를 배후로 하는 군산은 호남평야의 관문이었다. 이 3개 군을 포함한 호남평야의 미작 경지비율은 전국 평균이 37%인데 반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72%에 이를 정도로 일망천리一望千里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평야 지대로 전국 최대의 미곡 생산지였다. 삼한 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碧骨堤는 '벼의 고을'에서 '볏고을', '볏골'로 변천되고, 음을 따라 한자로 표기한 지명 벽골碧骨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벼농사의 고장이었다. 일제는 처음부터 호남평야를 식량 생산기지로 눈여겨보고 있었다.
 

동학농민항쟁의 아픈 역사가 가시기도 전에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1906년에 통감부가 수리조합 조례를 공표하자, 앞을 다투어 지목변경地目變更이 가능한 토지와 황무지를 헐값으로 사들여 수리조합을 설립하고 경작지로 변경해 갔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의 요체로 등장한 수리조합이 식민지 지주제 구축의 방편이 되자 일본인들의 토지 수탈은 점점 노골화되어 갔다.
 

군산 인근에는 이미 미야자키宮崎 농장, 구마모토熊本 농장, 시마타니嶋谷 농장 등이 세워져 있었고, 익산의 호소카와細川 농장, 오하시大橋 농장, 김제의 이시카와石川 농장, 하시모토橋本 농장과 같은 대농장들이 속속세워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지가地價는 일본의 십 분의 일밖에 되지 않아 해를 거듭할수록 호남평야 대부분 땅이 일본인 지주들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값싼 노동력으로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는 이 지역의 비중이 날로 커지자, 일제는 운송과 반출을 손쉽게 할 목적으로 이 지역에 대단위 토목공사를 진행했다. 1908년 군산과 전주를 잇는 신작로를 건설하고 곧이어 전주-군산 간 철도도 개통했다. 일본인이 소유한 대농장을 지나도록 노선을 계획하고 역사驛舍 역시 농장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위치에 두었다.
 

군산에서 제일 가까운 구마모토熊本 농장 같은 경우는 경지면적이 1천만 평에 소작농만 3천여 명이고, 이들 가족까지 합하면 2만여 명이 넘을뿐더러 농장의 사무직원만 해도 50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까, 농장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산 인근의 개정開井역은 순전히 이 농장의 쌀만을 실어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역이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가 끝난 후 서너 달 동안은 볏섬을 가득 실은 달구지 행렬이 신작로에 이삼십 리씩 꼬리를 물었다. 군산선의 개통으로 화물열차까지 가세하자 일본인들은 편리한 운송망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하여 농지를 점유하고, 수확한 쌀을 항구 근처의 창고와 정미소를 거쳐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 전군도로全群道路는 철두철미 수탈의 길이었던 셈이다. 군산항에서 실어내던 쌀이 정점을 찍었던 1934년에는 한해에만 200만 석이 넘을 정도였다.

군산항에 쌓여있는 쌀 가마니(사진= 동국사)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차와 면화를 인도에, 커피를 브라질에, 향료를 동남아에 이식시켜 착취해왔던 플랜테이션 농업 형태를 고스란히 조선의 미작농업에 적용했다. 토지와 소작은 조선인이, 판매와 유통은 일본인이 하는 전형적 식민지 농업형태였다. 유럽의 동인도회사를 그대로 흉내 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설립하고, 식민지 경제 수탈을 교묘하게 전담시켰다.
 

쌀농사로 현물시장이 형성되자 군산은 전국의 어느 지역과도 다르게 차별화된 독특한 경제블록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쌀의 소비지가 일본이다 보니 매일같이 오사카에서 결정되는 미곡 시세가 지역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현물시장의 가격등락에 따라 그 시세 차액을 노리는 투기가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점점 도박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도박으로 변한 쌀 투기는 미두꾼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사회적 부작용들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현물 없이 쌀 투기를 일삼는 도박에 손을 댔다가 토지가 고스란히 은행의 신탁 관리로 넘어가거나, 빚을 갚지 못해 패가망신하는 자들이 속출하면서 조선인 지주들의 몰락을 더욱 촉진했다. 이 고장의 소설가 채만식은 그의 소설 '탁류'濁流에서 미두에 몰두했다가 망해가는 지주의 이야기를 쓰면서, 일제의 수탈과정에서 빚어지는 안타까운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쌀의 반출과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이루어진 도시계획으로 무분별하게 산허리가 잘려 길이 나고, 조계지에서 외항으로 나가는 터널이 뚫리기도 했다. 초기 군산 선교부가 있던 해안가 수덕산 봉우리가 없어진 것도 이때였다. 내항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매립하고 대대적인 항만 축대 공사를 완공해 부두의 정박 시설을 크게 확충하는 한편, 대형정미소들이 즐비한 군산역에서부터 선착장까지 철도를 연결하고 내항에는 부잔교浮棧橋까지 설치했다. 쌀의 항구, 군산은 이렇게 급속히 확장되어 갔다.
 

소작농이 급증하다
 

일제 통치 10년 만에 곳곳의 전답들이 일본인 지주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이 지역은 식량 생산의 전초기지로 급속하게 탈바꿈되어 갔다. 일제는 지금까지의 관습상 세습되던 경작권마저 인정하지 않고, 소작 기간마저 일방적으로 단축해 버리자 농민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그 결과 이 지역 농가의 8할 이상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농사를 개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소작에서마저 조선인을 배제하고 그 자리를 일본인으로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농지를 잃고 벼랑 끝까지 내몰려 생존에 위협을 느끼자 고향을 떠나 간도로 이주하는 농민들의 수효가 해마다 급증하였다. 조정래는 그의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일제의 잔혹한 수탈로 무너져 내린 이 지역의 농민들이 만주와 연해주, 하와이 등지로 흩어져가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농민의 처지에서 보면 착취와 수탈의 주체가 과거의 탐관오리에서 일본인으로만 바뀌었을 뿐 그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는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한 톨의 쌀까지도 다 빼앗기고, 그 대신 만주에서 날라온 콩깻묵으로 허기진 배를 겨우 채우고 살아야 했다.
 

옥구 농민 소작쟁의
 

당시 옥구에는 앞에서 언급한 구마모토熊本 농장을 비롯한 시마타니嶋谷 농장과 이엽사二葉社 농장 등 대규모 일본인 농장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엽사二葉社는 전주의 삼례농장, 익산의 황등 농장, 옥구의 서수 농장 등 세 곳에 3백 6십만 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약 1700명의 조선인 소작인을 두고 있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잔혹한 소작방식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 당시 전국평균 소작료가 45% 정도였는데 반하여 이엽사는 75%라는 살인적인 소작료를 현물로 낼 것을 요구하자, 터무니없는 횡포에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을 결의하고, 1927년 11월 25일 소작쟁의小作爭議를 시작했다. 영락없는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섰던 농민들의 형편과 많이 닮아있었다.
 

백낙규가 처음 기도공동체를 세웠던 서수면의 농민들이 쟁의에 참여했다가 80여 명이 체포되고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동련교회 시작부터 백낙규와 함께했던 매서인 송군선의 집안의 청년들도 붙들려가 고초를 당했다는 소식에 과거가 되어 버린 동학농민항쟁의 기억이 환각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식민지 하부구조로 전락하다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엄청난 양의 쌀을 반출해 가는 대신, 마치 은혜를 베풀 듯 값싼 생필품들을 뿌려댔다. 상인들은 몰락하고 조선의 경제는 밑바닥에서부터 허물어지면서 식민지 소비경제로 빠르게 재편이 되어갔다. 조계지를 중심으로 도로가 정비되고 일본식 주택과 상점들이 줄지어 세워지고 도심에는 세관과 은행, 수리조합, 농지회사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일본식 사찰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활발한 성장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 밖의 조선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군산은 단순히 조계지의 하부구조下部構造로서 역할과 기능을 갖는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되면서 농토를 상실하고 생계가 막연한 소작인들이 개항한 군산으로 몰려들었다.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대부분 정미업, 양조업 등과 관련된 일자리에서 매가리공, 미선공米選工, 지게꾼 등으로 막노동을 하거나 군산항으로 운반되어 온 쌀을 하역荷役하며 겨우 연명해야 하는 하루살이 인생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산비탈이나 저지대에 무허가 판자촌을 세워 거주했는데 상하수도시설이 전혀 되어있지 않아 골목마다 오물과 쓰레기가 넘쳐 코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그 당시 신문들은 이 지역의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터전을 잃고 처절하게 무너진 채 가난에 내몰린 농민들이 밀려들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군산은 개항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전국에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교활하고 지능적인 식민 지배를 가혹하게 겪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