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는 하위렴(William B. Harrison)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현재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를 다룬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에 이어 토박이 예수꾼 백낙규 장로의 영성과 신앙을 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를 연재한다. 백종근 목사 /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빠르게 정세政勢가 안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백낙규는 누님의 중매로 풍양 조씨 처녀 조만자를 만나 혼인을 했다. 26세가 되어서야 했던 결혼이었다. 그 당시로써는 노총각의 늦은 결혼이었다. 그리고 익산益山으로 옮겨와 황등黃登에다가 자리를 잡았다. 하필이면 왜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황등으로 들어왔는지는 아무도 명쾌히 아는 이가 없다.

 

백제의 고도 금마, 요교호의 전설
 

요교호 주변 지도

옛적부터 황등에는 요교호腰橋湖라고도 불리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미륵산 서북쪽 기슭 금천에서 발원한 시내가 삼기면을 지나 요교호로 모였다. 1872년 제작된 고지도에도 요교호는 삼기산 지척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에서 익산을 오고자 할 때 육로가 아니라 수로를 이용한다면, 배를 타고 금강으로 내려와 다시 만경강을 통해 요교호로 건너오면 바로 코앞에 미륵사로 연결이 된다.
 

천도遷都를 계획하던 백제의 무왕이 왜 왕궁과 엄청난 규모의 미륵사를 익산에 세웠을까? 미륵사彌勒寺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무왕이 하루는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절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제 소원입니다“

왕이 그것을 허락했다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전과 탑을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미륵사와 왕궁을 건축하고 천도를 계획하던 무왕은 물의 확보가 바로 국가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다고 판단하고, 도읍지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고 백제 최대의 곡창지대를 직접 관할하고자 했다. 이때 만들어진 저수지가 백제시대부터 식량과 물류를 확보해주던 바로 요교호였고, 물을 막아둔 제방은 후일 황등제黃登堤로 불렸다.
 

익산의 옛 이름은 금마인데 물가에 있다는 뜻의 금마저金馬渚라고도 불렸던 이유가 바로 요교호 때문이었다. 이곳에 미륵사가 세워지자 용화산은 미륵산으로 불렸고, 이때부터 금마는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우리 역사 가운데 미륵신앙만큼 백성들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은 민간신앙이 있었을까? 미륵신앙 말고 극락정토를 염원하는 백성들의 바람과 맞아떨어지는 민간신앙은 그다지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 역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쇠약해진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미륵신앙을 꼽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에 살면서 이상사회를 꿈꿔온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 미륵신앙이 때때로 사회를 변혁시켜 보고자 하는 정신적 구심점이기도 했다. 미륵신앙이 갖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가난과 억압으로 시달리던 구한말에 태동했던 수많은 신흥종교 역시 대부분 미륵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 당시 조선을 휩쓸었던 동학을 그 자체로 미륵신앙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이 내세우던 후천개벽의 세상은 우리 민족 가운데 끊임없이 계승되어온 미륵의 출현에 대한 기대를 수용한 것이라 여겨진다.
 

계동학교의 교가에 '만여리에(의) 최후지에 문명날개는 금마터에~' 구절처럼 마지막 이상세계가 금마에서 시작될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미륵신앙에서 얻어낸 아이디어를 가사에 차용借用한 것으로 보인다.
 

1884년 수배를 받아 쫓기던 해월 최시형이 피신한 곳은 금마에 있는 백제의 고찰 사자암이었다. 미륵산의 중턱에 자리한 이 암자에서 4개월 동안 은신하면서 호남지방 동학포교의 기반을 닦았다. 이런 이유로 미륵산의 사자암은 후일 천도교의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와 동학은 전혀 다른 종교였지만 미륵신앙과 후천개벽이라는 이상세계만큼은 동일한 시각에서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도의 남은 일부가 투항을 거부하고 쫓기다가, 고산을 거쳐 대둔산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3개월에 걸쳐 마지막 항전을 벌였지만, 결국은 바위 절벽에서 전원 자결하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백낙규는 이미 고산에서 동학도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몸을 숨기며 떠돌다가 교주 해월이 도피했다는 이곳 금마를 은신처로 생각하고, 미륵산이 바라다보이는 황등에 눌러앉은 것으로 여겨진다.
 

황등면, 서수면, 임피면 일대의 평야는 수원水源을 요교호에 두고 있어 예로부터 비옥한 수도작水稻作 경지였는데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에 김제 벽골제와 정읍의 눌제, 그리고 황등의 황등제가 있으므로 온 나라의 세수稅收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 피력했으며, 혹자는 국중삼호國中三湖로 불린 이 저수지들로 인해 호남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했다. 호수의 크기로만 보면 그중에서도 요교호가 단연 으뜸이어서 그 둘레만 해도 자그마치 20Km에 달해, 임상마을에서 황등을 가려면 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인근에 백길白吉(뱃길), 섬말(섬마을) 같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고, 도선渡船 마을은 이름에서 보듯 선착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경강 제방을 쌓기 전에는 황등면은 물론 삼기면까지 만경강의 조수의 영향을 받아 습지가 많았고, 요교호 주변에서는 예부터 토탄土炭이 많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저수지라 할지라도 개보수改補修는 물론 관리마저 제대로 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버려둬 토사의 매몰이 가속화되자, 저수지로서 모습을 점차 상실하면서 습지처럼 되고 말았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이 점을 눈여겨보았다.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의 달성을 목표로 경작지 확장에 큰 관심을 보이던 일본은 1909년 이 지역에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간척사업을 핑계 삼아 제방을 쌓고 습지였던 요교호의 물을 빼내 경작지로 만들어 헐값에 일본인 농장주들에게 넘겼다. 1937년 수리조합에서 만든 간척지 평면도가 그나마 남아있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요교호는 점차 논으로 탈바꿈이 되어 가면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임익수리조합 간척지 평면도

황등의 유래
 

요교호에서 고개를 돌려 서쪽 편을 바라보면 커다랗게 솟은 화강암의 석산石山이 구릉을 이루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 지역주민들은 '한댕이' 혹은 '한등'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말 지명을 모조리 한자로 바꾸면서 석산 주변을 황등黃登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크고 웅장한 화강암 석산은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황등석의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60년대 초반 군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필자가 여름방학이 되면 할머니가 계시는 황등에 가서 방학을 지내고 왔던 기억이 새롭다. 군산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역에서 내려 호남선 완행 상행열차를 타고 만나는 첫 정거장이 황등이었다. 간이역 비슷한 시골 역사驛舍에 내리면 돌을 쪼아내는 석수石手들의 망치 소리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귓전을 때리곤 했다. 간이 역사를 통과하면 먼지 나는 황톳길 바닥에 쪼아낸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낮술에 취해 불그레한 얼굴을 한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돌가루 먼지로 얼룩진 남루한 옷을 걸친 그들 곁을 스쳐 지나기라도 하면, 땀에 배인 술 냄새가 묘한 여운으로 코끝에 맴돌곤 했다. 백제 시대 최고의 석장石匠 아사달이 웅장한 미륵사지 석탑을 세우던 시절부터 단단한 화강암을 떡 반죽 주무르듯 빚어내는 석공예의 달인들이 이곳에 즐비했다. 최근까지도 황등은 석재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능숙한 석수들이 전국으로 불려 다니는 석수장이의 양성소 같은 곳이었다.
 

1910년 일제에 강제병합이 되고 그해 호남선 철도 개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군산의 일본인 농장 오오쿠라大倉의 군산 경유 노선과 전주의 이와사키岩崎의 전주 경유 노선의 대결은 치열했다. 그러나 전주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 전주 경유를 극렬히 반대하자, 통감부에서는 전주도 군산도 아닌 이리노선을 확정하였다. 이 때문에 작은 마을 솜리(후에 이리)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고 호남선이 황등을 지나게 되었다.
 

백낙규가 황등에 자리를 잡자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먼저 고향에서 노모를 모셔와 보살피며 부지런히 가세를 추슬러 나갔다. 조랑말에 포목을 싣고 솜리, 함열, 김제, 임피, 삼례 등 멀리는 군산의 서래장까지도 돌았다.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황등에 역사驛舍가 생기고 면 소재지로 승격이 되자, 금강 변 웅포 등지에서 생선, 젓갈, 소금 등이 유입되고 우시장과 망건시장도 형성되어 황등장은 그런대로 시골장치고는 제법 활기가 있었다. 백낙규는 조랑말에 포목을 싣고 장터를 옮겨 다니는 보부상이 아니라, 면 소재지 황등에 가게를 차려 포목점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