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옥 집사 / 부산 거성교회

나는 두 권의 성서를 가지고 있다. 「토지」와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가 그것이다. 토지는 문학의 성서이고,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는 깨우침의 성서로 책장 가장 귀한 자리에 잘 모셔져 있다.
 

겨울은 나의 일 철이다. 밤낮없이 일하고 벚꽃이 필 즈음 풀려난다. 한 달쯤 소파 굴屈에서 춘면春眠을 한다. 그러다 몸을 일으키는 곳이 헌책방이다. 여러 해 전의 그 날도 헌책방에서 책을 쓸어 담고 있었다. 쉽게 읽히는 추리소설, 궁금함에 들여다 보는 과학책 등으로 바구니를 채우는데, 바로크풍의 그림이 눈에 쑥 들어온다. ‘얀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으로 표지를 만든 두꺼운 책, 그리고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냐고 묻는다. 요리책이거나 기독교 뒷이야기쯤 되겠지, 그렇다면 취향이 아닌데 하면서도 표지가 마음에 들어 챙겨왔다.
 

추리소설들을 후루룩 읽고, 과학책 두 개를 뒤적여 보고 난 뒤 이 책을 열었다. 450 페이지의 묵직한 책이 8, 9포인트의 작은 활자를 빈틈없이 담고 있다. 숨이 턱 막혔지만…, 까짓것 ‘역사란 무엇인가’도 읽었는데 설마 이 책 못 읽으랴.
 

한동안 책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연필로 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공부하듯 읽었다. 읽는 내내 가슴이 쿵쾅댔고, 머릿속이 투명해졌다. 살이 저며나듯 아프고 가슴이 터질 듯 원통했다. 읽는 동안 그 아픈 원인과 원통함의 배경을 이해했고, 그래서 더 아프고 더 원통했다. 그리고 억울했다, 이 억울함을 토로하고 해결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더 억울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엇을 주장하거나 누구를 선동하려는 의도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편향되지 않는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원시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여성사를 담담하게 기술해 놓았을 뿐이다. ‘여성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종교는 어떻게 여성을 종속시켰는가.’ ‘여성의 노동은 어떻게 평가받는가.’ ‘여성의 성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여성의 교육과 권리는 어떻게 변해 왔는가.’ 등에 관한 지극히 객관적인 서술로 채워져 있다.
 

- 여성의 몰락
 

원시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높았다. 수렵채집 시대라 하나 제대로 된 무기가 없던 시기여서 큰 짐승을 사냥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수렵은 설치류를 비롯한 소동물을 잡거나 가끔 동물 사체를 얻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대신 식량 대부분은 채집으로 충당되었다.
 

채집은 남녀 구분이 없다. 즉 경제력에서 남녀는 같은 위치에 있었고, 생명을 낳는 여성은 신의 격으로까지 이해되었다. 책 51페이지에 이렇게 기술되었다. ‘여성은 의논 상대자, 현명한 자, 지도자, 이야기꾼, 의사, 마술사, 입법자 등의 역할을 맡았음을… 여성 고유의 생산력과 출산력이라는 신비한 힘 덕분에 초자연적인 권위를 유지했고, 이 특수한 권력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선사시대 유적들은 모두 부족 내에서 여성이 갖는 특수한 지위를 확인하게 한다.’
 

남녀의 지위 반전은, 정착농업과 잉태의 비밀이 풀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농업 즉 힘이 권력이 되는 시대로 돌입하자 여성은 종속되기 시작했고, 생명 생산에서 남성의 역할이 확인되자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 현상에 쐐기를 박은 것은 종교다. 책 115페이지에 엥겔스의 말이 인용된다. “아버지 신의 등장이 여성들의 전면적인 패배를 초래했다.”
 

이 한마디에서 보듯, 모든 것은 신의 섭리요, 신의 질서라는 지극히 타당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방어기제가 등장한 것이다. 기독교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이 수직관계로 남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월권의 대가를 털어버렸고 또 착취에 대한 부채의식에서도 온전히 벗어났다. 내가 아니라, 숭고한 신의 뜻이며 이 질서가 지켜질 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 남자의 도피처로 종교만 한 것이 또 있으랴.
 

사회 곳곳 차별이 걷혀가는 요즘 세상에서도 가장 동작이 느린 곳이 종교계고, 곳에 따라서는 아예 요지부동이다. 기독교는 여자에게 목사와 장로직을 허락하지 않는 교파가 여전히 많다. 또 허락되었다고는 하나 그 가능성과 활동면에서 남자와 비할 게 못 되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오히려 많다.
 

가톨릭은 더 심하다. 여성은 사제가 아닌 수녀만 가능한데, 사제인 신부는 성직자로 분류되고, 수녀는 수도자로 정의된다. 그리고 수녀 업무 첫 조항이 ‘성직자를 보조하는’이라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수녀의 위치를 가늠하고도 남는다. 그 외에도 수녀의 일은 성당 부대 업무들이고 직렬에 따라서는 사제의 집안일 즉 가정부 업무까지 포함되어 있다.
 

불교라고 다를까. 천 년도 더 전에 생겼다는「비구니 팔경계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백세百歲의 비구니라도 비구를 보거든 그가 비록 어린 비구일지라도 일어나 절하고 자리를 내어줘 앉도록 해야 한다. 또 어떤 경우라도 비구를 책망할 수 없으며,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물론 요즘 불교에서는 비구니들에게 이 계를 모두 따르라고는 하지 않지만, 이 얼마나 노골적인 남성 중심인가. 이슬람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 여성의 노동

구십 넘은 엄마와 이야기하던 중, 투정을 좀 했다. “아직도 일을 못 벗어나는 내 팔자야, 옛날 여자들은 직장 안 나가고 살림만 했으니 세월은 어려웠어도 살기는 수월했겠다” 하였더니 엄마가 발끈하신다. “맞벌이라꼬? 그거 요새 여자만 하는 줄 아나? 옛날에는 맞벌이 더 많이 했다. 농사는 일 아니 가? 그라고, 남자는 집에 오면 방에 들어가지만, 여자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맞다. 부르기는 안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온종일 바깥에서 일한 것이 여자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노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자의 노동에 유럽이라고 달랐을까. 책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이 한 가지 노동을 하는 동안 여자들은 다섯 가지 노동에 종사했다. 남자의 일은 해가 지면 끝나지만, 여자의 일은 끝나는 법이 없다.’ 여기에서 여자들의 일이라는 것은 육아와 집안일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직업도 포함된다. 책에 소개된 16세기 독일 여성의 직업은 남자들이 하는 일 대부분과 동일했다. ‘네제 란트메닌(대장장이), 캐서린 안드레아스(정원사), 캐서린 레베스퇴킨(금 세공자), 아그네스 브라우마틴(곡물 상인), 엘제 폰 올템베르크(재봉사), 캐서린 하인리히(통 제조업) 등.
 

그러나 유럽인들이 역사와 예술에서 묘사하는 여자는 늘 다른 모습이다. 우아한 귀부인, 책 읽는 여자, 소풍 나온 여자, 왈츠 추는 여자… 그리고 그 절정에 나이팅게일이 있다. 나이팅게일은 등불을 든 백의의 천사로 묘사되고, 숭고한 봉사자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실상 나이팅게일은 등불 아닌 망치를 들었고, 약품 창고를 부숴서라도 필요한 의약품을 챙겨 나오는 강단 있는 전사였다. 또 원그래프를 최초로 고안한 통계수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이처럼 각색된 여성, 혹은 숨겨진 여성은 비단 나이팅게일뿐만이 아니다. 1930~60년대 물리학, 의학, 천문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고도 남을 여성들이 자기 이름으로 보고서 한 줄 쓸 수 없었고, 대부분의 연구 성과는 남성 연구자의 업적으로 흡수되었다. 이렇듯 역사는 오랫동안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여성을 대했다. 필요에 따라 꽃으로 천사로, 그리고 또 필요에 따라 축생과 다름없는 일꾼으로 대가 없는 착취 대상으로.
 

중세와 근대의 긴 시간 여자는 성녀 아니면 마녀밖에 될 수 없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책을 읽어나가며 내려다본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녀와 마녀 중에 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디에 서고 싶은지를.
 

내 성서의 저자 ‘로잘린드 마일스’에게 경외의 인사를 보낸다. 책 394페이지 헬렌 레디의 노랫말로 맺는다. 

“… 내가 발끝으로 서는 것을 보아라

나는 아름다운 양팔로 대지를 감싼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주 많이 남은…”

전성옥 집사

 

2012년 <월간문학>에 소설로, 2013년 <에세이문학>에 수필로 등단한 후 <에세이부산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대상'(2012년), ‘부산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2023년)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