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요한 목사(황창연) / 선교사

닐 엘리어트(Neil Elliott)는 “바울은 모든 것을 십자가라는 무시무시한 중력장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려 하였다”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참으로 실감 나는 회화적인 서술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정리한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를 구원의 원천으로 고백할 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반복되는 언어와 행동, 태도와 가치관, 꿈, 사회적 활동, 대인관계, 교회 내외적 봉사, 목회, 선교 등 우리 모든 삶의 중심으로 여기며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긴 하나 교리나 신비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을 뿐, 언어생활이나 대인관계 같은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에서는 그 자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를 신학적 사고의 중심에 놓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을 십자가 중심으로 배열하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도전합니다. 이 같은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영성은 바울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가 갖는 깊고 풍성한 차원을 더 드러나게 하기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에 연합함
 

로마서 6장 5-11절은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요약해서 보여 줍니다. 6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먼저 언급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독특하게 경험하고 진술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안에서 함께 못 박힌 자신을 경험한 영적 진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를 자신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에 연합했다고 표현하는데, 이때 옛 사람은 본질상 죽었으나 실제로는 육신이 죽는 날까지 계속적으로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저는 바울이 말한 바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은 것을 선포하며 이제 죄에서 해방된 새사람임을 믿을 때,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내면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주님을 닮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구원의 시작으로만 받아들일 뿐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옛사람을 못 박으며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옛 사람에 속한 것들과의 이별은 육신적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과도 같습니다. 부자 그리스도인에게 가진 재산을 팔고 공동체로 들어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지금껏 아끼며 사랑하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이기에 사형 선고로 여겨질 것입니다. 명예를 목숨처럼 중시해 온 사람에게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는 것 역시 그에게는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주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와 우리가 못 박혀야 하는 십자가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어 인류를 구속하신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못 박혀야 하는 십자가는 우리 안에 여전히 활동하는 죄의 행위를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근원(sin)이 제거되고 새 생명을 얻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죄악들(sins)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기에, 우리는 자기 십자가에 날마다 우리 안의 죄악들을(sins)을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할 때 표적 암 치료를 떠올리곤 합니다. 항암제가 몸에 들어가 암세포를 추적하며 제거하듯,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영혼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죄의 세포를 궤멸합니다. 십자가의 치료 광선이 몸을 통과할 때 우리의 옛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십자가는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 버린 죄악들을 우리에게서 떼어 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죄인 줄도 모르고 사용하는 말투, 습관과 성격, 더 나아가 우리가 가진 신념, 경험, 꿈, 가치관을 십자가는 가차 없이 부정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일조차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목숨만큼 소중한 자존심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치료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망과 질병에서 우리를 살리고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든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어린 자녀가 부서진 과자를 손에 꽉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하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먹지도 못하고 결국 부스러기만 사방에 떨어지는데도 아기는 움켜쥔 손을 펴지 않습니다. 억지로 손을 펴려고 하면 고집을 부리며 울고 떼를 씁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이때 조용히 아기가 좋아하는 다른 것을 가져와 눈앞에 보여 줍니다. 그러면 아기는 금세 움켜쥐었던 손을 펴서 부서진 과자를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린아이만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썩어질 것에 연연하여 영원한 생명을 향해 손을 뻗지 못하니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에 연합함
 

십자가 사역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시작하여 부활과 영광을 향해 나아갑니다.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고전 15:19). 성경은 항상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밀접하게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세례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연합한 사람에게는 그분과 함께 다시 사는 영광의 부활 생명이 임합니다.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는 삶은 주님의 사랑과 임재 안에 거하면서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참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부활 생명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주시는 참 생명은 필연적으로 옛것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한 알의 밀알에 비유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를 살리실 것,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원 사역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이 길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명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통해 생명의 열매를 인류에게 선사하셨고, 이제 제자 된 우리에게도 이 길을 걷도록 요구하십니다.
 

순교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밀알은 육체적 소욕을 따라 사는 옛 사람에 해당합니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자기의 생각과 경험, 열심으로 사는 사람은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옛 사람이 주인이 되어 일합니다. 성령과 무관하게 자신의 본성적인 지정의를 사용하여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성과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옛 사람의 열매라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영성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기 이전에 먼저 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밀알이 죽지 않고 열매를 맺을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법칙은 잘 알면서도 이를 영적인 면에 적용하는 것은 거부하려 합니다. 옛 사람을 죽지 않게 화학 처리를 하고 멋있게 업그레이드하면서 열매 맺을 것을 기대합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길이 바로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명하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씨앗이 땅에 깊이 묻히면 모든 외적인 것을 상실합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외피도 점점 소실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생명의 싹이 돋아나 땅을 뚫고 바깥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 새싹이 자라나 무성한 나무가 되어 맺히는 열매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답고 풍성합니다.
 

씨앗이 한 일은 땅에 떨어져 죽은 일밖에 없는데 삼십 배, 육십배, 백 배의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심오한 영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에게 하나님은 부활의 새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때 새 생명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선교지에서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후 저의 유일한 소원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더 깊이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과 더불어 앞서 이 길을 가신 분들의 자서전과 경건 서적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낯선 선교지에서 저는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미약한 자에 불과했기에 제 능력으로 무엇을 멋지게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고, 그때마다 십자가의 진리를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추운 겨울, 집에서 약 5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국의 서북 변방 지역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집회를 하기 위해 두 명의 형제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좀처럼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이라 두 달 일정으로 여섯 번의 집회를 계획하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세 번의 집회를 끝내고 2~3일 쉬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얼마 전 멀지 않은 곳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하고자 두 형제와 함께 그 기간에 재난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에 구호 텐트에서 떨고 있던 이재민들은 우리를 어떤 경계나 의심 없이 반갑게 맞아 주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짧게 복음을 전하고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구제금을 전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공안에 신고가 들어가 우리는 순식간에 공안국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일이야 사역하면서 늘 각오하고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기에 무슨 조치를 취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공안이 우리를 구치소에 가두고 협박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두려운 상황에서 오직 기도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직 세 지역의 집회가 남아 있는데 먼 곳에 와서 이렇게 구금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저로 인해 비밀이었던 그곳 교회의 활동이 모두 노출되고 교회가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그들을 도우러 갔는데 오히려 저로 인해 많은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저나 가족의 안위조차 그보다 시급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감옥에서 겪었던 일은 다른 책 《광야에 세우는 십자가》에서 이미 다 서술하였기에, 여기서는 풀려나온 다음의 일을 말하려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던 세 곳의 교회는 우리 일행이 갇혔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고, 함께 모여 우리를 위해 합심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사실 그때 교회 지도자들 간에 불화가 있어서 함께 연합하지 못하고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회개하며 합심하여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매달려 있었는데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제 영혼은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절대적인 평안을 느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제가 가서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 사건을 통해 죽어야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의 진리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잘해 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영적인 고갈에 이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의 영성은 일하는 것에 몰두하는 사역자를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는 것에 몰두하도록 이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