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요한 목사(황창연) / 선교사, 박사

서문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교회를 포함한 기독교 세계는 큰 충격을 받고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교회에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많은 논의가 기독교 지도자들 간에 진행되었는데, 공통적으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교회가 복음의 본질 이외의 외형적인 인습에 많이 얽매여 있었음을 철저히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일까요? 초대교회가 핍박 가운데서도 전했던 기독교 신앙의 유산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핍박이 사라지고 교회가 점차 풍요로운 재정과 안정된 사회적 위치를 얻으면서 교회의 관심은 성공 신학 또는 번영 신학에 편승한 수적인 부흥에 쏠렸고, 대형교회는 새벽부터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회사와 같이 변했습니다. 많은 목회자가 매일 빽빽한 칸막이 책상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오늘날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십자가의 영성으로 사는 제자도의 결핍’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많은 교회에서 큐티(QT)를 비롯한 각종 제자훈련 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교재를 통해 성경 지식을 가르치거나 주제별 학습을 제공하는 등 지식적 또는 도식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훈련의 한계는, 아는 것은 늘지만 그것이 실천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밖에서 보기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만일 이러한 훈련 과정을 이수하고 수료증을 받는 것이 자타가 공인하는 그리스도인의 스펙이 된다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가 되는 길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저는 30년간 선교사로 살면서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늘 안타까웠습니다. 수십 년간 예수를 믿고 교회에서 직분자로서 충성을 다하지만, 늘 영혼은 피폐한 가운데 곤고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역을 위한 봉사로의 부르심으로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 못하고 황폐한 상태로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지도자가 되다 보니, 현대 교회의 영성이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세대는 참 그리스도인, 참 제자, 참 목회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부흥을 위해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 D. L. 무디는 “부름 받아 오병이어로 드려진 온전히 헌신된 한 사람이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현대의 급속한 세속화의 도전에 직면한 오늘의 교회에 무엇보다 ‘십자가 영성으로 살아가는 제자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는 첫째로, 자신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존재임을 시시때때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잊지 않는 자는 결코 세상에 편승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교회 지도자가 초심을 잃어버리고 세속의 길을 가게 된 이유는 이 영성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언행, 계획과 활동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밖으로 내보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그리스도, 보혜사 성령을 경험한 자는 결코 이기적인 본성과 혈기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정을 하며, 그 언행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웁니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가 안락한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이웃과 사회를 향해 증인의 삶을 살고자 열망하도록 우리를 끌고 갈 것입니다.
 

셋째로,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은 당대의 십자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면 그 뜻이 명백해집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자를 처형하는 사형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도전과 핍박을 받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이 제시하는 삶의양식이 당대 이방 종교 및 전통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새롭고 혁명적인 도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 영성으로 사는 제자는 사회를 향해 새롭고 혁신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고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2019년에 중국 선교의 이론과 실제를 담은 졸저 《광야에 세우는 십자가》를 출간했는데, 이번 책도 이 책과의 연결선 상에 있습니다. 앞선 책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 ‘선교 현장에서 경험한 십자가의 능력과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공동체 사역’ 등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반면 이 책은 십자가 영성으로 살아가는 제자가 갖춰야 하는 인격과 삶의 특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한 번에 빨리 읽기보다는 각 주제별로 묵상하면서 자신과 또 저자와 대화하듯 읽고 떠오르는 것을 메모하면서 읽어 나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실 두 책의 출간은 순서가 바뀐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두 권으로 나눠 집필할 것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고 급박한 선교 현장에서 공안(公安)의 감시를 피해 바울이 서신서를 썼던 심정으로 우선 첫 번째 책을 완성했고, 그 후에 타이완에 와서 제자도에 관해 차분히 정리하여 이번 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인 《제자도》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선택(제자의 8가지 특징: 불순응, 그리스도를 닮음, 성숙, 창조세계를 돌봄, 단순한 삶, 균형, 의존, 죽음)은 다소 자의적인 것이었다. …당신은 분명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고 싶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분명히 성경적이기를, 그렇지만 또한 당신의 문화와 경험이 반영된 것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당신이 그 일을 잘 해내기를 바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감히 저에게 하시는 당부처럼 들렸습니다. 이 책은 십자가 영성을 제자도의 핵심이자 뿌리로 하여 제자도와 관련된 몇 개의 주제를 조명했습니다. 그리고 존 스토트 목사의 표현대로 저 역시 여기에 기술한 내용은 저를 포함한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견하고 싶은 제자도의 모습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진리를 독자 개인의 문화와 경험을 토대로 내면화할 수 있도록 각 장마다 적용을 위한 질문을 첨가했습니다. 시간을 들여 질문을 묵상하고 주께서 비춰 주시는 빛을 따라 실천한다면 분명 영적인 유익과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를 십자가의 길로 부르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을 알아가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서 이 책을 읽는 분들 역시 마음이 뜨거워지고 십자가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책의 원고를 꼼꼼이 읽어 주시고 신학적인 면에서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신 은사 이형기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에 함께해 준 아내 오순영 선교사에게 사랑을 담아 감사를 전합니다.

2024년 7월

타이완에서 황창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