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 /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저자 서문

역사적 사실事實을 서정적序程的 흐름 속에서만 인식하려 한다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유기적 관계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경작해 온 주체들의 삶이 사건에 가려진 채 시간의 경과에 따른 전후 관계의 사실寫實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사건 중심의 도식적 나열이 아니라 그것을 발전시켜 왔던 주체를 바로 인식할 때만 고리처럼 연결된 사실史實들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초기교회사의 사료史料들 역시 대부분 사건 중심의 연대기적 사실事實에만 집중이 되어있어, 사건의 배면에 깔린 선교사들 자신은 물론 그들과 함께하며 초기교회 역사를 만들어 온 인물들의 전기적 경험들을 발굴하는 일에는 너무도 등한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설사 이미 발굴되어있는 것들이 있다 해도 기독교가 이 땅의 문화와 만나 토착화될 때 표출되었던 사회적인 대립이나 투쟁 혹은 개인적인 긴장과 갈등의 신앙 여정을 담아 오늘의 관점에서 친근하게 바꾸어 낸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는 1900년도 남장로교 선교사 하위렴William W. Harrison에게 복음을 듣고 동련교회를 설립하신 백낙규 장로의 신앙과 영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찍이 동학농민항쟁에 뛰어들어 소접주로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지만, 패전 후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다가 복음을 듣게 된 특이한 신앙 이력의 소유자라 생각이 됩니다.
 

필자에게는 증조부가 되는데 그의 신앙 역정을 추적해 보던 중 남장로교 선교 자료 가운데서 그와 관련된 120년 전의 사진과 자료를 우연히 만났을 때의 감회는 참으로 남달랐습니다. 감회는 기독교가 전래 되던 시절 그의 개종과 삶에 대한 회상으로 이어졌고, 결국 초기교회를 되돌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집필을 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한국 초기교회사를 뒤돌아보면 다양한 영성을 가진 분들이 출발하고 있지만, 백낙규야말로 역사의 한복판 격동의 시대를 지나며 기성旣成에 회의懷疑하고 그가 들었던 복음을 따라 지향志向을 추구한 외곬의 신앙인으로 실천신앙과 영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분이라 여겨집니다. 저희 가족사에 기독교를 처음 받으신 분이기도 하지만 남장로교 초기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기독교의 발아發芽를 지켜보신 분으로 그가 익산군 황등면에 세운 동련교회는 올해 120주년을 맞는 유서 깊은 교회로 실재하고 있고,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갈등 속에 기장에 속한 교회로 지역사회에 귀한 사역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남장로교 선교사를 다룬 많은 교회사 학자와 목회자들이 있지만, 아직도 묻혀 있는 초기교회 인물들을 세세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백낙규 장로의 활동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잊혀져 가는 그 시대와 초기교회의 진경眞境을 새롭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하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서문을 빌어 그동안 집필을 위한 자료조사를 위해 함께 여행하며, 크고 작은 일을 보살펴준 큰아들 조셉과 곁에서 기도로 격려하며 내조한 아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같은 교단에서(PCUSA) 동역했던 서예가인 백현수 목사가 속표지의 제호를 써주신 것과 미국수채화협회(American Watercolor Society) 정회원이신 장황남 화백께서 노구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백낙규 장로의 초상을 그려주신 것에 대해 새삼 깊은 감사를 드리며, 편집의 실무를 담당하며 꼼꼼하게 살펴주신 이승훈 제씨의 노고에도 자리를 빌려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2021년 9월

백종근 

글을 시작하며...

Ⅰ

간지干支가 한 바퀴를 돌아 만 60년이 되는 것을 주갑周甲이라 한다면 1901년 설립된 동련교회가 2021년 올해로 설립 120년이 되어 2주갑이 되는 셈이다. 설립자인 백낙규 장로의 신앙을 한번 정리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은 몇 해 전부터 해왔으나 분주한 목회와 미흡한 자료... 사실은 그보다 둔한 필력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더 커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신대 연규홍 교수의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에서 백낙규의 영성을, 전영철의 <믿음, 그 위대한 유산을 찾아서>에서 그의 신앙을 간략하나마 장章으로 묶어 다루고 있는 책들이 있고, 학술 논문에서도 그의 삶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냈다.
 

이 일로 초기선교자료를 뒤져보는 일이 잦았는데 우연히도 해묵은 미국의 선교잡지에서 남장로교 선교사 해리슨William B. Harrison/하위렴이 기고한 동련교회와 백낙규와 관련된 기사와 사진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비록 짤막한 내용이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120년 전 기록물이었다. 뛸 뜻이 기뻤다. 하위렴 선교사는 백낙규에게 세례를 주어 그를 장로로 세우고 함께 동련교회를 지도하고 이끌었던 신앙과 교회를 가르친 영적 스승이지 않았던가?
 

관심을 불러일으킨 하위렴의 자료 덕분에 지난해 가을 하위렴 선교사의 고향 켄터기주 레바논Lebanon, KY 시골 마을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가 성장하고 신앙생활을 한 마을과 교회, 학교 그리고 그를 파송했던 노회를 둘러보면 행여라도 그와 관련된 흔적 같은 것들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같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리슨의 고향 레바논을 중심으로 유진 벨Eugene Bell/배유지, 의료선교사 알렉산더Alexander J. A. Alexander와 포사이드Wylie H. Forsythe가 다 인근에서 태어났고 유진 벨, 보이어Elmer T. Boyer 선교사가 공부한 루이빌신학교와 포사이드와 오긍선이 공부한 루이빌 의대가 차로 2시간 정도의 반경 안에 소재하고 있는 이 지역은 남장로교 초기 내한 선교사들을 키워낸 태반胎盤과도 같은 곳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하위렴의 고향 레바논은 격전지였다. 전쟁의 포화가 걷히고 그 이듬해 하위렴이 태어난 이 마을에는 켄터키의 여느 시골처럼 나른한 고적古跡함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성장했던 교회에 찾아갔으나 이미 퇴락해 버린 고성처럼 문이 잠긴 채 가을비에 젖고 있었다. 고즈넉한 석조 건물 입구 한쪽에 무지개 깃발의 표지판을 붙여놓고 묻지도 않은 정체를 드러내고 있어 씁쓸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 교회를 끼고 남북으로 뻗은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길Harrison St.을 따라 걷다가 방향을 돌려 마을 어귀에 있는 그의 묘지까지 돌아보았다. 조선에서 간호 선교사로 사역했던 아내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와 역시 내한 선교사로 잠시 활약했던 딸 셀리나Margaret S. Harrison도 곁에 묻혀 있었다.
 

잊은 채 오랜 세월을 지나고 있었지만, --아니 모른 채라고 해야 맞겠지만-- 하위렴과 백낙규와의 인연은 질기게 이어져 내 앞에 섰다. 그는 살아서도 백낙규를 이끌었지만 죽어서도 우리의 뇌리에서 백낙규를 끌어내 눈앞에 등장시키고 있다는 느낌에 실소하면서도 하위렴의 행적을 떠올려 제대로 추모해 주지 못하고 묘지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동련교회의 시작을 이야기하며 그를 빠뜨릴 수 없고, 하위렴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백낙규의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켄터키 여행의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백낙규가 맞닥뜨린 역사는 동학에 깊이 줄을 대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해방 이후 최근까지도 그렇게 엄연儼然했던 동학농민항쟁을 짐짓 내몰리던 역사로만 밀어두다 보니, 벼랑 끝에서 절규했던 민초들 이야기는 어느새 들여다볼 수 없을 만치 지워져 있었다. 많은 기록물을 뒤져보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참여한 인물들의 구체적 행적을 추적해둔 것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는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흩어져 있는 구술과 기억을 찾아내 주섬주섬 엮어본다고 했지만 훼손되어 복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드러난 결과를 손에 들고 과정을 돌아보아야 하는 부분에 와서는 어쭙잖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백낙규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백낙규를 이끌었던 영성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의도였지만 그래도 드러난 흠결欠缺이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시선을 돌려 백낙규가 활동했던 시공간을 조망하면서 조금이라도 그를 짐작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바램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지역을 오버랩시켜 지역 교회사에 드러난 교회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동시대를 맞대고 고민했던 그들의 공통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을지를 추적하다 보면 지역교회 저변에 깔려있던 인식 가운데 행여 드러나지 않은 백낙규의 지향점과도 일치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몸부림치던 초기 지도자들의 삶과 신앙 속에서 백낙규와 일치를 찾아내는 퍼즐게임은 독자들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고 싶다.
 

이것저것을 끌어다 만용을 부리고 염念을 낸 덕분에 겨우 엮어 냈지만, 과거 연구원KIET 시절 발간했던 정해진 주제의 보고서나 강단에서 했던 설교를 엮어내는 설교집과는 달리, 특정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는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히 전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사건들의 연대와 날짜, 지명 등에 적지 않은 착오가 있을 것 같아 염려될뿐더러 두서없이 쓰다 보니 앞뒤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 있을까 부끄럽기까지 하다. 읽어 주시는 분들의 넓은 이해를 구하며, 새로운 자료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색다른 접근으로 수정해 볼 계획이 있음을 약속드린다.

Ⅱ

살아간다는 것은 자취를 남기는 일이다. 이력에 담긴 업적이나 공과功過 같은 것들은 전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가도 뒤따라 온 세월에 탈육脫肉이 되어 무기화無機化되면, 자연스레 그가 보여준 삶의 열정에 비례했던 신념같은 것들만 남아 있게 된다.
 

백낙규는 구한말에 태어나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고 더구나 남아 있는 이야기들마저 흩어져 마모된 것뿐이기 때문에 둔탁해진 잔해殘骸만으로 그의 생애를 요연瞭然하게 살펴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아 전해지는 것들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가 마주했던 시대적 상황을 탐색하고 활동했던 공간에 남겨진 흔적들만이라도 촘촘하게 거두어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반사적일 때가 많은 법. 비록 망각에 묻히고 남아 있는 자취가 희미해졌다 할지라도 남겨진 자국들을 조심스레 인출印出해낼 수만 있다면, 달을 그리지 않고도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내듯 그의 삶의 윤곽을 짐작해 볼 수가 있지 않을까?
 

홍운탁월烘雲托月! 구름을 그려 달을 그려내듯 요흔凹痕의 언저리에 드러난 백낙규의 삶 속에서 그가 매달렸던 실존적 상황을 살핌으로 그의 영성과 신앙도 함께 엿볼 수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백낙규(1876-1943)가 살았던 시대는 어쩌면 조선의 역사 중 가장 어두운 질곡의 시기였다. 부정부패와 외세의 침략으로 격동을 치던 구한말 시기에 몰락한 양반으로서 고향을 떠나 동학에 몸을 던져 농민항쟁의 중심에 섰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걸고 역사의 가파른 협곡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찬 고뇌와 갈등에 시달리고 살았을지 헤아려봄 직하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개혁의 주체가 되어 보고자 몸부림을 쳤으나 패배와 좌절을 맛보았다. 밀려오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잃고 혼돈混沌의 세월을 살면서도 그는 거기서 끝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만난 복음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하나님 나라에서 비전을 보았던 백낙규는 교회를 세우고 젊은이를 가르치려 학교를 세웠다.
 

끊임없이 치열함을 가지고 살았던 그였지만 목숨을 다할 때까지 어둠의 터널이 여전히 그를 가로막고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씨앗을 뿌렸으나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황국화 신민 정책으로 학교가 폐교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아픔을 겪으며 코앞에 둔 해방을 보지 못하고 향년 67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포로로 끌려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을 소망하며 외치던 스가랴 선지자처럼 백낙규도 역시 가난한 이웃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면서, 그들과 함께 해방을 꿈꾸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읊조리며 살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노래 부르던 스가랴는 이 땅에 살았던 백낙규의 표상表象이었다.
 

"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슥 9:16)
 

구한말 조선 땅에 태어나 외세의 지배 아래 굴레 씌워진 민중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자기 삶에 주어진역할과 사명을 올곧게 감당했다. 어두운 질곡의 삶을 살면서도 소망했던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이루려 바라고 믿었던 바를 실천에 옮기며 살았던 그의 역정歷程을 살피며, 주변에 남겨둔 흔적을 따라 이야기로 풀고자 한다.
 

참고로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 목차는 아래와 같다.  

백종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