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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목사의 이단시비에 대한 반론 2
1998년 02월 01일 (일)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1. 이단 규정과 권위의 문제: 성경이냐 전통이냐

최삼경 목사는 이단들의 존재 의미를 “한국교회의 위치와 방향을 보여주는 좋은 거울”이라고 간주하면서, 한국교회가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이단사상의 토양을 연구하고 이단을 대처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1993년 10월 <교회와신앙>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다. 그는 이 창간지에서 이단의 본질을 윤리가 아닌 교리에서 찾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아무리 윤리적으로 선하다고 하더라도 교리적으로 잘못되면 이단”이라며, 윤리적인 면과 교리적인 면을 혼돈하지 말라고 주장했다(189쪽). 물론 일차적으로 이단의 문제는 교리적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말은 보완되어야 한다. 최목사의 관점은 너무 교리 중심적이다. 마치 교리 지상주의를 대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말해서 교리적인 면에서만 문제가 없다면, 윤리적인 면은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최목사도 그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교리적인 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이른바 “교리만능주의”는 재고되고 지양되어야 한다.

교리적으로 잘못되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교리만을 이단척도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교리가 성경과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인 교회에서 만든 교리적 진술을 절대적인 기준인 양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교리와 성경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로 넘어간다. 최목사가 성경의 말씀을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있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분명 이단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최목사는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에게는 적어도 이단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성경보다는 우리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교리가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최목사는 “윗트니스 리는 교회관에서도 이단이다”는 글에서(<교회와신앙>, 97년 11월호), 자신의 논쟁은 “성경적으로 적극적인 논쟁을 하지는 않았다”고 고백했으며, 그 이유를 “필자가 따르고 있는 정통교회의 교리 자체를 성경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62쪽). 하지만 그는 계속 이어지는 글에서 자신은 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신학과 성경을, 교리와 성경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신학자들을 신뢰하지 않고 인용하지 않는 이유가 어째서 신학과 성경이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그의 논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적어도 전통과 성경의 차이를 부인함으로써 성경의 권위와 전통의 귄위를 거의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한 발언을 한 셈이다(163쪽).

물론 최목사 본인은 교리와 성경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성경의 권위의 문제와 관련해서 논란이 될 수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글에서, 최목사는 Daniel Towle과 조동욱씨를 “교리와 성경을 나누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비판하고 있지만(167쪽), 내가 보기에는 최목사가 그들의 입장을 왜곡시키고 있는 듯 보인다. 사실 그들의 강조점은 성경과 교리를 나누고 있다기보다 성경을 교리보다 우선하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하여튼 성경보다도 전통에 더 의지하는 입장은 최목사가 실질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교회와신앙>의 이단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같은 잡지 1993년 11월호, “100문 100답”에서 이단의 기준을 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적 교회의 신학과 교리에 기준해서, 사도들이 물려준 그 전승에 의해서 이단이 규정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단의 기준점이 성경이냐, 아니면 역사적 교회의 교리와 전승이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이단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은 성경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범위와 교리와 전승에서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교리와 전승은 어쩔 수 없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종교개혁자들은 과거의 전통이나 교리를 비판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문제가 없을 경우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키는 문제에서 초대 교회에서 이단을 내치고자 했던 일차적인 이유와 한계선에서 멈추지 않고 그보다 더 앞질러 나가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하나됨과 화해를 원하신 분이다. 그런데 교리적인 입장에서 이단의 기준을 세분할 때는 교회간에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고, 함께 패망의 길로 달릴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것은 역사적인 교회의 살아있는 증언이기도 하다.

세 번째 이유는 성경이 아닌 역사적 교회의 전승과 교리가 이단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그 이단 판별의 기준에 보편성이 결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교파와 교파간의 교리적 논쟁으로 발전하여 무익한 투쟁으로 서로의 정력을 소모하는 양상이 되고 말 것이다. 최목사는 계속해서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말하면서, 그 정통교회를 “개신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혔는데(<교회와신앙>, 97. 11, 165쪽), 이는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너무 애매한 기준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사실 그가 개신교의 교리를 앞세웠지만, 그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기준은 장로교의 교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서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와 장로교의 교리를 기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위의 글, 167쪽).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의 보편적인 교리”가 무엇이냐에 있다. 도대체 개신교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기본 입장을 어디서 어떻게 찾겠다는 말인가? 이런 관점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가 이와 같은 이단논쟁사가 된 것이 아닌가? 개신교의 보편적인 하나의 입장이 나오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인가? 결국 최목사가 말하는 개신교의 정통신학은 장로교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장로교의 신학과 차이가 있는 다른 개신교파의 교리는 어찌할 것인가? 모두 내칠 것인가? 과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교리논쟁을 오늘날 또 재현하자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경에서는 이단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는 이단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 왔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최목사는 이단을 판별하는 데 적어도 성경보다는 역사적 교회의 교리에 더 비중과 유용성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의 입장과 역사적 교회의 입장이 동일한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반대로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면 최목사의 이단시비 관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보다는 교회 전통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침례교의 한 신학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성경보다 전통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는데, 최목사도 그런 비판을 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의 문제

성경에서는 이단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교리적인 차원과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각각 살펴보겠다.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경계하고 있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보다는 신약의 상황이다. 구약은 하나님과 이방신에 대한, 혹은 율법과 비율법에 대한 구분이 대체로 명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약적 상황에서는 그 구분이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 때때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하기 때문이다(막 13:6).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신약적 상황에서만 그 용례를 찾아보기로 하겠다.

1) 교리적 측면
먼저 교리적인 차원에서 나타난 이단의 특징은 그들이 “사신 주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공동번역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리셔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며 자기 자신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첫째 조건은 자기를 사신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불신을 일으키는 것으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모든 사상들과 그 분의 구원의 완전성을 손상시키는 그릇된 신앙관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유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에비온주의자들과, 근대에 들어와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자유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

또 성경에서는 이단이라는 말로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미혹하는 자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먼저 이 미혹케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를 말한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 1:7). 이런 종류의 미혹자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관련이 있다. 이 사상은 영과 육의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고대 헬라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고 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를 미혹의 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를 분별하기는 쉽지는 않지만, 요한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미혹의 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의 핵심사상은 이단의 실체를 단순히 성경 해석상의 차이 정도에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이런 제한된 이단 규정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이단 시비를 벌여 왔던 이단감별사들의 월권 행위에 귀감이 되어야 한다.

2) 사회 윤리적 측면
윤리적인 면에서 볼 때, 미혹케 하는 자들은 허탄한 자랑을 일삼으면서 육체의 정욕에 빠지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벧후 2:18). 또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자들을 미혹된 자들이라고 규정한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갚(벧후 2:15). 돈을 사랑하여 믿음에서 떠난 자들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다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또한 미혹하는 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들이 주를 섬기지 않고 자기의 배만 섬긴다는 데 있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그래서 필경 이들은 순진한  교인들을 미혹해서 잘못된 길을 가게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불의한 방법으로 돈과 명예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미혹케 하는 자들은 택하신 백성들을 미혹케 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전략이기 때문에, 더욱 기성교회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막 13:22). 특히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이들에게 뒤따르기 때문에, 많은 기성교회의 신자들도 그들을 따라가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대체로 이단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하기 때문에, 더욱 분별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적어도 성경에는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실수하는 차원이 아니라, 본래부터 거짓된 자들이며, 택한 자를 미혹케 하려는 악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단 혹은 미혹케 하는 자들을 가려내어 기성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격리시키는 일은 마땅히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양들의 영혼을 위해서 불철주야 헌신하는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잘못된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믿는다.

3. 역사적 교회, 즉 전통으로 말하는 이단의 문제

교회 역사 속에서 행해졌던 이단 시비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각종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단의 문제를 공동 대처했던 과거의 경험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서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종교회의들의 결과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정립하고 수호해 나갔으며, 이단의 정체를 우리에게 밝혀 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교리사」를 썼던 니브(J. L. Neve)는 종교회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각종 종교적 관심과 논쟁에서 나온 표현들은 그 배후에 성서와 기독교적 체험의 근본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종교회의의 지상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모든 종교회의가 다 올바른 것은 아닐 수 있고, 그 종교회의의 결정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신중한 비판의 시각도 만만찮다. 사실 우리는 과거의 종교회의에서 결정한 교리적 내용들이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우리의 전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무조건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종교회의도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교회의 39개조 신조의 제21조, “일반적인 종교회의의 권위에 관하여”(1571년 영국판)를 보면 이런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지적하고 있다: “···종교회의도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는 때때로 오류를 범해 왔다. 심지어는 하나님에 관한 사항조차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종교회의가 정한 사항들도 성서에 의거하여 그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최목사가 지나치게 교리 중심적으로, 역사적 교회의 교리 전통에 의존하여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직된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사가 증명하듯이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교회와신앙>(1997. 12월호)의 “윤석전 목사의 구원관과 목사관에 나타난 이단성을 다시 분석한다”에 대한 반론

사실 이번에 두 번째로 최목사가 문제를 제기한 내용은 같은 잡지 1997년 9월호에서 지적했던 문제와 거의 대동 소이한 내용이었다. 다만 구원관과 목사관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고, 좀더 많은 근거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미 9월호의 내용에 대해 최목사의 이단시비가 부당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최목사는 그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다시 똑같은 문제들로 이단시비를 계속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최목사에게 시시때때로 나의 입장을 밝혀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목사가 나를 정죄할 권한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지적해 준 부분들에서 나의 본래 의도가 와전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나의 입장을 다시 밝혀 두기로 하겠다.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첫째는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구원관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구원관이다. 결코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록 선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언제나 내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다음이다. 그러나 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믿는다.

그 점에서 나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7~18). 여기서 야고보는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즉, 야고보의 근본적인 관심은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

나도 역시 이런 야고보의 신앙을 따른 것이다. 최목사는 12월호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윤목사는 성도의 성화에 속하는 것들을 구원과 연결시킴으로, 교회에서 불평을 하여도 지옥에 가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지옥에 가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지옥에 가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지옥에 간다는 것이었다.··· 윤목사의 이런 구원관은 어쩌다 한두 번 실수로 한 말이 아니라 윤목사가 설교할 때마다 쏟아지는 핵심사상이다”(154쪽).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주로 부흥성회에서 했던 나의 설교 테이프를 근거 자료로 제시했다. 그는 나의 행함 강조를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으로 규정한 바가 있다(9월호, 140쪽).

그러나 그가 인용한 나의 설교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문제가 단순히 율법주의적으로, 행함을 통한 구원론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대목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대로 사느냐 안 사느냐 하는 것은 천국이냐 지옥이냐이기 때문에 당신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예수 믿어야 돼요. 우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예수 믿어야 해요. 아주 구원받으려고 환장하고 믿는 분 아멘합시다! ··· 여러분 모두가 다 영생하려고 예수를 믿거든 영생에 금이 가고, 영생에 상처가 나고, 영생이 썩고, 영생에 헛점이 있고, 영생에 오류를 남기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12월호 155쪽/ 1996년 2월 흰돌산기도원 구정축복성회, 테이프 5번 내용 중).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전제되고 나서 행함을 문제삼자는 것이다. 사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어찌 예배에 빠지겠으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헌금을 하지 않고, 예배에 빠지면 지옥에 간다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어찌 믿음이 없는 자에게 그가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하겠는가?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런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만 위의 내용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영생을 얻은 사람이 그것을 상실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는 최목사가 비판의 초점으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회개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므로 다음 문단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둘째는 구원과 회개의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설교해 왔다. 구원을 위한 일회적 회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 성화를 위해 필요한 회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입장은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견인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임을 알고 있다. 칼빈주의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견인 교리는 택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중 예정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판적으로 말하면 신자의 견인은 택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또 다른 시각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침례교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이 이중 예정이라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의 견인 문제를 칼빈주의처럼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설명하지 않는다. 견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타락가능성은 인정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라) 견인될 것이라고 확신할 뿐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행여 믿음이 파선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는 말씀을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침례교의 한 신학자는 구약에서는 민족적 배교 행위, 배교에 대한 예레미야의 관심, 신약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나 바울 서신에서 갈라디아서 1장만 제외하고 다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경고가 있고, 목회서신과 옥중서신,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히브리서, 요한서신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교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할 정도다. 따라서 최목사의 기준은 여전히 칼빈주의적인 것이므로, 그의 이단시비는 대단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는 목사관에 대한 문제다. 전형적인 이단의 교주와 같은 목사관이라는 최목사의 비판은 9월호의 비판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고, 따라서 나는 그 때 나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한 것으로 안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간다면, 나는 이단의 교주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고 순종하는 교인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카리스마적인 목사관을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목회관의 “철저성”에서 나온 문제다. 최목사가 나의 목사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하려고 했던 아나뱁티스트들의 삶의 모습이 용납되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5. 끝맺는 말
물론 부흥성회의 특성상, 행함이나 회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부각시켜서 구원의 도리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통보다 더 중요시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침례교의 전통에 서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나의 설교가 본의 아니게 잘못 전해지는 문제는 앞으로 끊임없이 검토하고 신학적으로 다듬어서 개선해 나갈 것이다. 다만 나는 최목사의 이단시비가 그치든 말든 더 이상 그 문제에 연연해하지 않겠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내 소신대로 충성을 다해 이루고자 할 뿐이다. 그런 마음에서 나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마무리의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관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또 내가 내 자신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 내시고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을 아폴로와 나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아 ?한계를 넘지 말라?는 교훈을 배워 남을 깔보고 주제넘게 자기 편을 추겨 올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공동번역, 고전 4:1~6). 

(월간<교회와신앙> 19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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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정례 예배 외에 기도회 등
다수 차별하는 차별금지법안 교계
미국, 빌리 그래함 목사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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