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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의 들녘에서 추수꾼으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15)
2024년 07월 10일 (수) 09:09:13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백종근 목사 /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순회사역에 매진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위렴 선교사가 군산에 다시 부임하면서 그는 순회구역을 재조정해 3개 시찰로 나누었다. 부위렴은 군산을 중심으로 남부 시찰인 옥구군과 김제군을, 매요한은 북부 시찰인 충남 서천군을, 하위렴의 순회구역은 동부 시찰로 익산군과 충남 부여군을 각각 맡았다.
 

초창기 익산지역의 선교는 전주와 군산지부에서 나누어 맡았는데 전주지부에서는 익산의 동북부 지역에 서두교회(1907), 금마교회, 선리교회(1905), 여산교회, 황화정교회를 세우고 있었고, 군산지부에서는 익산의 남서부 지역에 동련교회, 고현교회, 후리교회, 용산교회 등을 개척해 감으로써 익산은 군산과 전주 선교지부가 편의대로 지역을 나누어 담당하고 있었다.
 

하위렴이 군산지부로 다시 돌아온 것은 거의 7년 만이었으나, 1차 군산 선교 당시(1904~1908) 익산지역에 자신이 세우고 순회했던 동련교회(1905), 고현교회(1906), 제석교회(1906), 송산리교회(1906), 함열교회(1907) 등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하위렴 선교사는 자신의 관할 구역인 동부 시찰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몸소 보고 겪었던 교인들의 신앙생활과 얽힌 일화들을 <Lights and Shadows of Itinerating in Korea>라는 같은 제목으로 선교잡지에 여러 차례 기고하기도 했다.
 

"... 내가 조선인 마을을 순회하며 보았던 밝고 즐거운 면과 한편으로 어둡고 그늘진 가정 이야기도 함께 해볼까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는 (듣는 이에 따라)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나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동련교회: (1) 우상숭배에 빠진 이웃을 계몽하는 이야기
 

동련마을 한가운데 정령이 깃들어 살고 있다는 커다란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당산나무 가지 위에 교회의 종이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교회의 종이 정령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누군가에 의해 올려진 듯했다. 비록 교회의 종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믿음이 결코 성경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하위렴은 주민계몽을 위한 교인들의 퍼포먼스로 여기고 소개하고 있다.
 

"동련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회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위에 종이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무 위에 올려진 종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나는 곧바로 그 종이 교회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나무에는 마을 사람들이 섬기는 정령이 살고 있다는 당산나무였다. 당산나무 가지 위에 교회의 종을 올려 놓으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하리라'(마 16:18)는 말씀처럼 (교회의 종이) 귀신의 권세를 이길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는 말인가?"

   
당산나무 위에 올려진 교회 종

• 동련교회: (2) 믿는 자의 모범을 보인 백씨의 이야기
 

동련교회의 백씨(장립이 되기 이전 백낙규로 추정)는 포목점을 하는 상인이었다. 그는 주변 상인들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과는 달리 주일에는 일하지 않고 주일성수를 했을 뿐 아니라 물건을 팔면서도 가격과 품질을 속이는 일이 없이 정직한 거래를 지속했다.
 

이 같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처음 5년간은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주일에 일하는 상인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겼을 뿐 아니라 가게도 더욱 번창해졌다는 그의 간증을 전하면서 "정직함은 영생을 보장받은 우리의 현재의 삶에도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예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며 백 씨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교인이 된 자 중에 백씨라는 소상인이 있었는데 그는 물건의 가격이나 품질을 속이기도 하는 다른 동업자들과는 달리 정직한 거래로 늘 판매가 저조했으나, 그는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에는 물건을 팔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가게의 문을 닫았다. 5년 정도 가난을 벗기 위한 몸부림은 애처로웠으나 그의 믿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신용이 있는 사람으로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동업자들보다 훨씬 더 장사가 잘되어 그간에 입었던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었다."
 

하위렴 선교사가 안식년(1908)을 맞아 미국에 돌아갔다가 그 후에 다시 목포지부로 옮겨가면서 자리를 비운 사이(1909~1915), 백씨는 교회부설 계동학교(1909)를 세우고 문맹 퇴치 운동과 농촌계몽에 앞장서기도 했다.
 

   
계동학교 학생과 교사(중앙 흰색 두루마기 차림이 백낙규로 추정)

하위렴이 다시 군산 지부로 돌아오던 그해(1915) 이미 부위렴 선교사에 의해 피택이 된 백낙규를 곧 바로 장로로 세워 동련교회를 조직교회로 출범시켰다.
 

• 동련교회: (3) 잘살 수 있다는 권면에 교회에 나오게 된 자의 이야기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다는 초기 교인들의 신앙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교회를 다닌 교인들이 살았던 집에는 우환이 없고, 그 집에 들어가 살면 물질이 저절로 모인다거나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에도 하위렴은 그들의 신앙 수준을 비판하거나 내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교회를 나오는 교인들의 모습까지도 적나라하게 전해주고 있다.
 

"동련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최근 들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한 교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기를 최근 한 교인의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전 집주인이 말하기를 '이 집은 우상 숭배자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의 집입니다. 나는 이 집에서 3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자 그는 '우리도 이 집에서 우상숭배를 하지 않을뿐더러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한 이후로 그들은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다."
 

송산리교회: 생업의 위기에서도 주일성수를 지킨 박 씨의 이야기
 

송산리교회 박 씨는 수년째 일본인 농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소작농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농장의 감독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박 씨를 찾아와 일방적으로 소작권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그는 곧바로 일본인 지주에게 찾아가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소작권만큼은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해 보았지만, 일본인 지주는 최근 시행된 '소작권에 대한 법률개정'을 들먹이며, 박 씨의 사정을 개인적으로는 들어줄 수가 없다며 자세한 규정을 알고 싶으면 다음 날 다시 찾아오라고 건성으로 말하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튿날이 마침 주일이라 박 씨는 자신의 믿음 상 주일에는 찾아올 수 없음을 말하자 일본인 지주는 거드름을 피우며 자신은 그날밖에는 시간이 없다고 매몰차게 내뱉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박 씨는 자신이 소작을 포기하더라도 주일성수를 해야겠다고 작심하고 주일에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는 이미 소작권을 잃었으리라 여기고 체념하고 있었으나 하루는 일본인 지주가 박 씨를 불러 그의 소작권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몰랐으나 지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얼마 후 그는 주일성수를 하면서도 자신의 소작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을 교인들 앞에서 간증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인 지주가 여러 소작인 가운데서 왜 자신만 지명해 소작권을 보장해 주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일성수를 하려는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음을 확신하고 감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시험을 마주했을 때 교인들이 믿음으로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주일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어 너무도 기뻤다는 박 씨의 간증을 전하기도 했다.
 

• 옥곡교회: 당산나무를 베어내고 계몽에 앞장선 이야기
 

임천군 양화면 선미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이 신령하게 여기는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크기도 크지만 가을이 되면 많은 열매가 달리기도 했는데 매년 정초가 되면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리고 소원을 빌기도 하는 200년이나 된 배나무였다.
 

우연히도 최근 한두 해 사이에 선미 마을에서 무려 열 가정이나 초상을 치르는 일이 생기자,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에 깃든 정령을 노하게 해서 생긴 일이라 여기고, 무서워하며 아무도 나무 근처엔 얼씬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산나무 근처에 사는 사람 하나는 아예 자신의 집을 버려두고 마을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 집은 상당히 크고 좋은 집이었음에도 몇 년을 그렇게 비워두자 거의 폐가가 되다시피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놓아도 아무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없자, 점점 흉흉한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를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도 그것을 베낸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나무 근처에도 얼씬도 하려 하지 않았다.
 

"... 집주인은 이 나무를 잘라내는 사람에게 그 나무의 목재는 물론 돈까지 주겠다고 광고까지 내자, 인근 마을에 교회 다니는 청년 하나가 용감하게 나서서 아무 두려움이 없이 나무를 잘라버렸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신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이웃을 계몽해 가는 교인들의 활약을 알리기도 했다.
 

• 제석교회: 철석과 같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과부 김 씨 이야기
 

하위렴은 제석교회의 가난한 과부 김 씨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녀는 좁은 오두막에 혼자 살면서 야산에서 약초를 캐거나 나무를 해다가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였다. 과부 김 씨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하나는 어려서 죽고, 하나는 결혼해 가정을 이뤘으나 너무도 가난해 어머니를 도저히 도울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였다.
 

인근에 살던 의붓아들이 찾아와 그녀를 자신 집으로 모시겠다는 제의를 여러 차례 했으나 두 가지 이유로 과부 김 씨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첫째는 믿지 않는 아들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가 있다는 이유이고, 둘째는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간다면 결국 자신의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라고 했다. 꿋꿋한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과부 김 씨의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은 하위렴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지켜내려는 그녀의 신앙을 칭찬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하위렴 선교사가 1908년부터 1928년 은퇴할 때까지 당회장으로 돌보았던 제석교회는 1909년 부설 학교인 부용학교를 설립해 지역계몽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학교 출신 교인들이 군산, 강경, 익산 등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특히 익산 4.4 만세운동 당시 남전교회와 고현교회, 동련교회 등 하위렴 시찰 구역 내의 교회들과 함께 그 중심에 서기도 했다.
 

• 왕골교회(초왕리 교회): 3전 4기로 신앙의 실패를 딛고 승리한 윤씨 이야기
 

왕골교회(초왕리교회 후에 오량교회)에 출석하는 윤 씨는 놋그릇을 만드는 장인匠人이었다. 그가 교회에 출석한 햇수로만 따져도 20년이 넘던 터라, 다른 어떤 교인보다도 성경 지식에 해박하고 교회 생활에도 밝은 편이었다. 그런 그가 학습을 세 번씩이나 받았으면서도 그때마다 번번이 죄를 짓고 넘어지곤 했다. 그런데도 다행인 것은 그가 넘어지는 중에도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고 교회 생활을 지속한다는 데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넘어질 때마다 교회에서 그에게 학습을 다시 받도록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지은 죄가 파렴치한 죄라기보다는 누구나 다 그의 죄를 인지할 만큼 공개적이었던 것 같고, 본인 자신도 세 번씩이나 학습을 받으면서도 교회 생활을 지속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교회에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학습 교인(catechumen)이라는 제도 자체가 세례가 신중하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의도에서, 세례받기 이전, 문답만을 통해 받아들이는 일종의 예비신자 제도였기에 망정이지 그에게 세례를 곧바로 주었더라면 얼마나 교회의 덕을 가렸을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놋그릇 제조업이라는 게 재료비가 오르면 반대로 수요가 급감하는 구조였는데, 몇 해 동안 지속적으로 재료비가 크게 오르자 윤 씨의 일감이 줄어들면서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궁색해지고 말았다. 그 후로 종종 동업자들을 통해 일거리가 주어지기도 했으나 그는 단호히 말하기를 '나에게 아무리 좋은 조건의 일거리가 생긴다 해도 믿지 않는 사람과 일하는 것은 거절할 것'이라 말하면서,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다시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그의 다짐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1905년도에 이미 300여 명의 교인이 출석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던 초왕리교회(오량교회)는 1907년에 이르러 옥산교회를 비롯해 청포교회, 지석교회, 성산교회, 마명교회, 오덕교회 등 여러 교회를 충남지역에 분립하면서,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모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 후리교회: 가족을 구원하고 교회를 부흥시킨 오덕순의 이야기
 

오덕순은 오덕근의 여동생으로 19세가 되던 해에 한마을에 사는 김자윤과 결혼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집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안질을 얻었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거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 시절 어디 눈뿐이랴! 몸 어디에 사소한 병이 생겨도 요즘같이 병원은 고사하고 흔하디흔한 약조차 구할 수 없을 때니까 침침하던 눈을 그대로 방치한 게 잘못이었다. 남존여비가 엄혹했던 시절 배우지 못한 데다 실명까지 했으니 그녀가 겪은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를 영접하고 나서는 실명의 장애를 딛고 전도에 앞장서면서부터 교회가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선교사 순회 방문이라 해야 일 년에 몇 차례도 되지 않던 시절에 교회가 세워진 지 불과 몇 년 사이 주일학교를 포함 3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한 것은 순전히 그녀의 전도와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자윤의 부인 오덕순

한번은 엄청나게 눈이 많이 내린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데다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 모든 길이 얼어붙고 미끄러워 통행이 거의 불가능했는데 그날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한 학습과 세례를 위한 문답이 밤 11시 3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날 정도로 교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27명의 학습 교인을 포함해 25명의 세례 예식이 있던 주일, 예배당에 자그마치 280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선교사의 순회가 기껏해야 일 년에 두어 차례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라, 모든 순서(장로 선출, 세 사람의 서리 집사 선출, 문답과 세례, 성찬)를 주일예배와 함께 진행해야 했던 그날의 행사는 세 시간을 넘기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부흥의 열기는 오덕순에 의해 이미 3년 전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그녀는 교육받지 못한 여성으로 실명까지 한 상태였으나,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기도했으며 (그녀의 열정적인 기도 생활은) 오래 믿었다는 사람을 부끄럽게 할 정도였다. 일 년 정도는 그녀 혼자 수고했으나 그녀의 오빠와 남편 그리고 대여섯 명의 부녀자들이 그녀의 영혼에 감화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회 안에 기도회 모임을 만들어 수시로 인도했으며, 행여라도 교인들 가운데 아픈 사람이 생기면 한밤중에라도 거리를 불문하고 달려가 기도했다. 그녀의 기도 생활은 엄동설한에도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쉬지 않을 정도로 늘 상황을 초월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기도해, 심지어 귀신 들린 자도 네 사람이나 고치는 등 그녀의 기도는 주변 사람을 감화시키고도 남았다. 그녀는 기도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사도신경과 주의 기도 그리고 십계명 등을 쉽게 풀어 가르쳤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완전성과 구원의 필요를 수시로 강조하기도 했다.
 

하위렴은 목사인 자신도 지금까지 그렇게 기도하며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그녀야말로 교회를 위한 살신성인의 전도자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분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나의 죄를 씻겨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진리는 물론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등을 포함한 기본 교리들을 정확하게 가르치며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친정 오라버니와 남편을 인도해 장로로 피택이 되게 했으며, 장로가 된 오덕근과 김자윤은 영혼 구원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기고 마을을 돌며 전도와 권면에 힘을 썼다.
 

하위렴은 이 교회의 부흥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그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얻어낸 하나님의 응답이라 말하면서, 누구라도 이들처럼만 한다면 하나님은 같은 축복으로 교회를 채우실 것이라 강조하기도 했다.
 

• 함열교회: (1) 핍박을 이겨내고 남편을 회개시킨 황 씨 부인의 이야기
 

함열교회의 황 씨 부인이 믿기 시작한 것은 이웃에 사는 한 여자의 권유를 따라 그녀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였다. 그녀의 남편은 너무도 완고해서 그녀가 교인이 된다는 것은 물론 아예 교인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반대했다. 이 같은 남편 황 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 주일 교회에 나갔다. 그때마다 남편은 심한 욕설과 매질로 그녀를 폭행하면서, 심지어 가위를 들고 삭발하겠다는 위협을 하기도 했으나 그녀는 굴하지 않고,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앙생활을 막지 못할 것'이라 말하며 교회 출석을 계속했다. 남편 황 씨는 자신의 어떤 협박으로도 아내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아예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내 버렸다.
 

그 후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황 씨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가정에 어려움이 왔음을 크게 뉘우치는 한편 그길로 아내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그녀를 데려와 가정을 다시 꾸렸다. 남편의 핍박으로 친정으로 쫓겨가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인내로 지키고 기도로 남편을 회개시켰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금은 그녀가 글을 깨우치고 문답을 통과해 세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그녀가 배울 기회는 물론 집안에서조차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없어 그야말로 낫 놓고 ㄱ자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었으나, 교회에 나오면서부터 글을 깨우쳤으며 지금은 모든 공 예배에 참석하면서 세례를 받고자 기다리는 중이다."
 

• 함열교회: (2) 기구한 삶을 믿음으로 이긴 한 씨 부부 이야기
 

함열교회에 한명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학습 교인이었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한 씨도 의병으로 나가 활동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붙들려 갔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가족과 두절이 된 채 3년이 흘렀는데, 생사를 모르는 그의 행방불명으로 누구보다도 답답한 것은 가족들이었다.
 

그의 장모는 가사를 다 팽개치고 경성에 올라가 통감부까지 찾아다니며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그와 관련된 어떤 소식도 전혀 듣지 못한 채 허탕만 치고 말았다. 사위 찾기를 자포자기한 그녀는 그길로 고향에 내려와 자기 사위가 감옥에서 동사凍死한 것을 보았다고 거짓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렇게 해야만 딱하게 사는 자기 딸을 재촉해 결혼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후 친정어머니의 강권에 못이긴 한 씨 부인은 딸린 두 자식을 데리고, 믿는 홀아비와 재혼하게 되었다. 그녀가 재가하면서 한 씨 부부의 사연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그 후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죽었다던 한 씨가 갑자기 살아 돌아와 마을에 나타났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이미 재가해서 다른 남자와 살림을 꾸린 한 씨 부인과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씨는 곧바로 장모를 찾아가 자신의 아내를 돌려달라 요구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무튼, 그들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어땠는지는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결론은 그녀가 현재의 남편을 떠나 전 남편에게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그녀가 전 남편 한 씨에게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그녀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다급해진 한 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든 아내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용하다는 의원을 다 찾아다니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자 마지막으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해보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한 씨 부인은 죽는 한이 있어도 굿은 하지 말아 달라고 극구 반대하면서, 만일 진심으로 자신의 회복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남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남편이 묻기를 나 같은 죄인이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실지를 묻자, 그녀는 당신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새롭게 살기를 다짐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 말했다. 아내의 간곡한 당부대로 남편 한 씨는 이때부터 날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기적적으로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면서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신실한 교인이 되었다."
 

그녀의 강권으로 남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뿐더러, 돌아온 남편의 간절한 기도로 병든 그녀가 온전하게 회복되었다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 함열교회: (3) 반상의 차별을 극복하며 교회를 이끈 조사의 이야기
 

함열은 현감이 맡아 다스리는 고을로 예부터 반촌班村이 형성되어 있어, 반상班常의 구별이 인근 지역과 비교해 유난히 남달랐다. 1907년 함열군 소재지에 함열교회가 세워질 때만 해도 교인들의 대부분은 상민 출신들이었다. 이렇다 보니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함께 나오던 양반들이 슬슬 눈치를 보면서 떨어져 나가 50여 명쯤 되었던 교인이 겨우 1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에 교회를 이끌어 가는 조사가 한 사람(이내겸으로 추정)이 있었는데, 그는 상민 출신이었으나 신실한 교인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권서인으로 활약도 했지만, 결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자랑한다거나 공치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반촌班村에 사는 양반 가운데는 조사가 상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활동을 못마땅해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때때로 서울에 올라가 큰 교회에 참석한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하며 스스로 믿음이 있는 체하면서도 아예 상민들과는 함께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견디다 못한 조사가 어느 날 불쑥 하위렴 선교사를 찾아와 자신이 교회를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이 교회를 떠나야만 양반들이 교회에 나올 것 같다는 거였다.
 

조사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 하위렴은 그를 달래며 '교회에 나와서도 양반임을 내세우는 이들이라면 결코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누누이 설명하고 오히려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해 가을, 부흥회가 열렸는데 양반집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듬해 봄에는 양반들이 주도해서 김익두 목사를 초빙해다 일주일간 사경회를 개최했는데 참석했던 모든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았다. 이때부터 아주 보수적인 몇 가정을 제외하고는 고을의 양반들 대다수가 교회에 나오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경회가 끝나고 2개월이 지난 후, 하위렴 선교사가 함열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인 수가 12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고, 그중의 3명은 세례를, 22명은 학습 교인으로 등록하는 쾌거를 이루고 있었다. 그 후로 이 씨는 여전히 조사로써 아무런 문제가 없이 교회를 이끌어 오고 있다.
 

반상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던 시절, 하위렴은 교회 안에 존재했던 신분 갈등의 현실을 전하면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이후 양반들이 변화되면서 그동안 하대下待했던 조사의 인도를 받아 가며 교회를 세워가는 모습에 뿌듯해하기도 했다.
 

• 함열교회: (4) 남자 교사로 인해 교회부설 여학교에서 일어난 웃지 못할 이야기
 

한번은 교회부설 여학교에 남자 교사 채용을 계획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처음부터 학부형들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다. 성장한 딸을 젊은 남자 선생에게 맡긴다는 사실에 커다란 거부감을 보이는 학부모들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어렵사리 남자 교사 채용을 허락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있었으나, 유교적 전통사회가 언젠가는 맞닥뜨리고 넘어야 할 통과의례로 여기며 오히려 계몽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교회부설 여학교에서 젊은 남자 교사를 임시로 채용하기로 했다. (중략) 여학생들은 부모의 동의 아래 학교에 오기도 했지만, 부모 몰래 학교에 온 여학생 가운데는 집에 돌아가 매를 맞기도 했다. 이것은(남자 교사에게 배운다는 것은) 여성들이 집안에만 갇혀 지내야 한다는 관습에 일종의 혁명이었다. 부모나 학생 모두 우리의 동정심과 협력을 필요로 했다."
 

• 함열교회: (5) 교회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에서도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
 

어느 주일 아침이었다.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교인 중 하나가 종각에 나가 종을 치고자 줄을 잡아당겨 보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종에 줄이 꼬여 종을 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잽싸게 종각에 올라가 그것을 풀어보려 했으나 그날따라 쉽게 풀리질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종각 주변에 몰리면서 왁자지껄 떠들며 소란을 피우자 예배당 안에 있던 교인들까지 밖으로 나와 어찌 된 영문인지를 알고자 했다.
 

마침 종각에 올라가 있던 사람이 우연히 교회 건물을 내려다보다가 건물이 크게 기울어져 붕괴 직전임을 발견하고, 예배당 안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안에 계신 분들은 절대 뛰지 말고 빨리 건물 밖으로 나오시오!"
 

외치는 소리에 놀란 교인들이 건물 밖으로 모두 빠져나오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교회 건물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으나 천만다행으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회 건물이 무너졌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교회로 달려 나와 친척과 친지들을 부르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교인들이 나서서 무너진 건물 밑에 깔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안심시켰으나 모여든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의 잔재를 다 치우고 그것을 다 확인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건물 손실 외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였다. 왜냐하면, 마침 교회에서는 재건축을 준비하며 그때까지 사용하고 있던 이 초가 예배당을 헐고자 하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위렴은 이 일을 두고 하필이면 그 주일 아침에 종탑의 줄이 꼬여 종을 칠 수가 없었는지, 그뿐 아니라 때마침 종탑에 올라갔다가 건물이 붕괴하기 직전에 그 사실을 발견하고 교인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두동교회: 조선의 결혼풍습 이야기
 

하위렴 선교사가 전도선을 타고 금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며 순회하던 교회를 살펴보면 양안兩岸을 따라서 익산군에는 웅포교회, 대붕암교회를 거쳐 황산리교회, 무형리교회가 있었고, 부여군에는 초왕리, 오량리, 청포리교회 등이 있었다. 물길 중도에 대붕암교회를 지나 성당포구에서 만나는 함열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부곡리교회와 송산리교회까지 뱃길로 순회가 가능했다.
 

성당면의 부곡리교회와 두동리는 상거가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동리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하위렴 선교사는 조사 김정복과 함께 두동리 주민들을 데리고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두동교회가 시작되었다.
 

"익산군 성당면 두동리 교회가 설립되다. 선시先時에 선교사 하위렴과 조사 김정복이 전도함으로 부인들이 믿고 부곡리 교회에 래왕來王하더니 안신애의 열심 전도로 신자가 점진漸進하매 박재신이 자기 가옥 중 부속을 차여借與 회집 예배하니라"
 

두동교회에 혼기가 찬 한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의 식구들은 자그마치 14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큰오빠를 제외하고는 모두 두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가족과는 달리 기독교를 극심하게 반대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까다로워 다른 사람의 생각은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아주 완고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교회에서 예배 후 회의가 열렸는데 그날따라 토론이 길어지면서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교회에 갔던 가족들이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자 참다못한 그녀의 아버지는 그길로 교회에 달려가 집기什器들을 집어 던지며 교회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까지 서슴지 않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자기 딸의 결혼조차도 당사자인 딸의 의견은 전혀 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고, 유교의 전통 방식대로 하되 모든 것을 아버지인 자신이 결정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가끔 인근에 사는 부녀자들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와 사윗감을 구해준다며 믿지 않는 남자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믿지 않는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티며 자리에 눕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예 집을 나가 잠적하기도 했다.
 

이런 갈등이 이삼 년이나 계속되면서 나이가 18살이 넘도록 그녀의 결혼은 미뤄지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한 중매쟁이가 와서 믿는 청년의 이야기를 꺼내며 혼사를 타진했다. 그녀는 믿는 남자라는 말에 호의를 가지고 마음을 열었는데 마침 그녀의 아버지 역시 그 청년이 사윗감으로 적절하다고 여겼는지 이야기가 나온 지 하루 만에 혼사를 결정해버리고 말았다.
 

가족들 역시 더할 나위가 없는 잘된 결정이라 여기고 만족하고 있었으나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간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입으로는 믿는다고 했지만, 세례는커녕 학습도 받지 않아 교인으로 등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법에 따르면 그녀는 교회에서 예식을 치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는 과거에도 여러 번 학습 문답을 받고자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좌절된 것은 교회에서는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아서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그녀가 최소한 학습 교인이 되어야 했다. 다급해진 가족들은 하위렴 선교사에게 결혼식 날짜를 통보하고 학습 문답을 받게 해달라고 재촉했지만, 하위렴 선교사는 이미 예고된 순회 일정을 따라 두동교회에는 2주 후에나 올 수 있는 상황임을 설명하고 결혼식을 그때까지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그 당시 사회적인 관습상 이미 잡아 놓은 혼인 날짜를 연기하자는 이야기는 곧바로 파혼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랑이나 신부 측 어느 쪽에서도 먼저 혼례를 연기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양가 모두 혼례식 나흘 전까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속앓이만 하고 있던 차에 하위렴 선교사가 마침 인근 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침 하위렴 선교사가 신부의 집에서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밤을 새워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는데 하위렴은 그녀에게 기별해 그곳에서 그녀만을 위한 문답을 할 수 있다고 알렸다."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문답에 참여하라는 통보를 받자 신부의 어머니와 대여섯 명의 부녀자들이 그 밤에 득달같이 신부를 데리고 걸어서 왔다. 예정된 문답은 쉽게 통과되었고, 걱정했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며 예정된 날짜에 교회에서 혼례식을 치를 수가 있었다.
 

그 시절에만 해도 워낙 유교 전통이 완강하고 남존여비의 뿌리 깊은 인습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배우자의 선택이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무조건 부모의 의사대로 정해지던 그 시절에, 하위렴은 기독교로 말미암아 여성들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가는 사회적 변화에 주목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조선 여성의 인권상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기독교는 여권신장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를 추모하다(1920.6.)
 

1920년으로 넘어오면서 또 한 사람의 동료 선교사가 순직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정명여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던 유애나Anabel M. Nisbet 선교사였다. 그녀는 1919년 목포 4.8 만세운동 당시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기숙사 계단에서 미끄러져 뇌를 다친 후, 그 길로 일 년 가까이 병석에 누워 지냈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20년 2월 21일 목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69년 1월 19일 테네시주 클락스빌에서 태어난 그녀는 1899년 6월 목사인 유서백John S. Nisbet과 결혼하고 그를 도와 목회를 하다가 1906년 부부가 함께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내한 당시 그녀는 선교부에서 회계업무를 잠시 맡기도 했으나 언어훈련이 끝난 그 이듬해부터는 교육선교사로 활약하며 전주의 기전여학교와 목포의 정명여학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또 다른 업적 가운데 하나는 1919년에 출판한 'Day In Day Out in Korea'(한국에서의 나날)라는 책을 꼽을 수 있는데, 그녀는 이 책에서 남장로교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조선인 교회에 대한 4반세기 역사를 수록함으로써 조선 선교의 의의와 그 위상을 해외에 크게 인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장로교 내한 선교사 제29차 연례모임을 마치고

하위렴 선교사 부부에게 니스벳 선교사 부부는 누구보다도 오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자녀가 없어 오누이처럼 살았던 두 내외는 동갑내기로 비록 하위렴보다는 세 살이 적었으나 오히려 마음으로는 하위렴이 더 그들을 의지하곤 했다.
 

하위렴이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신흥학교 사역을 맡길 때도 니스벳이었고, 1912년 목포지부 시절, 에드먼즈의 병고病苦로 장기간 지부를 비워야 할 때도 이들 부부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대신 맡아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으로 출국할 당시에도 어린 남매까지 딸린 에드먼즈를 염려해 부산까지 동행해 준 것도 그들이었다. 어찌 보면 하위렴에게 있어서 니스벳 부부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나타나 함께해 주었던 수호천사와도 같았다.
 

항상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섰던 유애나Anabel M. Nisbet 선교사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음에도 차일피일 미루다 병문안 한번을 제대로 가지 못한 것도 그렇게 후회스러웠을 뿐 아니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유서백John S. Nisbet 선교사를 볼 때마다 상처喪妻의 고통으로 시달렸던 자신의 아픈 기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남장로교 내한 선교사 제29차 연례모임이 1920년 6월 18~29일까지 광주에서 열렸을 때 참석한 선교사 일동은 그녀의 죽음을 추모했는데 하위렴은 "Mrs. Nisbet as a Hostess"(도우미로 살았던 니스벳 여사)라는 제목의 조사弔辭를 지어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고 선교사의 삶을 함께 기렸다.
 

하위렴 선교사 내한 선교 25주년 기념 예배(1921.2.18.)
 

1921년 2월 18일 금요일 저녁 군산 지부의 선교사들과 구암교회가 마련한 '하위렴 선교사 내한 선교 25주년 기념' 행사는 시작이 되기 전부터 하위렴 선교사를 감회에 잠기게 했다. 1896년 2월 18일 제물포에 도착해 조선에 발을 디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 지났다는 게 도무지 믿겨 지지가 않았다.
 

다음은 하위렴 선교사 내한 선교 25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했던 간호 선교사 래스롭Lillie O. Lathrop 이 KMF(The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한 내용을 발췌해 번역한 것이다.
 

“구암교회 행사장은 마치 성탄절 행사라도 치르는 양 만국기와 등을 달아 한껏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교회 정문을 아치(Arch) 모양으로 장식해 그 위에 '하위렴 선교사 내한 25주년 기념'이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등불을 걸어 글자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ㄱ자 모양으로 건축된 교회 내부로 들어서면 한쪽에는 남자, 다른 한쪽에는 여자들의 좌석이 보였고, 꺾이는 구석 쪽에 강단이 놓여있어 모든 회중이 설교자를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좌우로 앉은 남녀는 서로 볼 수 없도록 중간에 분리막을 쳐 놓았다.
 

한껏 들떠 있는 분위기 속에 먼저 교인이 착석하고 여학교 교사의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마치 신랑과 신부가 입장할 때처럼 손에 등을 든 양응칠 장로가 하위렴을 인도했으며, 양 장로의 아내와 여학교 학생 하나가 에드먼즈를 강단에 마련된 자리로 인도해 하위렴 선교사의 곁에 앉혔다. 조선에서는 그렇게 일상적이지 않은 예식이었다.
 

참석한 모든 회중이 일어나 ‘예수의 전한 복음’(The Morning Light is Breaking)을 함께 부르며 행사가 시작되었다.
 

예수의 전한 복음 천하에 퍼지니,

어두운 나라 백성 그 말씀 듣도다.

죄인이 믿으려는 마음이 있으니,

반갑게 받는 이들 각 나라 많도다.
 

찬송이 끝나자 하위렴 선교사의 조사 가운데 한 사람이 등단해 감사가 넘치는 개회 기도를 하고 나서, 이 땅에서 평생을 사역하며 복음 전파를 위해 애쓴 하위렴 선교사에게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자 회중에서는 아멘으로 화답했다. 조사와 장로 네댓 명의 축사가 잇달아 있었으며, 남학교와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합창으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특별 순서로 10명의 작은 소년들이 줄을 맞춰 서서 하위렴 내외에게 절을 하고, 진심 어린 사랑과 존경 담아 "Our Dear Teacher"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보기에도 귀여운 모습이었다. 여학생 하나가 독창을 했으나 너무나 회중을 의식했는지 수줍음으로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하위렴 선교사가 사역했던 교회들로부터 선물 증정이 있었으며, 하위렴 선교사의 감사의 답사答辭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 행사에 함께 참석했던 래스롭Lillie O. Lathrop은 그때 받았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남겨두기도 했다.

 

"...'아직 사역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The Work Is Not Yet Done)라는 제목의 하위렴의 답사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인상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선교사와 현지 지도자 모두가 조선에서의 복음 사역에 그들 각자의 책임감을 새롭게 느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교사 연수회(1921.3.28.)
 

하위렴 선교사가 영명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군산 지부의 주관으로 교사 연수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일단 대상은 선교부 산하 기독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선인 교사들로 하되, 교사의 전문성보다는 오히려 교사들의 자세와 자질향상에 중점을 두고, 가장 기본적인 교수법 과정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교사 연수회를 기획한 듀피 선교사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오랫동안 우리는 교사들을 위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이 처음 시도였습니다. 대다수 조선인 교사들은 기본적인 교수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서도 자신들의 교수 능력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였습니다. (중략) 우리가 이번 연수회에서 기대하는 것 가운데 한가지는 그들이 교사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전주, 광주, 목포와 군산 선교지부 산하 미션 스쿨의 교사들에게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왕복 여비까지 선교부에서 부담했는데 초청에 응한 교사들은 남자가 40명, 여자가 10명이었다.
 

3월 28일 월요일 경성에서 내려온 강사가 ‘교육의 의도와 목적’이라는 주제강연을 하면서 연수회가 시작되었다. 실제 강의는 각 지부에서 교육 사역을 담당하는 선교사들이 과목을 분담해 맡았으며 군산 지부의 하위렴W. B. Harrison과 듀피Lavalette Dupuy, 광주 지부의 낙스R. Knox와 클락W. M. Clark, 전주 지부의 에버솔F. M. Eversole 등이 진행했는데 연수회에서 다룬 강의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교사의 준비/ 일과/ 교실에서의 주의집중과 규칙/ 훈련/ 수업지도 단계/ 평가/ 학부형과 교사의 관계/ 등이었다.
 

수업 진행은 30분 수업 후, 질문과 토론으로 이어졌다. 첫날 저녁 시간에는 학부형과 교사들의 공동관심 주제들을 중심으로 다뤘으며, 그 둘째 날 저녁은 부위렴 선교사가 제언提言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끌었고, 마지막 날 저녁은 학생들이 옛 서당과 신식 학교를 비교하는 촌극을 준비해 공연했다. 남학생들은 조선 시대 서당교육을 그대로 흉내 내 한자로 쓰인 고전을 외우는 장면을 재미있게 연기하고, 여학생들이 신식 학교에서 수업하는 장면을 그대로 재연해,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소년들이 마루에 앉아 큰소리로 글을 읽고 나서, 읽었던 글을 다시 외울 때는 훈장에게 등을 돌리고 다 같이 노랫가락을 흥얼대는 방식으로 외웠다. 교사와 학생들이 한 권의 같은 책으로 공부하는 방안에서는 이 방법이 필수적이었다."
 

"남학생들의 촌극이 끝나자 책을 보자기에 싸서 손에 든 8명의 여학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책상에 앉아 조용히 공부하면서 묻는 말에 답변했으며 암기한 것을 요구받았을 때만 암기했다. 학생들을 일일이 살피는 여교사에 의해 진행되는 신식 학교의 수업 방법을 보여주었다."
 

한편 여학생들은 에드먼즈로부터 틈틈이 배워온 수예 솜씨로 작품으로 만들어 교사 연수회 기간 전시하기도 했는데, 교과 활동 내용과 학생들의 솜씨를 연수회에 참석한 다른 학교의 교사들과 공유함으로써 교사들 스스로가 크게 고무鼓舞되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그동안 만들었던 수예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봄학기 동안 학생들이 만든 것을 보관해 두었다가 전시했는데 (중략) 연수회가 끝날 때 대여섯 명의 교사들이 작품을 한 세트씩 그들의 학교로 가져갈 수 있는지를 묻기도 했다."
 

비록 3일간의 짧은 연수였지만, 참석한 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강의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교사들과 교제하며 얻은 유익함은 더할 수 없이 좋았다'라고 이야기했다. 비록 교사 연수회는 군산 지부에서 처음 시도해보는 행사였으나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교사 연수를 처음부터 함께 기획하고 참여한 듀피 선교사는 연수회를 다음과 같이 자평하기도 했다.
 

"멜볼딘 여학교에서 지난 3일 동안 개최되었다가 어젯밤 마무리되었던 교사 연수회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중략) 교사 연수회는 너무나 성공적이었고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커다란 영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교사 연수회가 진행되는 동안 순천 선교지부 크레인(Crane) 선교사로부터 그동안 당국의 규제로 문을 닫아야만 했던 순천여학교에 대해 문을 열어도 좋다는 허락을 당국으로부터 받았다고 연락이 오자 그 자리에 있던 선교사들과 교사들이 모두 함께 일어나 박수를 하며 환호하기도 했다. 순천여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군산 스테이션으로 자리를 옮겼던 듀피 선교사는 그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백종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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