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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군산 선교지부(1919.3)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14)
2024년 07월 03일 (수) 09:13:58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백종근 목사 /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의 조선 강점을 옆에서 바라보았던 내한 선교사들의 시각을 지금 우리의 시점에서 되돌아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대체적으로 내한 선교사들이 우리 근대사 내지는 민족문제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서는 긍정과 부정의 시각이 혼재되어 있는데, 선교사들이 일제와 친화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제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였다는 부정적인 견해와 반대로 전도와 교육을 통해 조선인의 의식을 깨우쳐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견해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주류에서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화 과정을 지켜보던 선교사들의 입장을 긍정적인 후자의 견해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일단 선교적 관점에서 정교분리의 입장을 취하고, 총독부와 거리를 두면서 상호 인정과 불간섭원칙을 유지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은 선교사는 조선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외국인 신분으로 이 땅에 거주하며 일제의 지시와 보호를 동시에 받는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가졌던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을 그들에게서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며, 더군다나 선교사들이 내한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복음 전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부정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 한 그 목적을 효과적이고 충실히 수행하려는 노력을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내한 선교사 공의회 이름으로 발행했던 KMF(Korea Mission Field)와 같은 잡지만 보더라도 내용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왕 부부의 사진이라든가 조선 총독의 사진을 속표지에 종종 삽입한 것을 보면 단순히 그들을 존경한다거나 지지해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가 선교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짐짓 시도했던 제스처로 보인다.
 

이들은 줄곧 이 같은 입장을 취해 내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일제와의 관계에서 암묵적인 치외법권적 영역(?)으로 유지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정작 일제에 대항해야 하는 거국적인 만세운동에는 교단이나 노회 차원의 적극적 대처를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아무튼, 개신교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을 앞장서서 전개할 수 있는 기반으로 활용할 수 없었던 점은 몹시도 안타깝지만, 그러나 이러한 조직망을 통해 민족의식을 공유하고,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주요한 장치로 활용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3.5 만세운동과 영명학교
 

3.5 만세운동이 군산에서 일어났을 때도 지부 차원에서는 표면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직접 앞장서지는 않았더라도 서울에서부터 영명학교에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학교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를 준비하는 일은 선교사들의 묵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거사가 누설되면서 이 학교 교사였던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이 3월 4일 체포되고 말았지만, 교사 김윤실과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이튿날인 3월 5일 만세 시위에 불을 댕기자 군산 3.5 만세 소식은 빠른 속도로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익산의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인근의 고현교회, 동련교회, 제석교회 등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익산 4.4 만세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3.5 만세운동으로 영명학교는 수업이 중단되었고, 만세운동에 참여했거나 관련이 되었던 모든 교사와 학생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심지어 구암병원의 직원들까지 전원 구속되면서 지부의 운영이 마비되고 말았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선교사들까지 구금拘禁하거나 추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겠지만 외교 문제로 일이 커질 것을 염려해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일제는 만세운동의 배후에 영명학교가 있음을 지목하고 고등과와 특별과를 전격 폐지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붙잡혀 들어간 박연세를 비롯한 교사 4명은 최종적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양기철을 비롯한 학생 11명도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3.5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그해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인돈William Linton 선교사는 일제의 잔학한 식민 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증언하는 등 조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조선 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했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기도 했다.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영명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1919~1921)
 

3.5 만세운동의 여파가 아물기도 전에 영명학교 교장으로 있던 인돈이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우자 하위렴은 또다시 영명학교 교장을 맡아야만 했다. 교장으로 취임한 하위렴은 무엇보다도 교사와 학생들이 구속되는 사태로 빚어진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를 일단 일신一新해야만 했고, 한편 당국으로부터 감찰 대상이 된 학교 운영의 정상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3.1 만세운동 후 전국적으로 민족 자각의 불길이 타오르며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교육열이 고조되면서 미션스쿨에도 지원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으로 학교가 입은 피해도 컸지만, 반면에 유익한 결과로 막을 내린 셈이었다.
 

"조선인들 사이에 커다란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깨닫고 있었으며 아예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일종의 장애로 알 정도였습니다. 뜨거운 교육열이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고등학교 1~2학년 학생 수가 처음에는 60여 명이었는데 지난 학기에는 260여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그런데도 100명 이상이나 되는 학생은 교실이 부족해 받아들일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Notes on Educational Work for Boys", The Korea Mission Field, Vol. 17, No. 5, May. 1921, pp. 231)
 

영명학교도 예외 없이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심지어 상투를 틀고 망건과 갓을 쓰고 서당에 다니던 학생들까지 찾아와 학교에서 입학을 허락해 준다면 기독교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하며 100여 명 정도가 지원하기도 했다. 그들은 입학과 동시에 자신들이 그렇게 고집하던 전통 복장마저 일순간에 바꾸자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다.
 

동부(하위렴)와 북부(매요한) 시찰의 교회부설 학교 역시 4개에서 9개로 늘더니 학생 수도 역시 8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 이를 본 주변의 다른 지역교회들도 앞을 다투어 곧바로 부설 학교를 시작하겠다는 의욕을 보이며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일제의 간섭과 조선인 탄압에 대해 교단의 관심을 촉구하다
 

군산 3.5 만세 시위가 있고 나서 얼마 있다가 서울에서 내한 선교부 공의회가 열렸다. 하위렴 선교사 역시 그 회의에 참석했는데 마침 총독부에서도 그 자리에 학무국장이란 자를 보내 여러 가지 규제 사항을 열거하며 기독교 학교에서도 총독부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따라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몇 사람의 선교사를 따로 총독부로 불러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총독부의 협조 요청을 검토한 공의회에서는 담당위원회를 통해 공의회의 입장을 총독부에 제출하면서 그동안 총독부가 약속해 온 것들도 함께 실행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하기도 했다.
 

"총독부에서 연례 선교사 공의회에 학무국장을 보내 선교사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따로 선교사 몇 명을 초대해 자신들의 일에 잘 협조해 달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공의회에서는 수개월 동안 대책을 논의해 그 결과를 위원회에 제출하면서 공의회의 강한 의사를 총독부에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여전히 총독부에서는 개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해온 약속을 실행하도록 하는 것뿐이었습니다."(William B. Harrison, "Letter from Rev. W. B. Harrison" The Missionary Survey, Vol. 10, No. 1, Jan. 1920, pp. 14-15)
 

하위렴 선교사는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장인 체스터 박사에게도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고 기독교 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에 대해 교단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편 하위렴 선교사는 자신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긴장감으로 살벌한 시내의 모습을 전하면서 일본 헌병들은 아무런 영장이 없이도 걸핏하면 조선인을 체포하거나 구금하기도 해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비록 소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았으나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물샐틈없이 배치된 무장 군인들이 걸핏하면 사람들을 잡아 드렸는데, 총독부에서는 그러한 탄압으로 조선인들을 단념시킬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습니다."(위의 책, pp. 14)
 

한편 그는 조선인 탄압의 예를 조목조목 들면서 일본인에 대한 폭행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면서도 조선인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즉결처분으로 체포와 구금을 시행할 수 있다는 총독부 부령府令을 언급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붙잡아다 폭력적인 취조取調를 하는 것 자체가 명백한 조선인 탄압정책이라 지적했다.
 

군산의 사정도 서울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삼엄한 총칼의 위협에 숨을 죽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전하며 소요 사태가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썼다.
 

"군산에서도 일본군 헌병대가 곳곳에 깔려있어 시민들도 무력의 위협하에서 꼬박 지난 3일 동안을 지내야 했으며, 어제는 많은 중화기가 시내로 반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 특별한 소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이던 국제연맹 회의가 연기됨으로써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일본 형사들은 전국 각 지역과 빈틈없는 연락을 주고받아도 서울과 지방에서 신문을 발행하는 자들까지는 잡아드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위의 책, pp. 14)
 

조선의 상황에 대한 교단의 반응
 

3.1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해 내한 선교사들은 본국에 여러 차례 자세한 실태를 보고했으나 교단 차원에서는 그때까지 이렇다 할 공식적인 성명서는 내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해외 선교부 총무인 체스터 박사는 조선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선교사들의 보호를 위해 정부 차원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현재 참고위원회(Committee of Reference)와 해외 선교부가 중심이 되어 국무부와 협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고 일본 정부를 향해서는 세계 여론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정중한 요청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솔직히 일본 정부가 세계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 국위에 걸맞는 처신을 하기 바라며, 조선 백성에게 황국 신민화를 강요하는 일본에 대해 세계 각국의 여론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지 조속히 깨닫기를 희망합니다."
 

한편 총회 교육부 간사였던 암스트롱Jno. I. Armstrong 목사는 몇 해 전(1915) 미국 남장로교 총회에서 "선교사 교육을 위한 7개년 계획"을 결의하고, 교회마다 매 주일 '배우자', 기도하자', '돕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기금 마련에 동참하기로 한 것과 매년 남장로교에서 선교하는 7개국을 돌아가며 선교사를 지원하기로 한 것을 상기시키며 일제의 탄압으로 고통당하는 조선의 지원을 호소했다. 남장로교 총회에서는 3.1 만세 시위가 있던 그해(1919)를 '조선 선교사 돕기의 해'로 선정했다.
 

"조선에서의 사역은 지금까지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조선의 영혼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내는 것보다 더 보람이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희생을 통한 복음 증거,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 등, 이런 것들 때문에 조선인들이 받는 박해는 교회사에 등장하는 2~3세기 교부 시대에 비견할 만합니다."
 

총회에서는 이 지원 사업을 위해 어느 해보다도 많은 $40,000 헌금을 작정하고, 조선의 2,651,000명의 영혼을 위해 한 사람이 $5씩만 헌금한다면, 8천 명만 참여해도 가능하다고 호소하면서 일제로부터 압박당하는 조선에 대한 선교 지원을 본격화했다.
 

콜레라가 창궐하다(1919)
 

전국적으로 확산해 가는 만세 시위에 두려움을 느낀 총독부에서는 군대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진압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다는 식으로, 그해 여름에는 콜레라까지 창궐해 사망자가 급증하며 전국적으로 피해가 극심해지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오히려 조선인의 여행과 집회를 제한하는 기회로 삼아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예를 들면 일본인들은 예방 접종이 없이도 여행이 가능했지만, 조선인들은 의사의 예방 접종 증명서가 없이는 여행은커녕 차표조차 살 수 없게 하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방역을 핑계 삼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상인들의 영업을 중단시키는 등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조선인들을 통제하다 보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영세상인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갔다.
 

하위렴은 콜레라로 인한 당국의 여행 규제 때문에, 평양에서 열리는 집회에 차질이 생긴 상황을 체스터 박사에게 알리면서 '콜레라가 진정될 때까지 자신은 스테이션을 떠날 생각이 없고, 학교 내에서 발병하는 일이 없는 한, 휴교 조치는 없을 것'이라는 각오를 밝히며 그동안 학교시설 보수에 힘을 쏟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도 했다.
 

"LA에 거주하는 토레이 박사가 평양에서 열리는 한 주간의 집회를 인도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으나 콜레라로 인한 여행 제한 조치로 그가 일본까지는 왔다가 결국 조선에는 오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강사의 유고로 결원이 생긴 평양집회에 나라도 참여할까 생각했으나 현재 상황을 보아서는 집에 머물러있는 것이 낫다고 여겨 결국 평양에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중략) 물론 학교에서 발병하는 일이 생기면 휴교 조치를 하겠습니다만 별일이 없다면 우리는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 합니다."( William B. Harrison, "Letter from Rev. W. B. Harrison" The Missionary Survey, Vol. 10, No. 1, Jan. 1920, pp. 14-15)

 
백종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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