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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목사의 이단 시비에 대한 반론1
1998년 02월 01일 (일)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이단성이 있거나 사이비성이 있는 사람들은 이단 논쟁을 그 핵심적인 내용 자체에서 찾기보다, 개연적인 방법을 문제 삼거나, 법원에 제소를 하거나, 언론 플레이를 하거나, 또는 협박이나 시위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 점에서 윤석전 목사측도 예외가 아님이 나타났다. 본지가 지난 1997년 9월호와 12월호에 윤석전 목사의 이단성을 지적하자, 그에 대하여 엄청난 비용을 들여 광고전을 하였고, 법원에 제소하겠다고 말하고 있고, 그리고 여러 차례 최삼경 목사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로 집단 항의 방문을 하였다. 그러나 본지는 본지 본래의 뜻에 의해 본호에 윤석전 목사측의 글을 게재하는 바이다. 다음 호에는 최삼경 목사의 반론이 게재될 것이다. 독자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음 글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본지가 참으로 큰 인내심을 가지고 참고 있는 것처럼···. <편집자 주>

1. 서론: 최목사의 이단시비에 나타난 기본적인 오류
구체적인 변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최목사의 글을 대하면서 느꼈던 기본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하기로 하겠다. 최삼경 목사가 “윤석전 목사의 구원관에 이단성 있다“(<교회와신앙> 46호/1997년 9월호, 이하 괄호안의 숫자는 이 잡지의 페이지를 의미함)에 나타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첫 번째로 드러난 문제점은 이단시비에 대한 최목사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목사 자신은 비판기준의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하지만(133), 그것은 비판기준의 객관성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비판할 자료를 확보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목사는 남을 이단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단에 대한 분명한 정의와 그 기준을 밝혔어야 한다.

사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주관적인 잣대에 의해 박해를 받아 왔는지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충분히 경험해 왔다. 도대체 이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정말 타당한 것인가? 최목사가 이와 같은 질문에 의해 검증된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단시비는 그 자체로 무의미한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최목사가 이단시비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꼭 밝혀야 할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최목사는 한 사람의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성 여부가 가려질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을 그 사람의 글이나 말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고 유추하는 성급함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제는 최목사의 이단시비가 극히 위험한 감정적인 것으로서, 이른바 “말 앞에 수레를 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에 끌어 맞추기 위해 억지로 논리를 전개하는 오류를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모든 사고의 원인도 마귀로 보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유추해 보자면 윤목사는 모든 질병이 마귀에게서 온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138). 최목사는 나의 마귀론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최목사는 내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유추“하여 나를 이단으로 몰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엄밀성이 결여된 최목사의 태도에서 나는 그에게 정말 이단을 시비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셋째는 최목사가 나의 글과 설교를 인용하는 대목에서도, 본문 전체의 문맥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이끌어내지 않고, 단장취의식(斷章取意式)으로 그 말의 뜻을 왜곡시킬 때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그가 나의 글을 오해하거나 의미를 왜곡시킨 부분 가운데 몇 가지를 제시하면 이렇다. “그분에게 완패해야 합니다. 그분 앞에 살아 있으면 그 때 가서는 영원한 지옥을 면치 못해요“란 나의 글에서 최목사는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윤목사가 말하는 ‘그‘는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윤목사는 ‘그‘를 사탄 마귀 편에 서 있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132~33).

이 도대체 무슨 엉뚱한 해석인가? 하나님을 가르키는 그 분을 사탄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최목사의 독해력 수준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병을 문제 삼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병을 이기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을 문제삼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없는 것을 문제 삼아야 합니다···“를 인용한 최목사는 그 대목에서 “병이 마귀에서 왔으니 병을 문제 삼지 말라는 뜻이다“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다(137). 마치 마귀가 준 병이니까 저항하지 말고 문제삼지 말라는 식으로 말한 것처럼 본말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강조한 것은 마귀에게 온 병이니까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음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목사의 태도가 이처럼 본문의 의미에서 충실하지 않았기에,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윤목사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너를 죄 짓게 한 마귀의 죄를 사하노라‘고 하시거나 또는 ‘네가 죄를 회개하니 네가 지은 죄를 마귀에게 돌리노라‘고 하셨어야 할 것이다“(138~39)로 억측을 할 수 있었다.

2. 마귀론에 관한 변론
최목사는 이른바 “귀신파“의 대표적인 이단성을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왔다“는 사상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135). 동시에 그는 나에게도 이런 “귀신파“의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모든 질병이 마귀에게서 왔다고 한 나의 직접적인 말을 인용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질병이 마귀에게서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질병 가운데는 마귀가 준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도 있고, 인간의 잘못으로 얻은 질병도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기본 입장이다. 다만 욥기서를 설교할 때는 그 상황에서 그 질병들을 마귀가 준 것이라고 강조했을 뿐이다.

또한 누가복음 13장 본문은 다음과 같다.
(11절)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절)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절)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귀신은 아니지만 이 본문에서는 이 여자의 앓으며 꼬부라진 이유가 귀신들렸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누가 무어라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귀신은 아니다. 그러나 눅 13장의 이 본문, 이 여자의 경우는 귀신들림이 원인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설교를 귀신파들의 주장과 연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또 그는 이단성의 근거로서, 내가 죄와 마귀를 연결시키고, 죄의 책임을 마귀에게 돌리며, 그 결과 우리의 회개는 마귀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최목사의 주장은 또 다시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최목사의 주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윤목사의 회개관은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우리가 져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이 마귀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결국 마귀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138).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다. 최목사가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인용한 나의 글은 다음과 같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지탄을 받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배후에는 마귀가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모릅니다.“ 나는 그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했지, 그것이 마귀의 죄라고 하지 않았다. 죄의 본질을 바라보고 한 설교였지,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이 마귀의 죄이므로 인간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이렇듯 최목사의 비뚤어진 시각은 마침내 예수님의 사죄 선언을 마치 내가 “너를 죄 짓게 한 마귀의 죄를 사하노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억측이다. 나의 구원관에 대한 최목사의 비판은 바로 이런 억측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최목사는 나의 구원관에 대한 문제성을 이런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윤목사의 말처럼 그 죄의 책임이 마귀에게 있다고 하면 달라지는 것이 바로 구원관이다“(139).

3. 구원론에 관한 변론
구원의 문제를 교회생활이나 기도생활에 국한 시킨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가 교회생활이나 기도생활을 신앙문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구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구원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것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최목사는 기본적인 비판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적어도 나의 구원관을 문제 삼으려면, 내가 구원관을 설교하는 본문에서 그 문제점을 발견해야 한다. 성화된 삶을 강조하고,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 목적인 본문에서 구원관의 문제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해석의 기본원리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회개와 신앙생활의 부분들을 구원과 연결시킨 데 있을 것이다. 최목사가 지적한 것처럼, “기도도 해야하고, 거룩한 교회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하고,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예배시간에 졸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원과 연결시킨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적인 것이다“(141)는 말에는 다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목사는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그런 행위들을 구원관과 연결시킨 것이 문제였다고 그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 비약하여 나의 구원관이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이니, “복음을 폐하는 사탄적인 행위“시하며, 나의 구원관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논평은 나의 구원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직접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4. 계시론에 관한 변론
최목사가 계시와 영감과 조명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영감이라는 말을 내 자신에게나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사용한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나의 계시관에 문제가 있으니 역시 윤목사는 이단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일종의 모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얼마나 세 단어의 관계를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겠는가? 전문적인 신학적 견해가 다소 다르거나 혹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내친다면, 이땅에 이단 아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사실 많은 목회자들은 영감과 조명을 서로 혼용하여 쓰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결국 이 문제는 사도 시대가 지난 이 시대에도 병고치는 은사가 가능한 것인가를 시비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문제는  하나의 신학적인 입장 차이이지, 결코 이단의 시비를 가릴 성질의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최목사가 이단의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일종의 “지나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이렇게 지나치게 이단분별사가 되려고 하는 최목사이기에, 그는 내가 교인에게 절대적 순종을 요구한다고 하면서, 나를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몰아붙이고 있다. 그가  한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명령에는 교인들이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 그렇다.

우리 인간의 판단과 명령에는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없다. 그것이 성령의 명령이라는 절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최목사의 말에 의하면, 절대명령을 요구하는 것은 성령의 명령이고, 성령의 명령은 계시라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의 명령을 계시라고 할 수 있는가? 계시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계시는 복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 주신 것이 아닌가?

5. 목사관에 관한 변론
최목사는 “윤목사의 목사관에 의하면 그는 신격화된 교주와 유사하다“고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유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최목사는 그 근거로 목사의 권위가 너무 지나치다, 성도들에게 폭력을 사용한다, 목사의 손에 성도들의 생사권이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등을 들고 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신격화된 교주의 모습으로 나를 둔갑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교인들에게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때로는 성도들을 때려주기도 한다.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의 생사를 책임지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신격화된 교주가 되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순종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신앙을 멀리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가 제 자식을 매로 다스리는 것을 보고 마치 불량배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왜곡 아닌가?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서 성도들은 그 영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 어찌 목사의 역할이 중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일개 윤목사의 실권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윤목사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인 것이다. 어찌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곡해하는가? 그런 면에서 다소 나에게 지나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을 일이다. 이 문제를 신격화된 교주니, 이단이니 하는 문제로 비화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6. 결론
나는 최삼경 목사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이단시비를 벌려온 일에 대해서 결코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그런 분들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라지들에게 순수한 성도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이라는 것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단에 대한 시비는 그야말로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며, 그 일을 수행하려면 그만한 인격과 자격이 갖추어진 분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최목사가 그 일을 하는 데 전적으로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누가 이 일을 하더라도 좀더 검증된 이론과 기준을 가지고, 다각도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무책임하게 잡지에서 “아무 아무게는 이단성이 있다“는 식으로 정죄한다는 것은 반론권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나친 월권 행위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에게 좋은 교훈을 주었다. 말씀을 전할 때나, 목회를 할 때에 행여나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살 만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한 일인데, 조그마한 나의 실수가, 지나친 언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월간<교회와신앙> 19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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