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교계·선교
       
다시 금강을 따라 궁말 언덕에(1915~1928)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13)
2024년 06월 25일 (화) 18:39:48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백종근 목사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3차 안식년(1912~1915)을 마치고
 

1912년에 신병 치료차 미국에 돌아갔던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이태를 훌쩍 보내고, 1915년에 접어들고 나서야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에드먼즈의 회복이 늦어진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에드먼즈의 친정아버지 노아Noah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그해 겨울을 캐나다에서 체류했던 원인도 있었다. 그는 78세의 나이로 1914년 성탄을 2주 앞둔 12월 11일 세상을 떴다.
 

그들이 캐나다에 머무는 수 주간동안 몰아친 한파와 눈 폭풍으로 에드먼즈의 친정이 있던 온타리오의 시골 마을은 수 피트나 쌓인 눈으로 통행이 어려웠다. 하위렴은 장인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도 한 동안을 캐나다에서 머무르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미국으로 내려와 내한 준비를 서둘렀다.
 

1915년 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베로 향하는 우편 증기선 시베리아Siberia호에 몸을 실었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무는 동안 두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벌써 셀리나가 6살, 찰스가 4살이 되고 있었다. 해외 선교부에서도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건강을 회복해 조선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내한 선교부에 단신으로 전하며 함께 축하해 주었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베를 항해했던 시베리아siberia호

그 배에는 중국, 일본 그리고 조선으로 파송되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하위렴 선교사 내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해 처음으로 임지에 나가는 남장로교 초임선교사들로 하위렴 선교사의 어린 두 자녀를 포함해 일행은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2주간의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 고베에 당도했고, 다시 하위렴 선교사의 일가족이 제물포를 거쳐 군산에 도착한 날은 그해 2월 27일이었다.

   
1915년 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베리아siberia 호에 승선한 선교사 일행

이때 시베리아 호에 함께 승선했던 일행 가운데 토마스 윌슨Thomas E. Wilson(1886~1917)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는데, 아칸사스주 컬럼버스Columbus, AR가 고향인 그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한 하위렴의 후배로, 건장하고 열정이 남다른 젊은 목사였다. 그는 조선 선교 상황을 보고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그곳에서 하위렴 선교사를 만나 조선 선교를 지원한 초임선교사였다.
 

미혼이었던 그는 파송이 되면서 곧바로 광주지부에 부임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보다 먼저 내한한 여선교사 조지아Georgia C. Willson 양을 만났다. 2년여 교제 끝에 동료 선교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1917년 5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곧바로 광주로 내려와 선교사 숙소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혼의 단꿈도 채 가시지 않은 그해 가을, 윌슨T. E. Wilson 선교사는 아내의 태중에 유복자를 남긴 채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광주지부는 물론 남장로교 동료 선교사들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다. 그해 아내 조지아는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미국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T. E. Wilson 선교사

하위렴은 자신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선교사를 자원했던 후배 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되어 사역다운 사역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는 것에 더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조선에 파송되어 죽음을 맞았던 동료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전킨과 그 세 자녀의 죽음, 유진 벨의 두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오웬 선교사의 죽음과 그리고 이번엔 후배의 죽음까지, 계속해 이어지는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조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조선 선교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다시 한번 새롭게 했다.
 

다시 군산으로(1915)
 

하위렴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군산에 부임하던 2월 27일은 때늦은 폭설이 내렸으나 하위렴의 귀환에 대한 환영을 막지 못했다. 그가 군산지부로 다시 돌아온 것은 거의 7년여 만으로 그동안 지부 산하 교인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를 잊지 않고 찾아와 반기며 환영했다. 하위렴은 동료 선교사들과 지역교회의 뜨거운 영접에 몇 주 동안은 정신없이 지냈다.
 

자신이 떠나있던 7년 동안, 군산은 몰라볼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조계지를 중심으로 시내 곳곳의 거리가 죄다 일본식 가로街路명으로 바뀌었고 일본풍의 가옥들이 줄지어 들어서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호남평야의 미곡을 손쉽게 반출할 목적으로 군산항에서 내항까지 철로를 연결한 인입선 공사와 대형선박의 접안接岸을 위한 축항 공사까지 마무리되어 부두의 모습은 몇 해 전과 비교해 사뭇 달라져 있었다. 죽성포 근처의 해안을 매립한 터에 세워진 대형창고와 정미소들은 이채롭기까지 했다.
 

자신이 군산을 떠나기 전 이미 개통되어 있던 전주-군산 간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까지 되어 전국 최초의 신작로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한편 호남선이 이리까지 연장이 되면서 이리가 교통의 요지로 자리를 잡게 되자, 군산은 경술국치(1910) 이후 전국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워 일본인 농업이민자를 모집해 조선에 정착시키고자 했던 일제는 먼저 이 지역에 수리조합을 세웠다. 그리고는 농경지를 헐값에 사들여 곳곳에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몇 해 가지 않아 호남평야 일대의 대다수 농민은 농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개항장 군산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지대에 무허가 판잣집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빈민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군산은 서서히 식민지 수탈의 현실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 빈민으로 전락해 버린 그들에게 한 가닥의 유일한 위로는 교회였다. 그들이 교회로 몰리면서 스테이션 내 구암교회는 물론 시내에 있던 개복교회도 교인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교회 증축의 필요를 느낀 두 교회 모두 장로를 한 사람씩 더 세워야만 했다.
 

한편 하위렴 선교사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1908-1915) 순회지역 내에 60여 개나 되는 교회를 겨우 두 선교사(부위렴과 매요한)가 몇 사람의 조사만을 데리고 이끌어왔다는 사실은 그들의 노고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목회자가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교회를 지켜온 교인들을 보는 순간 하위렴은 하나님께서 조선과 조선인 앞에 펼쳐두신 푸른 미래를 보는 듯했다.
 

사역 분담과 전문화
 

그동안 전주(1896-1904), 군산(1904-1908), 목포(1909-1912) 등 세 지부에서 사역하며 스테이션 조성사업을 완수해 각 지부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가는 곳마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흔치 않은 과제들을 완수했던 하위렴 선교사에게 다시 한번 군산지부의 책임이 맡겨지고 있었다.
 

부임 당시(1915) 군산지부에는 이미 스테이션 조성이 마무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하위렴은 소속 선교사들과 함께 지부의 전체 사역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하위렴은 먼저 복음, 의료, 교육 등 3개 사역 외에 아예 여성 사역을 따로 떼어 네 분야로 나누고, 분야마다 새로운 인원을 보강해 전문적인 팀 사역을 추진했다.
 

1917년 당시 사역 분담을 보면 복음 사역은 하위렴, 부위렴, 매요한 등 세 선교사가 맡았고, 의료 사역은 패터슨Jacob B. Patterson과 간호사 래스롭Lillie O. Lathrop이, 학원 사역은 남학교에 인돈William A. Linton과 여학교는 엘비Libbie A. Alby와 순천 선교지부에서 전임해온 듀피Lavalette Dupuy가 맡았으며 여성 사역은 다이샤트Julia Dysart가 전담하고 있었다.
 

그해 남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던 베너블(William A. Venable) 선교사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떠났으나 다행스럽게도 인돈 선교사가 충원되면서 그의 자리를 대신해 주었다.
 

이처럼 우수한 자질과 열정을 가진 선교사들이 잇달아 부임해 오면서 군산지부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매요한 선교사는 내한 선교사 연례회의(1916)에 하위렴 선교사 부부의 귀환과 함께 군산 선교지부의 사역이 크게 활성화되어 가고 있음을 서면으로 보고하기도 했다.
 

복음 사역
 

당시 군산지부에서 관할하는 순회지역의 전체적인 인구는 대략 336,000명 정도였다. 하위렴은 군산으로 복귀하면서 사역의 전문화를 통해 스테이션의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복음 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순회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위렴은 순회 구역을 조정해 동부와 남부 그리고 북부 등 3개의 시찰로 나누고, 자신을 포함해 부위렴William F. Bull과 매요한John McEachern 등 3명의 선교사가 각각 나누어 맡았다. 그리고 순회 사역을 돕는 선교부 소속의 조사 3명과 7명의 조선인 유급 조사 그리고 3명의 권서인을 따로 두었다.
 

3개 시찰 포함해 순회지역 전체에 교회가 62개, 그리고 세례 교인이 1700명, 학습 교인이 257명이 등록되어 있었으며, 믿음을 고백한 자는 따로 계수해 93명이 있었고, 그해 유아 세례자는 43명이었다. 시험을 통과해 이미 장로로 세워진 자가 한 사람이 있었으며, 한 사람은 피택이 된 상태였다. 우선 하위렴 자신이 맡은 동부 시찰만 해도 373명의 세례교인과 138명의 학습교인을 포함한 17개 교회와 2개의 미조직교회가 있었고, 교회는 그 후로 하나가 더 늘어 18개나 되었다.
 

혼자서 17~18여 개의 교회를 한 해 52주 동안 나누어 빠짐없이 순회한다고 쳐도 교회별 방문횟수는 일 년에 겨우 2번에서 많아야 3번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쩔 수가 없는 현실 없었다. 선교사들은 순회할 때마다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베풀고, 헌금관리를 감독하고, 나아가 교회 생활에 잘못을 있을 때는 교정해 주기도 하면서, 마치 허물어진 농장에 울타리를 다시 두르고 풀을 뽑아 북을 돋우며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처럼 힘을 다해 교인들을 가르치며 교회를 돌보았다. 그렇게 순회 횟수가 적고 지원이 부족한 현실임에도 한 여성의 리더십 아래 교회 성장을 이뤄낸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시력이 거의 맹인에 가까울 정도였던 한 여성의 리더십 아래 2년 동안 교인이 4배가 증가했는데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었음에도 교회 증축을 해낼 만큼 급성장을 이뤘다. 그해 16명이 세례 문답을 통과했는데 놀랍게도 그중 6명은 47~70세 사이의 과부들로 문맹이었다. 학습 교인으로 47명이 등록하기도 했다. 게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이 거의 200여 명이나 되는데도 한 사람의 결석자가 없이 매주 예배에 참석했으며 만일 한 사람이라도 주일예배에 빠지면 누군가는 그를 찾아가 결석의 이유를 묻고 권면해 반드시 다음 주에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끌어내기도 했다."
 

한편 주일학교에 대해서는 선교부 차원에서 지속적인 강조를 해와서 그런지 교회마다 대체적으로 주일학교 조직을 잘 운용하고 있었고,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곳도 있었다.
 

하위렴의 순회 구역 가운데 이미 5개의 교회부설 학교가 세워지면서 학생 수가 90여 명에 달해 내심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공교육이 무상으로 이뤄지고 있는 데다 교회부설 학교에 대한 당국의 규제가 점차 심해지고 있어 기독교 교육의 정체성이 약화 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기도 했다.
 

의료 사역
 

내한 선교 초기부터 의료 사역이 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데다 하위렴 자신이 과거 의료선교사로 사역을 해본 적이 있어 누구보다도 진료를 통한 선교 효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병원 운영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원활한 의료 사역을 위해 현지 간호사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파악하고 간호 선교사였던 아내 에드먼즈와 함께 간호사 양성에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마침 패터슨 박사가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광주에서 사역하던 쉐핑E. J. Shepping 선교사가 군산에 올라와 구암병원에서 잠시 사역을 했는데, 이때부터 그녀가 1917년 세브란스로 옮겨갈 때까지 거의 3년 정도를 에드먼즈와 함께 간호사 소양 교육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다섯 명의 간호사들에게 일본어, 중국어, 영어, 의약품 개론, 간호의 이론과 실제 그리고 심리학 등을 나누어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이렇게 교육받은 간호사들의 자질과 능률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향상된 것에 대해 하위렴은 쉐핑의 역할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는데, 이듬해 쉐핑은 세브란스로 옮겨가면서 군산에서 가르쳤던 두 명의 학생을 그곳에 데려가 공부시키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구암병원에서 6년 이상을 일했던 조수 정 씨도 언급하면서 그는 병원을 찾은 환자들의 절반 이상을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놀람을 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구암병원이 더욱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며 그를 칭찬하기도 했다.
 

한편 전쟁으로 의약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오르며 품귀 사태까지 빚어지자 의약품 확보에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의약품이 품귀되어 약값이 놀랄 만치 올랐으나 아직 까지는 그런대로 필요한 만큼의 재고가 있었기 때문에 견딜 만했다. 전쟁 전에 2불에 거래되던 것이 지금은 25불에 거래되고 있다."
 

교육 사역
 

1916년 당시 군산지부에 소속된 교육기관으로는 일단 선교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소학교와 남녀 고등보통학교 과정이 있었고, 지역교회에 부설되어 있던 12개의 남자 소학교가 있었다.
 

"그해 소학교에는 200명의 어린이가 재적하고 있었고, 여학교에는 62명의 학생과 5명의 선생이 그리고 남학교에는 74명의 학생과 7명의 선생이 있었다."
 

미션스쿨이라고 해서 자체적인 교과과정은 일절 허락되지 않았고, 반드시 당국에서 요구하는 교과과정을 따라야 했다. 다만 기독교 수업 같은 종교교육은 별도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이 원칙이 지켜지는 한 수업이나 학사學事 과정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한가지 흠이라면 미션스쿨은 졸업 시 총독부에서 시행하는 학력 시험을 통과해야 총독부 인정의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해마다 학교는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점차 다가가고 있었다. 졸업생 6명 가운데 2명이 총독부 학력 인정 졸업장을 받았고, 다른 4명 가운데 3명은 안타깝게도 한 과목에서 과락이 있었다. 그 과목만 합격하면 그들 역시 총독부 학력 인정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위렴은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 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학생들에게 세 가지 영성 훈련을 추진했다. 그것은 YMCA 활동 참여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일, 그리고 제주도 선교여행을 통한 현지 전도 훈련 프로그램 등이었다.
 

"첫째는 70명의 회원을 가진 YMCA에서 매주 금요일 저녁 2시간씩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둘째는 남학생들이 4개의 주일학교 확장프로그램에 봉사하는 일과 셋째로는 학교에서 경비를 대는 졸업 여행으로 한 달 동안 제주도를 돌며 전도 훈련을 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한편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과 수업을 통해 보조 신청을 받아야만 하는 남학생이 다른 어느 해보다도 많아 25명이나 되었지만, 자랑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는 실과 수업 중에 만든 학생의 공예작품 가운데 '찬합饌盒' 1점과 '서가書架' 2점이 경성에서 열리는 전람회에 출품되어 총독부로부터 상을 받은 일이었다.
 

여학교는 1916년 한 학기 동안은 다이샤트 선교사가 지도했는데, 순천지부에서 듀피 선교사가 부임해 오면서 다이샤트는 다시 여성 사역을 맡았다. 여학교에는 듀피 외에 쉐핑과 에드먼즈가 합동으로 주당 14시간을 맡아 가르쳤으며 에드먼즈는 교과 이외에도 여학생에게 필요한 과외활동을 지도하기도 했다.
 

"에드먼즈가 지도한 수예부에는 여학생이 25명이나 될 정도로 서양자수의 인기가 많았다. 그들이 만든 작품을 판매한 수익금은 91엔이나 되어 들어간 경비를 제하고도 25엔 정도가 남아 수예부의 운용 경비에 보태기도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그해(1916)에 있었던 세 분야의 사역을 보고하면서 조선교회의 보랏빛 미래를 내다보기도 했으나 일제의 수탈로 주민들의 삶이 점점 더 비참해져 가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교인들을 위로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교인들의 불굴의 의지와 헌신은 한국교회의 장래를 기대해 볼 만 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추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교인들이 견뎌내야 했던 시험들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중략) 더 많은 양의 쌀이 생산될수록 가난한 농민들의 식생활은 점점 더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설사 선교사들의 손길이 내년에 감소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교인들의 열성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는 더 큰 결과들을 이루리라 기대해 봅니다."
 

사경회(査經會)를 개최하다(1916)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로교 공의회 차원에서도 현지 지도자 양성의 필요를 절감切感하고 있던 때라 그들을 양육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사경회였다.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도 1906년 1월 군산지부에서 처음으로 사경회를 시도한 이래 해마다 각 지부를 돌아가면서 개최하자 지역교회들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
 

하위렴이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부임한 그 이듬해(1916)에도 마침 군산에서 중사경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도 그는 사경회를 기획하고 전체적인 운용을 지휘했다. 그해 중사경회 참가 인원은 남성이 230명, 여성이 75명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일단 참가자들은 본인의 등록비와 먹을 양식 그리고 오고 가는 여비는 물론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 부양가족의 생계까지도 미리 챙겨두어야만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경회 참가자들의 열성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사경회에 참가하고 싶어도 이러한 경비를 감당치 못해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가자들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원근 각처에서 달려와 겸손한 자세로 임했으며 시작하는 첫날부터 새벽기도로 시작해 사경회의 일정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사경회 첫날부터 참석자 전원이 참석하는 뜨거운 새벽 기도회를 비롯해 모든 순서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참석자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사경회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평양에서 강사로 참석한 스왈론(W. L. Swallon) 박사가 남자반을 맡아 그들을 6개 반으로 나누어 하루에 3시간씩 10일간에 걸친 성경공부를 이끌었으며, 여자반은 그래함(Graham)과 미세스 파커(Mrs. Parker) 선교사가 맡아 15명씩 5개 반으로 나누어 하루에 3시간씩 10일 동안 진행했다.
 

저녁 모임은 주로 참가자 토론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주로 교회가 당면한 문제나 가정예배 실천요령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거나 주일학교 사역과 운용에 있어서 개선점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사경회 도중에도 그들은 1,022일의 날 연보(복음서를 출판하는 일에 헌신할 주중의 날 수)를 작정하기도 했다.
 

사경회 종료식이 있는 마지막 날에는 으레 교인 수 비례 참가자가 가장 많은 교회를 선정해 따로 시상施賞을 함으로써 다음 사경회의 참가를 독려했으며 참석자 전원이 촬영된 사진 액자와 기념 현수막은 그해 가장 많은 참가자를 보낸 교회가 수상受賞한다는 예고에 따라 해당 교회에 상으로 주었는데 해마다 사경회가 거듭되면서 교회별로 기념 현수막을 쟁취하기 위한 열띤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음 해에 열리는 사경회 준비를 위해 성경 문제를 숙제로 내주고, 참가하고자 하는 자는 한 해 동안 미리 성경을 읽으며 기도로 준비하도록 했다. 이듬해 사경회에 참석할 때 답을 적어 제출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작년에 내준 마가복음 시험문제는 답을 제출한 참석자 가운데 네 사람만 만점을 맞았는데 그들에게도 따로 푸짐한 시상을 했다. 금년에는 누가복음을 숙제로 주어 다음 사경회 때까지 풀어오도록 했다.
 

마가복음에 대한 질문(군산지부에서 열린 중사경회에서)
 

 1. 마가는 예수님을 보았는가?

 2. 마가복음에는 얼마나 많은 비유가 있는가?

 3. 마가복음에는 얼마나 많은 기적이 실려있는가?

 4. 메뚜기를 먹은 사람은 누구인가?

 5. 몇 사람의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았는가?

 6. 누가 세례요한을 처형했는가?

 7. 어디서 얼마나 오랫동안 5,000명이 빵을 먹었는가?

 8. 언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셨나?

        9. 4000명을 먹이시고 얼마나 많은 떡 광주리가 남았는가?

10.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무엇을 받았는가?

11. 누가 예수님의 산상 변모를 보았는가?

12. 주님은 어린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나?

13. 언제 어디서 주님은 회초리로 사람을 치셨나?

14.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15. 어디에서 물 주전자를 운반하는 남자에 대해 들었나?

16. 누가 주님을 겟세마네까지 따라갔나?

17. 예수께서 세 제자 앞에서 시도하신 것은 무엇인가?

18. 십자가에 달리신 후 예수의 옷은 어떻게 되었나?

19. 가상칠언 중 마지막 말씀은 무엇인가?

20.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은 무엇인가?
 

사경회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전라 대리회(代理會; Sub-Presbytery) 지도자 협의회가 뒤따라 열려, 지역 노회 설립에 관한 행정적인 절차와 거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지엽적인 이슈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해 소사경회도 지역교회별로 개최되었는데 남성 소사경회는 5일간씩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 10회 정도 개최되었고, 여성을 위한 소사경회 역시 같은 내용으로 5회 정도가 개최되었다. 후리교회에서 열렸던 여성 소사경회에는 농번기를 앞두고도 60여 명의 여성이 참석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전북노회 창립과 활약(1917.10)
 

1917년 9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제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모였을 때 전라노회를 남북으로 분립하기로 결의하고, 전북노회장을 이원필로, 전남노회장을 류서백John S. Nisbet으로 임명했다.
 

그해 10월 10일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사회원 15인과 장로회원 20인이 회집해 전북노회 창립을 위한 예배를 드리면서 곧바로 노회장 이원필 목사의 주재로 공천위원에 김인전, 하위렴, 임구환, 이승두, 최흥서 등 5인을 지명하고 임원회 및 상비부위원을 선출했다.
 

전북노회 창립 당시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공천위원에 지명된 하위렴 선교사는 임원선출과 노회의 조직에 깊숙이 관여했고, 또한 상비부위원으로써 규칙위원에 선임되어 리더십의 이양을 위한 조직의 기틀을 잡았다. 그뿐 아니라 군산 동부지방 시찰위원을 비롯해 전도국위원 등으로도 활약하며 치리회 운영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 연례회의의 각 분과위원회에도 소속되어 내한 선교 운영 전반에 참여했으며 그는 선교부의 인사위원회, 선교사 자녀교육위원회, 임시위원회 위원을 맡아 활약하면서 선교사연합기관인 '개신교선교부공의회'에 남장로교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1921년에는 사기史記 편집위원으로 테이트와 함께 호남지방 기독교 역사를 기록하고 편집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전북노회 창립 예배를 마치고(둘째 줄 좌로부터 일곱 번째가 하위렴 선교사)

전북지방 선교 25주년 기념행사(1917.11)
 

전북노회가 창립되면서 곧바로 전북지방 선교 25주년을 교회별로 기념하기로 하고, 전북지방 전체 기념 축하예배는 그해 11월 4일 전주 서문교회에서 드리기로 했다. 기념행사 준비위원으로는 이자익 목사, 이승두 장로, 홍종필 장로가 선출되었다.
 

축하예배 전 기념행사는 11월 2일 금요일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날 저녁 7시 30분 전주 서문교회에서 레이놀즈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된 25주년 기념행사에는 4~500여 명의 교인이 모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호남에서 25년간 사역한 선교 내력문<How the Mission Was Begun>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보고 했다.
 

• 7인의 개척선교사 내한 여정

 

• 호남지방 선교회 지부 설립과정

  전주 선교부 설립(1894~ )

  군산 선교부 설립(1896~ )

  목포 선교부 설립(1898~ )

  광주 선교부 설립(1904~ )

  순천 선교부 설립(1909~ )

 

• 남장로교 선교부의 통전적 사역

  복음 사역(전도 역사의 4시대 : 파송, 왕성, 낙심, 조직)

  의료 사역(군산, 전주, 목포, 광주)

  교육 사역(고등학교 8, 교회소학교 79, 학생 2,022명)

  주일학교 사역(1897~ ) 315 교회 중 252개 교회에 설립, 63개 교회 미설립

  서적 번역간행(성경 번역과 기타 서적)

 

• 순직자 추모

  광주 배유지 목사 부인(Charlotte W. Bell) 기념문(1895 내한~ 1901)

  군산, 전주 데이비스(Linnie F. Davis) 선교사 기념문(1892 내한~ 1903)

  군산, 전주 전위렴(William M. Junkin) 목사 기념문(1892 내한~ 1908)

  광주 오기원(Clement C. Owen) 목사 기념문 (1898 내한~ 1909)

  전주 랭킨(Cornelia B. Rankin) 선교사 기념문(1907 내한~ 1911)

  군산 안부인(Anna M. Bedinger) 선교사 기념문(1910 내한~ 1916)

 

남장로교 내한 선교사 가운데 지난 25년 동안 조선 땅에서 사역하다가 목숨을 바친 6명의 순직자 명단이 호명될 때는 참석한 모든 사람이 숙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궜다.

 

이튿날 11월 3일에는 전라북도 부지사와 전라노회 노회장, 이 지방 출신 평양신학교 학생대표와 세브란스 의대 학장 어비슨O. R. Avison 박사 그리고 영국성서공회 휴즈 밀러Huge Miller의 축사가 있었고, 오후에는 각 선교지부의 사역과 활동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가졌다.

 

11월 4일 주일 11시 서문교회에서 열린 선교 25주년 기념 축하예배에는 많은 인사와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현지인 목사들이 순서를 맡아 진행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로, 후에 장로로 세움을 받고, 다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된 자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들을 키워낸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감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군산지역 선교 초기 역사를 갈무리하다(1918)
 

하위렴은 목포 사역(1909~1912)을 끝내고 안식년(1912~1915)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군산에 부임하면서 그는 군산 선교의 초기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의무감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초기 군산 선교를 시작했던 전킨은 물론 당시 그와 함께 사역했던 데이비스마저 유명을 달리해 버린 데다 의료선교사 드루조차 신병身病으로 귀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척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부위렴 선교사 내외가 부임해 있었지만, 내한 연도로 보아도 하위렴 선교사보다 3년이나 늦고 나이로 쳐도 하위렴보다 10년이나 연하였기 때문에 선교지부에 대한 실질적 책임과 리더십은 늘 하위렴에게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하위렴은 자신의 파송 20주년(1918)을 즈음해 자신의 기억 속에 남겨진 초기선교 개척사를 선교잡지에 게재하면서 자신의 기록이 후세의 역사가들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기사의 끝부분에 기록한 의도를 밝혀두기도 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로 말미암아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역사가들에게 남기고자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선교지부가 개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전킨과 드루가 준비를 위해 지부를 비웠을 때(1896) 하위렴이 군산 스테이션에 머문 적도 있었고, 데이비스의 사망 후 전킨과 사역지를 교환해 군산지부를 실제로 이끌었던 그였기 때문에 군산지역의 초기선교에 대한 하위렴의 기록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기록한 군산 초기선교 역사는 연대기적 사건의 순서로 본다면 당연히 서두에서 다뤄야 하겠지만, 하위렴의 행적을 따라가는 서술의 순서상 그가 선교잡지에 게재한 시점을 따라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 선교사들의 군산 정착
 

선교지부 설치를 위해 맨 먼저 레이놀즈와 드루가 도착해 살펴보았던 군산의 인문지리적 개황과 특징 그리고 군산에 도착하면서부터 군산에 매혹되어 버린 드루 박사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금강 입구의 작은 포구 군산은 제물포에서 남쪽으로 120마일 떨어져 있었다. 우리가 아는 한이 곳을 처음 방문한 선교사이자 서양인은 레이놀즈와 드루였다. 선교를 위해 이 지역을 살피러 온 것은 1894년 가을이었다. 당시 군산은 농사를 짓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한적한 마을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조그만 증기선을 겨우 댈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포구의 조건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양호하거나 가망성이 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밀하게 펼쳐진 매혹적인 농경지만큼은 장래성이 있는 지역으로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누구보다도 드루 박사는 이곳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1895년경의 수덕산 전경

당시 호남 일대는 동학농민항쟁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영사관에서조차 선교사들의 신 변 안전을 위해 이 지역의 여행을 자제시키며 일단 서울로 철수를 권고하고 있었다. 얼마 후 사태가 수습되자 선교부에서는 다시 대책을 세우고, 군산지부 개설에 대한 책임을 전킨과 드루에게 맡겼다.
 

곧바로 그들은 네 명의 선원을 포함한 범선 한 척을 세내어 약과 책 그리고 약간의 생필품을 싣고 제물포를 떠나 군산으로 향했다.
 

"1895년 3월 전킨과 드루가 다시 범선을 타고 제물포를 출발했으나, 비와 안개 때문에 11일이나 걸린 끝에 겨우 군산에 도착했다."
 

군산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한 달 남짓 답사를 하며 진료와 전도를 펼치는 동안, 놀랍게도 두 사람의 신자를 얻기도 했는데 그들은 친절하게도 자신들의 사비私費를 들여 임시거처까지 마련해 주었으며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선교사들에게 다시 그들이 돌아오면 학습을 받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1896년 4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전킨과 드루의 가족이 군산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들은 답사 당시 보아 두었던 거처에 짐을 풀고 선교지에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드루의 집은 현재의 우체국 앞쪽에 있는 언덕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드루의 집 뒷마당에 있었던 우물이 지금도 거기에 남아있으며, 전킨의 집은 드루의 집에서 동남 방향으로 지척에 있었다."
 

하위렴은 당시 선교사들의 머물던 거처에 대한 묘사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남기고 있는데 심지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한 우물의 위치까지도 언급하며 그 주변에 초기 선교사들의 집이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가 기억해낸 정보와 자료 등이 어쩌면 이 지역 초기선교 역사 복원에 귀한 단서를 제공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주민들의 생활상
 

개항되기(1899) 전까지만 해도 외부 세계와 소통이 될 수 있는 인프라가 전혀 없었던 군산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선교사의 눈에 비친 가난하고 무지했던 주민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부두에 정박시설은 물론 우체국이나 전화국도 없었다. 길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데다 불결하기까지 했다. 교환수단이라고는 오직 구리 엽전이었으며 은을 가지고도 물건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 세관이 있는 자리와 그 남쪽으로 난 해변을 따라 고작 100여 채의 초가집들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무지하고, 미신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으며 남자들은 대다수가 음주와 도박에 빠져있었고, 여자들은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며 잘 싸웠고 걸핏하면 무당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외국인들에게만큼은 친절했는데 특히 외국인 여자들이 외출이라도 하면 그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그들이 하는 일이나 행동에 언제나 커다란 관심을 보였으며 즐거운 화제로 삼기도 했다."
 

"조선인들이 사는 초가집은 유리창과 굴뚝이 없고, 크기가 8x12피트보다 작았으며 무엇보다도 가사를 도울 도우미를 구하는 문제는 심각했다. 적절하게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이 없는 데다가 젊은 여자들은 관습상 집 밖으로 외출이 금지되었고, 나이 든 여자들은 아예 배우려 들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존여비 관습에 찌들어,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봐주기까지 해야만 하는 남자들만 제외한다면 군산에서의 삶은 지극히 단순했다."
 

선교사로 살아남기
 

군산의 사정은 서울보다도 훨씬 열악해서 일부 식량을 제외하고는 석탄과 같은 땔감은 물론 사소한 생활용품조차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본국에서 날라와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구입한 물품을 배편으로 보낸다 해도 일본과 제물포를 거쳐 군산까지 탁송託送되는 소요 시간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걸리기도 해, 때때로 식품이나 생활용품이 바닥이라도 나면 선교사 가족들은 제물포에서 배가 들어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쌀이라든지 닭과 계란은 시장에서 구할 수 있었으나 땔감과 석탄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활용품 가운데 어떤 것은 제물포에서도 가져올 수 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구입해 세관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제물포로부터 군산에 들어오는 증기선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모든 환경이 생소한 데다 육아용품이나 생활용품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꾸려가야만 하는 선교사 아내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교사 아내들은 행여라도 말씀을 전하는 남편들에게 누累가 되거나, 현지인들이 복음에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될까 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난로가 (화재에 취약한) 초가집에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이 되어 일 년이 넘도록 모든 요리는 석탄 화로만을 사용했는데 그 후로도 전킨 부인은 난로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사용하지 않았고) 드루 부인은 아예 갖고 있지도 않았다. 이 헌신적인 선교사 부인들은 (조선의) 아낙네들이나 어린이들과 우정을 쌓아가는 것 말고 다른 어떤 것에도 일절 그들의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모범적인 생활을 통해 교인들이 배워야만 하는 (기독교)가정의 모델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군산의 초기 선교사역
 

전킨과 드루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짝을 이루어 진료와 복음 전도를 병행했다. 드루가 주중에 진료를 시작하면 전킨은 진료소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주일에는 그들을 데리고 예배를 드렸다. 진료소에 환자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점차 교류하는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안타깝게도 남녀가 동석할 수 없다는 관습 때문에 여자들은 교회에 나올 수도 없었다.
 

"드루는 진료소를 열어 환자를 돌보았고 전킨은 기다리는 환자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초창기에는 남녀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여자들은 교회에 오는 것조차도 어려움이 많았다."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믿음이 확인되는 사람을 만나면 세례에 앞서 먼저 학습 문답의 과정을 통과하게 했다. 선교 초기부터 자주 등장하는 학습 교인(catechumen)이라는 용어는 세례가 신중하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의도에서, 초신자에게 문답을 받게 한 다음 시간을 두고 신앙고백과 서약을 통해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예비신자 제도였다.
 

1896년 군산지부에서 최초의 학습 교인이 생겼고, 그해 7월에는 최초의 수세자가 나왔으며 그해 10월에는 유아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1896년 4월 6일에 송영도, 김봉래, 차일선이 첫 학습 교인이 되었으며 그중 송영도와 김봉래는 7월 20일 세례를 받았다. 10월 4일에는 송영도의 딸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데이비스의 부임과 사역
 

하위렴은 데이비스가 군산에 부임하게 된 경위와 시기에 관해서도 설명해 두었다. 1896년 인성부재에서 열렸던 연례회의에서 데이비스의 군산 사역이 결정되자 데이비스는 한 달간의 준비를 마치고 군산에 내려왔다. 그녀는 지부의 선교사들과 합류하면서 매 주일 사람들을 모아 전킨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데이비스는 주일예배에 함께 동석할 수 없는 부녀자들과 어린이들만을 주중에 따로 모아 말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해(1896) 연례회의가 서울의 인성부재에서 열렸을 때 바로 데이비스 양의 군산 사역을 결정했으며 그녀는 한 달이 지나서 군산에 도착했다. 매 주일 전킨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몇 사람의 남자가 참석했다. 시계를 가진 자가 아무도 없고 종을 쳐서 부를 수도 없어 깃발을 사용했는데 여성 모임을 알리는 색깔, 아동 모임을 위한 색깔을 구별해 사용했다. 주중에도 두세 차례 모였으나 모두가 잘 참석했다."
 

그녀가 주중에도 궁말 지역을 찾아 부녀자들의 모임을 인도한 것을 보면 스테이션을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에도 이미 이 지역에 교인들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육로로 4.5 마일(배로 2마일) 떨어진 궁말에서 열리는 여성을 위한 주간 모임은 데이비스 양이 인도했다. 1897년부터는 데이비스 양의 커다란 온돌방이 모임을 위해 개방되기도 했다."
 

해외 선교부 총무 체스터 박사의 방문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였던 체스터 박사는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세계 각국의 선교지 가운데서도 특히 아시아 선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조선 선교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 내한 선교 초기부터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선교사들과 함께 전라도 지역 답사를 직접 지휘하며 각 지부의 스테이션 선정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지부가 세워지고 얼마 안 되어 선교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가 군산을 방문했을 때 지부의 선교사들이 마련한 환영 행사를 지켜본 주민들이 군산에 서양 선교사들이 정착해 활동한다는 소문을 내자, 삽시간에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을 만나보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해외 선교부 총무 체스터(Dr. Chester) 박사가 군산을 방문해 성원과 격려를 해주기도 했는데 선교부 남자들이 다 나와 해 질 무렵쯤 마을 서편의 언덕에서 한 시간 동안 폭죽을 터뜨리기도 하고, 체스터 박사를 위해 맛있는 고기 요리로 푸짐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군산에 외국인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인근 지역에 다 알려지게 되면서 이 지역에 주민들이 선교사들을 보려고 찾아오기도 했다."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전킨은 주일마다 설교했는데 설교에 대한 반응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이 지역이 신속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토요일 저녁에 집을 떠나 몇십 리를 걸어오기도 했다.
 

• 선교부의 이전계획과 하위렴의 활약
 

개항이 발표되기 한해 전(1898) 이미 수덕산 일대가 조계지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교부에서는 스테이션 이전대책을 논의하면서 테이트와 하위렴 선교사를 위원으로 지명해 책임을 맡겼다. 하위렴은 부지 매입과정을 설명하면서 전도선의 계류繫留여부를 확실하게 해달라는 드루의 의견을 참고해 강변이 바라다보이는 궁말 지역의 언덕을 부지로 선정했음을 밝히고 있다.
 

"1898년 전주에서 연례회의가 열렸을 때 위원회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스테이션 부지 선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테이트와 하위렴 선교사에게 스테이션의 부지 선정을 돕도록 지명했는데, 두 사람은 곧바로 군산에 내려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선창에서 남동쪽으로 일 마일 반 정도 떨어진 언덕에 부지를 정했다. 다행스럽게도 궁말 언덕 기슭까지 연결된 강은 전도선의 좋은 선착장을 드루에게 제공했다."
 

• 선교부 이전으로 교회가 나뉘다
 

지부 내 유일한 교회였던 군산교회가 자연스럽게 나뉘게 되는 경위도 이야기하고 있다. 군산의 개항(1899)이 발표되자 조계지 내에 있던 스테이션을 조계지 밖으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군산교회는 지역 이름을 따라 궁말교회(구암교회)로 불렸다. 한편 형편상 그곳으로 따라갈 수 없었던 교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시내에서 모임을 유지하다가 1906년 가을 그들만의 예배처에 교회를 따로 세우고 개복교회라 이름하였다.
 

후에 군산 최초 교회의 타이틀을 놓고 구암교회와 개복교회가 다투기도 했는데, 군산교회가 궁말로 옮겨 구암교회가 되고, 옮기지 못하고 남아있던 교인들이 개복교회로 이어졌으니 최초를 놓고 두 교회가 서로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군산이 개항되고 나자 조계지 안의 조선인 집들은 다 철거가 되면서 신도시 조성계획에 따라 도로들이 새롭게 정비되기 시작하자, 교인들 역시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면서 대다수가 궁말교회로 옮겨가 버리는 바람에 남아있던 군산 교인들의 조직적인 사역은 1906년이 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단이 되고 말았다."
 

드루의 전도선 사역
 

드루는 처음부터 군산이 가지고 있는 포구로서의 입지 조건을 높이 평가했다. 물류 통로로서의 가치는 물론 무엇보다도 육로교통의 불편함을 대신해 전도선을 타고 금강과 만경강 그리고 고군산 열도를 다니며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강력한 지론이었다. 군산지부의 잔류결정과 유지는 전적으로 의료선교에 중점을 둔 드루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도선

부위렴의 부임과 알비와의 결혼

1899년 부위렴 선교사가 군산지부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봄에 리비 알비Libbie A Alby양이 뒤따라 군산에 합류하면서 미혼이었던 두 선교사가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골인하자, 선교사들 사이에서 군산은 큐피드의 화살이 날아드는 곳이라는 무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부부 선교사로 군산 선교에 평생을 헌신했으며 전킨 선교사와 그리고 그 후임으로 부임했던 하위렴 선교사와 함께 이 지역 선교에 크게 이바지했다.
 

전킨 내외의 교육 사역
 

군산에서의 교육 사역은 전킨 선교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그해 1902년 몇 명의 소년을 모아 가르치면서 영명학교가 시작되었고, 전킨의 부인, 메리 역시 그녀의 거실에서 여학생을 가르치면서 여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당시 남학생 교실은 지금 병원의 일부가 되었으며 여학생을 가르치던 학교는 여학생 기숙사가 되었다.
 

하위렴은 선교사들의 정착 과정에서부터 궁말 스테이션의 개설과정과 초기사역을 자세히 기술하고 글을 마감하고 있다. 

 
백종근 목사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성명서19) 통합 노회장연합회,
김의식 목사 후임(?)으로 결정된
이광선, 이광수 형제 목사, 무고
김의식 목사의 후임(?) 한경국
“책임자 출석 어려우면 하나님의
김의식 목사의 후임(?)으로 한경
예장통합 목회자 1518명 김의식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최삼경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12125)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도제원로 32-2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