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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도 선생과 방지일 목사의 워치만 니에 대한 소회
지방교회 이단에 관한 학술 자료(6)
2024년 06월 12일 (수) 11:01:36 유동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유동근 목사/ 온누리선교교회 원로

   
유동근 목사

(7) 왕명도 선생의 워치만 니에 대한 소회
 

본 내용은 중국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중화권에서 널리 존경받고 있는 왕명도(王明道, 왕밍따오, 1900-1991) 선생이 1980년대에 직접 남긴 그의 녹음본에서 워치만 니(倪柝声, 니투오셩, 1903-1972)에 대해 직접 말씀한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왕명도 선생은 이 녹음본에서 워치만 니에 대한 그의 경험과 평가를 들려주고 있다. 이 녹음본의 진위 여부는 이미 여러 경로로 입증되었다. 왕명도 선생은 지속적으로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를 비판하였는데 그 내용이 일치한다. 특별히 왕 선생이 남긴 그의 일기에서도 워치만 니와 만났던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부분은 본 녹음본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물론 왕 선생이 오랜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회고하는 것으로 연대에는 어느 정도 오차가 있다.
 

이 녹음은 중국 대륙과 대만 등 중화권에서는 제법 널리 알려진 것으로, 아직 한국교회에는 자세히 소개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지방교회와 관련하여 워치만 니를 연구함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번역은 출처 링크의 동영상에서 ‘12:37-21:25, 34:08-38:00’까지의 내용이다. 왕 선생이 특별한 자료의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구술한 내용이므로, 말이 중복되거나 말끝이 흐려질 경우 당시 정황을 모르면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직역을 원칙으로 했지만, 의미가 원활하게 전달되도록 약간의 의역과 접속사, 괄호설명을 추가하고,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경우 주를 붙여 보충적 설명을 하였다(역자의 말- 송요한 목사, 백석측 중화권 이단 연구가).

   
왕명도 선생 부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언젠가 워치만 니에 관한 글을 쓰려고 했다. 나는 23세 때 워치만 니가 쓴 푸저우(福州)에서 출간한 두 편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 글이 마음에 들었고, 그를 좋아하게 되어, 그에게 편지를 썼고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고자 그의 나이를 묻기도 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어리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그를 매우 사랑스럽게 생각했다. 1925년(왕명도 선생 25살, 워치만 니 23살 즈음), 나는 처음으로 강남지방(중국의 상하이 이남)에 가게 되었는데, 푸저우에 갈 기회를 내어 기선을 잡아타고 워치만 니의 집에 가서 4일 동안 머물렀다. 첫 만남 후 이틀 동안은 그와 편하고 친숙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나에게 매우 냉담해졌는데 나는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일까? 나는 마음을 다해 그를 아끼고 교제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나에게 매우 차갑게 대했기에 깊은 실망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이듬해 봄 나는 합동로 문덕리(哈同路门德里)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한 하녀를 불렀는데, 나는 그와 몇 마디 대화조차 하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하녀는 “선생님, 가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워치만 니 선생이 몸이 안 좋으셔서 사람들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녀의 말을 듣고도 그런 행동을 만류하지도 않았다. 하녀는 “선생님, 나가주세요.” 거듭 말하였고,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손님을 쫓아내는 행동이었다. 그후 나는 그를 13년 동안 보지 못했다.
 

1939년에, 나는 워치만 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특히 그가 각처에서 교회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자기 집단으로 끌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나러 갔고, 그를 보자 “십 수 년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지내셨소?”라고 하자, 그는 내가 방문한 이유가 자기를 책망하기 위함임을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추종자들이 저지르는 일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물었지만, 그는 화를 내지도 않고,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당신은 말하시오. 난 들어보겠소’라는 태도였다. (그런 태도에) 나는 화가 치밀어 “당신의 신도들이 저지르는 행위를 당신은 아는 거요? 모르는 것이요?” 하며 강하게 물었다. 그는 말해야만 할 상황임을 알자 한마디를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았소”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길 “당신이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소? 당신이 가르치는 도리(설교)가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데 말이오.” 나는 계속하여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이전의 그 여자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식사하시지요.” 나는 당연히 되었다고 하고, 모자를 들고 가겠다고 하였다. 그때 워치만 니가 나에게 말하였다. “선생 여기서 식사하시지요.” 이에 내가 말하길 “매우 좋지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도 나는 끝이지 않고 계속 말을 하였다. 식사 후에도 나는 계속 말했는데, 이제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에 대한 심판자적 입장에서 말하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책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말도, 반박도 없이 귀 기울여 들었으니 정말 교양이 넘치는 태도였다(왕명도 선생은 워치만 니의 점잖은 듯 말없는 태도를 매우 위선적으로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임: 역자주).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2시간 반~3시간가량 이어졌다. 그는 시종일관 말이 없었는데, 나는 그가 (영적으로) 큰 병이 들어 치료불가의 상태라고 진단하고, 이별을 고하며 나왔다. 이것은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나는 일생동안 이렇게 그를 세 번 만났다.
 

1940년대에 이르러 나는 워치만 니가 수많은 거짓과 사기를 일삼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내가 이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그 자신도 할 말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말하면 할수록 나의 책망은 더 강해질 것이기에 ‘그는 당신은 말하시오 난 그냥 들을테니’ 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1950년에 이르러 그의 악행이 모두 폭로되고 말았다. 워치만 니가 감옥에 간 이유는 삼자회를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떳떳하지 못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워치만 니 집회소는 푸저우에서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집회소 사람들이 사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토지개혁의 때에 워치만 니는 전답을 빼앗길 것을 우려해, 정부를 향해 자기들의 전답은 보류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소수의 말은 먹히지 않을 것을 우려해, 전국의 집회소에서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보류를 요구했던 것이다. 서명 이후 그는 위험을 자초하고 말았다. 토지 개혁은 반드시 실행되고 말 것처럼 보였기에 다시 한 번 보류를 요청하기 위해 그 1만여 명의 서명서를 오요종(吴耀宗,우야오종, 1918-1979)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이 일은 워치만 니가 우리 신도들은 삼자혁신운동(三自革新運動)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달함과 같은 의미였다.
 

내가 그런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베이징의 죽은 엄 씨 성을 가진 한 신도를 통해서였다. 그는 본래 우리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고 우리의 교회에 몸담았던 사람이었다. 후일 그는 워치만 니의 단체에 끌려 들어가고 말았는데, 한동안 그와 우리는 단절된 상태였다. 그런데 1952년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가 말하기를 “명도형, 나는 워치만 니의 옳지 못한 행위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서명을 요구했습니다. 나 또한 그 중의 하나입니다. 목적은 토지 몰수를 보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서명을 오요종에게 보냈습니다. 이는 삼자혁신운동을 옹호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워치만 니의 그런 행위는, 정부를 속이는 일이며, 또한 서명한 사람들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떠나 당신의 교회로 왔습니다. 괜찮죠?”라고 하였다.
 

나는 “괜찮소”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잘 알기 때문이다. 후일에 나는 또 다른 사람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상하이에 갔는데, 특별히 집회소 사람들에게 그 일에 대해서 사실 여부를 듣고자 했다. 그들의 말도 역시 그의 증언과 같았다.
 

토지 몰수 보류를 위한 1만여 명의 서명, 그것은 삼자혁신운동에 대한 옹호였다. 워치만 니는 삼자혁신운동에 대한 최고옹호자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1952년 감옥에 갔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부가 그의 죄상을 발표하였다. 횡령, 국가재산 절도, 그리고 또 하나의 모종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간음 행각이었다. 내가 제일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것은 1956년 겨울이었다. 내가 처음 감옥에서 나온 후 나는 <천풍>에서 한 소식을 접했다. 그것은 상해법원이 워치만 니의 몇몇 동역자들을 법원에 출두케 하였고, 워치만 니가 그들 앞에서 자기의 죄상들을 시인토록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시인한 죄목 중에는 놀랍게도 간음도 있었다. 그는 두 명의 여 동역자들과 관계를 가졌다. 그의 아내는 연경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들의 결혼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지 타인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집안에서 맺어준 그런 것도 아니고 부모가 맺어준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런 지식인 아내를 두고, 그는 다른 두 명의 다른 여자와 통간하였다. 그 중의 한 여성은 내가 1925년에 여러번 보았던 여성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소식을 듣고, 감히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워치만 니가 간음을 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상해에 가서 그와 관계된 적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 그 일의 진위여부를 들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일은 50년대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40년대부터 있어왔던 일이었다고 했다. 여러 차례, 긴 기간 동안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워치만 니의 그런 행위들에 대해 당신들은 왜 처벌하지 않았소?” 그에 의하면 당시 여러 사람이 그를 처벌하고 제명해야 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결국 그 사건의 처결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 워치만 니는 상하이에서 도피하여 충칭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고 항복한 이후 그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서 여전히 그들의 지도자로 행세했고, 1951년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운영되는 기독교 단체 처리를 위한 모임(处理接受美国津贴的基督教团体会议)에 지방교회의 대표로서 참가하기도 했다. 그와 그 단체가 거기에 참여한 것은 자기들은 외국인들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런 모임에 왜 돈 받은 것과 관련 없는 그가 참여해야 했는가?

 

(8) 방지일 목사의 워치만 니에 대한 견해
 

   

처음에는 小群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것이 大群이 되었다. 상해로부터 시작된 모임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소군이 대군이 된 것이다. 그는 본시 화학도로서 상해에서 페니실린 공장을 경영하여 크게 성공한 대재벌이기도 하였다. 일제가 침입하고 미국선교사들이 떠나게 될 때 선교비 전부를 자신이 독담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구원관은 확실하여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확실감을 주면서 신앙을 그 생활에서 나타낸다. 모여서 성경보고 그 깊은 맛에 도취하여 거기 들어간 사람은 자연히 교회를 멀리 한다. 소홀히 한다. 심지어 떠나게 된다. 워치만 니의 가장 측근으로는 산동사람 이계성, 이상수 두분이 크게 후계자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계성은 일찍 별세하였고 위트니스 리(이상수)가 대만가서도 큰 일을 하였고 미국으로 가서는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몇 분야로 갈라졌다.
 

워치만 니 자신은 어떤 선교단체와는 무관하고 자신의 사업으로도 얻은 부로도 큰 교단적 행사를 할 수 있느니 만큼 경제적으로나 인원으로도 맘모스 집단화한 것을 자부도 하고 공산당 정치라도 자신들에게만은 간섭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구속당했다. 다들 그 귀추를 보고 있었다. 그의 생활상 사치 문란한 자백서가 나돌았다. 그 친필 생활상의 영상까지 전시 방영하여 지방마다 관람케 했다. 그의 녹음까지 들려준다. 이는 조작된 것이라 다들 믿지 않음을 보았다. 그의 영향력이 어떠하였기에 이렇게 구체적 죄상을 그의 친필로 그의 영상까지 전시하되, 그 본인이 나타나게 해달라 등의 말이 있기도 했다. 드디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이중생활로 속였다는 죄목, 음란한 반인민죄로 처형했다 한다(pp. 148-152, 임마누엘, 방지일. 1996년 4월 10일 발행, 선교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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