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교계·선교
       
남도에서 부르는 전도자의 송가(頌歌)(1909-1912)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11)
2024년 06월 12일 (수) 10:21:46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백종근 목사(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유진 벨과 목포 선교지부
 

하위렴이 처음 내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진 벨과 함께한 전라도 탐사 여행에서 남도에 지부를 세우기로 계획한 곳은 원래 목포가 아닌 나주였다. 나주는 오랫동안 전라도의 행정 중심도시였던 데다 무엇보다 영산강의 수로를 이용해 서해로 나가는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서둘러 유진 벨 선교사는 1897년 한옥이 딸린 토지를 매입하고 지부 설치를 추진했으나, 이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나가면서 나주의 유생들이 격렬하게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림이 사는 고을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는 거였다. 반대가 너무도 극심한 데다 타협의 여지마저 전혀 보이지 않자, 유진 벨은 매입한 거처를 다시 매각해야만 했다.
 

마침 이 무렵 목포항이 개항(1897)되자, 선교부에서는 반발이 심한 나주 대신 목포에 지부 설치를 결정하고, 1898년 유진 벨 선교사는 부인 로티Lottie W. Bell와 함께 이곳에 남도 선교의 깃발을 꽂았다.
 

그해 6월 유진 벨 선교사가 양동 한쪽 언덕에 천막을 치고, 20여 명을 모아 시작한 양동교회에 대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목포부 양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是)에 선교사 배유지와 매서인 변창연이 당지(當地)에 도착하여 양동에 장막을 치고 선교를 시작해 열심히 전도함으로…(중략)… 20여 인이 믿게 되고 교회가 이뤄졌다."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 스테이션을 중심으로 나주와 광산, 장성, 광주 지방까지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1901년 4월 벨이 순회 전도를 나가 있는 동안, 부인 로티Lottie W. Bell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목포에 지부가 세워지고 3년 만의 일이었다.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으나 조선에 대한 사랑만큼은 유난히 남달랐던 그녀였다.
 

통신과 교통 사정이 열악했던 시절이라 그녀의 부음을 듣고서도 며칠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유진 벨은 스테이션 곳곳에 남아있는 로티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 엄마 없이 자라야 할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이제 겨우 시작한 선교사역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했다. 조선에서의 사역이 순간 위기를 맞는 듯했다.
 

안타까운 소식이 켄터키에도 전해지자 고향의 누이동생이 아이를 맡아 기르겠다는 기별이 왔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이들을 맡아 양육하겠다는 누이가 한없이 고마웠으나 아이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1901년 5월 3일 두 자녀를 데리고 요코하마에서 미국행 증기선에 몸을 실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조선을 향한 기도와 꿈을 놓지 않았다. 고향에 도착한 유진 벨은 누이 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적응이 되는 것을 확인한 이듬해인 1902년 10월 30일 다시 목포에 돌아왔다.
 

양동교회는 1년이 넘도록 목회자가 없었으나 놀랍게도 교인들은 그 허전한 공백에도 자리를 지키며 한 사람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지부의 선교사들 역시 유진 벨의 유고有故 중에도 한마음이 되어 자신들의 사역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웬은 환자를 진료하며 진료소의 토대를 세우고 있었으며 스트래퍼 선교사가 15명의 여학생을 데리고 시작한 여학교 역시 조금씩 기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 같은 동료 선교사들의 수고에 고무된 유진 벨 역시 1903년 10여 명의 남학생을 모아 교육 사역의 시동을 거는 한편, 같은 해 양동교회를 한옥 기와집으로 증축, '로티 위더스푼 벨 기념 교회당'으로 봉헌하기도 했다.
 

한편 광주가 전남지방의 중심도시로 성장할 것을 예견한 선교부에서는 1904년 봄에 개최된 연례회의에서 광주에 지부 설치를 결정하면서 곧바로 유진 벨을 개설 책임자로 지명하고, 목포지부의 일부 선교사들을 광주지부에 전임시켰다.
 

일이 이렇게 되자 목포지부 설립 당시부터 유진 벨과 함께 사역했던 스트래퍼Fredrica E. Straeffer와 프레스톤John F. Preston/변요한까지 광주로 옮겨가고, 목포에는 의료선교사인 오웬C. C. Owen/오기원과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낙스Robert Knox/로라복와 맥컬리Henry D. McCallie/맹현리 등 신참 선교사들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오웬 선교사마저 순회 중에 과로로 쓰러져 순직하는 사태가 생기고 말았다.
 

목포지부의 사정이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자 1909년 7월 군산에서 열린 제18차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마침 안식년을 마치고 복귀하는 하위렴 선교사에게 목포지부를 맡기기로 했다.

 

유진 벨의 후임으로 목포에 오다
 

하위렴이 만삭이던 아내와 함께 제물포를 출발해 목포에 발을 디딘 것은 1909년 9월 말이었다. 유달산이 바라다보이는 선창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낙스 선교사와 맥컬리 선교사 부부가 함께 나와 영접해 주었다. 군산지부 소속의 하위렴과 에드먼즈가 목포에 부임한다는 소식에 선교사들은 물론 모든 교인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하위렴은 자신의 임지인 군산에서 해야 할 사역들을 구상하며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광주지부가 새롭게 개설되고 선교사들의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임이었지만, 하위렴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지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지역 선교를 되살리고자 했다.

 

양동교회에서의 협력 목회
 

1909년 9월 6일 조선예수교장로회 3회 독노회가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열렸을 때, 그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윤식명을 포함한 졸업생 8명(2회)이 노회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이날 독노회는 하위렴을 양동교회 담임목사로, 윤식명을 동사목사로 정하여 목포 파송을 결의했다.
 

호남지방 최초로 조선인 목사를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위렴으로 하여금 일단 교회를 안정시키는 일에 주력하게 했으며, 1년 동안 윤식명을 동사목사로 두고 절차적 방식에 따라 리더십이 자연스레 이전될 수 있도록 했다. 현존하는 양동교회 교회사에도 5대 당회장에 하위렴 선교사 그리고 6대 당회장을 윤식명 목사로 기록해 둔 것으로 보아 하위렴의 역할을 분명히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동안 유진 벨(1대, 3대)을 비롯해서 레이놀즈(2대), 프레스톤(4대) 등 선교사들이 잇달아 목회하면서 목포선교지부 직할 교회인 양동교회는 해마다 부흥을 거듭해, 하위렴이 당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1910)만 해도 교인이 7~800명에 이르고 있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열풍 속으로
 

하위렴 선교사가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백만인구령운동'의 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부흥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을 방문해 군산, 전주, 광주, 목포, 공주, 행주,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한 조지 데이비스George T. B. Davis 목사는 '백만인구령운동'의 현장을 3개월간 목도하고, 그때의 놀라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백만인구령운동'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넘치고 있었으며, 선교사들은 이 운동을 위해 기도하고, 지역을 순회하며 인도하고 있었고, 반면 한국인들은 여러 날을 연보로 드렸으며 열심을 다해 이웃을 전도하기 위해 복음서를 구입했다. '올해에 백만 명'이라는 외침은 들불처럼 조선 전역을 휩쓸었으며, 조선인은 영혼 구령을 위해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불길이 목포지방에도 어김없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조지 데이비스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하위렴 선교사가 통역을 맡았는데 뜨거운 성령의 임재가 집회 내내 계속되었고, 눈물로 심령을 찢는 통회 자복의 역사가 교회와 지역을 휩쓸었다. 부흥회 기간, 전 교인이 성경 반포에 앞장을 서겠다며 마가복음을 5천 권이나 구입해 전국 어느 도시, 어느 교회에서도 보지 못했던 기록을 세워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목포에서는 하위렴 목사가 몸이 불편한데도 통역을 맡았으며 325명의 교인이 마가복음 5,000권을 주문하기도 해 기록을 깨기도 했다."
 

구령운동의 열풍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면서 증축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예배당이었으나 모여드는 교인을 도저히 다 수용할 수가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남녀를 따로 나누어 남자는 본당에서 모이고, 여자는 그 옆에 있는 서양식으로 지은 영흥학교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무려 350여 명 정도가 모이는 주일학교 역시 13개 반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한편 전 교인을 10개 조로 편성해 조별로 집회 당시 구입했던 마가복음을 집집마다 배포하는 축호逐戶 전도에 참여했는데, 맹현리 선교사는 이때의 상황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교회 모습에 견주기도 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행 5:42)
 

조지 브라운 목사 역시 그의 책에서 부흥회 기간에 뜨거웠던 전도의 열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짧은 집회 기간에 목포 일대에 있던 집이라면 복음을 전하지 않고 지나친 곳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 한 해 동안 36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학습 또한 거의 같은 수의 교인이 받았다. 그뿐 아니라 주일학교가 이웃 마을의 지교회까지 확대되면서 교사들이 주일마다 방문해 지도하기도 했다.

 

양동교회의 재건축과 리더십의 이양
 

백만인 구령 운동의 여파 속에 하위렴 선교사와 윤식명 목사와의 협력 목회는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내며 뜨거운 교회 부흥을 불러일으켰다. 매 주일 교인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남녀가 따로 나뉘어 예배를 드려도 앉을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예배당이 비좁아지자 교인들의 관심이 자연스레 교회 재건축으로 모이면서 전 교인의 기도 제목이 되고 있었다.
 

그 당시 교회 재정이나 교인들의 형편을 비춰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으나, 교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교회 건축에 협력하겠다는 각오로 한마음이 되어있었다. 교회 건축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가운데, 증축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교회당을 헐고 다시 건축하기로 공동의회에서 의결하자 선교부에서도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다.
 

"더 큰 예배당의 필요가 교인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많은 기도와 회의 후에 교인들은 62×36 ft²새로운 석조건물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커다란 부담이 떠맡겨졌으나 그들은 선교부에서 지원한 $500로 마련한 대지와 기존의 대지를 합해, 그 위에 지금의 건물을 시작해야만 했다. 게다가 선교부에서는 교인들이 $900의 건축헌금을 마련하면 그 절반인 $450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략) 부녀자들 가운데는 은반지나 비녀를 바치기도 하고, 어떤 남자 교인은 건축에 필요하다면 자신의 집을 팔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건축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가 부지에 준비되고 있었다."
 

설계도를 그리고 자재 구입과 함께 인허가에 필요한 법적 준비까지도 다 마치고 실제 건축을 시작하려 할 즈음, 두 사람의 시무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순천으로 이사해야 할 사정이 생겼다. 교회 건축이라는 과업을 놓고 책임을 맡았던 장로가 이사한다는 소식을 접한 하위렴은 한동안 당혹스러웠으나 개인 사정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 사람의 장로라도 남아있음에 애써 위로를 삼아야만 했다.
 

교회 건축이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교인들을 이끌어 갈 장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하위렴은 두 사람을 피택하고, 동분서주하며 대리회의 허락을 받아냈다.
 

"유 장로가 새로운 스테이션이 있는 순천으로 이사했는데 교회로 봐서는 일꾼 하나를 잃게 되었지만, 장로 한 명이 아직 남아있고, 빈자리에 채우기 위해 대리회의 허락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에서 두 사람의 집사를 선출해 두었다. 그들이 과정을 거쳐 시험을 통과하면 장립이 될 것이다."
 

온 교인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선교부의 지원에 힘입어 이듬해인 1911년 864평 대지에 121평의 석조건물을 완공했다. 교인들이 직접 날라 온 유달산의 화강암으로 축조한 양동교회는 그 당시에는 보기조차 힘든 최초의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한때 이 지역의 명소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도 하위렴의 업적으로 남겨질 양동교회 건축에 그의 은사와 리더십이 크게 발휘되었다는 것은 거듭 말할 필요가 없다.
 

양동교회는 전 교인이 함께 협력해 세운 이 지역 최초의 자립교회란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교회당 건축 과정을 통해 하위렴은 자연스럽게 한국인 목사(윤식명)에게로 리더십을 이양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후 양동교회는 이경필 목사(8대)가 담임하던 시절(1919), 4.8 목포 만세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으며 그 뒤를 이은 박연세 목사(10대)의 부임으로 신사참배 반대와 항일 민족운동의 본산지가 되기도 했다.

   
석조건물로 지어진 양동교회

양동교회에서 시무했던 이남규 목사(12대)는 해방이 되고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약했으며 전남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양동교회는 구정교회, 온금동교회, 중앙교회, 죽교리교회, 연동교회, 서부교회 등을 분립하면서 이 지역교회의 산파역을 감당했으나 해방 후 노회가 분열되면서 안타깝게도 양동교회는 기장으로, 이름을 달리하며 갈려 나간 양동제일교회는 예장으로 나뉘고 말았다.
 

스테이션 조성공사(1910-1912)
 

그뿐만 아니라 하위렴 선교사는 부임과 동시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선교사 숙소를 포함해 3채의 주택 공사에다 목포병원과 정명여학교 건축까지 완공시킴으로써 14,000평에 달하는 목포 스테이션의 조성공사를 실질적으로 마무리했다.
 

오웬 선교사가 과로로 쓰러지고 나서 그 후임으로 부임한 리딩햄Roy S. Leadingham/한삼열이 1912년부터 의료사역을 이끌었으나, 안타깝게도 1914년 한 직원의 실화失火로 하위렴 선교사가 건축했던 병원 건물 전체가 전소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마침 하위렴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목포를 떠나 미국에 머물고 있던 때였다.
 

하위렴 선교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군산지부로 복귀한 후의 일이지만,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를 통해 목포병원의 화재 소식을 전해 들은 미주리주의 성 요셉 장로교회의 성도들이 앞장서 헌금을 하고, 거기에 독지가인 프렌치Charles W. French씨가 기부한 금액을 보태 1916년에 불탄 그 자리에 석조건물로 다시 병원을 짓고, 기증자를 기념해 프렌치 메모리얼 병원으로 불렀다. 리딩햄은 목포에서 11년간 사역을 하다 1923년 귀국하였다.
 

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프렌치 메모리얼 병원은 이 지역에서 의료선교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왔으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강압으로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결국 문을 닫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후로 다시 문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프렌치병원(French Memorial Hospital/富蘭翠病院)

 

순회사역
 

하위렴 선교사가 부임하기 전 목포지부의 유진 벨과 오웬Clement. C. Owen, 변요한John F. Preston 등의 선교사들과 조사 변창연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이미 여러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단 하위렴 선교사는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보는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부임하던 그해(1909년)만 하더라도 자신의 시찰 구역에서만 자그마치 447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고, 24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리회(代理會; Sub-Presbytery) 체제를 유지하던 독노회가 7개 지역 노회로 개편되자, 이에 따라 회집된 전라노회에서는 회무 처리와 함께 선교사들의 활동 지역을 재편하고 사역을 재조정했다. 이때 하위렴 선교사에게는 해남, 강진, 장흥, 영암 4개 군이 맡겨졌으나 그 당시 그는 목포지부 사역을 전체적으로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회 사역에만 전념할 수 없어 순회지역의 절반을 동사목사인 윤식명과 나누어 맡았다.
 

"처음부터 순회 사역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순회지역의 절반을 동사목사인 윤식명에게 맡겼다. (중략) 순회 여행이 가능하게 된 것은 5월 말이 되어서였다. 순회지역의 교회에서 방문해 달라는 많은 요청에 일일이 부응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점이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 많아 조직이 잘 되어있지 않았고, 지도 감독을 필요로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런데도 내가 받은 보고들은 대개 고무적인 내용이었다. (중략) 내가 방문했던 한 곳에서는 32명의 학습 교인 가운데 17명이 세례 문답에 통과되어 세례를 받았고, 학습 문답에는 67명이 지원했으나 그중 40명만이 통과되었다."
 

지역교회들로부터 밀려드는 순회 요청에 무리한 강행군을 하다 도중에 과로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외딴 초가집의 빈방에 누워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온종일 신열身熱에 시달리면서도 마땅한 통신수단이 없었던 때라 어디에도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중에도 예정된 순회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자기를 대신해 조사를 보내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순회 중 방문했던 두 번째 장소에서 몸이 아파 온종일 오두막에 틀어박혀 지냈는데 나는 돌아갈 힘이 있을 때 속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아파서 순회를 계속할 수 없었던 교회들은 조사와 권서인들의 신실한 인도로 대신해야만 했다."
 

외진 폐가에 홀로 누워 밤을 지새우는 동안, 동료 선교사 오웬이 순회 중 폐렴으로 쓰러졌던 일을 불현듯 떠올리며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핍박과 굶주림과 추위로 시달린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을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7-28)
 

비록 삼 년 남짓한 목포 선교였지만 순회 구역의 각 교회 당회장의 권리를 위임받아 순회하면서 점점 외연外延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1911년에만 하더라도 강진과 장흥을 21일 동안 288Km를 여행했는데 48Km는 배로 다녔고, 48Km는 말을 탔으며 나머지 192Km는 걸어서 다녔다. 그는 순회 일정 중에 갑작스럽게 닥친 한파로 추위에 떨기도 했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돌발적인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순회하다가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뛰어오르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너무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땅바닥에 팽개쳐진 채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일어나 짐을 챙기고 주위를 둘러보며 안심은 했으나 머리를 땅에 찧던 순간을 생각하면 도저히 다시 올라탈 용기가 나지 않아 고삐만 붙들고 다음 순회지까지 25마일이 넘는 여정을 걸어서 가기도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경험 중의 하나는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배를 타고, 거의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가르며 4시간이나 떨었던 적도 있었다."
 

그는 후에 이때의 순회 여정을 회고하며 “만약 이러한 일들을 고통스럽다고만 여겼다면 전도자로서 자신의 특권이 복음 증거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일이 지역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를 베풀었으며, 직분자를 세워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 한편 순회 여정을 함께하며 자신을 도왔던 조사들은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회를 세워가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수고에 대해서도 감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12개 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을 점검했다.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제직 임명과 문답 그리고 성례와 치리를 시행했다. 문답 지원자 174명 가운데 100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았으나 15명은 거절되었으며 이미 전에 문답을 받았던 26명은 학습 교인으로 받고, 33명에게는 세례를 베풀었다. 순회 일정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조사 김 씨와 최 씨의 뜨거운 열심과 신실한 수고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잊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회를 이끌어온 리더들의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도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선교 초기 시절에는 조사로 활동하던 권서인들의 역할도 컸는데 그들은 주일에는 교회에서 교인들을 돌보다가 주중에는 쪽 복음과 전도지를 들고 전도하면서 성경책을 팔기도 했다. 그들은 전도하는 도중에도 상대방이 성경에 관해 묻기라도 하면 자세히 답변을 해주기도 하고, 어려움이 있다거나 고통을 호소하는 자를 만나면 그들을 붙들고 기도해 주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어느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겠지만, 하위렴 선교사의 순회지역의 농민들 역시도 가난한 소작농이 대다수였다. 한 해 동안 땀을 흘리며 등이 휘도록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추수가 끝나면 높은 소작료를 지주에게 떼이면서도 세금은 그들 몫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빌려 쓴 비료 대금은 물론 심지어 수리 조합에 내는 수세까지 차주借主에게 갚고 나면, 겨울을 나기도 전에 이미 쌀독은 바닥나기 일쑤여서 이듬해 봄까지는 겨우 죽으로 연명하거나 굶주려야만 했다.
 

옆에서 보는 것조차도 힘이 들 정도로 궁벽한 삶을 사는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얼마 되지 않는 양식까지도 건축헌금으로 바쳐가며 서너 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예배 처소라도 세우고자 하는 교인들을 만날 때면 그 순수한 믿음과 헌신이 눈물겹기까지 했다.
 

"전혀 수입이 없는 가난한 부녀자들은 매달 한 홉 정도의 쌀을 주머니에 담아 들고 나왔다. 이런 주머니 쌀을 모아 팔아 교회 건축기금으로 모았다."
 

이처럼 빈궁한 사람들이 위로를 찾아 교회로 모였다. 그들은 교회 벽에 붙여놓은 '나는 너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요 14:2)라는 그 성구의 의미도 잘 모르면서 '처소를 예비하러'라는 말만으로도 위로받는 듯했다.
 

지역을 순회하며 각계각층의 다양한 교인들을 만나다 보면 종종 믿음을 가진 자들로 인해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뿌듯할 때도 있었지만, 반면에 교회에 다니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의 유혹에 빠져 넘어진 자들을 만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교인은 문답하는 도중에 자신의 죄를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을 들을 때면 큰소리로 흐느껴 우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는 남정네들보다는 오히려 부녀자들이 복음을 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함으로 받는 진지함을 보였다. 말씀을 듣고 상처받은 자아가 치유되고 회복되면서 부녀자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글을 배우고자 하는 열심을 내기도 했다. 자식이 없는 과부, 구박받는 부인네들, 집에서 쫓겨난 여자아이들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한편 하위렴 선교사가 집을 떠나 예정에 없던 순회로 일정이 길어질 때면, 편지를 써서 만삭인 아내와 돌이 지난 딸 셀리나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지역교회의 크고 작은 사정을 알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에드먼즈는 남편이 보내온 지역교회의 소식을 정리해 다시 KMF(Korean Mission Field)에 기고하기도 했다.
 

"1월 11일 하위렴 선교사의 부인이 목포에서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내왔다."
 

"월요일 4개 교회에서 110명을 문답했고 20명의 세례와 68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았으며 한 사람을 교인명부에서 삭제하기도 했다. 이번 순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내에서 행해지던 변법을 치리하고 나머지 교인들에게는 격려해 준 점이었다."
 

하위렴은 순회하는 동안 문답을 하고 성례를 베풀며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지만, 교회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해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이 있다고 판단되면 치리를 통해 당사자들을 교인명부에서 단호하게 삭명削名해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권징의 필요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에드먼즈는 '오직 믿음'으로만 교회 건축을 이뤄낸 교인들의 이야기도 기고했는데 7평 정도의 아주 비좁고 보잘것없는 예배 처소에서 모이던 교인들이 힘을 모아 70평짜리 건물을 마련한 놀라운 사례를 들면서 2,000날을 연보했다는 형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어림잡아도 3년의 세월을 교회 건축에 헌신하며 1,000냥이나 되는 돈을 헌금했다는 이야기도 썼다.
 

"마지막 방문한 교회는 원래 7평 남짓한 지붕이 아주 나지막하고 작은 교회였는데, 교인들이 힘을 모아 70평짜리 건물을 세우고 한쪽 면은 회칠하고 나서 창문과 문을 달았다. 그 후 내가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형제가 나와 며칠 전에 강풍으로 날아가 버린 교회 지붕을 보수하고 있었다. 그 형제는 교회를 건축할 때 2,000날을 연보하고 1,000냥이 넘게 헌금했다."
 

이 당시 1,000냥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 엔(Yen)화가 쓰이던 시절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구한말의 화폐인 양(兩/Yang)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에드먼즈는 기고문 말미에 자신이 하위렴으로부터 전해 들은 대로, 믿지 않는 가정에서 믿는 자녀들이 어떻게 핍박받고 있는가를 전하면서 불신 부모들의 무지한 인식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내가 위의 글을 쓰고 난 이후에 16살 되는 아가씨가 문답을 받았는데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자신이 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그녀를 회초리로 때려 집 밖으로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해 하위렴 선교사가 순회 사역을 하며 세례를 베푼 총인원이 12개 교회에서 86명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해남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는데, 이때 설립한 교회가 해남군 읍내교회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그 설립 과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0년 해남군 읍내교회가 성립하다. 먼저 선교사 하위렴이 조사 김영진을 파송하여 이 마을에 전도한 결과 김채윤 등 몇 사람이 믿고 남문외교회에 내왕하더니, 신자가 늘면서 대정 마을에 예배당을 세웠는데 그 후 이 마을에 이전하니라. 선교사 맹현리와 조사 마서규, 김달성, 최병호, 원덕찬, 조병선 등이 상속 시무하니라."
 

그 후 해남읍 교회는 해남의 모교회로서 지역 전도에 앞장을 서, 많은 포자 교회 분립을 통해 성장을 거듭했으며 ‘해남의 그룬트비’라 불리는 이준묵 목사와 전 한신대 총장 오영석 목사와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영흥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
 

1903년 유진 벨에 의해 시작된 남학교는 원래 소학교 과정으로 출발했으나 1907년이 되면서 중학교 과정이 신설되었다. 과정만 나뉘었지 여전히 한 지붕 밑에서 겨우 3명의 교사가 110명이나 되는 학생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다. 하위렴이 목포에 부임하던 그해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부임 당시(1909) 하위렴이 교실에서 마주한 학생들에게 받았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남학생들의 품행과 학업은 양호했다. 가을철에 야외활동이나 봄철의 소풍으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연중행사 가운데 선교회 활동으로 한 달에 2회 저녁에 만났으며, 그것과는 별도로 두 번의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성탄 절기에는 12명을 뽑아 여행경비를 주고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시골을 돌며 전도하게 했다. 학생들은 모두가 자신이 뽑히길 원해,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 이듬해에는 학생 수가 135명으로 늘었으나 그들 중 가정 형편이 어려운 63명은 기숙사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하위렴 선교사는 실질적으로 그들을 도울 방법을 궁리한 끝에 스테이션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거들게 하고, 학생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도록 하는 거였다.
 

"스테이션 조성공사에 잡일을 거드는 보조 인부로 봉사하게 하자, 3개월 동안 평균 참석자가 47명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시간 반씩 일하고 한 달에 3엔씩 받으면서 공사장 주변 정리와 자재 운반과 같은 잡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그들의 급료는 노동자의 임금을 참작해 그들 임금의 1/3 정도를 지급했다."
 

그나마 이 일도 날씨가 좋지 않다든지 혹은 감독자가 결근하거나 장비가 부족해서 할 수가 없을 때는 근로 학생들의 절반 정도는 일이 없어 돌아가야만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일거리가 없어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들의 학비 마련을 걱정하며 함께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자 하위렴은 군산 영명학교에서 시행했던 것처럼 아예 학교에서 실과를 시범 운영하기도 했는데, 일종의 실기 교육과정으로 학생들에게 목공 기술을 가르쳐 학비로 연결될 수 있게 했다.
 

그는 학원 선교의 현장에서 실기교육의 절실함을 느낀 하위렴은 연례회의 때마다 실업교육의 관심을 촉구하며 안건으로 올렸으나 논제의 중심이 언제나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실업교육이 과연 필요한가'로 흘러가면서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가 없었다. 결국, 기술교육은 학생들의 학비 마련을 위한 과정으로만 그쳤지, 정식 학과목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그 이후로도 하위렴은 자신의 경험과 사례를 들어 실업교육을 전담해 줄 전문인력의 파송을 해외 선교부에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하위렴의 제안 이후에도 다시 레이놀즈가 해외 선교부에 실업교육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인력과 예산을 청원한 적이 있었으나 해외 선교부에서도 선교에서 교육 사역은 교회 지도자양성에 목적이 있지 교육을 사업화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교육 사역에서 실업교육은 배제한다고 못을 박음으로써 오랫동안 이어왔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하위렴이 영흥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는 동안 그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실업교육의 확대 시행의 여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독교 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이 점차 심해지고 있는 점이었다. 그들은 매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재와 수업 내용은 물론 심지어 학교에서의 모든 일상까지도 보고하게 하는 등 선교사들의 사생활까지 침해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총독부에서는 최근 들어 부쩍 우리 학교에서 사용하는 책과 사용하지 않는 책은 무엇이며, 부르지 않는 노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을 묻는 공문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연료사용 경비 내역과 선교사의 사례 액수까지 자세한 보고를 요구해 왔는데, 모든 질문서의 내용이 한자로 쓰여있어서 번역을 따로 해야만 이해할 수가 있었다. ...(중략)... 나를 강제로 자리를 비우게 하고, 임시 휴교 조치를 강행했던 위기가 두 번이나 있었다. 국면이 이렇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학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선교사의 임석臨席과 단속團束이 필수적이라 생각되어 이번 연례회의에서 적절한 대책이 세워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전라노회 창립에 참여하다(1911)
 

1911년 대리회(代理會; Sub-Presbytery)를 노회로 개편한다는 독노회의 결정에 따라 독노회 산하 7개 대리회를 7개 지역 노회로 개편 조직했다. 이로써 조선 장로교는 선교 한세대 만에 노회 정치체제의 성공적인 안착을 이루며 뿌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라대리회 역시 1911년 10월 15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회집을 하고, 전라노회로 개편하면서 임원을 선출하고 노회 시대를 열었다. 당시 전라노회 창립 당시 회원구성을 보면, 목사회원이 배유지, 이눌서, 류서백, 부위렴, 강운림, 최의덕, 마로덕, 고라복, 타마자, 하위렴, 이기풍, 김필수, 윤식명 등 13명이었으며, 장로회원으로는 양성률, 최흥서, 서영선, 신경운, 이승두, 최국현, 조덕삼, 이원필, 류기택, 최학삼, 이자익, 위위렴W. A. Venable, 오인묵, 김응규(유고로 불참) 등 14명으로서 총대는 모두 27명이었다.
 

임시회장인 김필수 목사의 사회로 노회를 이끌어갈 임원과 각부 위원을 선출했다. 이때 하위렴은 이눌서 선교사, 류기택 장로와 함께 규칙위원을 맡아 노회 조직의 틀을 함께 세웠으며 창립 당시 전라노회의 조직도는 다음과 같다.
 

회 장 : 김필수 목사

부회장 : 배유지(Eugine Bell) 목사

서 기 : 이승두 장로

회 계 : 최국현 장로, 최의덕(Lewis B. Tate) 목사

정사(定事)위원-배유지(Eugine Bell), 이기풍, 최흥서

헌의(獻議)위원-서영선, 부위렴(William F. Bull), 이승두

재정(財政)위원-이자익, 고라복(Robert T. Coit), 강운림(William M. Clark)

규칙(規則)위원-하위렴(William B. Harrison), 이눌서(William D. Reynolds), 류기택 학무(學務)위원-김필수, 류서백(John S. Nisbet), 위위렴(W. A. Venable)

정치(政治)위원-윤식명, 최의덕(Lewis B. Tate), 최학삼

검사(檢査)위원-未擇

 

   
전라노회의 창립(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하위렴 선교사)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7개 노회 가운데 전라노회의 지역 범위가 일단 자신들의 선교구역과 일치하고 있는 점에 만족감을 표시했으며 1914년 8월 총회로부터 제주 선교를 전라노회가 주관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다.

 

사경회(査經會) 강사로 참여하다
 

앞에서 언급했듯 각 지역 선교지부에서 해마다 열리는 중사경회(Station Bible Class) 행사에는 다른 지역 선교지부의 선교사들을 강사로 불러 개최하는 관례에 따라 1910년 2월 1일 군산에서 개최된 사경회에 하위렴 선교사가 강사로 초청되었다. 그는 설교학과 소요리 문답 등 2과목을 가르쳤는데 참석자는 260명 정도 되었다.
 

하위렴이 군산에서 사역할 당시(1906) 처음 개최되었던 중사경회에 60여 명이 참석한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이듬해 1911년 2월에는 목포지부가 주관하는 남녀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순천 선교지부 개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
 

1910년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는 호남 남동부지역에 또 다른 지부 설치를 계획하고, 광주와 목포지부에 속한 선교사들에게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목포지부에서는 하위렴이 위원에 지명되었다. 소속 위원회의 대다수 위원은 광주에서 출발했으나 하위렴은 목포에서 혼자서 말을 타고 1,280Km의 순회 일정을 마치고 광주로 가서 위원들을 만났다.
 

위원들과 함께 순천지역을 돌아보고 순천이 지부 설치에 적절한 조건을 갖춘 장소라는데 동감했으나 선교부의 예산과 인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현재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가까운 시일 내에 스테이션을 여는 것은 불확실해 보인다고 하위렴은 판단했다. 왜냐하면, 목포지부에 대한 선교사 충원요청에도 해외 선교부의 반응이 늦어 안타까워했던 터라, 하위렴은 개인적으로는 순천지부의 개설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종근 목사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성명서19) 통합 노회장연합회,
김의식 목사 후임(?)으로 결정된
이광선, 이광수 형제 목사, 무고
김의식 목사의 후임(?) 한경국
“책임자 출석 어려우면 하나님의
김의식 목사의 후임(?)으로 한경
예장통합 목회자 1518명 김의식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최삼경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12125)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도제원로 32-2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