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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 선교사 에드먼즈와의 재혼(1908)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10)
2024년 05월 31일 (금) 11:48:33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백종근 목사(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
 

미국 북감리교 내한선교사, 에드먼즈(Margarret J. Edmunds)
 

북감리교 내한 선교사로 내한했던 에드먼즈는 1871년 캐나다의 온타리오주의 작은 시골 마을 페트로리아Petrolia, ON에서 태어났다. 페트로리아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유전 지대였다. 북미에서 석유가 최초로 발견된 지역으로 개발 바람이 한창 불던 1860년대, 에드먼즈의 아버지 노아Noah Edmunds는 페트로리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의 고향 스미스 폴스Smith Falls, ON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캐나다라고 하지만 페트로리아에서 미시간주 접경까지 15마일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도시로 나가려면 오히려 미국 쪽이 더 가까웠다.
 

그의 아버지 노아는 고향에서 제법 이름난 대장장이로, 아내 파멜리아Permelia Rose와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 에즈먼즈는 그중 여덟 번째였다. 위로 언니가 셋, 오빠가 넷이 있었고, 남동생 하나와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석유개발 붐을 타고 페트로리아에 몰려든 주민들 대다수가 그랬던 것처럼 보잘것없는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에즈먼즈는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2남매가 함께 사는 낡고 비좁은 통나무집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며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에드먼즈는 늘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어려서부터 나이팅게일을 동경했던 그녀는 자신도 언젠가는 간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늘 머릿속을 채우곤 했는데 어쩌면 이때부터 넓은 세상을 그리며 호젓한 가출(?)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국경 건너 미국의 미시간대학에 간호학교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드먼즈는 마치 이 학교야말로 자신을 위해 예정된 운명의 통로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간호학교를 지원한 그녀는 4년 과정을 마치고 간호사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1894년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 OH시의 외곽 빈민 지역에서 가난한 산모와 어린아이를 돌보는 방문 간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1900년에 접어든 어느 날 그녀가 출석하던 톨레도 웹워드연합감리교회Epworth United Methodist Church에서 선교 집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 강사로 나온 커틀러Mary M. Cutler 양은 조선에 파송된 북감리교 여의사라고 자신을 간단히 소개한 뒤, 곧바로 조선에서의 의료선교 상황을 설명하고 간호사가 전무한 조선에서 간호사 양성의 시급함을 역설했다.
 

우연한 기회에 집회에 참석했다가 커틀러 선교사의 간절한 호소에 크게 감명받은 에드먼즈는 곧바로 '북감리회 해외 여자선교회'에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녀가 선교사에 지원하자 교단에서도 그녀를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웹워드연합감리교회에서도 적극적인 후원을 약속하고 나섰다.
 

그녀가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소식이 캐나다의 가족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딸이 고향을 떠나 미국에 홀로 가 있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선교사 지원 소식에 놀라며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조선에 어린 딸을 결코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몇 개월 동안 거의 싸우다시피 부모님을 설득해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낸 에드먼즈가 커틀러Mary M. Cutler와 홀Rosetta S. Hall 두 선교사와 함께 뉴욕에서 런던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은 1902년 캐나다의 짧은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문턱에 접어들던 무렵이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하는 태평양 노선 대신 대서양을 건너 런던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보다 긴 여정을 택했다.
 

6개월의 기나긴 항해를 하는 동안 에드먼즈는 심한 멀미에 시달려 피곤하기는 했으나 다행히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커틀러와 홀 두 선교사로부터 조선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사역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배우는 유익한 여정이었다. 일행이 고베와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3년 3월 18일이었다.

   
마거릿 에드먼즈(1903)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서양 의료 시설이 제대로 소개조차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조선의 의료체계는 말 그대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제중원이라는 병원이 개설되어 있다고는 해도 양반 상류층을 위한 진료소로만 여겨져 일반 백성의 출입은 아예 허용조차 되지 않았다. 보구여관普救女館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의 진료를 위해 정동에 문은 열었어도, 신분이 낮은 일반 부녀자들이 진료받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에드먼즈는 조선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그해 겨울 서둘러 보구여관에 간호사 양성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모집하면 금방 모여들 줄 알았던 것부터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그 당시만 해도 여성의 사회활동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혀 없던 때라 여자가 외간 남성을 시중들고 간호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 통념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동에 소재했던 보구여관(普救女館)

그 이듬해인 1904년 겨우 5명의 학생을 모집해 간호학교의 문을 열었다. 조선 최초의 간호사 양성학교였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20년, 심지어 중국과 비교해도 10년 정도 뒤늦게 출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간호사 수칙과 임무를 제정하고, 조선 여성에게 걸맞은 간호사 복장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1908년에는 한글로 된 간호 교과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보다 먼저, 개교 이듬해인 1905년에는 일본 적십자사와 협력사업으로 러일전쟁 기간 발생한 부상병을 치료하는 간호 현장에 2명의 조선 학생을 선발해 견학시키기도 했다.
 

에드먼즈는 1908년 하위렴 선교사와 결혼하면서 보구여관을 떠났지만, 두 해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한국 최초로 간호사를 양성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 후 그녀는 하위렴의 사역지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간호사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보구여관 간호사 양성학교를 마친 최초의 간호사들

(그레이스 리, 마르다 김, 엘렌 김, 매티 정, 가운데가 마거릿 에드먼즈)

도티(Susan A. Doty) 양의 소개로 만난 에드먼즈
 

1907년 선교사 공의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하위렴은 북장로교 선교사인 도티Susan A. Doty 양을 회의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몇 해 전 자신의 결혼식을 바로 도티가 머물던 선교사 사택에서 치렀기 때문에 그녀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데이비스와의 결혼식 이후 하위렴이 도티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티는 친구 데이비스가 전주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신혼의 달콤한 추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졸지에 홀아비가 되어 자기 앞에 서 있는 하위렴이 그렇게 측은해 보였다. 마침 그 자리에는 하위렴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알렌 공사도 함께 있어 긴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그녀는 잠시 하위렴을 위로하고 자리를 떴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도티는 하위렴 선교사와 헤어져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에드먼즈를 떠올렸다. 도티가 교장으로 있던 정신여학교는 보구여관普救女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도티는 앳된 에드먼즈를 자주 만나 자매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바로 발길을 돌려 하위렴을 다시 쫓아간 그녀는 에드먼즈를 그에게 소개했다.
 

도티의 소개로 하위렴은 에드먼즈와 전혀 예기치 않은 만남을 갖게 되었지만, 이 만남은 두 사람의 운명을 다시 한번 바꾸는 계기가 된다.
 

에드먼즈 역시 자신이 보구여관에서 사역하는 동안,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를 잃었다는 선교사의 이야기를 소문으로 전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도티가 소개하는 이 남자가 그 사람일 줄이야!
 

에드먼즈를 만난 자리에서 하위렴이 먼저 자신을 소개하자 에드먼즈도 하위렴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노라고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각자의 사역을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하위렴은 자신의 처지를 동정해 주는 아담한 몸매를 가진 캐나다의 아가씨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런 진전이 없이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고는 모임이 폐회되던 마지막 날, 에드먼즈를 다시 만난 하위렴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심중을 어렵게 토로했다. 에드먼즈는 즉답 대신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날 하위렴은 그녀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고 군산에 내려왔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도와 묵상 가운데 지루한 몇 달이 흘러갔다.
 

어느 날 서울에서 에드먼즈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에드먼즈의 편지는 하위렴에게 연민과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그러고는 편지 말미에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누구하고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자신이 만일 결혼하게 된다면 캐나다의 부모님의 동의 가운데 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부모를 떠나 조선에 선교사로 올 때도 부모님이 못내 섭섭해하셨는데 조선에서 만난 홀아비 선교사에 대해 부모님의 허락과 축복이 없다면 자기는 결혼을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로 돌아갔다.

   

고베에서 샌프란시코로 가는 Korea Maru호의 에드먼즈의 승선 기록(1908.4.10.)

2차 안식년(1908-1909)과 에드먼즈와 재혼
 

공교롭게도 그녀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하위렴 역시 안식년을 맞게 되었다. 1908년 4월 10일 고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증기선 코리아 마루에 승선했다. 하위렴은 고베에서 배에 오르기 직전 에드먼즈에게 전보를 쳐 자신의 캐나다 방문을 미리 알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캐나다로 향하는 여정 내내 에드먼즈 부모님의 반응을 은근히 염려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에드먼즈의 부모님들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딸을 찾아 머나먼 조선에서 쫓아온 청년 선교사 하위렴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리고 그해 9월 2일 에드먼즈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에드먼즈의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11명이나 되는 형제 외에 아버지의 형제가 10명, 어머니의 형제도 8명이나 되어, 결혼식에 모인 에드먼즈의 형제와 사촌들은 다 헤아려 순서를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온타리오 남부지역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에서 추방된 왕당파들과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일부 왕당파들은 미합중국과 연대하는 것에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후 들어온 초기 이민자들은 소수만이 영국을 지원했을 뿐, 일반적으로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며 대부분 중립을 지켰다. 에드먼즈의 증조부도 이런 부류였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캐나다로 건너온 이민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적 신앙 배경은 그 당시 왕당파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던 감리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여름인가 싶더니 캐나다의 가을은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 단풍나무와 자작나무 그리고 참나무의 교목喬木들의 군락이 끝없이 펼쳐진 온타리오의 평원과 구릉을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휘덮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 찾은 캐나다에서 두 사람은 에드먼즈의 가족들과 캐나다 추수감사절(10월 둘째 주)까지 거의 한 달간을 머무르다가 미국으로 내려와 성탄과 연말연시를 보내며 꿈같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그 이듬해 두 사람은 켄터키주를 비롯해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그리고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의 교회를 돌며 조선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고, 후원교회들을 결성하는 일로 오히려 선교지에서보다 바쁘게 보냈다. 1909년 9월이 되어서야 그들은 다시 조선에 돌아왔다.

   
백종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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