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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잦은 약속파기, 이유 뭘까
새국면 맞은 북핵문제… 북한의 속내를 알아본다
2003년 04월 16일 (수) 00:00:00 이영종 yjlee@joongang.co.kr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외교팀 기자

다자간 대화 가능성에 따른 향후 북핵문제의 새로운 국면 전망에 긴밀하게 관련된 북한의 빈번한 약속 위반 행보를 분석해본다.

북한당국은 4월 7일 평양에서 열기로 약속한 10차 남북장관급회담을 무산시켰다. 지난 1월 서울에서 개최한 9차 회담 때 남북한이 문서로 확정한 일정을 사전에 아무런 양해도 없이 깨버린 것이다.

북한은 3월 말 한·미 합동으로 실시한 연례적인 연합전시증원연습(RSOI)과 독수리 훈련을 문제삼아 우리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또 미국의 이라크 공습과 관련해 우리 정부가 경계태세를 강화했다며 3월 26일부터 평양에서 가지려던 경협분야 실무급 접촉을 연기시켰다. 비상경계태세 발령이 우리 청와대 대변인의 실언 때문이라는 정부의 해명에 대해서도 “장차관 말이라면 몰라도 청와대 대변인의 말인데 무슨 소리냐”며 막무가내였다.

북한의 약속 위반은 지난 2000년 6월 치러진 남북정상회담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6·15 공동선언에서 두 정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해 합의했다. 공동선언은 말미에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못박고 있다. ‘적절한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 기간 중 끝내 서울 답방을 하지 않았고, 아직 이와 관련한 움직임도 없다.

북한은 6·15 공동선언 석달 뒤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를 통해 “앞으로 가까운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며 이에 앞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북한 권력서열 2위)이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전해왔지만 이 역시 말로 그쳤다. 김 위원장은 이듬해 5월 방북한 요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를 지켜본 뒤 답방문제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약속은 언젠가 지켜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간에 약속한 각종 경협사업과 합의사안의 이행 성적표를 보면 북한이 합의위반을 식은 죽먹듯 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남북한이 각종 회담을 통해 합의한 사안은 20여 가지에 이르지만 이 가운데 완전히 이행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남한내 비전향장기수의 북송과 재일 조총련 동포의 고향방문, 북한 경제시찰단의 서울 방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은 북한이 강력하게 원했던 사안으로 합의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2000년 9월 북한행을 희망하는 62명 모두가 북송됨으로써 일단락됐다.

그렇지만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이나 군사당국회담, 백두산·한라산 관광단 교환 등은 한두 차례 만난 뒤 흐지부지 되거나 반쪽짜리 이행으로 중단된 상태다.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은 각 100명씩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형태로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이산가족 면회소의 개설 등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금강산에 면회소를 설치하는 데 원칙적인 합의를 하고도 남측의 방안보다 10배 가까운 대규모 시설을 요구해 어려움을 겪었다. 남북한은 어렵사리 ‘4월중 면회소 착공’이란 합의를 이뤘지만 남북장관급회담의 연기 등 당국관계의 파행으로 미뤄볼 때 4월내에 면회소 건설을 위한 가시적인 조치가 취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이 밖에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공사도 지난해 말에서 올 상반기 사이에 완공됐어야 할 사안이지만 아직 본격적인 공사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북한 동해 어장의 남한 어민에 대한 개방이나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의 연결, 민간 선박의 상호 영해통과 문제도 진전이 없는 상태다.

북한의 이런 합의파기 행위는 국제사회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다. 북·미간에 지난 1994년10월 체결한 제네바 기본합의는 대표적인 사례다. 93년부터 본격적으로 불거진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는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를 지어주는 대신 북한은 핵개발 계획을 전면 동결하기로 한 당시 합의는 현재 중대한 위기상황에 봉착했다. 북한 당국이 지난해 12월 12일 핵동결을 전면 해제하겠다고 선언한 데 따른 것이다. 북한은 이후 북한지역에 체류해 온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단원을 추방했고, 올 1월 10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했다. 또 2월 26일에는 영변의 5MW원자로의 재가동에 들어갔다.

북한은 미국이 먼저 핵동결의 대가로 경수로와 함께 제공키로 한 발전용 중유공급을 지난해 12월부터 중단한 데 따른 대응조치라고 항변하고 있다. 핵시설의 재가동도 이에 따른 자위적이고 불가피한 조치라는 주장이다. 한국과 미국·일본이 주도하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2003년까지 북한에 지어주기로 한 200MW급 경수로 발전소의 완공이 사실상 어렵게 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경수로 제공과 북·미 관계 개선 등 약속을 위반한 마당에 자기들만 이를 지키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경수로의 완공지연이 96년 9월 북한의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과 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등에 따른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북측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북한의 잇단 도발사태에 따른 한·미·일 등 국제사회의 대북접근 속도조절에 따라 나타난 결과지 북한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게 우리 정부와 북한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북한의 이 같은 행태를 놓고 그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만큼 북한의 행동이 예측 불가능한 가운데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데다 김정일 정권 내부의 권력 핵심부 의사결정 체계 자체가 베일에 싸여져 있는 때문이다.

몇 가지 분석 가운데 가장 비중있게 거론되는 것은 최근 북한이 처한 국내외적인 정세란 측면에서의 해법이다. 90년대 들어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말미암아 정칟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사회주의 보루’란 위기감이 대두하면서 위축된 때문이란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국제사회와의 신뢰관계보다는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를 쫓아 합의와 약속파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풀이다. 이런 상황은 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이 이른바 3난(식량·에너지·외화 등 3가지가 부족한 상황)을 겪으면서 더욱 심화됐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북한 정권의 태동과 관련해 북한의 태도를 파악해 보려는 시각도 있다. 김일성 정권 자체가 이른바 항일 빨치산 활동과 반제국주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당시의 전략·전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일 활동이란 목표를 유지하기 위해 비합법적인 투쟁과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빨치산 활동의 유지를 위한 약탈행위 등이 당위성을 갖게 됐고, 결국 현재 국제사회와 남한을 상대로 한 대북지원 조달 등이나 각종 경제협력 사업도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소 거친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협상이나 회담에서 주도권을 사전에 거머쥐려 하는 북한 정권의 특성 때문이란 풀이도 나온다. 어느 체제보다도 자존심을 강하게 내세우고 자주권을 강조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협상 테이블에서 유연한 자세를 보이거나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뻣뻣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얘기다. 북한이 처한 위치가 어렵거나 수세에 몰려 있을수록 북한의 이 같은 행태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분석도 이 때문에 나온다.

결국 북한당국의 빈번한 합의 파기는 이유야 어떻든 간에 김정일 체제에 대한 남한당국과 불신을 부르는 것은 물론 대북지원 등에 대해 국민여론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부른다는 게 정부와 북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게다가 북한의 국제무대 진출에도 적지않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북한이 당국간 합의와 외교상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국제기준에 발맞추는 태도변화를 보일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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