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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
송요한 목사의 이단 문제 분별법(12)
2024년 05월 27일 (월) 10:18:06 송요한 목사 webmaster@amennews.com

송요한 목사(중화권 선교사, 이단연구가, 백석)

3-4절 성령론

가. 성령의 명칭

성령을 일컫는 명칭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명칭들을 소개한다.

① 성령: 거룩한 영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다(행 1:5).

② 보혜사: 카운셀러(Counseler), 상담자, 돕는 자의 의미이다. 성도를 향한 사역의 측면에서의 명칭이다(요 14:16).

③ 주의 영(롬 8:9): 성령은 삼위일체 중 제3위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성부의 영이기도 하시며 성자의 영이기도 하시다. 이는 예속이나 양태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도는 성령을 통해 그분 안에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 교제할 수 있는 것이다.

④ 진리의 영: 세상과 구별된 거룩하신 분이시며 성도 안에 거하신다(요 14:17).

⑤ 생명의 성령: 성령은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롬 8:2).

 

나. 성령의 사역

성령을 떠나서는 인간이 거듭날 수 없으며 영생을 소유할 수 없다. 인간들을 향한 성령의 사역은 다음과 같다.

① 중생하게 하심: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요 3:3-8).

② 성령 세례를 주심: 성도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우주적 교회의 일원)가 된다(고전 12:13).

③ 내주하심: 믿는 자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신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다(요 14:16-18, 고전 3:16).

④ 인치심: 신자들은 구속의 보증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다(엡 1:13, 고후 1:22).

⑤ 가르치심: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신다(요 14:26, 요일 2:20,27).

⑥ 인도하심: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되 특별한 은사를 주기도 하신다(롬 8:14, 갈 5:16, 고전 12-14장).

⑦ 위로하심: 성령은 보혜사시며 신자의 심령을 위로하는 분이시다(행 9:31).

⑧ 충만케 하심: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도가 능력을 얻게 되는데 ⑤~⑦항의 내용이 매우 강력하게 임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행1:8, 2:1-4, 4:31).

 

다. 성령론의 여러 견해들

성령론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논쟁점들이 있다. 교회사 부분에 소개되었던 필리오케(Filioque) 첨가 부분도 성령론 논쟁이었다. 오늘날 개신교 정통교단 안에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성령의 내주와 성령세례의 관계, 중생과 성령세례의 관계 등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다음은 성령론에서 차이점이 발견되는 정통교단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1) 오순절 교파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한다.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신자가 신앙생활 속에서 체험해야 할 단회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은 그 성령세례의 계속적인 사건이다. 오순절파는 중생 때 성령이 신도 안에 내주하지만 성령 세례는 다시 한번 새롭게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곧 성령세례는 예수 믿어 중생하는 그 때에 받는 것이 아니고 중생 후에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 방언으로 나타나는 별도의 체험으로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행 2:1-4). 그래서 오순절파의 이런 견해를 두고 보수적 교단들은 은사파, 방언파라며 비판하기도 한다.
 

2) 성결교회

성결교회도 오순절파처럼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한다. 중생 때 성령이 신도 안에 내주하시게 되지만 성령세례의 체험이 또 한 번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첫 성령충만의 체험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후의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계속적인 사건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순절 교단들이 방언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성결교회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더 큰 강조점을 둔다. 성결교회는 성령세례를 성결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3) 개혁파와 다수 교파들

중생하는 순간 신자는 성령 세례를 받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한번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는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의 내주는 성령 세례 때 주어지는 것이다. 많은 정통 개신교회는 개혁파의 입장을 취한다.

   
 

라.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봉사를 위해 주어지기도 하며 표적이나 능력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은사의 내용들은 다양하다. 대부분의 정통 개신교회에서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14장 등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다고 믿고 있다.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이유는 교회를 덕스럽게 하며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위함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도 있다(갈 5:22-23).
 

성령의 은사를 논함에 있어서 보수적인 칼빈파에서는 은사중단론(Cessationism)을 주장하기도 한다. 곧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은 신약성경 시대에만 국한되고 오늘날은 재현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이런 은사중단론자들 중에서도 완전단절설이 있고 부분단절설이 있다. 반면 비칼빈파에서는 요엘서 2장과 신약의 많은 부분들을 이유로 은사중단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중도적 입장에서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는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도적 권위의 계시나 직분은 사도시대로 종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곧 사도 시대의 이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을 통해 주시는 계시를 확증해 주는 사도적 이적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 시대의 은사나 이적은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의 응답으로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사도적 이적과는 다르다.”
 

곧 은사 그 자체의 존재는 인정하나 사도적 직분이라든가 성경과 같은 효력의 특별계시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도시대와 같은 은사가 나타난들 그 권위적인 면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는데 그 문제 해결의 단서는 사도행전 21장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유대인들이 그를 묶어다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 예언은 대략적인 것은 맞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완전치 못했다. 아가보는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넘겨주리라고 했지만 실제로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때렸던 것이고 로마 군인들은 그를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결박하여 데려갔다(행 21:10-11, 27-34). 이로 보건대 구약시대 선지자들이나 신약시대 사도들과 교회지도자들에게 임했던 예언들은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까지 100% 완전한 응답과 증명이 되었던 반면, 신약시대 이후 은사로서 주어진 예언들은 그 응답과 증명에 있어 불완전함이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곧 권위와 정확성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바람직한 태도가 요구된다.
 

① 은사는 성경을 통한 검증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고전 14:32-33). 무언가 은사를 받은 듯하다고 해서 다 신뢰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허락하신 온전한 은사인지 검증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검증의 최우선 기준은 성경이다. 일부 사람들이 받았다는 예언의 진실성은 더 크고 최고 예언인 성경을 통해 검증되어야만 한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다녀왔느니, 직통계시를 받았느니 한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집단적으로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체험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를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매우 황당하며 유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거짓말이었든지 악한 영의 작용이었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교회나 그 대상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으로 알고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에 힘쓸 일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과시적 명예나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예언의 은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을 깊이 있게 잘 배우고 알아서 그 깨달음으로 신도들을 바르게 가르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이해함이 안전하다.
 

② 목회자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히 13:17, 고전 14:26-33). 아무리 뛰어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어느 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다면 그는 그 교회 목회자의 권위 아래 있다. 특별히 목회자는 이런 질서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필요하다. 질서에 위배되면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마땅히 치리해야만 교회가 시험을 면하고 덕을 세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만날 수 있다. 2008년 한국의 어떤 목회자는 귀신 쫓는 은사가 있다는 한 여자 집사를 지나치게 떠받들다가 심각한 결과를 당했다. 그 자신마저 그 여집사로부터 귀신을 쫓는다는 명목으로 상습적인 폭행을 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여집사에게 자기 아내가 맞아 죽고 말았다.
 

또 한편 교회나 목회자의 관리를 받기 싫다고 기도원 등을 통해 단독으로 은사사역을 하는 경우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말씀과 신학적 기초가 약한 사람이 은사에만 몰입하다 보면 결국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③ 외적 현상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다가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매우 조심해야 할 태도이다.
 

④ 은사로 인한 영적 교만을 주의해야 한다. 은사를 받고 교만함보다 은사를 안 받고 평범함이 낫다.
 

⑤ 질서와 절제 중에 사용되어야 한다(고전 14:40). 바울 사도는 은사에 대한 내용을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자세히 논한 이후에 결론적으로 모든 은사는 적당하고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과한 것은 오히려 부족함만 못하다. 최근에는 성령 춤을 춘다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데, 그 성경적 근거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예배나 집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보고가 있으므로 이것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⑥ 은사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집회 중에 자기가 평소에 사모하던 방언이나 기타 은사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행위이다. 그런데 그릇된 집회에서는 인도자가 타인의 방언을 따라 하거나 흉내를 내면 방언을 받는다고 유도하기도 하는데 그런 가르침은 단연코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런 행위 속에서 오히려 악령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방언 비슷한 소리가 나와 당장에는 기쁠 수 있지만, 그 방언을 할수록 점점 기쁨과 평안이 떠나고 이상한 느낌과 불안감이 찾아오게 된다. 방언 소리도 정상적인 사람들의 것과는 무언가 미묘한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지체없이 담임목회자에게 문의하고 그 방언을 더 이상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악한 영이 떠나고 심령에 평강이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한다. 오래 방치할 경우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성령께서 그에게 그 은사 주시기를 원치 않으심에도 그 사람이 사모한다는 구실로 정도를 넘어선 행위를 반복할 경우 악령이 슬쩍 틈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⑦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은사는 성도 개인의 영적 성숙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에 덕이 안되면 교회 안에서는 중지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요셉의 꿈에 대해 야곱이 취한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것이지만 요셉이 자꾸 말하고 다니는 것은 형제들 사이에 덕이 되지 못했다. 이에 야곱은 요셉이 함부로 자기 체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오늘날 은사 추구자들도 이런 야곱의 태도를 본받을 때 쓸데없는 분쟁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며 교회의 질서와 덕은 높아질 것이다(창 37:5-11).

 

마. 성령론 이단들

① 성령의 신성 및 인격(위격)성을 부인하는 이단

아리우스는 성부만이 유일신이라고 이해했으므로 성령의 신성과 인격(위격)성을 부인했다. 동방교회에서도 ‘성령 훼손당(Pneumatomachen, 성령 적대파)’이라 불리는 집단이 나타나서 성령은 하나님의 피조된 능력 내지는 도구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단일신론파들이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다. 사벨리우스파는 양태론적인 입장에서 성령은 성부의 다른 양태로 보았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성령은 개별 인격(위격)을 가진 분이 아니시다. 종교개혁기의 소시니도 성령을 하나님이 사용하는 단순한 힘으로 이해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도 성령의 신성과 인격(위격)을 부인한다.
 

② 자칭 보혜사 이단

고대의 이단 몬타누스는 자기를 가리켜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였다. 이런 모습은 한국의 이단 천부교의 박태선에게서도 나타났었다. 또한 신천지가 이만희 교주를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 안상홍하나님의교회에서는 이미 죽은지 오래된 교주 안상홍을 보혜사라고 한다.
 

③ 성령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

ⅰ. 심령술의 오용- 오늘날은 심령치유의 방법을 마치 성령의 능력인 양 왜곡하여 사용하는 이단 사이비들도 있다. 그들은 힌두교식 영성에 가까운 신초월주의(neotranscendentalism)와 뉴에이지(New-Age) 운동, 고대종교 혹은 이교적 종교혼합주의 색채를 띤 정신측정(psychometry), 영매(mediumism), 마술, 최면, 강신술(spiritualism), 맹목적인 긍정을 외치는 미국식 번영신학의 영성이 담긴 적극적 사고와 긍정적 사고 등을 이용하여 심령치유 (psychic healing)를 일삼기도 한다. 사람의 심리란 복잡하지만 단순하기도 해서 저런 수단으로 치유가 가능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성령의 치유하심으로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치유하심과 능력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성도 개인의 기도와 경건의 깊이로 말미암는 것이지 심리적인 교묘한 수단들로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인 양 행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성령 훼방죄가 될 수도 있다(막 3:29).
 

ⅱ. 빈야드식 현상들- 빈야드식 쓰러짐 현상도 주의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에서 환자를 고치는 경우 쓰러뜨려 치료한 예가 없다. 오히려 누웠거나 앉아있는 자들을 일으키며 고쳤다(막 5:41, 행 3:6-10). 단지 쓰러진 경우를 들자면 귀신 들린 사람의 경우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이 쫓겨 나가며 아이를 쓰러뜨리자 그 쓰러진 아이를 즉시 일으켜 세우셨다(막 9:20-27). 오늘날처럼 일부러 쓰러짐을 유도하여 병을 고친 예가 없다. 더욱이 쓰러진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어 입신체험을 유도한 경우 또한 없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오늘날 쓰러짐을 유도하는 류의 집회는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웨슬리의 ‘페터레인(Fetter Lane)의 체험’(1738년 12월31일 송구영신 예배에서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던 웨슬리와 여러 사람들이 바닥에 뒹굴 정도로 뜨거운 성령체험을 했다고 함)과 같은 현상까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웨슬리의 경우는 열렬히 기도하던 중 의도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땅에 뒹굴 정도로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넘어짐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빈야드 형태의 집회는 인도자가 넘어짐을 억지로 조장할 뿐만 아니라 정신을 놓고 엑스타시를 체험하고 입신에 들라고 인도한다. 이는 영지주의나 이교 신앙이 추구하는 방법이다. 기독교는 정신을 놓고 믿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정신을 차리고 믿는 종교이다.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 존 윔버는 다니엘이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린 것을 성경적 근거로 삼기도 한다(겔 1:28, 단 10:7-9). 그러나 그들 선지자가 엎드림은 하나님의 사자의 영광에 압도되어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지 치유 행위나 입신을 위한 준비 작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자들은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온전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하였다(겔 2:1, 단 10:10-12). 결코 몽롱한 정신이나 빈 마음에 신비한 체험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강한 빛을 보고 눈이 멀어 엎드러진 것이므로 성격 자체가 다르다고 봐야 한다(행 9:1-9). 그러므로 오늘날 집회에서 인위적으로 넘어져 뒹굴도록 유도하거나 넘어진 채 몽롱한 정신으로 입신에 들어가기를 유도하는 행위는 최면술, 혹은 심령술에 지나지 않는다. <pp~. 참조>
 

특별히 오늘날 빈야드 현상과 같은 류의 쓰러짐이나 광적인 현상은 성경의 인물 중 단 한 사람 사울왕에게 나타났다. 다윗을 잡아 죽이고자 사무엘 앞에까지 달려간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사울은 예언을 하며 벌거벗은 채 하루 밤낮을 누워있었다(삼상 19:18-24). 사울이 성령에 충만해서 그런 모습이 나타난 것일까?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악한 영성을 가진 사람,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제 탐심을 따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난 성령의 징계 현상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곧 성령께서 사울로 하여금 악령에 사로잡히도록 해버리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변절해 버린 사울을 하나님이 악령(악신)을 부리셔서 괴롭게 하셨다는 말씀과 결부하여 이해하면 더 명확해진다(삼상 16:14). 그래서 성경은 이 부분을 두고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삼상 19:24)며 비아냥대는 말이 속담이 되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사울과 다를 바 없는 영성의 사람들이나 혹은 그런 영성의 사람들에게 미혹되어 경험될 수 있는 현상이 빈야드식 체험이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부끄러운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지도자들이 신자들을 이런 집회로 내몰아 영적인 혼미에 빠지게 하는 것은 분별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알고도 행하는 경우라면 신자들의 내적 변화와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과시와 영웅심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기 이익과 명성을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교회를 빨리 성장시키려는 그릇된 발상 때문이다.
 

더욱이 신자들이 이런 빈야드식 신앙에 심취하다 보면 결국 사울의 최후를 답습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사울은 끝까지 회개할 줄 모르고 종국에는 귀신 들린 무녀를 찾아가 묻기까지 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위 영험하다는 사람을 찾아 예언 기도를 받고자 몰려다니는 태도도 사울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김기동의 베뢰아와 같은 귀신파의 귀신축출 사역, 빈야드운동 계열과 그 아류들의 사역은 대부분 성령의 역사를 왜곡하여 이해하는 이단의 범주에 속한다. 또한 직통계시파나 신비주의적 경향의 사람들이 그릇된 현상을 성령의 역사라고 가르치는 경우도 많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④ 귀신을 쫓는다며 폭력을 일삼는 이단

또한 귀신을 쫓는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때리거나 눈을 찌르며 안찰을 하는 단체도 있는데 이로 인해 사람이 다치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도 있다. 귀신을 쫓는다는 명목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대상자나 가족들이 맹종적으로 동의하는 예가 많은데 그 과정에서 심하면 사고가 발생한다. 성령께서는 때리지 않아도 귀신을 내쫓아 주신다. 사람이 억지로 하려다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귀신이 속히 나가지 않으면 계속 기도할 일이지 물리력으로 하려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물리적 힘으로 귀신이 쫓겨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귀신의 역사가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정신병과 귀신 들림도 확고히 구분해야 한다. 귀신 들렸다고 생각될 만한 사람의 상태도 단순 정신병인 경우가 많다. 귀신이 들리지 않았음에도 귀신이라며 쫓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실 리 없다. 사람이 횡설수설하는 경우 다른 영이 들린 말을 한다면 귀신 들림이지만, 자기 말을 두서없이 하며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면 단순 정신병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도 주의가 요망되므로 차라리 의사의 검진 결과를 보고 기도하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치료를 위해 간구함이 바람직하지 무조건 귀신이라고 쫓는 행위는 도를 넘는 것이다.
 

바. 성령론 이단의 특징들

①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한다. 피조물 혹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여긴다.

② 성령의 위상을 종속적으로 이해한다. 성부나 성자께 예속된 존재로 본다.

③ 성령의 능력을 제한한다. 그러면서 교주나 단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④ 성령의 사역을 왜곡 이해한다.

* 구원사역에서 성령의 역할을 제한한다.

* 말씀을 떠난 은사와 체험 위주의 집단 - 빈야드 운동, 신비주의 집단

* 인간사의 모든 것을 귀신과 결부하여 해석하며 집회는 주로 축귀사역을 한다.

* 심리학이나 심령술, 최면술 등을 이용하여 성령사역으로 위장하는 집단도 있다.

⑤ 성령의 역사를 자기들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전유물로 여긴다.

⑥ 자칭 성령(보혜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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