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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와 함께 전념한 복음사역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8)
2024년 05월 24일 (금) 10:36:20 백종근 목사 webmaster@amennews.com

백종근 목사/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은퇴

 

데이비스와 함께 복음사역에 전념하다
 

안식년으로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사이 전주지부에는 의사인 잉골드만 남아 스테이션을 지키고 있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하위렴 부부는 그동안 중단되어 있던 레이놀즈와 테이트의 사역을 이어 활동을 개시했다.
 

선교사들이 자리를 비운 5개월여 동안에도 50여 명 정도의 교인들은 한 사람도 흔들림 없이 자체적으로 예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위렴과 데이비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모두가 환영하며 반겼다. 이때부터 하위렴은 팔을 걷어붙이고 교인들의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가장家長들을 권면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그뿐 아니라 성문 근처에서 정기적으로 장이 서는 것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5일마다 열리는 장터에 관심을 가지고 장터를 돌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주 4 대문 밖에 서는 장 가운데 남문 장과 서문 장은 대시大市라 불렀고, 북문 장과 동문 장은 간시間市라 했다. 특히 전주 남문 장은 그 당시에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장시場市였는데, 지금과는 달리 싸전 다리 동편에 있는 천변에서 열렸으며 서문 장은 완산 다리 북쪽 너머까지가 장터였다.
 

4 대문 주변의 장들은 날짜를 달리하며 남문 장은 2일, 북문 장은 4일, 서문 장은 7일, 동문 장은 9일에 섰다고 하니까 성곽 주변의 장들은 거의 하루 건너 장이 서고 있었고, 거기에다 전주 외곽의 소양장, 봉동장, 삼례장 등 7개 정도의 장터까지 포함하면 전주 주변에는 거의 매일 같이 장이 열리는 셈이었다.
 

지역마다 전통 장이 정기적으로 선다는 것을 알게 된 하위렴은 사람이 모이는 장터를 순회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선교는 없다고 판단하고, 장이 서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열정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하위렴은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장터 선교의 개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위렴 선교사가 전도하던 전주장터(남문밖 시장으로 추정) 멀리 기린봉이 보인다

당시 전주교회를 방문해 선교상황을 살펴보았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는 ‘그리스도 신문’에 전주교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전주교회가 아직 흥성치는 못했으나 차차 날로 흥왕할 모양은 이 아래 몇 가지로 알 것이다. 제일 깨달을 것은 예수의 도를 사나이만 할 것이 아니고 남녀가 다 믿어야 할 줄 알고, 주일에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마다 집안 식구가 다 함께 다니기가 어려움으로, 차례로 다니는 것과 아이들도 데리고 다님이요, 그중에 한 형제의 말이 비록 큰 새악시를 데리고 다니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데리고 다닌다 하며, 또한 이곳에 남녀학당도 실시하였으며 교중 연보도 차차 성심으로 드리며 전도도 바지런히 하는 이도 있고, 장마다 위인 강화 중에 책도 팔며 전도하는 이도 있어 여러 촌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어 믿음으로 전주교회 몇 고을에 주일이면 예배하는 곳이 있더라.”
 

하위렴은 예배 후 학습과 세례 문답을 위한 교리공부반을 열어 단계별로 가르쳤으며, 데이비스는 부인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성경 말씀과 찬송가를 가르쳤다. 데이비스가 가르친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 이 당시 주일학교의 주제가가 될 정도로 널리 불렸으며 초기 교회 당시 가장 많이 애창된 찬송이었다.

   
찬셩시(8장) 1898, 찬숑가(190장) 1908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하면서 이듬해인 1901년에는 교인 수도 배가되기 시작하더니 1903년에는 20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문밖교회 뿐 아니라 이미 테이트에 의해 세워진 전주 주변 지역교회를 순회하며 성례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 새로 생긴 태인의 계양과 금구의 구봉리 공동체도 돌아보았다. 1901년 8월에는 정읍의 매계교회에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5명에게 세례를, 19명에게 학습을 베풀기도 했다.
 

하위렴은 정읍지방 최초의 교회인 매계교회의 성장을 이렇게 보고했다.

“예배 출석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집 한 채를 사서 회집 장소로 개조했고 그들은 20리 떨어진 곳에 가 예배를 드린다.”
 

테이트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까지 하위렴은 전주 북부지역(고산, 여산, 함열, 임피)과 동부지역(진안, 용담, 무주, 금산, 진산)을 혼자서 맡고 있다가 1903년 마로덕Luther O. McCutchen 선교사가 새롭게 부임하자 전주 동부지역을 그에게 인계하고 하위렴은 북부지역에만 몰두했다.
 

신흥학교의 설립
 

하위렴은 처음부터 복음 사역 이상으로 교육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교부 연례회의가 열릴 때마다 선교부 차원에서의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육 사역을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 선교부가 책정한 계획에 따라 남녀학교를 하나씩 시작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처음에는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이유로 다소 회의懷疑를 보이던 선교부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학교 설립의 책임을 맡겼다. 1900년 레이놀드가 겨우 1명을 데리고 시작한 것을 하위렴이 맡으면서 8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는데 이것이 신흥학교의 효시가 된다. 교사는 하위렴과 데이비스였다.
 

개교 당시 상황에 대해서 하위렴은 1901년 7월 9일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기독교 가정에서 온 소년들을 위해 학교가 문을 열었다. 학교를 여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모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에 대하여 부모들은 학교가 시작하기 전부터 8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보내주었다. 그들 가운데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몇몇 어린애들도 있었다. 우리는 건물과 책 그리고 유능한 교사 등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전주지부 선교사 사택(1904): 맨 왼쪽이 하위렴, 맨 오른쪽이 테이트 양, 그 옆에 작은 키의 여자가 존슨 선교사 아내

 

1904년에는 교사校舍를 화산 스테이션에 있는 하위렴 선교사의 사랑채로 이전하고, 데이비스를 포함한 최중진, 김필수, 김명식 등 5명의 교사가 주 5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업을 진행했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과 한글, 한문, 지리, 산수 등을 가르치면서 신흥학교는 전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1906년에 희현당 옛터에 한옥 건물을 신축해 독립된 교사校舍를 확보하고, 1907년 2월 랭킨Nellie Rankin이, 3월에는 교육선교사 니스벳John S. Nisbet/유서백 부부가 전주에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교육 선교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908년 9월 다시 8간의 교사校舍를 다시 신축하고, 니스벳이 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교명을 신흥학교라 정했다. 새 여명黎明을 뜻하는 New Dawn의 한역韓譯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이 어두운 세상을 빛의 세상으로 바꾸자’라는 의미를 담았다. 1911년 니스벳이 목포 영흥학교로 옮겨가기 직전에 신흥학교 학생 수는 이미 15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신흥학교 연혁을 보면 기록자에 따라 그 시작을 레이놀즈로 보기도 하고, 신흥학교라는 교명을 정식으로 사용한 니스벳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정작 에버솔 F. M Eversol이 언급한 기록에 의하면 선교부에서는 개교 책임을 맡아 시작했던 하위렴을 설립자로 여겼다.

   
1900년대 신흥학교 학생들과 교사의 모습

 

교육 선교에 대한 하위렴(1대)의 비전이 그 후로도 니스벳(2대)과 레이놀즈(3대), 에버솔(4대), 인돈(5대)으로 이어지면서 신흥학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돌려 하위렴 선교사가 뿌린 이 지역에서의 교육 선교의 씨앗이 어떻게 발아되어 결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아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최초의 신흥학교 학생이 된 김창국은 1884년 1월 28일 한의원 김제원의 차남으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의 조모와 모친은 일찍이 테이트 양의 전도로 전주 최초의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조모와 모친을 따라 자연스레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의 신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때 나이 13세였다.

   
전주 최초(1897)의 주일학교 학생;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창국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을 도와 장터에 나가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 활동에 힘쓰기도 했다. 1900년 하위렴이 시작한 신흥학교 최초의 학생이 되었고, 졸업 후 하위렴의 추천으로 평양 숭실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당시 평양 대부흥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은 그는 졸업하던 그해(1907) 평양신학교에 들어갔으며 그는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와 선교사들을 도우며 선교부 내 순회 사역을 돕기도 했다. 1915년 졸업과 함께 안수받고, 전주지부 내 최초의 한인 목사가 되었다.

   
김창국 목사

1917년 전라노회에서는 그를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했다. 그는 6년 동안 내도리교회, 삼양리교회 등을 개척해 제주도 복음화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1922년에는 광주 남문밖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사역하다가 1924년 광주 양림교회로 분립해 나와 25년 동안 봉직했다. 한편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102회 걸친 부흥회를 인도할 정도로 부흥사로서도 크게 활약하기도 했다.
 

신흥학교는 그 후로도 발전을 거듭하며 수많은 목회자와 인재를 배출했는데 교계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전주 안디옥교회와 바울선교회를 이끈 이동휘 목사, 서울신학대 총장을 지낸 강근환 목사, <사랑의 원자탄> 저자이자 기독신문의 전신인 <파수꾼>의 발행인 안용준 목사, 현대종교를 설립하여 이단과 맞선 탁명환 소장과 예장합동 총회장인 전계헌 목사 등 이름난 목회자들이 즐비하다.
 

이 학교 출신의 유명 인사로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운동가로 활약한 작곡가 정율성70), 민중신학의 거두인 서남동 목사, 서울대 교수이자 작곡가인 백병동 등이 있고, 하버드대 한인 최초 졸업생 하경덕 전 서울신문사 사장을 비롯해 거창고 교장을 지내며 참 스승 상을 제시한 전영창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세균 역시 신흥학교가 배출한 유명 인사들이다.

 

스테이션 조성사역
 

하위렴 선교사의 다양한 사역은 의료, 복음, 교육을 넘어 스테이션 조성공사에도 미치고 있었다. 전주 선교지부로 사용하던 은송리 일대 완산 언덕의 땅이 왕실 소유로 밝혀지면서, 왕실에서 그 땅을 다시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자 선교부를 이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완산 언덕에 있던 스테이션을 되팔고, 다시 스테이션을 옮겨 조성하는 사업은 그 당시에 누구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사역이었으나, 하위렴의 다양한 은사와 추진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1902년 화산 스테이션 자리에 건축한 지금의 전주 예수병원의 토대가 되는 진료실과 병동은 해리슨의 설계와 그의 탁월한 아이디어로 가능했던 기념비적 사업이었다. 그는 이어서 선교사 숙소 건축까지도 도맡아 완공하고, 1902년 자신이 건축한 새집으로 입주했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의 집은 신흥학교가 시작된 모태가 되기도 했다.

   
1903년 전주 선교부 전경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하위렴 선교사가 자신이 건축한 선교사 주택에 입주하고 나서 그 이듬 해인 1903년 이른 장마가 시작되던 6월 초순 데이비스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한기가 들면서 고열이 나자 처음에는 감기몸살로 알고 약을 먹었으나 전혀 듣지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그녀를 찾아온 잉골드가 곧바로 그녀의 피를 채혈해 검사한 결과 발진티푸스에 확진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순회 전도하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감염된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쉽게 약을 구할 수가 없었다. 잉골드는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데이비스는 열흘 동안 심한 고열로 시달리다 안타깝게도 그해 6월 20일(음력 5월 15일) 기린봉 위로 보름달이 환히 비치던 초여름 밤, 겨우 4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죽음은 하위렴은 물론 내한 선교사들과 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를 꿈꾸었던 그녀는 하위렴이 내한하기 4년 전 1892년 11월 남장로교 개척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과 군산, 전주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역에 매진하다가 짧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녀의 선교 열정은 주변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칭송을 받을 만치 적극적이었다.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일러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라고 하면서 오열했다. 전주에서 전킨의 주례로 천국 환송예배를 드리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얼마 안 되는 우리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한 생명을 이 땅에서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를 먼저 보내지만, 내한 남장로교 선교사 여러분과 그동안 외로움과 고난을 인내해 오며 함께 만들어 온 뜨거운 우정과 사랑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W. M. Junkin, "Appreciation", The Missionary, Sep. 1903, pp. 424)

   
리니 데이비스의 장례

무엇보다 짧은 결혼생활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하위렴의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던가 켄터키에서 들려온 연로하신 아버지의 황망慌忙한 부음까지. 하위렴은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선교를 향한 일념으로 조선에까지 달려왔건만 ‘주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꼭 선교사이어야만 했던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심란해지기도 했다.
 

하위렴의 심신은 극도로 허약해지고 있었다. 주변의 동료 선교사들은 그가 의욕 상실에 빠질까 염려해 중국에 보내 잠시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중국 선교부 견학이라는 명분으로 그해 여름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하위렴은 상처喪妻의 아픈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한껏 고조되고 있던 전주지부의 분위기가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순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군산지부의 사정도 전주와 매한가지였다. 1901년 드루 선교사가 이미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의 후임자 알렉산더마저 그의 부친의 사망으로 잇달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던 데다 안타깝게도 1903년 4월 생후 20일이 지난 전킨의 아들 프란시스까지 연달아 사망하자 전킨 선교사를 포함한 군산지부 역시 침체의 늪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내한 선교부에서는 전주지부는 물론 군산지부에 대해서도 일단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백종근(白鐘根) 목사는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였다. 한양대 공업화화과(BS), 동 대학원(MS), 산업연구원(KIET)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M. Div)를 획득하고 미국장로교(PCUSA) Covenant Presbytery에서 안수를 받았다. 비버튼 한인장로교회 정년은퇴하여 목회 사역을 내려놓았다. • 저서: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 ,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 『예수가 울다』 설교집이 있다. • Email: whitebell01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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