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이단&이슈 > 가계저주론
       
족계를 타고 내려오며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저주는 없다
‘가계저주론’ 이윤호 목사의 반론에 대한 정훈택 교수의 반박(3)
2003년 06월 25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정훈택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필자가 이윤호의 가계 저주론 및 가계 치유론을 비성경적이라 규정하고 한사코 비평하는 이유는 그가 “가계/혈통/유전자(DNA)를 타고 우리 시대로 흘러내려 왔다”고 말하는 ‘저주’ 개념이 완전히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저주로 다루는 것은 첫째, 남이 못되기를 비는 말이나 행동으로서의 저주, 둘째, 그 결과로 나타나는 나쁜 상태로서의 저주, 셋째, 그런 상태가 가계를 타고 흘러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과 내지 영향력으로서의 저주, 넷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만들어 내는 힘으로서의 저주 등이다.

요약하면 어떤 사람이 남에게 저주의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힘이 되고 세력이 되어 가계를 타고 내려오면서 언젠가는 그 가문에 해악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저주든지, 마귀의 저주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든지 모두가 영적 힘, 세력이 되어 혈통 속에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그는 정말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성경은 이런 저주를 알지 못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웃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힘도 아니며 세력도 아니다. 그냥 말일 뿐이다. 욕설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저주를 듣고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실 때가 아니면 저주란 아무런 효력이 없다. 성경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저주란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이다. 축복이 하나님의 통치 행위인 것처럼 저주도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속한다.

축복이든 저주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직접적 행동이 아니라면 어느 것도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냥 흘러 다니는 저주는 없다.
그런데 이윤호는 하나님의 저주를 말하는 부분에서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 다루지 않고 하나님과 격리된 세력, 힘으로서의 저주를 말한다. 어떤 저주든지 위력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공중을 떠돌아다니다가, 가계를 돌아다니다가 때가 되면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미신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윤호는 이번 글에 “가계의 저주는 유전을 통해 대물림될 수 있다”는 제목을 붙여 단순히 가능성만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막상 본문은 “가계의 저주는 유전을 통해 대물림된다”는 확신을 알리는 것이다. 제목을 약화시킴으로 반감을 최소화하려 한 일종의 완화위장술이 아닐까? 그러나 제목이 보이는 ‘가능성’에서 본문이 말하는 ‘확신’으로 넘어가는데는 아무런 논리적 설명이 없다. 그렇다면 억지를 쓴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는 ‘신학적, 교회사적 변증’이란 제목을 사용하고 그 증거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 독자들이 직접 성경을 찾고 참고 문헌을 확인한다면 - 가계의 저주나 이 저주의 유전은 없는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우선 그가 말하는 성경적 증거들을 검토해 보자. 그가 지시하는 벧전 1:8은 ‘망령된 행실’이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증언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아마 벧전 1:18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이다.

이윤호는 이 구절 중 “유전한 망령된 행실”을 피/혈통을 타고 흘러 내려온다는 의미의 “유전(遺傳)하다”로 이해한 모양인데 헬라어 “파트로파라도투(patropara-dovtou)”는 그런 유전이 아니라 전수(傳授)하고 전수(傳受)하는 전승(傳承)을 뜻한다. 더군다나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이 이미 그런 “망령된 행실로부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미 구속함을 받았다”고 썼다.

그가 제시한 성경 구절들, 즉 창 1:27~28; 3:16~17; 5:3; 욥 14:4; 15:14; 시 51:5; 행 17:26; 롬 5:12,15~19; 고전 15:21~22은 가계를 통한 저주의 유전을 말하고 있지 않다. 독자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인용하여 본다. 이윤호는 아래의 구절이 그의 가계저주론을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창 1:27~28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복을 주시며 말씀하신 내용이다” 축복, 복의 혈통적 계승을 말하고 있지 않다. 창 3:16~17에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언하신 내용이다. 저주가 혈통을 타고 흐르게 하셨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이 있을 뿐이다. 이윤호가 말하는 식의 힘, 세력, 악한 영향력으로서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행위로서의 저주를 뜻한다.

창 5:3도 그의 주장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욥 14:4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겠느냐? 아무도 없다”이고, 욥 15:14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는 안타까운 질문일 뿐이다.

시편 51편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도 이윤호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이 처음부터 죄인의 상태로 태어났음을 말하는 것이지 그 원죄가 피를 통해 어머니나 조상에게서 유전되었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음”을 바울 사도가 지적한 말이다.

롬 5장 12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다. 이윤호는 12절과 15~19절이 그의 가계저주론을 지원하는 구절인 것처럼 적어 놓았다.

정말 바울 사도의 견해가 이윤호가 말하는 가계저주론 가계치유론이라면 이곳이야말로 그런 교리를 설명할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뒤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가 아니라 ‘그 죄와 사망이 피와 가계를 따라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을 법하지 않은가? 하지만 바울은 12절이나 그 이하의 구절에 전혀 그런 흔적을 남겨 놓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13절 이하에 아담과 모든 사람의 관계를 말한 다음에 오히려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의 관계를 이렇게 강조하며 말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이윤호는 이 구절들을 고의적으로 빠뜨려 놓았다).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도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표원리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바울 사도가 말하는 대표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이 구절들이 이윤호의 가계 저주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구약적 상태의 연속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새로운 상태, 신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저주, 가계의 저주, 가문의 혈통을 타고 흐르는 파괴 세력 등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주장할 수 있는 이 귀중한 기회에 이윤호는 어떤 성경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엉뚱한 구절들을 나열하며 이 구절들이 마치 자신의 주장을 지원하는 양 짜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제시하는 성경구절들은 그의 주장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쓴 글의 내용은 “성경이 가계저주론을 말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등이다. 어디에서 이런 억지를 부릴 용기가 난 것일까? 차라리 성경적, 기독교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가계의 저주나 저주에서의 치유를 말한다면 필자도 또 다른 기독교인도 이렇게 신랄하게 비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사적으로는 제대로 증명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윤호는 신앙고백서나 유명 신학자들의 글 중에서 가계를 타고 흘러내려간다는 말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그의 가계 저주론과 짜 맞추고 있을 뿐이다. 교회사적으로 증명하려면 그가 인용한 몇 개의 글을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다. 말만 거창하게 ‘교회사적 변증’이라고 했을 뿐 교회 역사를 논한다고 할 만한 아무런 주장도 증명도 없다.

축복과 저주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거룩한 통치 사역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축복이나 저주를 자동적인 세력으로 독립시켜 어떤 법칙에 따라 흘러 다니도록 하시지 않고 지금도 직접 세상을 통치하신다.

이 통치적 사역에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 참새 한 마리라도 그의 눈빛과 손길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저주는 없다! 가계의 저주란 미신적 개념을 성경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삶에서 덕담이나 욕설을 하듯이 축복과 저주를 말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인간의 희망 사항일 뿐, 실제로 작용하는 힘이 아니다. 법칙을 따라 피속을, 혈통과 가계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세력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축복이나 저주를 받아주시지 않는 한 그것은 공중을 울리는 음파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축복이나 저주를 받아주신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이윤호는 하나님 없이 자동으로 굴러다니는 저주와 악한 세력과 그 결과들을 신학화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엉성하게 …. 이윤호가 말하는 가계의 저주, 저주의 유전, 저주의 현실화 등은 없는 것이다.

 

교회와신앙의 다른기사 보기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건국 전쟁 이승만, 안창호와 드류
2023년 한국교회 핵심분쟁 유형
"이만희 신천지교에 대한 언론 보
개역과 영어 현대역은 뉴에이지 이
가나안 청년 성도 비율 23%,
예배설교학의 선구자 한일장신대 전
10개교단이대위, ‘한국교회이단대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6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