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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씨가 ‘야다’(ידע, yadah)를 ‘섹스 예배’로 보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전 씨 속의 잠재된 성의식으로부터 나온 결과이다(시리즈 6)
정성구, 장경동, 서요한, 김진홍, 김철홍, 최귀수, 심상효, 최태영, 유무한 등 그리고 황규학 씨 중에 누구라도 필자의 글에 반론할 수 있다.
2023년 05월 26일 (금) 10:03:28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최삼경 목사 / <빛과소금교회> 원로목사, 본지 편집인

   
▲ 최삼경 목사


서론: 위기의 한국교회를 살리려면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자정력(自淨力)을 높여야 한다.

한때 기독교의 위기를 부정하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대형교회 목사들이 그랬다. 그렇지만 이제 한국교회 위기에 대한 책임과 해결방법에 대한 견해는 달라도 위기 자체를 부정하는 목사는 아주 배부른 분들을 제하고 거의 없는 듯하다.

물론 교회에 대한 오해와 모함이 심각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 먼저 스스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자정력(自淨力)을 높이지 못하면 오해를 풀 수 없고, 모함을 이겨낼 수도 없다.

여기에 한국교회 스스로 전광훈 씨와 같은 자를 퇴출시켜야 할 이유가 있다. 이는 보수주의자들도 동일하다. 보수주의자들이 나서서 전광훈 씨를 스스로 퇴출시켜야 보수가 살아나고, 한국교회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를 퇴출시켜야 교회가 살아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못하면, 전 씨는 보수의 이름으로 보수를 죽이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죽이고 말 것이다. 요즘 전도를 하다 보면 ‘전광훈 씨를 보면 예수 믿고 싶지 않다. 어디 그게 목사냐?’고 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고 한다.

본 글에서는 전광훈 씨가 야다를 하나님과 섹스하는 것이라고 한 주장에 대한 신학적, 언어적, 윤리적 오류가 무엇인지 밝히겠다. 반복하지만 ‘야다’에 대한 전광훈 씨의 설교 핵심을 다시 게재하며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히브리어 ‘야다’(ידע, yadah)가 하나님이 사람하고 섹스하고 싶다는 말이야! 그것이 예배라는 말이야! 예배.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섹스가 안 이루어지는 거야! 할렐루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지막 지점은 뭐냐? 이불 속의 침상으로 들어가야 해! 거기가 끝이야! 끝! … 그리스도와 우리를 한 몸이라고 그래! 한 몸은 어떻게 한 몸이 돼요?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 한 몸이 되잖아!”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time_continue=61&v=lI1D-vSh-L4&embeds_euri=https%3A%2F%2Fwww.good-faith.net%2F&source_ve_path=Mjg2NjY&feature=emb_logo

 

본론: 전광훈 씨의 야다에 대한 언어적, 신학적, 윤리적 무지와 잘못이 무엇인가?
 

1 히브리어 야다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사실 히브리어인 야다에는 안다라는 대표적 의미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들이 있다. 따라서 전 씨처럼 ‘야다’를 성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로부터 왔지만, 그보다 전광훈 씨의 잘못된 성의식이 뒤에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야다’의 다양한 의미들부터 살펴보자.
 

첫째, ‘야다’는 성적관계를 의미한다.

   
▲ 전광훈 씨(너알아TV 캡쳐)

전 씨의 말처럼 “‘야다’가 성적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은 100% 틀린 말은 아니다. 구약성경에 야다라는 말이 무려 943회나 나오지만, 그중에 ‘성적 관계’를 뜻하는 것은 1/100 정도에 불과한 12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성관계를 지칭할 때 나오는 단어가 야다.

성경에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창세기 4장 1절이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에서, 동침하다(lay with)가 바로 ‘야다’다. ‘성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으로 ‘동침하다’​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좁게는 전 씨의 주장이 맞게 보인다. 그러나 ‘야다’에는 성적 관계 외에 더 중요한 의미도 있고, 더 다양한 다른 의미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야다’에는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간섭하다’는 의미도 있다.

야다는 머리가 아닌 마음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기울여 보살핀다’는 의미를 가진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다가,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인의 재산관리를 다 맡은 가정 총무가 되었다. 그만큼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하고 믿었다는 말이다. 창세기 39장 6절에 보면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다. 여기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이 바로 ‘야다’다. 즉 ‘마음을 써서 보살피는 의미의 간섭’을 의미한다.

시편 31장 7절에서,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에서 “내 영혼을 아셨으며”의 ‘아셨으며’가 또한 ‘야다’다. 굽어보거나 마음을 써서 알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야다는 ‘기술’과 ‘재주’의 의미도 있다.

왕상 7장 14절이다.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에서 여기 히람이란 사람이 “재능을 구비한 자”라고 하였는데 여기 재능이 야다. 때로 이것을 ‘기술’로 번역하기도 한다.

출애굽기 31장 3절이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에서, 여기 ‘재주’도 ‘야다’다.

넷째, ‘야다’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들이 있다.

야다 속에는 구별하다(삼상 19: 36, 욘 4:11, 사 7:15), 배워서 알다(잠 30:3), 관계 또는 관심(시 1:6, 시 37:18, 시 119:79), 친숙한 관계(출 33:17, 신 34:10), 심지어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 나아가 다른 신을 아는 것(신 13:3, 7, 14)과 ‘던지다’, ‘쏘다’, ‘칭찬하다’, ‘고백하다’는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다.

전광훈 씨처럼 이 모든 것들 중에 하나의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하고 적용하면 이상한 종교를 만들 수 있고, 이상한 행동도 합리화 되고 만다.

다섯째, ‘야다’의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의미는 ‘경험으로부터 오는 종합적인 인식’을 말한다.

‘야다’의 대표적 의미는 ‘안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의 헬라 철학적으로 하면 ‘머리 지식’을 의미하지만, 성경의 히브리어에서는 ‘경험을 통하여 아는 지식’을 말한다.

구약에서 처녀를 가리켜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할 때, 혹 어떤 여자가 남자와 생리적, 심리적 구조를 연구하여 박사가 되었다고 해도, 남자와 성적 체험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남자를 아는 여자가 아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었을 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고 말하는 의미가 바로 이 의미이다. 남자와 성관계를 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서에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호와인 줄 알리라’ 혹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라는 말씀이 에스겔에서만 무려 65회나 나오는데, 성경 전체에서 90회 나오는 것을 보면, 에스겔서가 이점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머리와 지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야다’의 진정한 지식이다.


* 필자가 처음 글을 쓰면서 "야다’에는 ‘찬송’ 또는 ‘찬양’의 의미도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 찬송과 찬양의 '야다'(ידה)와 위의 '알다'의 '야다'(ידע)는 한국말로는 같지만 히브리어로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필자의 실수임을 밝힙니다.

 

2. 비록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어에서 나온 단어라고 해도 언어학적 의미가 신학적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단어에 반대의 두 가지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로 신학적 의미를 찾기도 하지만, 어떤 단어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바른 신학적 입장으로 그 단어를 해석해야 올바른 견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 씨의 ‘야다’의 이해에는 전혀 그런 신학적 안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씨는 ‘야다’의 다른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간과하고, 더 중요한 핵심적 의미까지 뛰어넘어, 성적 의미 한 가지만 확대하고 그것을 예배와 연결시켜 ‘예배가 하나님과 섹스를 하는 것’이란 더러운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만 아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그것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이다. 전광훈 씨의 히브리어 실력이나 헬라어 실력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어디에서 ‘야다’가 성생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란 의미가 있음을 주워듣고, 그의 섹스론적 예배론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총신 교수를 했다는 서요한 교수가 원고도 없이 몇 시간씩 설교해대는 전광훈 씨가 그래서 훌륭하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그 점에 놀라는 서 교수가 더 놀랍다. 그래서 전 씨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런 문제의 엉터리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서요한 교수가 그것을 충고하고 비판할 수 있다면, 서 교수는 학문성 있는 교수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전 씨의 그 설교 자세는 주로 직통계시파나 이단들이 하는 짓거리다. 서요한 교수 편에서 다시 집중적으로 분석하겠다. 전 씨의 ‘야다’론은 윤리적으로도 문제지만 어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다 엉터리다.
 

3. ‘야다는 구약의 예배가 아니지만, 구약의 예배인 제사제도에는 성적 행위는 물론 성적 의미는 하나도 없다.

구약의 예배는 제사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후에 회당예배로 이어지고 그리고 오늘의 신약 예배가 되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에서도, 회당예배에서도 성적인 행위는 없고, 의미도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류 최초의 예배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 4:3-4)였다. 거기에 무슨 성적 요소가 있는가? 없다. 제사를 드릴 때는 성(性)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성적인 것과 더 멀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사의 특성은 거룩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지성소나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때 성적 요소를 가졌다고 할 아무런 행위도 근거도 없다.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고, 여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인 제사장 홀로 들어가 엄격한 계시에 의하여 제사를 드려야 한다. 전 씨가 예배를 하나님과의 섹스라고 하는 것은 성경 계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보겠다. 가끔 꿈에 예수님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여자 성도들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전광훈 씨의 위 견해로 한다면, 그 성도는 최고의 은혜를 받은 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보면, 그 여자 속에 깔린 성의식이 무의식의 거울인 꿈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보여, 부끄럽고 슬퍼해야 할 일이며, 오히려 회개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4. 전 씨처럼 야다를 성적으로 해석하면 결국 섹스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되고 만다.

구약에 ‘야다​’는 말이 무려 943회 나오고, 표면적 의미는 ‘지식’을 말하지만 그것은 곧 ‘믿음’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 성구 중 하나가 이사야 53장 11절이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여기 ‘나의 의로운 종’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뒤에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라는 말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의 의로운 종,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고 하였다. 문제는 본문에서 “자기 지식으로”라고 한 점이다. 자기 지식으로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말은 ‘지식으로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로 들리기 쉽다.

이 본문을 영지주의(靈智主義)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즉 본문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지식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믿음보다 지식을 높게 생각하고, 아는 것이 먼저이고,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우선이라고 하였다. 즉 “(믿음이 아닌) 지식, 즉 앎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야다’는 언어의 표면적 의미는 ‘지식’(knowledge)이지만 곧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광훈 씨는 ‘야다’를 섹스로 해석하고, 하나님과 오르가즘을 누려야 한다는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성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이 성구를 전광훈 식으로 하여 재해석하자면 “ ‘야다’ 즉 ‘섹스’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가 되고 만다. 그것이 이방종교이고, 아데미신이며, 바알신이다.
 

5. 비록 부부 사이에서 이루어진 지극히 정당한 성생활이라고 해도 그것을 자식들 앞이나 공개적으로 다 까발려 말할 수 없는 것이 성윤리다.

전광훈 씨가 불신자들도 있는 자리, 자기 스스로 전 세계에 예배를 중계하는 자리, 그리고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지 영어 동시통역까지 세워놓고 그렇게 더러운 설교를 서슴지 않고 한다는 것은 전 씨의 평소 성윤리가 그렇다는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 입에 붙은 욕들을 보면 더욱 확신을 가지게 한다.

깨끗한 음식을 절대로 더러운 그릇에 담을 수 없고, 담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깨끗하고 값진 음식이라도 더러운 그릇에 담는 순간에 먹을 수 없는 오물이 되고 만다. 전 씨가 기분 내키는 대로 쏟아 놓는 그 즉흥 설교에 귀하고 값진 진리가 들어 있을 수 없다. 즉흥적으로 떠들다 보니 횡설수설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혹 값진 진리가 있다고 하여도, 상식이 있는 목사라면 그것을 더러운 욕설과 정액 냄새 펄펄 넘치는 더러운 그릇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부부의 성생활은 합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다 자식 앞에서나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법이다. 성은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요, 선물이다. 그래서 성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교육해야 할 자리도 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교육을 시킬 수 있다. 그럴 때와 전광훈 씨가 광화문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설교와는 다르다. 전 씨의 자세는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하지 못하는 화인 맞은 양심으로부터 나온 오물에 불과하다.

전광훈 씨는 그래서 면직 목사요, 성추행범이요, 상습적 이단 옹호자인 황규학 씨와 코드가 잘 맞는 것으로 이해가 되고, ‘목사가 욕을 해도 된다는 정성구 교수와도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이며, 더러운 입을 가지기로는 못지않은 김철홍 교수(광나루 장신대 교수)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역시 유유상종이란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전 씨가 그런 사람이다. 전 씨가 성경 원어를 얼마나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야다’의 다른 다양한 의미들은 제치고, 가장 중요한 의미는 말도 하지 않고, 한 가지 의미 즉 성적 의미만 말하여 추잡한 성적 설교를 공개적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천박하고 비천한 것으로 만들고, 한국 교회와 목사의 이미지를 땅에 떨어트리는 것을 보면 전 씨는 이 한 가지 외에 다른 것은 모르는 모양이다.

전 씨는 아무에게나(기자회견 당시에도)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공부하라’ ‘알아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그 자신이 먼저 열심히 공부하고 책도 보고, 겸손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 광화문 집회를 가능한 빨리 치워야 할 것이다.

이어 다음에는 시리즈 7번째 글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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