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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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설교 3편
2023 부활절 설교 도움 자료
2023년 04월 04일 (화) 11:38:32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2023년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목회자에게 언제나 설교를 준비합니다. 부활절 설교 준비를 위해 도움되는 자료와 설교 예시 3편을 제공합니다. 10여 년 전에 <교회와신앙>에서 제공했던 것 중에서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설교 준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편집자 주>

 

2023 부활절 설교 3편과 도움 자료
 

㉠ 부활절

   
 

교회력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부활절은 교회의 출발과 관계가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그분을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나타나시는 부활 경험을 통해 다시 제자 공동체가 모였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계속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매 주일이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은 주께서 모든 죽음과 악의 권세를 깨뜨리고 생명으로 나오신 날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부활절은 특히 온 피조물에게 구원의 소망을 여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활 신앙은 교리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다시 사셔서 함께하셨다는 고백이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도 예수신앙으로 새롭게 생명을 되찾는 경험을 해야 할 문제다. 부활의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 주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구원의 품안에서 기뻐하며 생명을 살찌워야 한다. 이 살찐 생명을 가지고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며 살림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곧 부활 생명이다.
 

㉡ 부활절 예배 자료

1. 부활절의 명칭

부활절을 이르는 영어 ‘Easter’는 고대 이교도의 봄과 새벽의 여신인 ‘Eastre’에서 왔다 한다. 부활절의 원래의 이름은 히브리어 ‘파스카’다. 이 말은 유월절(Passover)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절을 ‘파스카’라 일컬음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월절이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절은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 생명, 승리, 새 희망 등 많은 것을 부각시킨다. 부활절의 색깔이 흰색인 것은 그것이 축하, 기쁨, 축제, 승리 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부활절 예배도 이 같은 정서가 잘 반영되도록 마련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2. 부활주일 예배의 주요 사항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주일 예배를 부활주일 직전 토요일 밤에 철야예배로 시작하였다. 이 예배의 주요 내용을 보면, 먼저 성서 낭독으로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 및 복음서 중의 고난 설화를 읽었다. 이어서 세례, 견신례, 성찬예식 등의 순서가 들어 있었다.

오늘날 개신교의 부활절 예배에서도 부활절 설교를 위한 본문으로 부활과 관련된 구약과 서신서, 복음서 중의 몇 구절을 택하며 성례전 역시 중세기의 부활 주일 예배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활주일 예배를 위한 몇가지 주요 사항을 적어본다.
 

(1) 부활절 예배음악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주일에 베토벤의 장엄미사곡(Missa solemnis,op.123, 1818-1822)이 연주되고 개신교에서는 수많은 부활절 찬송가, 부활절 칸타타 등이 불리어진다. 개신교가 중세로부터 이어 받아 부르는 부활절 찬송가는 ‘싸움은 모두 끝나고’(156장), ‘즐겁도다 이 날’(157장), ‘할렐루야 할렐루야’(160장) 등이다. 바하(J.S. Bach, 1685-1750)는 부활절 예배송으로 칸타타 제 4번 ‘주 예수 우리 죄인 위해’와 제 6번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날이 이미 저물었나이다’ 등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헨델(G.F. Handel, 1685-1759)은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때 그 절기에 해당되는 곡이 불리어진다. 특히, 합창 ‘할렐루야’는 가장 많이 애창되고 있다.

최근 개신교에서는 부활절을 위한 많은 찬송곡과 칸타타가 작곡되었다. 특히 한국인의 정서에 맞도록 작곡된 한국적 부활노래도 있다. 예를 들면, 나영수 작곡 ‘얼싸좋다 할렐루야’ 등이다. 이처럼 부활절 예배 음악은 교회전래적인 곡과 최근의 곡을 취사선택하여 적절히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한다.
 

(2) 부활절 및 설교 본문

a. 행 10:34-43, 골 3:1-11, 요 20:1-9
b. 사 25:6-9, 벧전 1:3-9, 막 16:1-8
c. 출 15:1-11, 고전 15:20-26, 눅 24:13-35
d, 출 14:15-31, 계 1:10-18, 눅 23:50-24:12
e, 욥 19:23-27, 고전 15:1-11, 막 15:42-16:8
f, 출 15:13-21, 거전 15:20-28, 요 20:1-10

 

(3) 부활절 예배에서의 부름 성구

<예1> 목사: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었다.

회중: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성가대: 아멘, 아멘, 아멘
목사: 오라, 우리 다 같이 사망을 이기신 우리 주님께 예배하자.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느니라.
회중: 우리에게는 다른 주가 없사옵고 당신만이 우리의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다같이 당신이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성가대: 아멘, 아멘, 아멘

<예2> 인도: 할렐루야, 우리 주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었다.

회중: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성가대: 할렐루야 할렐루야
인도: 우리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무덤에서 나오셨다.
회중: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하신 주님 안에만 있습니다.
성가대: 할렐루야 할렐루야

 

㉢ 부활절 교육활동 자료

1. 부활절 촛불 밝히기

중세기에는 신도들이 부활주일 전날(토요일) 저녁에 양초를 교회로 가지고 와서 이곳저곳에 불을 밝혔다.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같은 도시에서는 심지어 거대한 양초 원기둥을 거리마다 세워 불을 당기고 온 도시를 환히 밝혔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새로운 빛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절 철야예배 때 특수 제작된 커다란 양초를 켜고 예배를 드렸다. 오늘날 부활절 촛불은 부활절 전야에서부터 예수승천주일까지 사용되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어떤 형식으로든 부활절 촛불을 교회의 제단 같은 일정지역에 밝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부활절 아침 해맞이

고대의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부활주일 아침의 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춤을 출 뿐만 아니라 해가 뜨는 순간 즐겁게 껑충 뛰어오른다 한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은 부활의 기쁨을 춤추는 천사들이라 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부활주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맞기 위하여 넓은 평원이나 언덕 꼭대기로 달려갔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동이 뜨는 순간 기도와 찬송, 축포 터뜨리기, 타종 등 일련의 경축순서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 이 옛 풍습으로부터 미국의 여러 지방에서 부활주일 아침에 지켜지는 일출맞이 예배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는 수십 년 동안 이 부활주일 아침 해맞이를 부활절 아침 교파연합예배로 대치시켜 지켜오고 있다. 남산과 여의도 광장에서의 개신교 부활절 연합예배도 사실상 미국의 부활절 일출예배에서 근거되었다. 연합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교회에서는 해맞이의 의미를 살려 교회별로 신도들이 함께 부활주일 새벽에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부활의 기쁨을 대자연 속에서 노래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3. 부활절 달걀

옛날에는 달걀이 봄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봄 절기에 서양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달걀을 선물로 주고받았다. 오늘날 부활절 달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시어 새로운 생명을 얻으신 그 바위 무덤을 상징한다. 교인들은 발고 아름다운 색깔로 달걀을 채색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다. 어린이들에게는 부활절 대예배 시간에 이 부활절 달걀과 캔디를 여러 가지 색깔로 장식한 봉지에 싸러 선물로 주면서 목사가 머리에 손을 얹어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을 받아라”하고 선언하는 것도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활절 달걀 굴리기 등 다양한 달걀놀이로 부활절을 즐긴다.

4. 부활절 백합

성서를 보면 백합은 아름다움과 완전한 선을 상징하는 꽃으로 묘사되고 있다(사 35:1, 아2:1-2, 마 6:28, 눅 12:27 등). 미국에서는 백합이 부활절의 상징이다. 이 꽃은 1882년 일본으로부터 버뮤다로 전래되었는데 부활절 즈음에 꽃이 피기 때문에 부활절 백합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국교회에서도 부활절에 백합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발전시킨 프로그램으로 교회에서는 고인이 된 교우들의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교인들이 조상이나 일가 친척의 이름을 적어 붙인 백합 한송이씩을 교회에 가져와 제단 근처의 화병에 넣어 봉헌할 수도 있다.

5. 부활절 장식

그리스도인들은 중요한 절기마다 교회당을 아름답고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도록 장식해 왔다. 부활절에는 흰빛을 중심으로 갖가지 장식을 할 수 있다. 우선 앞서 지적했듯이 백합을 이용해 제단과 강단 주변을 장식한다. 강단 뒷벽에 대형 십자가가 부착된 교회에서는 이 십자가에 하얀 천을 운치 있게 걸친다든지 그 천을 십자가로부터 교회당 양쪽 뒤끝 천장 근처까지 늘어뜨린다든지 할 수 있다.

6. 부활절 이웃돕기

예수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불우한 이웃과 나누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만큼 중요하다. 고아원, 양로원, 소년소녀 가장의 집, 장애자수용서 등을 부활주일 오후쯤 방문하여 달걀, 꽃, 호분, 캔디 등을 선물하고 일상용품이나 금품을 전달한다면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7. 부활절 신앙특강

교회 각 그룹이 주최하여 부활주일 오후나 부활절 기간의 수요일에 신앙강좌를 연다면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현대인과 부활신앙’ 같은 주제를 다루어 예수부활의 의미를 보다 심원하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추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① 설교 제목: 부활의 새생명

본문: 마태복음 28:5-10, 로마서 8:3-5

1. 부활에 관한 환상과 증언

1)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들려간다. 살아있는 것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음은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체에 부여한 하나의 운명이라 할 수도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죽지 않을 수 있는 생명을 받은 것으로 창세기는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 2장 16절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 나무열매 만은 따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또 창세기 3장 2-3절에는, 하와가 그녀를 유혹하는 뱀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만 따 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영생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두 인간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향하여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은 몸을 죽을 것으로 운명지으셨다.

그때부터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꿈과 환상이나 희망으로만 가능하였다. 동양에서는 신선 같은 허구적 존재를 창안하여 영생을 꿈꾸었고, 서양에서는 희랍신화를 만들어 냄으로 영생을 그리는 인간의 희망을 투사하였다. 구약성서를 보면 의롭고 죄가 없었던 오직 두 사람, 에녹과 엘리야만이 살아있는 채로 하늘로 들리워 올라간 인물이다.

2) 본래 영생이란 죽음을 겪지 아니하는 상태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은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의 여생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의 새로운 생명일 수밖에 없다. 성서적으로 말해서, 죽었다가 다시 산 몸은 죄값을 치른 몸이니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부활은 가능한 것인가? 부활한 그 몸은 어떤 몸인가?

구약성서에서는 몇 군데 부활에 대한 환상을 그린 구절들이 있다. 에스겔서 37:1-10을 보면,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에스겔은 그빌강가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비한 환상 중에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로 소망에 찬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들판 한 가운데로 간 에스겔은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마른 해골들이 겹겹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 마른 뼈들에게 말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가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마른 해골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두 살아나 굉징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12:1-3을 보면, 다니엘도 하나님의 묵시를 받는 중에,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살리신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 등의 부활을 말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예수 자신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1) 오늘 이 두 곳 본문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찬 어조로 증언하고 있다. 갈보리산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예수는 옆구리에 로마 병정이 찌른 창을 받고 두 손, 두 발에 못박힘을 받아 피가 다 쏟아지고, 결국 더 나올 것이 없어 물이 나올 절도가 되어 완전히 죽으셨다. 통상관례에 따르면 십자가에 죽은 죄수들은 최후로 다리를 꺾어 버림으로 죽음을 확인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창으로 찔러 보고 나서 완전사망으로 판정되어 다리꺾기는 포기되었다. 그 분은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돌로 무덤 입구를 봉한 채, 군인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제 3일에 죽으셨던 예수가 부활하셨다.

마태복음 본문은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으며,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나시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 말한다. 이 여인들은 예수 부활의 뉴스만 들은 것이 아니라, 무덤 현장에서 다시 사실 예수를 직접 만나 뵈었다. 예수가 부활하시어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되어 버렸고, 부활의 그리스도는 여인들 뿐 아니라, 나중에는 베드로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리고 열한 제자 모두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갈릴리 해변에서는 제자들이 잡아 온 물고기를 구어 나누어 잡수시기까지 했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로마서 본문에 의하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로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한다. 즉 그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2) 예수의 부활은 의식만 없는 가사상태에서의 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집단 최면에 걸려, 환상 중에 예수가 다시 사신 것으로 착각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희랍신화와 같은 허구도 아니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오직 신앙으로만 존재하는 사건일 수 없다. 성서는 그가 정말 죽었던 그 몸을 다시 일으켜 살아나셨다고 선포한다. 이 증언은 3년 동안이나 예수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그의 제자들과 그를 시중들면서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던 몇몇 여인들의 생생한 경험의 보고였다.

다시 사신 예수의 몸은, 죽기 전의 썩어질 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담은 변호된 몸이었다. 그 몸은 영원히 사는 몸이요 승천할 수 있는 몸이며, 하나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역사상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의 부활의 새생명은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나 회당장의 딸의 생명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시 살아났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죽어 썩을 몸으로 돌아올 것이지만, 예수는 영원히 사는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직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새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비밀의 사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건이다.
 

3. 부활의 의미

1) 기독교는 죄 없는 고난을 당하여 처형된 한 의인을 추모하는 무리들이, 자의로 모여 만든 종교가 아니다. 예수의 삶고 교훈들을 기억하고 엮어서, 다른 사람들과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교육적 목적에서 발생된 종교일 수도 없다. 기독교가 성립된 근본적 동기 두 가지는 부활의 체험과 오순절의 성령강림이다. 부활사건에서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밝혀졌고, 성령의 강림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신화적인 자연발생적인, 혹은 인위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신 사건임이 드러났다. 기독교는 이 하나님의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

2) 부활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모든 죄와 위선과 자기 합리화를 깨뜨리시고 일으키시는 진실의 들어냄이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들어나는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은 생명의 복귀임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죄와 악, 거짓을 폭로하고 척결하는 두려운 심판도 된다. 집권자의 권력도, 성직자의 권위도, 민중의 무분별한 신념과 행동도 모두 심판받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만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3)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결코 사랑 때문에 정의를 희생시키시지 않으신다는 표식이 곧 부활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참아주실지 모르나 선과 악을 동시에 눈감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의 부활은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의 횡포와 지배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결의의 표식이다. 진실과 사랑과 의로움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진리의 들어냄이다. 진실과 사랑과 정의와 용서가 거짓과 미음과 불의와 복수보다 강하다는 확증인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중 첫 열매로서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셨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아니 이미 얻었다. 부활의 새 생명은 지금 바로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우리는 부활의 힘 속에서 어두음과 거짓과 두려음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 교회절기 프로그램,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4, pp. 41-56

 

② 설교 제목: 우리의 일상 속에 오시는 부활의 주님

성구: 마태복음 28:19-20

설교자: 유진 피터슨

1.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도 고기잡이를 떠났다(?)

우리에겐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한 형식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나눠주고 먹는 것을 실천하는 기독교 생활방식 전통이 남아 있다. 형태와 내용을 많이 부분 성경에서 따온 이 전통은 성찬예식에 명백히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전 세계의 부엌과 장작불 둘레에서 배고픔에 의해서 든 습관에 의해서든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식사 때 표현되고 재현된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제자들 가운데 일곱 명과 함께 잡수신다. 이 설정에는 강조점이 있으며 주목할 만하다. 이 일곱 제자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두 번씩이나 주일날 연이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인 갈릴리에 돌아와 있다.

마태에 의하면 그 이전에 그들은 사도적 임무를 부여받았다. “가서 제사를 삼아 ... 세례를 주고 ... 가르쳐”(마 28:19-20). 그리고 지금 원래의 11명 가운데 7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 그들의 옛 어업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주 최근에 예수님께 들었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보내고 있다. 왜? 왜 그들은 그렇게도 빨리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바뀌어 버렸는가? 왜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아덴으로 가는 최상의 방법을 연구하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는가? 왜 그들은 기운이 절로 나서 당장 가려고 안달하거나 열심을 내지 않는가? 왜 갈릴리에서 꾸물대고 있는가?

본문에 분명한 해담이 없는 데 대해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위험을 무릎 쓰고자 한다. 나는 나와 함께 수년 동안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의 고기잡이를 떠나는 거소가 같은 유사한 상황에서 왜 손을 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안다고 어느 정도 자부하고 싶다.
 

2. 이생에서의 부활이 주는 현실 충격이 컸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하던 날 밤에 그의 친구들을 끌어 모았다. 그와 그의 동료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충격에서 - 내 생각엔 주로 부활이 준 충격에서 -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다른 이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참으로 참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이요 친구가 조롱받으며 고통에 찬 고문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의 죽음이 준 충격을 약화시키거나 감소시켜 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죽음은 사물의 자연 질서 속에서 일어났다. 그들 모두는 이전에 십자가 처형을 목격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팔레스틴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개적인 십자가 처형이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로마식 사형 방법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적을 제고하는 것뿐 아니라 소동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로마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 처형법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참혹했다.

그러나 부활은 이와는 다른 무엇이었다.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이 이전에는 무엇을 상상하거나 믿었든지 간에, 부활 사건은 당시 그들이 겪고 있었던 일에 대해 그들을 전혀 준비시켜 주지 못했다. 당신이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은 내세와 관계된 것이어야만 한다. 즉 그것은 당신이 죽고 장사지낸 후에 일어나는 일이며 당신을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들이자 참여자들은 분명 천국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랐던 동일한 옛 땅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고 그들 무리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잡수시는 것을 목격했던 것은 여기 이 익숙한 곳, 이 익숙한 친구들의 무리 가운데서였다. 부활에 대한 평생의 가정 - 부활에 대한 전 유대세계의 사상과 논의 - 에 갑자기 균열이 일어났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의 반응을 열거해 줄 말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기이히 여김, 놀람, 경악 등 수세기 동안 그들의 이스라엘 선조들이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이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켜주지 못했다.

그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현실감을 지금 이곳에서의 부활에 즉응시킬 수 없었다. 지금의 부활은 그들에게 결코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 이생에서의 부활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현재적 부활은 너무나 거대한 개념이어서 세상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들의 사고력으로는 그 사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상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3. 물고기 잡는 현실에 뛰어든 ‘부활의 예수’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그들이 고기잡이로 돌아간 이유이다. 그들은 날마다의 현실을 자신들이 성장했던 지역, 그들이 익숙한 일, 바다와 고기잡이 배, 물고기와 그물들을 좀더 강하게 부여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또는 아마도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능한 다름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그들 삶의 작업환경에서 이 새로운 부활의 계시를 드러낼 필요를 느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형되셨고, 다시 정의되었다. 또한 부활은 그와 똑같이 그들 자신 역시 새롭게 변형시켰고 다시 정의를 내리게 했다.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부활에 대한 익숙한 개념은 지금 완전히 ‘생존세계’(시116:9)로서의 삶의 개념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특별한 사건을 그들의 평범한 삶 곳으로 흡수하기 위해,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의 옛 작업장에서 옛 일상으로 뛰어든다. 나는 이것이 매우 주의 깊게 계획된 일, 즉 우리가 때로 ‘영적훈련’이라 부르는 종류의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몸담게 된 새로운 현실에 대처하는 본능적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나타나 있듯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고기잡이 자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물고기를 잡던 밤은 ‘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평범한 노동의 삶의 세세한 모든 것에까지 미치며 그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방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해가 떠오를 무렵 아침, 예수님은 해변에 서 계신다. 해변에서 축구장 길이 정도로 100야드 쯤 떨어져 있던 일곱 제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나서 어땠는지 물어보시며 그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했음을 듣는다. 그는 그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이르신다. 그들이 그물을 던지자 그 물은 물고기로 가득 찬다.

일곱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왜 그들은 모두 즉시 알아보지 못했는가? 요한은 해변에서 100야드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 열성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맞으러 헤엄쳐감으로써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을 요란하게 드러내면서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들은 왜 자신들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알아보는 데 그렇게도 시간이 걸렸는가? 사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첫 번째 부활 만남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각각 다른 때 두 번씩이나 예수님을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누가 역시 부활식사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말해준다(눅 24장). 따라서 여기 갈릴리 이야기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사실상 이는 매우 극적인 만남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그들 가운데에 살아계신 것이다. 왜 그들 모두는 이것을 즉시 알아채지 못했는가?
 

4. 일상에서 만난 부활의 예수에 대한 감동

우리가 이 질문에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다면 최소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에는 우리의 시력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강제로 되거나 교묘히 이루어질 수 없다. 자원함과 관련된 무엇이다. 갈릴리 해변에서의 부활 출현은 압도적이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과 고백이 강요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 현현을 통해 예배나 제자도를 강요하지 않았다. 에밀리 티킨슨은 그녀의 글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진리의 눈부심은 서서히 나타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눈이 멀고 말 것이다.”

다행이도 나는 상상력을 존중하고 북돋워주는 설교 문화 속에서 자랐다. 우리 교회의 목사님들은 모두 많이 교육받은 분들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특별한 것이 없는 우리들 공동체 속에서 어떤 것이든지 택해서 성경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에, 우리는 갑자기 그 성경 이야기들이 몹시 그리고 영원토록 의미심장한 것으로 깨닫곤 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다윗과 바울의 이야기들 그리고 가장 멋진 예수님 이야기들과 그들의 삶들은 당시 내 삶의 구조 속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부활절은 제외다. 이해할 수 없게도 부활절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아무런 상상도 없었다. 그것들 대신 논증들, 증거들, 논리, 근거자료가 있었다. 우리는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논증법을 조목조목 정확하게 훈련받음으로써, 부활의 정체를 드러내줄 어떤 문제들도 다룰 수 있도록 삼단논법으로 무장되었다.

4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부활 이야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고 그냥 우리들로 하여금 직접 부활의 삶에 참여하고 실천하도록 초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의 마지막 부활 이야기는 그의 전임자들이 썼던 복음서의 일부이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요한과 그의 여섯 동료들은 예수님과 함께 해변의 아침식사에 참여하여 음식을 받고 예수님과 관계를 가질 때 믿었다.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나는 이 부활 아침식사가 우리들이 ‘워킹밀(working meal-업무 중 식사)’이라 부르는 것이었음이 흥미롭다. 그것은 극적 효과를 주기 위해 특별히 준비되고 식탁에 올려진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신의 첫 부활식사를 기억에 남겨질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잘 연습된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해변에서의 배경음악도 살리고 그의 갈릴리 여 제자들을 한데 모르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고된 작업으로 긴 밤을 새고 난 자연스러운 아침 노동의 일부였다. 일곱 명의 어부가 작업복을 입은 채 해변에 모였을 때, 그들은 몹시 시장하던 터라 불가에 구워지고 있는 생선과 아직도 따뜻한 빵을 보며 감사히 여겼으리란 것을 확신할 수 있다.
 

5. 일상의 식사 가운데 담긴 임재의 메시지

기도와 반성과 휴식을 위해 날마다의 삶에서 뒤로 물러설 수 있는 장소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예수님 역시 이것을 행하는 본을 보이신다(막 1:350. 하지만 이러한 물러남의 훈련들이 유익하고 심지어는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일곱 제자들과 가진 식사는 평범한 식사가 영성 형성을 위한 부활의 영성을 위한 어떤 것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 때마다 “소금 좀 건네주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손을 뻗어 양배추를 가져다 먹을 때마다 우리는 부활의 영성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의 주일 예배는 중요하다. 우리가 참석하는 성경연구도 중요하다. 물러남의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일생에 걸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식사 가운데 임재하는 것은 - 비록 인식하지 못할 때조차도 -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훨씬 더 견고히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공동 식사는 기본적인 것이며, 그 기본적 방법에 의해 우리는 음식에 대한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며 대화와 친밀함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필요와 전통을 계승하고 가지 - 철학자 앨버트 보르그만이 ‘식탁문화’라 부르는 것 - 를 전달하는 문화적 필요를 채운다. 식사 - 준비, 차림, 먹기, 치우기 -는 언제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장 단순한 삶의 구성요소로 구성된 일련의 복잡한 작은 현실들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포괄적이고(누구든지 식사자리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식사는 사실상 우리가 인간 존재로서 행하는 모든 것에 관련된 것들 -주고 받음,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지는 것, 후히 줌과 관대함 -을 끊임없이 공급해 준다.

우리 삶 사운데서 식사가 갖는 거듭되는 탁월성은 우리가 서있는 가족체계 및 전통과 연결되도록, 개인적으로 친구와 손님이 될 수 있도록 굶주린 사람들과 도덕적 관계를 맺도록 해준다. 아마도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가 우리들을 예수님이 일곱 제자들을 갈릴리 해변에서 그와 함께 부활의 아침식사를 하도록 초청하신 그 상황에 계속되는 변화에 참여자들이 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또는 거룩한 친교 또는 주의 식탁)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이 부활 현현과 우리의 고된 일과에 새겨진 부활, 이 모두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기독교 관례에는 매일의 식사를 일종의 작은 성례로 여기는 견고한 정통이 있다. 매일의 식사는 성만찬에서 유래되며 또한 성찬의 식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임재해 계시는 우리의 부엌 식탁에서 매일 먹고 마심으로 확대된다.

생각해보라. 부활로 갖춰진 형식의 모든 요소들은 우리가 식사를 위해 앉아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때마다 존재한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바로 그때처럼, 우리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축복하고 차리며 먹을 때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 유진 피터슨, 월간 <목회와 신학> 2003년 4월호, p.112-117

 

③ 설교 제목: 부활절의 기쁨

성구: 고린도전서 15:20

설교자: T. 드위트 탤미지

이 영광스런 부활절 아침, 음악과 꽃에 둘러싸여서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중히 인사드립니다. 축하합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오늘은 꽃들이 모두 한 목소리, 같은 어조로 합창하고 있습니다. 몸을 구부려 백합에게 귀를 기울여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군요.

“들판에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오, 여러분들 중 몇 분은 그것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습니까? 부활, 부활을 말입니다!

6년 전 부활절 전날이었습니다. 저는 부활절 카드를 하나 받았는데, 카드에는 그 아름다운 능소화(여름에 넓은 깔대기 모양의 황적색 꽃이 피며, 관상용으로 가꾼다-역자 주)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나팔 소리 울려 퍼지고 죽은 자가 일어서리라” 그때에는 그 카드를 내가 받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고, 오늘은 똑같은 위로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드립니다. 누가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죽음에서 일어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성도들이여, 오늘 아침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봅니다. 오늘의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부활 추수의 첫 번째 다발입니다.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오늘 아침이 다 지나가기 전에 저는 죽은 자의 모든 공동묘지로 걸어가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묻혀 있는 전국 방방곡곡의 묘지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 이 꽃들을 뽑아 모든 무덤 위에 희망의 장미요, 기쁨의 백합인 복음의 향기로운 약속을 뿌릴 것입니다. 아이들의 무덤, 남편의 무덤, 아내의 무덤, 아버지의 무덤, 어머니의 무덤 위에 뿌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있는 바로 이 시간에 우리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세상의 위대한 정복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알렉산더, 시저, 필립포스 2세, 나폴레옹 1세라고 말할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그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정복자들보다 더 위대한 정복자를 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는 검은 말을 타고 워터루와 아틀랜타와 살롱을 가로질렀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을 짓밟은, 피묻은 발굽입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정복자입니다.

그는 검은 깃발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는 포로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는 지구의 반구를 가로지르는 도랑을 파서는 인류의 시체로 메웁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새 세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지구상의 사람들이 전멸될 뻔한 적인 50차례나 있었습니다. 50차례나 이 세상은 생명체가 없이 공중에 있었을 뻔했습니다. 산에도 사람이 없고 바다에도 사람이 없고, 끝없는 공간 속으로 나아가는 폐기된 배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세대들에게 자기의 일을 몇 차례고 반복했습니다. 그는 정복자일 뿐 아니라 군주입니다. 그의 궁전은 무덤이며, 그의 샘은 세상의 눈물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사, 이 부활절 아침을 통하여 죽음의 무덤이 무너지고, 죽음의 왕궁이 파괴되는 모습을 봅니다. 죽음의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날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일어섰기에 우리도 일어설 것입니다. 예수는 “잠자는 자의 첫 열매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교리는 헤라일 수 없는 신비들로 싸여 있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기적의 하나님에게는 문제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이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의 몸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면,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떤지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에게 수천 가지의 질문을 하고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고 있지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난 믿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힘을 찾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나리라”저는 설명할 수 있는 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바뀐다. 그러니까 70세 먹은 사람은 몸이 10가지 있었던 것이다. 부활할 때에는 어느 몸이 나타날까?” 여러분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한 줌 먼지가 되고, 그 먼지는 식물에 흡수되며, 동물은 식물을 먹고, 사람은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 그렇게 많은 방향으로 흩어져 보린 몸이 부활할 때에는 어떻게 모일 것인가?” 여러분에게 이런 식의 질문이 더 있습니까? 자, 이리 와서 물어보십시오. 저는 대답하는 체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에 의지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나리라”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부활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설명마다 그날에는 커다란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매우 클지, 작을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매우 날카로운 소리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소리는 수천년간 침묵이 지배했을 그 장려한 무덤 속이라도 뚫고 지나갈 것입니다. 수백만의 영들이 영원의 문을 거쳐 땅 위에 있는 무덤에 와서는 울부짖을 것입니다.

“우리 몸을 돌려다오, 우린 그것을 부패한 상태로 너에게 주었으니 이제 부패한 상태로 넘겨다오” 수백의 영들이 게티스버그의 바위 주변을 떠다닐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몸이 뭍혔기 때문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그린우드로 올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몸이 묻혔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재결합되기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뉴욕에서 리버플까지 해로를 따라 증기선들이 침몰한 자리마다 떠났던 영들이 다시 돌아와 파도 위를 떠다니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스톤시호가 사라졌습니다. 거기에서 프레지던트호가 사라졌습니다. 떠도는 영들, 수백의 떠도는 영들이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립니다.

누가 그 장면을 묘사할 수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 일이 있기 바로 전에 완전한 정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는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 혹은 묘지를 지나가고 있는 덜그덕거리는 발굽소리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땅 위의 모든 동굴 속에도 적막이, 산비탈 위에도 적막이, 골짜기와 깊은 바다 속도 모두 적막합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대천사의 나팔소리가 산과 바다를 가로질러 종소리를 울리며, 바퀴를 굴리며 요란하게 달려옵니다. 대지는 공포에 떨 것이며, 죽은 자들의 무덤이 파도치듯 요동할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는 위로 떠올라 젖은 머리털을 큰 파도 위로 들어 올릴 것입니다. 모든 땅과 모든 바다느 한 덩어리 생명체가 되어 움직이게 됩니다. 모든 얼굴, 모든 세대, 모든 상태가 한 방향을 응시하고 한 왕좌, 즉 부활의 옥좌를 쳐다봅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나리라”

여러분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부활의 아침에 예상한 대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그의 사람들 모두가 부활한다는 약속이요 예언이라면, 당신은 우리에게 부활한 몸에 대해서 말해 주시겠습니까?”

네,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신비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활한 몸에 관해 말할 서너 가지 것들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며, 틀림없는 것입니다.

1. 부활한 몸, 영광의 몸

우선 첫째로, 저는 여러분의 부활한 몸에 관해서 얘기할까 합니다. 그 몸은 영광스런 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육체는, 죄가 손상시키고 망가뜨리지 않았더라면 유지되었을 그 몸의 뼈대에 불과합니다.

조각가가 만든 가장 멋있는 동상을 가져다가 정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쪼고, 여기저기를 두들기고 때린 다음에 수백년 동안 비바람 속에 세워놓는다면 그 본래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자, 인간의 육체는 수천년 동안 비바람 속에서 쪼아지고, 두들겨지고, 때려졌으며, 손상되었습니다. 다른 세대들의 육체적 결함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에 육체는 원래의 형상대로 장식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육체와 부활된 몸의 형태에서 보이는 차이는 운동선수와 나환자 병원의 바싹 마른 비참한 사람의 차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사망의 물이 고통과 노력의 얼룩을 씻어낸 후에 완전한 눈을 볼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수고한 일들의 매듭이 손가락 관절로부터 풀어진 후에 완전한 손을 볼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어깨로부터 짐을 던 후에 똑바르고 부드러운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는 몸입니다.
 

2. 부활한 몸, 불멸의 몸

그러나 저는 또한 그 몸에 관해 얘기할까 합니다. 그 몸은 부활할 때에 얻을 몸이며, 불멸의 육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들은 야위고 쇠약해집니다. 우리가 삶을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죽기를 시작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로에 땔감을 계속해서 공급해 주지 않는 한 화로는 꺼질 것입니다. 혈관은 빵가루를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 날라다 주는 수로입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병과 죽음은 언제나 육체라는 셋집 안에서 먹이를 얻으려고 애쓰거나 우리를 무덤의 제방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우리는 부활할 때에 불멸의 육체를 얻을 것입니다. 대기 중에는 말라리아도 없고, 감기도 없고, 신경통도 없고, 앰뷸런스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건강, 그것도 불멸의 건강이 있습니다.
 

3. 부활한 몸, 강한 몸

더 나아가서, 부활할 때에 여러분이 얻게 되는 몸에 관해서 말하겠습니다. 그 몸은 강한 몸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8마일이나 10마일을 걸었습니다. 지쳤습니다. 우리가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은 몇 백 파운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기운이 빠집니다. 무장도 안한 채로 야수를 만나면, 우리는 뛰거나 줄행랑을 치거나 기어올라가거나 몸을 피하거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야수와 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8시간이나 10시간은 정력적으로 일합니다. 그리고 나면 녹초가 됩니다. 그러나 부활한 우리는 결코 지치지 않는 육체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부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조난을 당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아 있는 배 조각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조각 위에서 버티었지만, 아들은 얼마 있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탈진된 상태로 파도에 떠밀려 해안에 이르게 되었고, 한 어부의 구조로 그 어부의 오두막집 침대에 눕혀졌습니다. 꽤 여러 시간이 지나 의식이 돌아온 아버지 옆에는 아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가 깨어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날 아침, 같은 무덤 속에서 나타나 우리 옆에 누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삽니다. 이제 더 이상 우는 일도, 헤어지는 일도, 죽는 일도 없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영원한 약속의 보혈로 말미암아 선한 목자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는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을 완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커티스 허트슨 편저, 부활에 관한 명설교, 이선봉 옮김, 생명의 말씀사, 1994, pp.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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