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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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총회장 김명혁 목사) 예수전도협회에 대한 보고
이유빈 장로의 '죄공개자백' 주장을 중심으로
2000년 12월 01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예장합신(총회장 김명혁 목사) 교단에서 금년(2000) 총회를 통해 이유빈, 윤석전, 이재록 씨 사상의 문제점들을 깊이 있게 지적했다. 예장합신 총회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박병식 목사)에서 조사 연구한 보고를 그대로 받아, 이유빈과 윤석전 씨에 관해 그 사상의 문제점을 이유로 '관계금지' 조치 결론을 내리고, 이재록 씨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공식 규정했다. 자교단 교회는 물론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 등 문제의 사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단호한 조치를 내린 것이다.

이유빈 씨의 '죄공개자백' 사상은 이미 본지가 98년 11월~12월호, 99년 3월호에 심도 있게 취급했으며, 예장 합동 교단과 기성 교단에서도 이씨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 내에 피해 호소가 줄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합신측의 규정은 문제의 사상이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공적인 조치가 내려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윤석전 씨의 사상에 대해서 합신측은 보고서를 통해 '이단 혹은 이단성이 짙은 주장들'이라며 강도 있게 지적했다. 또한 윤씨의 사상을 전통적 장로교회가 고백하고 존중하는 기본 신학적 입장에 '유해한' 주장들이라며 소속 교단의 목회자들이 주의할 것을 당부하며 관계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윤씨의 사상에 대해 침례교단측은 그렇다치더라도 예장합동, 예장통합의 소위 장자 교단들이 정치 바람에 흔들린 것에 비해 이번 합신측 규정은 공교단으로서 한국교회의 이단문제 이슈를 소신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재록 씨의 이단성은 이미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상태다. 신론, 기독론, 종말론, 천국론, 교회론, 인죄론 등 그의 이단성은 마치 독버섯처럼 성경 교리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이번 이씨에 대한 규정은 이단사상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일깨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지는 이번 합신측 규정 내용중 주요 부분들을 요약 게재한다. 이단문제 분별에 좋은 지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 주>

'예수전도협회'의 주장
예수전도협회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들의 홈페이지에 나타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 협회는 전도의 기술만을 가르치는 단체가 아니며, 모든 훈련과 집회를 통해 믿는 자의 신앙고백적 삶을 통해 거룩을 회복하여 전도하는 생활을 강조하고, 동시에 교회 안에 영적 교제를 회복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을 가져 부흥하도록 돕는다'

따라서 예수전도협회는 단순한 전도를 위한 단체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예수전도협회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시켜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기능을 하도록 돕는 교회 개혁 운동의 하나이다. 그 수단으로 교회와 지도자의 부패, 그리스도인들의 무능력과 타락을 지적하고 현재 왜곡된 복음이해를 불식하고 순수한 '십자가복음'의 직접적인 제시와 재이해 과정을 거쳐 죄를 인식시켜 공개죄고백이라는 홰개 과정을 통해 거룩을 횝고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예수전도협회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다.
1) 한국교회와 지도자, 교인들은 세속화했고 타락했다.
2) 모든 인간적, 기술적 문화적 수단은 배제되어야 한다.
3) 현재의 복음이해는 왜곡되어 있다.
4) 순수한 십자가 복음을 배워야 한다.
5) 죄공개자백을 통한 회개가 필수적이다.
6) 진정한 회개를 통해 거룩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데는 교회가 얼마나 타락되어 있는가를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신랄한 기성교회 비판이 전개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인식 위에 '공개죄고백'이라는 회개과정이 필수적이고, 이로써 개인과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시켜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시도한다는 것이 예수전도협회의 핵심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전도협회의 주장과 활동은 3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1단계: 개인과 지도자와 교회의 타락된 현실을 지적하여 문제점을 인식시킨다.
2단계: 십자가의 복음을 재인식시키고, 확신시켜 외침전도로 그것을 대외에 고백적으로 공포한다.
3단계: 죄공개자백으로 고룩을 회복하고 비정상적인 모든 관계를 정상화한다.
따라서, 예수전도협회의 외침전도는 이방세계에 대한 복음적 확신의 공포이며, 죄공개자백은 교회에 대한 사죄 확신의 공포라는 점에서 거룩성 회복을 위하여는 필연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3단계를 향해 가기 위한 기초단계인 1단계에서 타락한 현실에 대한 리얼한 인식을 위하여 교계에 대한 신랄한 부정적 비판이 가해진다. 세속화된 개인과 교회와 지도자의 부패와 타락과 불경건을 적나라하게 비판하여 문제점을 공감케 하는 작업이 계속된다. 문제와 시작은 이 1단계에서부터 많은 신학적 인식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성교회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지나친 부정적 시각의 문제점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신학적 문제점을 다루는 부분에서 상세하게 지적할 것이다.

하여튼 예수전도협회는 단순한 전도훈련 단체를 넘어서 한국교회 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기성교계에 포문을 열고 날카로운 비판의 화살을 던지며, 사실상에 복음에 대한 재해석을 가하면서 그 터 위에서의 신학적 언설을 건축해 나가고 있다. 이 영향은 놀라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확대되고 있다. 특별히 그것을 수용하는 계층이 지도적인 평신도 교회의 일선지도자, 학생 등을 망라하는 다양한 계층이다. 그만큼 일반의 우리 한국교계가 복음과 신학의 통전적인 이해가 취약하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문제점
예수전도협회의 신학적 문제점을 논함에 있어 우리는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하려한다. 어떤 운동도 양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적인 점에 더 유의할 것이다.

1) 긍정적이 점
① 전도훈련의 계기
한국교회는 그 동안 많은 전도훈련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로 외국교회의 프그램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CCC의 사영리나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 프로그램이다. 그런 것들이 전도의 철학과 도구의 역할을 잘 감당해왔다. 그러나 근래들어 한국인들에 의하여 개발된 전도의 이론과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적용되고 있다. 소위 류광수 목사의 '다락방' 전도가 그것이고, 이유빈의 '외침전도'가 그것이다. 외국교회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지적이 전제되면서 교회와 한국인의 체질에 잘 맞는 직접적인 전도방법으로 개발된 것들 중에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전도하는 방법이나 기술울 거부'하면서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신앙고백적인 삶의 결과'임을 가르쳐 '거룩의 회복'을 통해 전도하도록 훈련한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긍정적인 주장이다.

그동안 삶을 동반하는 생활의 전도가 잘 안착되지 못한 면이 있었는데, 예수전도협회의 이런 주장은 일면 일리 있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외침전도의 방법이 유일한 전도방법이 아니고 하나의 전도방법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외치는 자의 인격적 변화를 외침을 듣는 불특정 다수의 청중이 확인할 수 없다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앙고백적 삶의 결과'로 전도하게 한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바이다.

② 한국교회 비판의 소리
이유빈의 글을 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깔려있다. 목회자의 사람과 인격에 대한 비판, 교회의 관행과 사업에 대한 비판, 신학과 신학교에 대한 비판, 교회정치에 대한 비판, 성도의 거룩하지 못한 삶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이러한 비판은 한국교회의 부정적이고 연약한 부분이며 그동안 계속 지적되어온 것들이어서, 그의 비판은 새롭지도 않고 신선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그런 지적을 해왔던 사람들의 소리 중 하나라고 볼 때 개혁의 외침으로 받을 수 있는 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면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하더라도 진정 신랄한 비판이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균형 잡힌 시각에서 나온 것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빈의 주장과 가르침에 경도된 많은 사람들도 다 같은 한국교회의 일원이라고 볼 때에 그의 비판의 소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③ 회개의 기회
이유빈은 거룩을 회복하려면 죄를 인식하고 '죄공개자백'을 통해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심각한 죄인식을 위한 신랄한 비판이 가해지고 이에 따라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순서가 된다.

그동안 명목적이고 형식적이고 값싼 은혜에 취해 있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죙니식이 심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에 걸맞는 회개의 기회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유빈의 장로의 가르침은 무딘 심령을 갈아엎는 강력한 죄지적의 메시지가 이어지고 이러서 죄인식을 촉구하고 그 해결로서의 죄자백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금 무기력하고 형식적인 신앙의 탈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영적 심각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죄관이 신학적인 면에서 온당하고 균형잡힌 것이냐 할 때는 문제의 소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점에 유의할 것이다.

④ 새로운 목회적 활력
예수전도협회의 혐회지 '생명샘'에는 예수전도협회에서 전도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의 체험이 많이 게재된다. 체험담들은 이미 3단계로 분석했던 것과 같은 패턴이다. 그 기본 패턴은 이렇다. 목회가 지지부진하고, 영적 생명력이 떨어졌을 때에 전도훈련을 받고 죄를 깨닫고 교회 앞에 자백을 한 다음, 거룩함을 회복하고 이어서 모든 관계 즉 가정회복, 성도간의 영적 교제권의 회복으로 목회가 부흥되고 역동성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침체현상과 어려운 목회현실 속에서 인간적인 목회적 기술로는 부흥을 이룰 수 없는 중에, 자기의 능력부족과 인격적 실력의 부족들 절감한 목회자들이 회개와 고백을 통하여 새로운 영적 활력을 얻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회개와 영적 각성은 균형 잡힌 바른 신학의 지도를 받으며 나타나야 한다.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신학의 체계에서 영적 각성이 촉구되고 영향 받아야 하는데, 이유빈의 예수전도협회가 기초하고 있는 신학이 주의 교회를 향도할 만한 신학적인 통전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극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2) 부정적인 면
① 지나친 기성교회와 목회자 비판: 교회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시각
이유빈의 장로의 비판은 무서울 정도로 신랄하다. 그의 교회 비판은 어떤 글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의 글을 보자. 그가 바라보는 교회의 현실은 대충 이렇다.

'설교 강단은 마를 대로 말랐다. 그러니 여전히 남의 설교를 베껴서 생명력도 없고, 역사도 없고, 열매도 없는 설교를 하는 강단들이 산재해 있다. 주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 복음 없는 강단, 힘없는 찬송, 응답없는 기도 등 교회 안의 영적 피폐 상황은 북한의 육신적인 식량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이러한 한국교회는 벼랑 끝에 와 있다. 주님의 피로 산 교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는 깊은 잠을 자고 있고,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영적 절망감에 싸여 있다. ``` 무슨 방법을 써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인식들이 퍼져 있다.'
'교회는 교회대로 영적인 빈곤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하고 세상과 비슷한 상태로 타락되어 급속도로 세속화된 길을 걷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도 교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와 같이 교회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교회 현실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2000년 어느 시대 건 교회가 타락하지 않은 시대는 없다. 어느 시대 건 개혁을 주장하지 않은 시대는 없다. 타락 이후 교회는 부정적인 면을 늘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이제까지 생명력을 이어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를 바라볼 때에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우리 속에서 교회를 붙잡고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를 소망스럽게 붙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미 언급했지만, 이유빈 장로의 교회 비판은 충격적일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진부한 것이다. 신선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길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면 거리의 부랑자도 그런 소리를 하고, 무식한 할머니도 그런 소리를 하고, 시중의 삼류 언론도 그런 소리를 한다. 어제 교회를 나온 초신자도 그런 소리를 하고, 오래 믿은 지도자들도 그런 비판을 한다. 따라서 그런 비판의 소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생각 있는 인사들은 더 이상의 교회 비판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비판이 능사가 아니라, 진실하고 조용한 실천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책임져야 하고, 같이 아파해야 하는 공동운명체 입장에서 오늘 주님의 몸인 한국교회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죽어가는 시체 가슴에 칼을 꽂으며 의분에 떨며, 의기양양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 신분에 걸맞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겸손과 사랑과 같이 아파하는 고뇌를 잊어버린 교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우리의 몸된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부정적인 비판한다는 것은 사실상 한국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며, 영적으로 불별력을 상실한 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유빈 장로의 지나친 교회 비판은 지금의 시점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고통하면서 조용히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유빈 장로의 교회 비판의 고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성경과 건전한 신학의 지도를 받을 것이다.

또한, 그의 교회 비판에는 중요한 논리적 오류가 들어 있다. 즉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어떤 부정적인 사실을 보고 바로 모두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논리상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설득력을 잃는다. 아직도 한국교회에 진실하고 훌륭한 목회자가 많고, 알차고 아름다운 교회가 많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일면을 바로 일반화시켜 다 그렇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이 된다. 그의 거의 모든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글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계속 그런 논리적 비약으로 나아가는 것은 억지이며, 언어 폭력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그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있게 하기 위한 상투적인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비판은 날카롭게 하면 그만큼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 화법의 기술이다. 그러나 늘 그런 방법을 써서 자기의 의도를 달성하면 그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원되는 부정적인 접근 방법이 진실성을 잃게 된다. 이유빈 장로의 글이 이미 그러한 상투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의 거의 모든 글이 부정적인 접근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미 그의 부정적인 접근법은 상투적인 한계를 노정하면서 진실을 잃고 있다고 해석된다.

또한 우리는 이유빈 장로의 교설에서 한국교회를 부정하고 비판해왔던 이단들의 극단적인 면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는 이단들의 특성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이 한국교회를 나름대로의 자로 재어 알량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그 비판이 이단들의 한국교회 부정의 논리와 일치한다면 그 자신의 문제성을 노정시키는 어리석음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② 한 부분에 편협되어 있는 비판
교회와 목회자를 비판하는 이유빈 장로의 언사와 글에 극도로 편협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다음 글을 보자.

'오늘날 가장 가슴 아픈 게 뭐예요? 교회에 신령한 사람들이 없어요. 여러분 목사님들 세계에서도 '어느 목사님' 그러면 신령한 분, 60, 50년대에는 그런 분들이 있었어요. "아 그 목사님, 참 훌륭한 목사님이야" 교인들끼리도 그렇게 얘기하고 목사님들 세계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여러분 요새는 어느 교인이 우리 목사님 훌륭하다는 얘기하고 유명하다는 얘기는 해도 신령하다고 하는 목사님이 없어. 큰 교회 목사님이고 유명한 목사님이고, 훌륭한 목사님들은 찾아 볼 수가 없어. 여기 오신 분들은 빼놓고요. 여기 오신 분들 중에 신령한 분들 계십니다. 진짜로 계세요.' 자기의 세미나 오신 목사님들 중에는 신령한 분이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 중에 신령한 분들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호언하는 것은 잘못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주님의 제자훈련 모델입니다. 제자훈련 뭐 어디 가서 배울 필요 없어요. 전도도 안하는 제자훈련, 제자훈련 교재 다 물 탄 것들이죠. 여러분 진짜 제자훈련 교제 원하면 마태복음 한 번 기가 막히죠.' 남의 제자훈련과 교재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볼링 치고, 테니스하고 축구하고, 또 등산 다니고 놀러 다니고 관광 다니고, 산이란 산은 다 섭렵하고, 아까 몇몇 목사님들이 말씀하셨지만 놀러 다니고, 교인들하고 여러분 이게 교회입니까? 놀러 다니는 게 교회입니까? 친목 단체죠! 왜냐하면 영적인 교통이 없고, 신령한 교제가 없으니까 놀러 다니게 되어 있어요.'

이 얼마나 편협되어 있는가. 건강과 휴식, 교제를 위하여 운동도 할 수 있고 오락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조차 매도한다는 것은 이유빈 장로가 얼마나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편협한 사람인가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언사는 그의 말과 글에서 계속 발견된다.

'우리 교회에서 저보고 등산 가자는 사람은 아직 없더라구요. 지금까지 20년 동안 등산 가자는 사람도 없고, 놀러 가자는 사람도 없고 윷놀이 하자는 소리를 제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죠!'

이만큼만 보아도 그가 신학적인 균형을 갖춘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 몸의 건강증진 노력과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교제와 휴식까지 거부하는 여유없는 모습은 결단코 균형잡힌 신앙사상이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로서 건강하게 하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닌가. 우리 몸은 성전이기에 우리 영육간에 강건한 가운데 주의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유빈 장로의 이러한 편협성은, 이원론적인 사고, 즉 육체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소극적이고 유치한 이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편협성은 복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은 '생명샘'에 실린 '예수 전도협회'의 훈련을 받은 신창수 목사라는 분의 간증이다.
"마침 휴일이라 장자(교단)이라고 하는 장로교 모 교단에서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수백 대의 교회 차량이 강변을 가득 메웠고, 각 교회의 '이기자, 필승'의 현수막들이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영적으로는 눈 먼 종교인들의 육신적 오락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지휘본부에서는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즐비하게 진을 치고 앉아서 육신적인 오락에 넋을 잃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전도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세례요한과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우리들은 그들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히 메가폰 네 대가 불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축구장, 배구장, 오락장을 향하여 지휘본부를 향하여 주님이 증거 하시고자 하시던 책망의 음성들이 전도자들의 입을 통하여 힐랄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지휘본부에서 바리새인들이 달려와 저지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내 앞에 와서 절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하루만 봐 주시오. 나도 전도훈련을 받은 목사요" 기가 막혔습니다. '전도훈련을 받고도 저럴 수가 있을까. 나보다도 먼저 훈련을 받았다는 분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할 수 없이 계속 말리는 바람에 돌아서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어찌 된 일입니까?  주님은 그래도 즐거워하시면서 너희들이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책망하니 내 마음이 시원하구나. 내 마음이 통쾌하고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전도협회'에서 전도훈련받은 사람이 이런 사람이 되었다면 얼마나 그 가르침이 편협되고, 왜곡된 가르침인가를 알 수 있지 않는가. '생명샘'은 협회의 기관지인데 이런 전도간증을 여과없이 실었다는 것은 그런 행동을 지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진정한 가르침은 복음진리에 입각한 분별력과 자기 절제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③ 반문화적 태도
우리는 이유빈 장로 '예수전도협회'의 신앙사상에 있어 반문화적인 태도를 개혁주의의 변혁적 문화관의 측면에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글을 보자.

'교회 안에 청소년들을 모으기 위해 농구장을 갖다 놓는 교회, 이건 뭐예요? 이건 완전히 인본주의이고 완전히 사기꾼들이예요. 왜 농구대를 갖다 놔요?' 농구대를 교회에 갖다 놓은 일이 어찌 인본주의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에 성도들의 휴식과 교제를 위한 시설이 다 인본주의란 말인가? 식당시설, 현대적인 오디오 시설, 각종 전자 장치들이 인본주의란 말인가.

다음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 주님을 따라가면 다른 걸 할 틈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고 주님과 함께 사노라 하면서 TV를 보는 사람은 정신병자예요. 어떻게, 어떻게 TV를 보면서 주님을 따라갈 수 있어요? 예? 여러분 세상 친구를 사귀면서 주님도 사귀는 거 이거 정신병자가 아니면 못해요. 능력이 많으시던지 아니면 정신병자든지, 둘 중에 하나예요.'

TV를 보는 것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TV는 이미 현대인의 정보 전달의 총아로서 교육과 문화 생활의 대중적 도구이다. TV시청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정보를 가려 선택하지 못하는 인간의 심령이 타락되어 있을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방송, 아세아방송, 극동방송과 기독교 TV등이 복음을 얼마나 효과있게 전하고 있는가? 다음의 글을 보자. '예수전도협회' 목회자 전도훈련을 받고 와서 TV와 오디오를 보자기에 사서 넣어 버렸다. 그리고 신문은 그날로 다 끊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스포츠는 다 까맣게 잊고 살고, 정치도, 문화도 모르고 산다. 지금까지 스포츠 중계 한번 본 일도 없다. 이런 태도는 세상속에 살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겠다는 반문화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의 문명의 이기는 왜 이용하는지 모르겠다. 전화는 왜 사용하며, 자동차는 왜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예수전도협회'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자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최첨단의 과학기술의 산물이며, 현대 문화의 총아인 인터넷과 사이버 문화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체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영역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영역이라고 믿고, 그 문화의 변혁을 위해 노력한다. 정치와 문학, 영화와 음악 등 온갖 표현 문화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 속에서 들어가 그 구조를, 철학과 표현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선포적으로 외치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고, 그들과의 공감대를 확대하면서, 복음적 지평을 열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 문화의 창달과 창조적 향유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변혁적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언론매체, TV 등, 모든 작위적인 문화적 산물과의 접촉은 필수적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세계에서 그 문화의 향유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는 통찰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바, 개혁주의는 '화목케 함', '창조함', '타락함', '세계', '새롭게 함', '하나님의 나라' 등의 용어들을 그 범위가 우주적인 것으로 이해해서 '종교적' 도는 '거룩한'영역과 '세상적', '세속적', '자연적', '속세적인' 영역으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반대한다. 그런 점에서 반문화적인 태도는 우리의 성경적 개혁주의 세계관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포괄적인 신앙적 사고에서 단호히 불식시켜야 할 위험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세상적', '세속적', '자연적', '속세적인', '인간적' 영역이나 방법을 멀리하는 것이 신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위 '영적', '종교적', '거룩한' 영역과 방법을 지향하지만 늘 실패하고, 좌절만 경험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무능력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원초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늘 노력하지만 늘 실패할 뿐인 것이다.

장로교 합동측 84회 총회에서 "'예수전도협회'는 성경과 신학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했고, 그 중 하나로 '문화부정'을 든 것은 일리있는 지적이다.

④ 문제점 많은 '죄공개자백'
먼저 이유빈 장로의 '죄공개자백'의 주장을 들어보자.
이유빈 신앙사상의 핵심은 거룩의 회복에 있다면, 그 회복은 '죄공개자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세상으로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케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살리는 능력은 상실한 알맹이가 빠져버린 내용이 없는 교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교회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시작하신다.' 그런 '교회의 거룩함은 죄를 감추거나 꾸며짐으로부터 오는 거룩함이 아니고 죄를 내놓고 자백하고 용서함을 받은 거룩함이다.' 죄고백은 거룩함을 이루는 수단이다. "분명한 것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거룩함이 목적이다. 거룩함이 목적이요, 본협회 사역의 목표라는 점이다."

이유빈 장로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사함 받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사함받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사함받은 결과로서 죄를 자백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사함 받을 때에 내 속에 죄책감이 떠나게 된다고 지적한다.

'죄공개자백'은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구하며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면 회개의 영이 임함으로 죄를 미워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해야 하는 이유는 전도에 있는데, 전도란 '자기가 구원받은 죄인임을 세상에 알리는 것', '내가 용서받고 사함받은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 각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나의 복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유빈 장로는 이러한 '죄공개자백'을 반대하는 것을 의식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는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은밀하게 하면 된다는 마귀의 속임수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일이요, 앞서 언급한 성경의 기록에 도전하는 일이요, 주님이 역사하셨던 부흥의 놀라운 역사를 백안시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죄를 자백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가 없어도 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아니하겠는가?"

또한, "죄의 공개자백에 대하여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정도 이상의 반응을 보이며 진리를 힐난하는 것은 자신이 '자기 속에 내놓기 싫은 죄가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투명한 삶을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숨길 수도 없고 숨길 것도 없음을 빛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 앞에 연막을 칠 리가 만무하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투명한 사람은 사람앞에서도 투명하다.

그러므로 죄를 자백하는 것을 왜곡비방하는 것은 자기 안에 상당한 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요, 예수의 피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감추고자 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자기의 힘으로 죄를 감추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필요가 없다. 그들은 예수의 피나 그리스도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하여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용서받고 해결받은 죄를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여 질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자기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을 이렇게 극단적인 말로 공격하는 사람이 어찌 복음의 사역자라고 할 수 있는가. 놀라울 뿐이다. 이렇게 공개자백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그렇다면, 자백하지 않는 죄는 어떻게 되는가? '자백하지 않는 죄는 성도다운 생활을 잃어버리게 하며 믿는 자로 하여금 죄사함의 큰 은혜를 받은 사실을 망각하고 사함 받은 사람처럼 살지 못하게 한다. 예수 믿기 전의 행실과 정죄함과 미움, 시기, 질투 등 옛사람에 속한 행실들이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빈의 죄공개자백 주장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얼마나 극단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하나 그의 '공개 죄고백' 사상의 문제점을 비판하여야 겠다.

1) 성경적인 비판
이유빈 장로는 '죄공개자백'의 성경적 근거로 요일서 1:5-9의 말씀을 사용한다. 과연 그의 주장을 밑받침할 만한 근거로 그 성경구절을 사용할 수 있을까?

오광만 교수는 이유빈 장로의 '죄공개자백' 주장을 성경적으로 비판하는 논문에서 '이유빈 씨가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죄사함과 관련된 성경구절이 성경 해석의 가장 기초적인 단어의 의미 정하기나 문맥 연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성경해석에 근거한 것'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살펴본 결과 '본문에서 이유빈 식의 고백과 자백의(하나님을 향한 것과 사람들을 향한 것) 이중 회개를 가르쳐 주는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다'고 결론 짓고 있다.

그는 성경의 해당본문에서 사용된 '호모로게오'란 단어의 연구에서는 이유빈 식의 하나님께는 '고백', 사람들에게는 '자백'이라는 엄격한 구별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문맥 연구에서 의미를 확정해야 된다고 말한다. 요한일서 1:5-9의 문맥은 영과 육의 이원론적인 경향을 지닌 이단이 자기들은 완전하다고 주장하면서 행동 사이에 커다란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5절에 있는 것과 같이 요한의 의도는 도덕적 무관심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오광만 교수의 해석을 요약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문제의 핵심구절인 9절도 그 앞 부분과 그대로 연결된다. '죄의 자백'을 권면하는 요한의 가르침은 이단들이 죄에 대한 곡해된 견해를 가지고 자기들은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 죄와 상관없이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답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는 실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참회로써 자기의 죄를 시인(호모로게오)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장애물을 치우시고 사람들으 그분과의 사귐 속에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대의이다.

결국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죄와 빛 가운데 생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단들은 이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죄를 호모로게오하면"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본성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누구나 죄인이며, 여전히 죄를 짓는 존재라는 그것을 시인해야 gkse. 이 사실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죄함을 얻는다. 칼빈은 "이 자백이 하나님께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백하는 사람의 마음이 신실함을 요구한다"고 했다

 또한, 이 자백이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 자백의 이중적인 단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명기되지 않았다. '호모로게오'가 세례(마 3:6)나 안수식(딤전 6:12), 신앙고백(롬 10:8) 등 공적인 경우에 여러 사람 앞에서 어떤 사실을 시인하고 공언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행위는 하나의 의식으로 여러 번 번복해서 행해지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고백 시에 자기 속에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 털어놓는 예는 없었다. ) 슈나켄부르크는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회중이나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이 거기 서 있거나 뒤에서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회중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풍습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본문이나 심지어 "너희 죄르 f서로 고하며"라는 말이 있는 야고보 5:16을 근거해서라도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33)

 본문은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자기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모순된 행동을 하는 이단들을 겨냥하여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께 죄를 자백함으로써 사죄를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친다.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며,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다. 이런 죄인에게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에 동참하는 길이 마련되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이것을 시인하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해서 우리를 정결케한다는 것과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혜가 바로 그것이다.34)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본문은 이유빈 식의 고백과 자백의(하나님을 향한 것과 사람들을 향한 것) 이중 회개를 가르쳐 주는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다'고 결론 지울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을 근거해서는 그런 주장이 성립할 수 없음을 밝힌다. 죄공개자백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이유빈 장로의 개인적 견해일 수밖에 없다.

 (2) 죄관의 편협성
 이유빈 장로의 언설의 주요한 단어는 전도, 죄, 회개, 거룩, 회복이다.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면, "죄를 회개시켜 회복하여 전도한다"라는 말로 구성할 수 있다. 그 언설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지 않고 인간으로부터 시작한다. 곧, 인간 실존의 심각한 문제점에서 출발한다. 또한, 신자와 교회의 심각한 타락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보다는 인간론 중심적인 신학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언제나 죄론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죄론은 신학적인 죄론이기보다는 체험적이고, 심리학적 죄론으로 전락하게 된다. 하나님을 바로 안 자 만이 자기를 바로 알 수 있다고 볼 때에,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이 아니고는 인간론을 구성할 수 없고, 이에 따른 죄관도 바로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죄는 본질적으로 사회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실재이기에 앞서서 신학적인 실재이다.'35) 이유빈 장로 언설은 인간론에서 시작하는 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고나이 편협적이고, 체험적이고, 심리학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된다. 곧, 현실의 문제점에서 죄의 모습을 귀납법적으로 추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 중심적 죄관은 항상 창조의 하나님에서 출발하고, 인간을 창조의 극치요, 하나님의 형상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인식에서 타락을 논하면서 인간 본질을 논한 다음, 그 인간의 현실을 그것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 죄관이 인간의 체험과 심리학적인 수준을 넘어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적 죄관을 형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유빈 장로의 '예수전도협회'의 죄공개자백 주장을 들으면서 갖는 의문은 이러한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다. 과연 어떤 죄를 자백할 것인가 할 때에 '성령의 역사에만 맡겨야하며 인위적으로 끌어내서도, 조작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36) 보통 죄공개자백의 내용을 보면 자기가 죄로 인식하고 있는 문제들이 대종을 이룬다. 성령의 역사로 공개자백을 한다고 해도 자기가 가장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중심으로 자백하게 될 것이다. 모든 죄를 고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 공개 자백하는 당사자는 고백할 죄목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의식적 작용이다. 성령의 역사는 고도한 분별과 자기절제로 그 역사 하심을 인격적으로 한다고 할 때에 더욱 그렇다. 또렷한 자기 의식과 자기 통제 속에서 자백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성령의 역사라 하여 자기 의식이 없는 가운데 한다면 그것은 성령역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성령은 우리의 의식을 더욱 또렷하게 하시고, 책임감있게 하시고, 균형있고, 질서있게 반응하고 표현하도록 하신다.

 이렇게 성령의 진정한 역사라면 그 죄인식도 하나님중심이 되고, 고도로 명징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해서 자기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죄공개자백의 수준을 보면 그런 신학적 죄인식보다는 심리학적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죄를 더 심각하게 인식하느냐하는 수준에 따라 죄를 고백하게 된다. 그것은 문제를 자기의 수준에서 판단하는 체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죄인식이다. 이러한 수준 낮은 죄인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경륜사적 섭리 가운데서 지금 현재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적 역사철학이 없는 인간론 중심적인 '복음'의 제시가 주로 원인인 것이다. 이유빈 장로의 언설에서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 역사철학의 부재를 우리는 보는 것이다.

 어떤 죄를 자백할 것인가 할 때, 결국 이런 점에서 자기가 인식하는 죄만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 알지 못한다. 자기의 과거와 현재 행위의 부족과 죄악을 다 인식하지 못한다. 어찌 인간이 자기의 죄를 다 알 수 있는가.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는 죄악중에 하나님 앞에 더욱 심각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을 다 알지 못한다. 그많은 죄악을 어찌 다 공개적으로 자백할 수 있는가. 나와 너의, 인간의 죄악은 바다를 먹물로 해서 하늘에 그린다해도 다 적을 수 없도록 많고 심각한 것인데,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거룩하게 된다면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유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죄공개자백' 시에 어떤 죄를 자백해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또 다른 신학적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유빈 장로의 언설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인간론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선한 행위로서의 회개를 강조하여, 그 회개를 통하여 거룩하게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전적 부패성은 이 회개에도 불구하고 죄악을 짓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개적 장소에서 성령의 역사로 죄를 자백했다고해도 인간은 또 부패성이 발로하여 그 죄에 빠지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온전함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9장 5항에 보면, '사람의 의지가 선한 것만을 완전히 또는 변동 없이 자유롭게 되기는 그가 장차 영화롭게 된 상태에 이르러서만 실현된다'고 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6장 5항을 보면, '중생한 신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본래의 부패성 자체와 거기서 나오는 행위들은 모두 틀림없는 죄악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제 9장 4항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은혜의 자리로 옮기실 때에 그를 그의 본연적인 죄의 결박에서 해방하시고, 그로 하여금 오직 은혜로만 신령한 선을 원하게 하시며, 또 행하게도 하신다. 그러나 그는 그의 남아 있는 부패성 때문에 선한 것만 완전히 소원하게 되지 않고 악한 것도 소원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근거에서 이유빈 장로의 인간론이 신학적 실존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타락성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다.

 (3) 성령의 역사에 애매한 이해
 우리는 실제적에서 '예수전도협회'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개자백 후에 나타나는 결과가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라고 해서 그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였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그 공개자백의 장소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전도협회'는 자백자가 '자발적'이고, 결과적으로 그 후에 문제가 발행하지 않고, 제반 관계가 회복이 되면 성령의 역사로 인한 공개자백이라고 판정하고 있는 것 같다. '공개적인 죄자백의 부작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37)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오는 죄공개고백이기 때문에 그 고백행위는 문제가 없고, 어떤 죄를 고백할 것인가 선택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듣고 보건데, 그간 이루어진 죄공개자백에서 목회자와 사모의 추악한 간음과 평신도들의 간음 등, 입에서 올리기 부끄러운 사례들이 많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 일을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며칠 전도훈련을 같이 받았을 뿐이고, 실제 이해 당사자들도 아닌 불특정 다수 앞에서 그런 죄악을 자백한다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인지 의심이 간다.

 설사 그 때에 성령의 역사로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했다고 해도, 그것을 듣는 회중은 성령의 역사가 없을 수도 있다. 그 회중 가운데는 믿음이 부족하여 그 내용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도 있는 것이다. 또한 자백자가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자백한다고 해도 순간 순간 인간의 부패한 본성의 더러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인간이다.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이라고 볼 때에, 그 역사는 형태와 수준이 다양하고 복잡하여 과연 성령의 역사였다고 그 즉시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로 죄를 자백하고 자유를 얻고 거룩을 회복했다고 할 때에도, 인간은 곧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일시적이고, 반복적이고 인간의 부패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추악한 인간의 죄를 쏟아놓았을 때에 올 1차, 2차, 3차의 반향을 고려하는 것이 오히려 성령의 역사라고 본다. 먹는 문제를 두고 바울을 길게 말했다. 롬 14장 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니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했고 21절에는 '무엇에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했다. 항상 '강한 자는 약한 자'를 고려해야 한다.

고전 8장 9절에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했고 12절에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8장 13절에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라고 자기의 행동을 통제한다. 이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자백하는 자도 부패한 존재요, 듣는 자도 부패한 존재요, 그 후에 2차, 3차로 들을 자들도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위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였다고 판정하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듣는 회중의 면면가 성격과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부분별한 충동적인 죄고백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저는 호텔에서 외국 손님이나 한국 손님에게 간음을 주선해 주며, 그 대가의 삼분의 이는 제가 가지고 삼분의 일은 아가씨에게 주며 또 호텔의 돈을 착복하고, 손님의 돈을 반강제로 하여 팀을 받는 아주 못된 큰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감음하고 제 아내를 미워하며 처갓집 식구들도 미워하고, 술과 담배로 죄의 투성이로 생활해 왔습니다.

하지만 훈련을 받으면서 말씀을 듣고 교육을 받은 후에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집에 가서 나의 죄를 모두 자백했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호텔로 출근하다 보니 다시 또 죄의 굴속으로 가는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휴혹으로 제 자신이 다시 죄로 물들기 시작하였습니다.38)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죄를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고, 죽을 줄 알면서 짓는 것이 인간이다. 공개죄자백을 했다고 해서 죄를 끊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신의 부패성을 늘 고려하여 그 때 그 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판단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 인간은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도 속이고, 회중도 속이고, 세상도 속일 수 있는 존재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이러한 부패성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고하고 그 때 그 때 겸손히 서는 것이다. 부패한 인간의 죄악상을 더 이상 교회가 들을 필요가 없다. 이미 인간의 더러움을 성령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우리는 성경이상의 어떤 충격도 받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인간적인 수준에서 속단하지 말하야 한다.

 (4) '죄공개자백' 시에 연장적으로 예상되는 실제적인 문제들
 우리는 만일 '죄공개자백'을 한다면 교회적으로, 목회적으로 예상되는 문제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의 문제점은 실제적으로 '죄공개자백'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다.

 1) 어느 시간에 자백할 것인가?
 어느 시간에 죄를 자백하게 할 것인가? 현재의 교회현실로 보아 주일 낮 예배시간이 적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인이 제일 많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백의 효과 면에서 교인이 적게 나오는 수요일 예배 때에 실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특별한 집회시간을 마련하여 자백하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배정할 것인가? 말씀이 끝난 다음에 할 것인가? 예배순서의 공식적인 순서로 넣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도 타락한 존재이기에 일주 간 더러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 양심적인 목회자는 회중 앞에 설 때에 '공개죄자백' 순서 때마다 자기의 죄를 자백해야 하는 부담이 있을 것이다.

낮예배 시간에 하는 전교인 참여하여 좋은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 예배 시간마다 인간의 추악한 죄악상을 들어야 하는가? 또, 그 중에는 연약한 신자, 심지어 불신자, 청소년 들이 있고 실제적으로 신앙의 질이 다른 성도들이 있고, 교회 내의 여러 갈등 요소를 함의한 사람들이 있는 곳인데 1차, 2차, 3차의 반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죄공개자백'의 실제적인 교회적 적용은 불가능한 것이다.

 2) 누가 죄자백할 것인가?
 누가 죄자백할 것인가하는 문제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 성령의 역사로 죄자백한다고 할 때에, 공적인 집회 시에 무작위로 회중 중에 아무나 나와서 말하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데 그의 발언을 허용할 것인가? 성령의 역사로 말하지 않는지 판정하려면 한참을 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자백을 계속 들어야 하는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 불건전한 교리와 접하여 때로는 황당한 경우를 당하는 것이 목회 현장인데, 조심없이 아무에게나 회중 앞에 서는 일을 허용할 수 것인가? 설사 성령의 역사라고 해도 기다리게 하고, 수차례 다방면으로 점검하고, 발언의 언사와 수위를 조절하고, 덕을 세우도록 조처해서 한 사람이라도 조심스럽게 교회 앞에 세우는 것이 목회 아닌가? 성령의 역사는 조심 없는 것이 아니다. 분별과 질서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유빈 식의 '죄공개자백'은 교회에 적용할 수 없다. 목회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3) '성령의 역사'라며 고집할 때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공적인 집회 시간에 '죄공개자백'을 하겠다고 나온 사람이 시간과 주제를 모르고 계속적으로 소위 '큰 죄', '작은 죄'를 망라하면서 자백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회중들에게 사안을 구체적으로 이해시키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런 죄 저런 죄가 얽힌 것들을 그것도 통제 없이 분별 없이 쏟아져 나온다면 그것을 어떻게 제지 할 수 있는가. 그는 소위 성령을 따라 말하고 있다는 주장하면서 태도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쏟아 놓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소위 '자발적'으로 나와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만일 제지하면 성령의 역사를 제지한다고 할 것인데 말이다. 자백을 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작은 죄'만 이야기하고 '큰 죄'를 이야기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지금 제지하는 것은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엇이라고 답한 것인가. 그때에 성령의 역사도 규모와 절제가 있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성령의 역사로 된다는 '죄공개자백' 주장의 모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의 역사로 되는 '죄공개자백'은 고도의 분별과 자기통제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으로 교회가 그것을 채용하려면, 누가 자백할 것인지, 무슨 죄를 자백할 것인지, 왜 하려고 하는 것인지, 시간은 얼마나 할애할 것인지, 어떤 집회 시간에 할 것인지, 교회의 건덕에 문제는 없을 것인지, 자백한 후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인지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다. 이러한 고려를 충분히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우리는 믿는다. 현장 중심적이고, 충동적이고, 점검이 되지 않는 '죄공개자백'은 극히 위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적 집회에서 '죄공개자백'은 채용하기 곤란하며, 위험한 일이다.

 4) 사죄 확신의 문제가 있지 않는가?
 다음의 글을 보자. '어느 교회 여집사님은 결혼하기 전의 간음죄로 고통 당하다가 남편에게는 이혼을 당하여도 하나님에게는 버림을 받을 수 없다하여 고통가운데 죄를 자백하여, 남편에게 용서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이미 허락하신 양심의 자유를 회복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39) 이 말 속에서 혼전의 간음을 자백함으로 양심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백하지 않으면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자백하지 못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탄이 그것을 빌미로 하여 정죄의식을 넣어주며 죄책감 가운데 사로잡히게 만들고 숨겨두고 덮어둔 죄를 수시로 들추어 보이면서 또 다시 조의 유혹을 불러일으킴으로 고범죄를 짓게 만들고 기호가 될 때마다 똑같은 죄의 사슬에 나를 묶어 끌고 다니며 괴롭게 한다면 차라리 단 한번 사람들 앞에 망신을 당하고 교인들 앞에 창피를 당하는 게 낫지 아니한가? 나를 끌고 가며 나의 심령을 조여오는 죄의 고통을 풀 수만 있다면 그래서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면 차라리 어리석은 쪽을 택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겠는가?40)

자백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고, 계속 그 죄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백하기 전까지는 사죄의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죄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자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진정한 자유를 얻고 거룩해 진다는 것이다. 이유빈 장로는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사함 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사람 받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사함 받은 결과로서 죄를 자백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사함 받을때에 내 속에 죄책감이 떠나게 된다고 지적한다.41)

 다음의 경우를 보자. '제가 혼전에 제 아내와 같이 잠자리를 했습니다. 이 문제가 제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양심의 자유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가 자백할 때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제 양심을 자꾸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양심이 자유를 못 얻는 겁니다. 실제로 용서를 받았어도 이걸 끊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확신이 와서 자유를 얻는데 마귀가 자꾸 이걸 가지고 늘어지니까 양심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교인들한테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지고 양심의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42) 이 사례를 보더라도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으로는 '양심의 자유'와 평안을 누리고 못하는 것이고, 회중 앞에서 자백을 통해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았다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람 앞에 자백하지 않으면 자유와 평안을 누릴지 못한다는 어떤 교리적 언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는데 그것도 이해당사자가 아닌 사람들 앞에서 그 죄에 대하여 계속적인 죄으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적인 면에서 사죄 확신의 근거를 십자가와 성령의 적용적 사역에 두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백행위에 두는 것은 아닌가?

 때때로 인간이 이상 '확신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기에 참된 신자도 확신을 소유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많은 난관으로 더불어 투쟁하게 될 수도 있으'나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들을 성령에 의하여 알 수 있으니, 비범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고,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성경말씀, 성례, 기도)을 바로 활용함으로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말한다.43) 따라서 죄를 공개적으로 그 구체적 내용을 자백한다고 자유와 평안이 오는 것은 아니며, 사죄의 확신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데는 재래의 거룩한 규례들(성경의 말씀을 접촉함, 성례에 참여함, 기도함)이외에 별도의 새 이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44) 관점에서 우리는 죄공개자백은 별도의 규례를 추가는 위험한 교리적 언설이 아닐 수 없어 경계하는 바이다.

 ⑤ 원론적 신앙체질의 심화
 이유빈 장로의 '신앙 사상 전반에 우리는 독선적인 배타주위와 극단적인 반문화적주의 불신과 기성교회와 신학에 대한 일방적인 적대감이 있는 것 같다. 그는 기성교회의 예배갱신 프로그램은 마귀의 속임수이며, 성경공부는 도구화 프로그램이며, 교회 전도,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신학교는 심령을 죽이는 오늘날의 신학을 가르치며 스포츠나 체육대회는 성령 없는 육신적 오락 싸움'이라고 주장한다.45) 이러한 그의 신앙 사상은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이원론적 신앙체질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잇다는 점에서 경계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원론적인 사고는 성과 속을 구분하고,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며, 역사와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 역할을 소극적으로 취급한다. 교회와 관련된 '거룩한 일'과 생활과 관련된 '속된 일' 등 공간적, 영역별로 이분하면서 일상의 문화와 정치와 사회의 문제에 대하여는 인간적인고, 세속적인 것이어서 그 영역에서는 진전한 신앙적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에 대하여 이미 한국교회는 많은 지적을 받아 왔거니와, 아직까지도 전포괄적인 성경적 세계관의 터 위에 정립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다.

 개혁주의는 우주론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주권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사상체계이다. 바른 대신관계를 기초로 하여 사람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를 하나님 중심한 시각으로 보려는 보려는 전포괄적인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단지 구원론적 의미만을 갖는 편협한 종교적 체계가 아니라, 종교적 또는 구원론적 영역 못지 않게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과학적 영역 등 삶의 모든 분야에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는 문화 변혁적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인 문화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 생활세계의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믿고, 각기 주어진 삶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이 설정해주신 인생의 의미를 확인하면서 자연과 예술과 문화, 그리고 체육과 적당하고 건전한 오락으로 즐기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 감사하면서 산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개혁주의자만이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이유빈의 반문화적인 편협한 가르침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걸맞지 않는 것으로 유치한 신앙사상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개혁주의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건전한 복음주의적 입장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위험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복음이해와 신앙행태에 이원론적인 요서가 있음을 걱정해 온 우리는 이유빈 장로의 주장은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는 가르침으로 보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총회 대책
1) 3대 개혁이념의 실질적 구현
우리는 총회의 교회운동이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일원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재에 대한 분명한 한국교회사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3대 개혁 이념을 신질적으로 구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유빈 장로의 언설은 사실 우리 총회가 태동되던 때에 우리가 한국교회에 외쳤던 소리와 많은 면에서 흡사한 면이 없지 않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교회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2)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정립과 확산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바로 정립하고 그것을 교회에 확신시켜 젊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균형 잡혀 있지 않은 신학적 기초가 허술한 운동에 경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복으멩 대한 역사철학적 이해의 확산
이유빈 신앙사상은 인간구원론 중심적 신학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 신학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그리스도 중심적 역사철학의 차원에서 복음을 인식하고 가르쳐서 감각적인 체험 중심적 신앙의 어프러치를 무산시켜 나가야 한다. 총회내 목회자의 신학적 역략을 확충하고 분별력을 가다듬어야 한다.

4) 전도의 신학적인 애해의 고취
전도에 대한 신학적 애해가 아직도 취약하다. 개혁주의 신학의 하나님 중심적 전도신학의 정립과 확신이 시급하다.

5) 개혁시학에 입각한 구체적 전도모델의 개발
구체적인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 걸맞고, 한국적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전도모델을 총회적으로 연구 개발하여 교회에 확산시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시중의 전도모델에 대한 신학적 비교 분석, 방법적인 비교분석이 있어야 한다.

6) 지나친 추종은 경계
이유빈 장로의 '예수전도협회'에 총회 내 목회자의 지나친 추종을 경계해야 한다. 주의 교회를 신학적으로 혼란시키면 안 된다. 총회는 총회 내 목회자가 예수전도협회의 간여하거나 참석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7) 총회내 신앙사상과 흐름에 각별한 관심
총회는 총회내 교회의 신앙사상의 성격과 흐름을 정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교회의 신학적 부패를 방지해야 한다.

8) 교계 사이비한 운동에 대한 예민한 식별
총회는 교계의 사이비한 가르침과 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그 정체를 파악하고  교회내 침투를 경계해야 한다. 교회가 그 진위 식별을 요구할 때 즉각 응답해야 한다.

7. 결론

우리는 이유빈 장로의 예수전도협회에 대하여 죄공개자백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유빈 장로의 현금 한국교회 비판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빋기 어렵다.
우리는 이유빈 장로가 신학적으로 균형 잡히고 더욱 겸손하고 진실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총회의 분별력 있는 결정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총회가 결정하여 줄 것을 우리 위원회의 이름으로 제의한다.

1) '죄공개자백' 주장의 근거로 주장하는 요한일서 1:9에 대한 이유빈의 해석은 바르지 않기 때문에 이 구절에 근거한 행위로 주장하는 '죄공개자백' 주장은 옳지 않다.
2)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6장 5항, 제 9장 4항, 제 11장 5항, 제 13장 2-3항, 제 14장 3항, 제 15장 6항, 제 17장 5항, 제 18장 4항, 제 25장 4-5항에 근거하여 판단할 때 이유빈 장로의 '죄공개자백' 주장은 인간론 부분과 성령의 사역 그리고 교회론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바, 이 주장의 교회적 적용은 삼가야 할 것이다.
3) 특히 이유빈 장로의 지나친 교회 비판의 시각과 반문화적 시각이 교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4) 따라서, 이유빈 장로의 예수전도협회에서 행하는 모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5) 또한 예수전도협회의 도서와 모든 교육용 요재의 교회 사용을 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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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샘' 1999년 5,6월호 p.5
2) '생명샘' 1999년 7,8월호 p.5
3) '생명샘' 2000년 3,4월호 p.5
4) 이유빈 에베소서 강해 1번 테이프
5) 이유빈 제 62차 목회자 전도훈련 98년 7월3일
6) 이유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1번 테이프
7) 이유빈 '예수전도협회' 97년 4월 21일 특강 '떠나가는 신자'
8) '생명샘' 97년 2월호. p. 18-20
9) '생명샘' 1999년 3,4월호 p.13 이상윤 목사, '개척교회 부흥의 모델'
10)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p.22-23
11) '기독신문' 98년 8월 5일자 참조
12) 이유빈 '전도는 쉽다' 276-277
13) '교회와신앙' 98년 11월호 p. 125
14) 윗글 p. 121-124, '교회와신앙' 1999년 3월호, 오광만 '예수전도협회 이유빈 씨 사상의 성경적 접근' 재 인용 p. 125
15) '생명샘' 97년 11, 12월호 p.40-46
16) '생명샘' 1999년 3,4월호 p.10-11
17) '교회와신앙' 1998년 12월 p. 159
18) 오광만, '예수전도협회' 이유빈 씨의 사상의 성경적 접근, '교회와신앙' 1999년 3월호 p. 124-131
19) Glen Baker, I john. The Expositor's Bible Vol 12, by F.E.gaebelein, p. 309, 윗글 오광만 재인용.
20) E, Earle Ellis, The world of St John(Grand Rapids: Eerdmans, 1984), p. 86
21) Rudolf Schnackenburg, The johannine Epistles, p. 74
22) John Calvin, The First Epistle of John, p. 241
23) D.Furst, "Confess", in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gy, Vol.1,ed by Collin Brown p.349
24) Schnackenburg. p.82~83 본문이나 야고보서 5:16은 구체적인 상황이 다르며, 또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25) 윗글 오광만, 요약적 인용
26) 윤철호, '공개죄자백' 사상과 관련한 인간의 사죄와 구원에 관한 신학적 성찰, '고회와 신앙'. 1999년 3월 p.132
27) '생명샘' 1999년 9, 10월호 '공개 죄자백에 관한 신학적, 교회사적 스케치' p.15
28) '생명샘' 1999년 9, 10월호 p.16
29) '생명샘' 1996년 4월 p.2
(월간 <교회와신앙> 200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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