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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③
박명수 교수 논단
2022년 11월 09일 (수) 11:13:37 박명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본 연구는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연구책임자 박명수)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2021년 연구한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탄압과 학살연구] 연구중 개신교에 관한 부분을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3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필자 주>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②


박명수 / 서울신대 명예교수

   
▲ 박명수 교수 

III.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의 피해와 사례

1. 인민군 퇴각 과정과 개신교의 피해

 다른 민간인 피해와 같이 기독교인들의 가장 많은 피해는 역시 인민군의 퇴각 과정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파죽지세로 남한을 점령하던 인민군들이 낙동강 전선에서 제지받자,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서 북한은 모든 역량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였다. 그 결과 중부지역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을 기회로 맥아더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서 지금까지 낙동강 전선을 지키던 유엔군과 국군들은 여러 통로를 통해서 북진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인민군은 각 지방당에 “1. 전세가 불리하면 퇴각한다. 2.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3. 유엔군 상륙 때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 --- 5. 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6. ---입산시키고, 남 강원도로 퇴각하게 할 것”등을 지시하였다. 1) 아울러서 “적의 침입으로 위급한 경우와 적 앞에서 그들을 환영하여 반동을 감행하는 경우에 관하여는 체포하여 처리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렸다.2) 이 지시에 따라 각 도당은 각 지역에 9월 26일 음력 추석 반동세력을 제거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하였다. 명령에 따라 추석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전국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루어졌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도 이런 상황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런 학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위의 명령에 있었다. 따라서 이런 학살을 지나치게 각 지역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 원인을 축소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인민군의 퇴각 과정은 각 지역에 따라 달랐다. 대부분의 경우는 9월 26일부터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전라도 도서 지방은 여러 사정으로 곧바로 퇴각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10월 4일 경에 퇴각했고, 바로 그 직전에 신안군 도서지역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유엔군들이 인민군들을 공격하며 북상하였지만, 퇴로가 막힌 그들은 지역의 산간지대로 도피하였다. 이들은 유엔군이 지나간 뒤에 다시 마을로 내려가 우익세력을 공격하여 그 지역을 좌익의 점령지대로 만들려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전남 영광군이다. 그곳에서 가장 많이 살해됐는데 그것은 산속으로 숨어든 인민군이 다시 나타나서 우익세력과 기독교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전국 많은 산간지역이 여전히 미수복지역으로 남아 있어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지냈다. 이들 지역에 계엄이 해제된 것은 1952년 봄이었다.
 

2. 개신교의 피해 사례

1) 충남 논산군 성동면의 상황과 병촌교회 피해

   
 

충남 논산 병촌교회는 9월 27일에서 28일 사이에 이 교회 신자 66명이 살해되었다. 병촌교회는 원래부터 반공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병촌교회는 강경성결교회가 지교회로 세웠는데, 최초의 제안자는 윤판석이었다. 그는 해방 후 우익활동을 한 교회 집사였다. 그 다음에 이 교회를 실질적으로 세운 사람은 강경교회의 이태석 전도사였다. 그는 그 후 북한에서 목회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1950년 10월 11일 북한에서 패주하던 인민군에게 살해되었다. 성결교회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있었는데, 공산주의를 말세에 등장하는 “붉은 용”, 곧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이 지역에 독촉국민회 논산지부가 조직되었고, 지부장은 기독교인 윤형중이었다.3) 윤형중은 당시 중졸자로서 논산금융조합장과 논산읍장을 지낸 인물로 기독교 장로였다.4) 당시 충청남도 독촉지부장은 감리교의 남천우 목사였고, 대전지부장은 성결교회의 김창근 목사였다. 윤판석은 중앙에서 반공적인 기독교 청년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런 것들이 병촌교회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논산군 성동면에 좌우의 갈등이 있었다. 아마도 좌익의 진원지는 이곳 성동면 병촌리에 사는 여씨 문중이었던 것 같다. 그 지역은 여운형과 친척 간으로 좌익 사상을 추종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성동면 원남리의 윤성병의 아들 윤해중이 여운형과 접촉을 하면서 좌익이 강화되었으며, 그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윤성병은 아들의 불행에 우익에 큰 적개심을 품고, 한국전쟁 시기에 성동면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 지역은 남한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원남리 3구(댁개)는 오래 동안 윤씨 양반마을을 자처하였고, 이들 가운데는 금융조합에 근무하는 사람들(윤철중, 윤수중)도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논산 금융조합장 윤형중과 함께 독촉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아래에는 이들에게 소작을 하거나 머슴을 살던 마을이 있었다. 이들이 윤성병과 함께 좌익활동을 주도했다.5) 따라서 해방 이후 원남리는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좌우 갈등과 겹쳐서 형성되었다.

좌익의 세력이 강한 병촌지역에 반공을 강조하는 성결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좌우의 대립을 예견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윤성병과 여씨 문중은 합세하여 윤씨 문중의 지주들을 공격하였다. 성동면에는 서북청년단 산하의 연락사무소가 있었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좌익이 강한 지역에 우익단체들의 요청으로 지역에 파견되어 좌익 적발에 앞장섰다. 미군정 보고서에 1947년 6월 30일에는 이곳에 와 있던 서북청년단원 소속 3명을 신원 미상의 30명의 괴한이 습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 좌우 갈등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6) 그러나 정부가 수립되고 보도연맹이 창설되었을 때, 이 지역의 좌익들이 얼마나 많이 여기에 가담했으며, 전쟁 직후에 얼마나 피해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7)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는 논산지역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1명으로 언급하고 있다.8) 따라서 성동면 학살 사건을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이런 갈등 때문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지역의 우익인사들은 강경경찰서의 지시에 따라서 7월 17일 구자곡 지역으로 피란을 떠났고, 이때 강경성결교회 신자들도 함께 떠났다. 그러나 5일 후 강경이 완전히 인민군에 의해서 점령이 되면서 피란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성동면 반공 인사를 비롯하여 경찰가족, 우익인사, 기독교인들이 잡혀갔다. 피란에서 돌아온 우익과 기독교인들은 반동세력으로 분류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당시 성동면 원남리의 지주 계층을 비롯하여 일단의 윤씨 집안이 집단으로 학살되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인민위원장이 지주들의 토지를 빼앗으려고 했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인민위원회로 권력이 재편되는 과정 가운데서 행해진 공산당식 토지개혁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가운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남쪽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북상으로 도당은 9월 26일 반동 세력을 제거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적대세력들은 9월 27일과 28일 양일간 병촌교회 66명을 포함해서 성동지역에서 120명을 사살했다.9) 특별히 병촌교회 신자들은 특별하게 우익의 정치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민군의 병촌교회 학살은 이 지역 좌익의 중심세력이 교회 자체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해서 이들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성동지역에서 다른 기독교인들도 병촌교회와 비슷한 희생을 당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교회 내의 좌우의 갈등으로 이것을 공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동과 가까운 강경에서는 동아기독교의 최초의 목사이며, 최초의 감독이자 해방 후 침례교회의 초대 총회장을 지낸 이종덕 목사도 9월 말 인민군이 퇴각하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수복 후에 이 지역에서 우익에 의한 부역자 처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태육은 수복 후에 약 700명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이 집단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700명이 어느 범위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서는 금산, 논산, 보령, 부여, 서천, 연기, 천안 지역의 부역자 희생자가 모두 109명에 이른다고 언급한다.10) 원남리의 유족들은 자신들은 보복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병촌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괴롭힌 세력들을 용서했다고 주장한다.11)

같은 해 11월 20일 동아일보에는 합동수사본부가 성동면 학살 주동자를 체포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9월 하순 도끼로 양민 72명을 죽인 이상태가 체포되었다. 이상태는 원래 성동면 우근리 사람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여의도비행장 정비계 문관으로 활동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에 입당하고자 9월 28일에 우익진영 군경가족 암살단을 조직하여 최봉근(30)외 18명의 대원을 확보하고, 경찰관 박병구(39)를 비롯하여 이관오(49)와 부락의 우익인물 조창수(73)씨 등 도합 72명을 죽였다. 이상태는 그 후 도망하여 영등포 모 기관에서 문관으로 있으면서 월북을 꿈꾸다가 11월 18일 체포되었다.12)
 

2) 전북 완주지역과 동상면의 개신교 피해

전라북도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보게 된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학동교회, 신월교회, 수만교회의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 기간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 지역의 기독교는 인근의 위봉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1900년대 초 전주에 온 남장로교 선교사 마로덕(Luther O. McCuchen)은 완주군 소양면 위봉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상면 학동 사람들이 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마로덕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5년에 학동교회, 1906년에 단지동교회, 1907년에 마재교회(현 신월교회)를 세워졌다.13) 이 교회들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고 산골마을에 신문명을 전달의 통로가 되었다. 이런 산촌에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과 그 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완주군 삼례 구와리를 중심으로 좌익이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들은 해방 이후 계속 대한민국의 수립을 반대했다. 인민군이 전북지역에 오기 전부터 반동분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기독교 세력을 적대시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우익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인식을 가졌던 좌익세력은 전북 완주지역에서 기독교 우익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삼례 옆의 봉동에는 역시 마로덕 선교사에 의해서 1908년에 제내교회가 설립되고, 영성학원을 세워져 지역사회 문명개화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곳을 점령한 인민군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아부한 것을 회개하는 자백서를 강요하였으며, 결국 이 교회의 중심인물인 장로 3명과 여러 신자들을 소방서에 구금하였다가 9월 27일 이들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총격을 난사하였는데, 여기에 김상천, 김현경 장로가 사망하였다. 바로 같은 면의 봉상교회도 마로덕선교사에 의해서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오기영 장로는 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하였고, 이것으로 전주 형무소에 체포되었다가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형무소를 소각할 때 겨우 살아났다.14)

그러나 완주군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가장 심각한 기독교 박해는 완주군 가운데서 가장 오지인 동상면에서 일어났다. 동상면에서 해방 직후에 어떤 좌우갈등이 일어났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는 이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우익세력이 형성되었지만, 좌익도 활동하기 시작한 곳이다. 1948년 동상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조한봉이 남로당 동상면 총책이 되었고, 사람들을 포섭하여 활동하려다가 발각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기독교 인사들은 조한봉 석방을 위해서 노력했고, 결국 석방되었다.15)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동상면을 점령한 것은 7월 25일이었고, 그 즉시 조한봉은 분주소장이 되어 나타났고, 그의 지휘하에 인민위원회, 노동당, 여성동맹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인민위원회와 기독교 간의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갈등의 출발점은 인민위원회의 예배당 사용문제였던 것 같다. 인민위원회는 각종 선전과 군중집회를 주도했고, 그 장소를 마재교회로 삼았다. 그러나 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만 이해했던 신자들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성녀 집사였다. 그녀는 마로덕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회를 시작하는데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결국 김성녀는 미제의 앞잡이로 낙인을 찍혔고, 결국 살해당했다.16)

이 지역에서 살해된 사람들은 세 교회 합하여 14명이다. 이들 가운데 김태환(면장), 박용순(소방대장, 교사) 등을 제외하고는 공직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고, 독촉이나 대한청년단에 가담한 사람도 없었다. 이들은 평범한 신자였다. 이들은 조한봉을 사랑으로 대했으나 그들은 기독교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시 동상면에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약 50여 명이 끌려 왔고, 이곳에서 대부분 희생되었다. 이들이 살해된 것은 9월 27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는 내용은 살해자 외에 납북자도 있다는 사실이다. 조한봉은 한편으로는 우익과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면서 가능한 대로 많은 젊은이를 납북시켜 함께 도피하고자 했다. 현재 납북자단체에서 작성한 명단에 전도사 이경천, 집사 박종봉, 최순임, 장장순이 등장한다.17) 그러나 현재까지 이들에 대한 조사는 없는 것으로 안다.

원래 이들은 불온 세력을 제거하고 동상면에 위치한 운장산 산맥을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미 연합군과 국군이 대전을 점령한 상황에서 이들은 북쪽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할수 없이 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인민위원회가 운장산으로 들어오게 되어 그것이 빨치산의 중요 활동무대가 되었다.18) 당시 정부가 실시한 화폐교환도 이 지역에서는 실시할 수 없어서 치안이 회복될 때까지 유예한다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19) 조한봉은 이 지역의 빨치산 대장으로 52년 봄에 체포되어 사살됐다. 이 지역에서 계엄이 해제된 것은 1952년 4월 7일 0시를 기해서 이루어졌다.20) 그리하여 사실 동상면은 약 1년 반 이상을 인민공화국 체재로 지냈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부역자 처리 문제를 낳게 만들었다.
 

3) 전북 군산의 원당교회·해성교회·지경교회 피해

군산지역이 개항장이 되자 1895년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 지역으로 들어와 기독교의 복음과 근대문명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이 일어났으며, 해방 후에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윤석구 장로를 중심으로 독촉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여기에 발 맞추어 장로교 군산노회에서는 독촉기독교협의회에 개교회가 가입해서 활동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자는 결정을 내기도 하였다. 윤석구 장로는 해방공간에서 이 지역의 우익을 대표하고, 이승만의 초대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일제 시대 군산은 조선의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항구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군산에는 강력한 일본인 촌이 형성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남겨 놓은 적산문제로 상당한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지역이었다. 일본인과 조선인들 사이의 갈등이 많았다. 조선인들이 일본인 부락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에서 귀국한 조선인들이 일본인 사장들에게 일인당 2,500엔을 요구하기도 하였다.21) 아울러서 이 지역의 공장에서는 좌우익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22) 1947년 3·1절을 앞에 두고서는 독립촉성국민회와 서북청년단이 좌익 계열의 신문사와 농민연합을 습격하는 일도 있었고23), 1947년 6월 24일에는 이곳에 머물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들이 신원을 알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24)

이렇게 좌우의 갈등이 심한 군산지역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피해자는 정연행 전도사였다. 정연행은 1927년 원당교회를 세운 다음 1928년에도 삼남 홍삼봉과 해성교회를 세웠다. 그는 해방 후 옥구군 애국부인회 회장과 전북 여전도회 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25) 그는 사회적으로 기독교적으로 리더십을 갖춘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1950년 7월 17일 공산군 제4사단이 군산에 진입해 원당교회를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사무실에는 붉은 깃발을 꽂고 김일성 사진을 걸고 일반 신자들의 예배 및 행사를 일체 중지시켰다. 또한 지역유지나 공무원들을 색출하여 인민재판을 거행했다. 군산을 점거한 제4사단 공산당은 원당교회를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정연행 전도사에게 “예수 믿지 말고 여성위원장”이 되어줄것을 요구했다. 그는 애국부인회와 전북 여전도회 연합회 회장이었기에 인민군이 지역민들을 통솔하는데 적격자였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정연행은 일제 시대 공산주의자들을 개종시킨 경험이 있었고, 전쟁 직전에 예비검속이 있을 때, 이들을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하여 이들의 생명을 살린 일도 있다. 그러나 인민군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에게 온갖 고문을 자행하고, 그를 일제 강점기에 공산주의자들을 개종시킨 죄목으로 감금했다.26)

그러다 9월 28일 추석을 기해 적대세력들은 숙청 대상자들을 정해놓고 원당 뒷산 방공호에 야간작업이 있다며 우익 인사들과 신자들을 불러냈다. 그중에 원당교회 신자 14명과 해성교회 7명 등 총 21명이 포함됐다. 시신들은 10월 2일 일본군이 파놓은 방공호에서 발견됐다. 원당교회 14명 중에서 홍씨 집안 10명과 민족청년회장인 이포엽 집사와 그의 남매가 살해됐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연행 전도사와 이포엽 집사의 정치적 행적과 궤를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두 사람의 정치적 행적과 달리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친인척을 포함한 일가족을 살해했다는 점은 이념을 넘어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감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실례로 정연행 전도사에게 피난을 권유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는 “다 피난 가면 누가 이 교회를 지키겠느냐? 일제 강점기 때도 신사참배를 믿음으로 이겼으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지키겠다.”며 거부했다.27) 그는 신앙을 위해 교회를 지키고자 했지만, 결국 교회를 인민군에 빼앗기고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인민군이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정연행 전도사에게 죽창과 총칼을 들고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말만 해라. 그러면 그러면 살려주마”라고 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방공호에 매립됐다.28)

지경교회에서도 9명의 신자가 살해됐다. 특히 장로 김창호(44세)는 청년 양만영과 최옥종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들을 비방하는 선전물을 살포하다가 체포되어 8월 15일 발산사무소 창고 앞에서 트럭에 실려 전주교도소로 압송됐다. 9월 28일 공산군이 수감자들을 대량학살할 때 이들도 함께 학살됐다.29) 지경교회 성도 중에 김장호, 양만영, 최옥종 3명은 공산정권을 비판하는 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살해됐다. 기독교인들은 애국 신앙을 곧 반공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적극적인 반공 운동을 올바른 신앙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념과 종교를 구분하기보다는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는 것이 타당하다. 박찬승은 이미 이런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한국전쟁의 배경을 종교와 이념 간의 갈등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여기에서의 종교는 기독교로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다.30) 즉 기독교 신앙은 곧 반공 운동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4) 전북 김제지역과 만경교회 피해

전북지역에서 김제지역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을 주목하는 이유는 김제 만경교회의 김방서 장로가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이곳의 교회가 한국전쟁 중에 수동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공을 강조하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완주지역의 기독교가 남장로교 전주선교부와 관련이 있다면 김제지역의 기독교는 군산선교부와 관련이 있다. 만경교회는 1913년 곽영욱의 주도로 세워졌는데, 이 분은 이 지역의 유지로 민족주의자였으나 해방 직후에는 인민자치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기독교신앙을 지켰고, 곽영욱 장로가 8월 1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회는 무사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곽진근 목사이며, 일제 말 친일행적을 남겼다. 그의 조카 곽유근 장로의 두 아들은 좌익에 가담하였으며, 한국전쟁 기간에 적극적으로 우익을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곽유근은 김제노회에서 장로 자격을 박탈당했다. 동시에 강성진 장로의 아들 강춘길 집사(의사)는 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만경 대동청년단장을 맡았다.31) 당시 이 교회의 담임은 일본에서 청산학원에서 공부하다가 조선신학원을 졸업한 김종학 목사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반공의식이 강했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해방 이후 김제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좌우익의 갈등이 심했다. 해방 직후에는 원래 전주의 배은희 목사, 군산의 윤석구 장로 등을 중심으로 자치위원회가 만들어졌으나 곧이어 좌익이 주도권을 잡았고,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특별히 전북지역은 미군의 진주가 늦었고, 실제로 군정부대의 각 군단위까지 장악은 더욱 늦었다. 그리하여 12월에서야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의 기록을 압수하고, 건물에서 퇴거를 요구했으며, 다음 해 1월에 가서 미군 전술부대의 도움을 받아서 각 면단위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32) 이런 상황 가운데 이 지역의 인민위원회들은 상당한 세력을 확보해서 미군정이 이들을 해산하려고 했을 때 격렬한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은 상당한 시간 동안에 자기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우익활동도 적지 않았다. 1945년 말부터 반탁운동과 결합하여 독촉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전주 배은희, 군산 윤석구, 이리 김병수를 중심으로 독촉중앙협의회가 조직되고 이것은 이어서 독촉국민회가 되었다. 김제지역도 1945년 연말이 독촉중협이 조직되었다.33) 최주일 김제지부장은 기독교으로 대동청년단장을 겸하였고, 임상교회 한성룡 장로와 금산교회 조영호 장로가 합세하였다.34) 만경교회도 이런 분위기와 함께 했다고 본다.

결국 김제지역에서 해방 직후 좌우의 이념 전쟁이 강하게 벌어졌다. 1946년 3월에는 민족주의민주전선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때 우익청년단체들이 출입을 통제하였다. 이것은 좌우익의 싸움으로 번졌다. 이 모임은 좌익이 우익인사들을 초청하여 중앙에 앉게 하였는데 개회식이 열리자 사회자가 중앙에 있는 비애국자를 제외하고 국기에 경례하자고 제안하여 논란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양측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25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미군이 30명이 출동해서 비로소 종결시킬 수 있었다.35) 1947년 3·1절에는 좌익이 불법집회를 개최한 혐의로 40명을 체포됐다. 그러자 약 200명이 김제경찰서를 찾아가 항의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관 4명이 부상을 입었고, 54명이 구속되었다.36) 1947년 7월 26일에는 여름 작물공출을 위해서 조사 중이던 담당관리 5명이 300명의 좌익 폭도에 의해서 습격당해 4명은 피신했으나 1명은 중상을 당하였다.37) 김제군은 전북에서 좌익이 상당히 왕성한 지역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김제 만경에 도착한 것은 7월 20일이다.38) 7월 23일은 주일이었고, 신자들은 거의 반절밖에 모이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교회 중진들을 박해하고, 건물을 그들의 선전장소나 사무실로 사용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 교회에 인민위원회의 직접적인 간섭은 없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곽영욱 장로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의 책임을 맡았던 강춘길 집사와 다른 여집사들이 반동분자로 몰려 치안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8월 18일 이후 공산주의의 압력은 점점 심해졌다. 곽영욱 장로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곽유근 장로가 좌익과 교섭하였으나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9월 7일경, 신학생 최정열이 미군이 상륙하고 인민군이 퇴각한다는 소문이 듣고 와서 우리가 부역하지 않고 국군 편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반공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일부 신자들이 여기에 가입원서를 냈다. 반공혁명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단원 10명 가운데 4명이 교인이었다.39) 적대세력은 9월 12일 반공혁명단 단원들과 이들의 배후 세력이라고 생각한 김종한 목사, 강성진 장로, 하창조 집사 등 15명을 체포하였으나, 세 사람은 2일 후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반공청년단원들은 전주형무소로 이송되어 9월 23일 처형되었다. 김방서도 나중에 체포되었지만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9월 26일(추석) 다시 김종한 목사와 강선진 장로, 27일에는 강춘길 집사 등을 체포하여 만경에서 처형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경교회에서 15명의 피살자가 나오게 되었다. 당시 만경분주소에서 살해된 사람은 53명이었고, 그중에 지주와 경찰이 포함되었다. 기독교인들도 이들과 함께 공산주의의 위협세력으로 간주되어 살해된 것이다.40)

이같은 인민군에 의한 기독교박해는 단지 만경교회 만이 아니었다. 7월 25일 전주로 파란갔다 돌아온 금산교회 집사 김윤철은 7월 28일 독촉국민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8월 26일에는 대송교회 신자였던 김형배, 김성두, 하치호가 대동청년단과 조선경비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비참한 모습으로 살해되었다. 그 후에 정기봉 장로를 비롯하여 5명의 신자가 살해당했는데, 모두 독촉활동을 하고 있었다. 8월 중순에는 금산교회 교인이었던 지주 김두현이 독촉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그 여파로 8월 27일 사망하였다.41)

이 지역의 죽산면 대창교회도 만경교회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창교회 신자들은 이미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던 중에, 인민군이 의용군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 기독교인이 많이 미국촌이라고 불리던 대창리는 의용군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의용군을 모집하러 간 공산주의자를 묶어 놓고, 죽산면 인민위원회를 공격하였으나 무기를 가진 이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은 대창교회 안덕윤 목사를 장총 개머리판과 창으로 살해했다.42)
 

5) 전남 영광군과 염산교회 피해

널리 알려진대로 한국전쟁 기간에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지역은 전남 영광군이다. 1952년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6·25 피살자 명부』에는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자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데, 전체 59,994명의 희생자 가운데 전남에서 43,500명, 그 중 영광군에서 21,200명, 염산면에서 4,500명이 죽임을 당했다.43) 이것을 보면 전남 영광군 염산면의 피해가 가장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영광군에서 발생한 기독교 피살은 염산교회(77명), 야월교회(65명), 법성교회(7명), 백수읍교회(36명), 합계 186명이며, 아직 미확인된 것도 있다. 특별히 염산교회의 기독교인 피살은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기독교 피해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다.44)

전남 기독교는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1908년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서 염산면 야월리에 야월교회(원래는 염산교회였으나 1847년 마을 명을 따라서 야월교회로 개칭)가 세워졌다. 염산교회는 1939년에 출발하여, 해방을 거치며 성장하던 중에 큰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야월교회가 시작된 동기는 독특하다. 이 지역에 일진회가 생겼는데, 문영국, 정정옥 등이 일진회와 대항하기 위해서 봉산교회에 다니다가 이 지역에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따라서 야월교회는 처음부터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남장로교 유진 벨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염산교회는 이 지역에 사는 이봉오의 부인이 병에 걸려 먼 교회에 다니다가 당시 섬이었던 이곳에 기도처를 세웠고, 해방 후 이것이 발전하여 1947년 염산교회가 시작되었고, 1950년에는 김방호 목사가 부임하였다.45) 당시 전라도를 선교하고 있던 남장로교 선교부는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교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으며, 공산주의를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지역의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신앙이었다.

전남 영광군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대규모의 수리사업과 간척 사업이 시작되어서 이 지역에는 상당수의 지주들이 살고 있었고, 염전을 만들어 상당한 수입을 거두고 있었다.46) 해방 후 처음에는 이런 지주·우익과 농민·좌익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좌우의 갈등이 일어났고, 좌익은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인민위원회는 아직 미군정 부대가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테러를 통하여 공공건물을 점유하고, 사용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불법으로 규정하고 환수를 명하였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의 물리력을 이길 수 없었고, 이때부터 좌익은 테러를 본격화했다.47)

10월 초 대구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곳 영광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미군정 일일보고서에 의하면 1946년 4월 공산당원들은 체포된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서 영광경찰서를 공격했다. 같은 해 11월 3일에 약 1,000명이 포천리에서 역시 경찰서를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4명이 사살되었다. 같은 날 300명은 경찰서를 불태우고, 경찰서장을 심하게 구타하였다. 대사리 근처에서는 600명에서 800명으로 구성된 6개의 공산집단이 외부세력과 함께 경찰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숫자가 피해를 입었다. 11월 4일에 영광 석암에서 농가구와 각목과 돌로 무장한 50명의 폭도들이 경찰서를 다시 공격하였다.48) 이것은 이 지역의 좌익들이 상당한 조직력을 갖춘 무장세력이었음을 말해 준다.

영광군에서는 좌익의 세력도 활발했지만 동시에 우익의 활동도 활발했다. 전남지역에서는 일찍이 최홍종 목사를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시작되었으나 점점 좌익이 이 조직을 장악하게 되었고, 여기에 반발하여 우익은 한민당과 독촉국민회를 만들었다. 특히 광주, 목포, 여수에는 많은 기독교인이 우익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광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연관 관계는 밝히지 못했다. 영광 독촉지부장 조영규는 5·10선거에서 무투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갈등은 5·10선거를 중심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각종 테러가 일어났다. 특별히 한국전쟁을 앞두고 이 지역은 좌익의 특별한 활동기지가 되었다. 윤정란의 연구에 의하면 1949년 1월부터 1950년 6월 2일까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경찰과 남로당 유격대의 싸움은 모두 30회에 걸쳐서 일어나게 된다.49) 특별히 한국전쟁을 앞둔 6월 22일 북한은 해상을 이용하여 주요지역에 정치공작대를 침투시키기 위하여 32명의 유격대를 보냈는데,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이들을 전멸시켰다.50) 차종순은 그가 작성한 야월교회 순교비문에서 이 당시 신고자가 기독교인이며, 이것 때문에 기독교와 인민군의 갈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51)

이 지역에 인민군이 들어온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쯤 뒤인 7월 23일이었다.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따르면 영광의 보도연맹 희생자는 4명이다. 이것은 전남에서 장흥 다음으로 적은 숫자이다.52) 이것으로 염산면 학살을 보도연맹 사건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53) 염산면의 민간인 희생은 전황에 따라 달라진다. 윤정란의 연구에 의하면 6월에는 6명, 7월에는 41명, 8월에는 608명, 9월에는 1,233명, 10월에는 1,143명, 11월에는 268명, 12월에는 51명이다.54) 각 시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피살의 원인을 밝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자세히 보면9월과 10월에 집중적인 학살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염산면의 민간인 피살은 신분문제가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이 지역의 주도적인 가문은 장동의 김씨 집안이었는데, 면장과 학교 교사를 비롯하여 중요한 직책을 가졌다. 이들은 인민공화국 정치에 장애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거의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같은 지역 축장의 문씨도 역시 중요한 가문이지만 주요 직책을 맡지 않았고, 좌익에 어느 정도 협조했기에 피살당하지 않았다.55)

염산교회와 좌익의 갈등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염산교회는 1947년 10월 원창권 목사가 부임하였는데, 그는 담양군 창평면 출신으로 탈미지(John V. N. Talmage)선교사의 영향을 받으며 신앙생활했다. 탈미지는 재림을 강조하는 보수적, 반공적 선교사였다. 아마도 원창권도 이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창평면은 김성수, 김병로, 송진우 같은 한민당 계열 인사의 고향이다. 이런 신앙적·사회적 배경을 가진 원창권은 염산교회에 와서 강력한 반공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이 지역의 좌익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좌익들은 이에 대한 복수로 신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원창권은 더이상 이곳에서 목회할 수 없었다. 그는 1949년 2월 10일 교회를 사임하였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가 되었다. 그러던 그는 1950년 10월 19일 영광군 불갑산 밀재에서 부인과 7명의 자녀와 함께 살해당했다.56) 원창권 목사 사건과 위에서 언급한 한국전쟁 직전에 침투한 유격대 살해사건이 기독교와 좌익의 적대관계 형성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50년 3월 김방호 목사가 부임하였는데,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민족주의자의 가정에서 자랐고, 후에 안수를 받아 영광읍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염산교회에 부임하였다. 인민군이 이곳에 온 것은 7월 23일 주일이었다. 염산교회는 이날 주일예배를 드렸지만, 그 뒤부터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봤다. 현재 기록으로는 9월 말 인민군의 퇴각명령 때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이 지역의 인민군들을 퇴각할 퇴로가 막히자 인근 산으로 올라갔고, 동시에 타 지역의 인민군들이 영광으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인민군과 빨치산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숫자로 불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목포고등성경학교에 다니는 기삼도가 인민군의 패퇴 소식을 듣고, 유엔군 환영대회를 열자고 제안했는데, 김방호 목사는 아직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기삼도를 이상하게 여긴 좌익세력은 10월 8일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김방호 목사는 10월 26일, 허상은 11월 중순에 피살되었다. 이렇게 처형된 숫자가 모두 77명이었다. 야월교회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기독교의 복음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교회이다. 야월교회 신자들의 죽음도 염산교회와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도 상당한 기간을 거쳐서 65명이 살해되었다.

염산교회와 야월교회는 자신들의 수난이 연합군 환영대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9월 29일 연합군이 영광읍에 진주하였다. 이들을 위한 환영대회가 열렸는데, 염산교회와 야월교회 신자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야월교회에서 참여한 숫자는 약 10명이었다. 이것을 본 인민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이들을 죽였을 것으로 추측한다.57) 유엔군이 9월 29일 이곳에 진주하였지만, 이들은 이곳을 그냥 통과하였을 뿐이다. 그후 영광군의 다른 지역은 군경이 들어가 수복했지만 백수읍, 불갑면, 염산면은 좌익세력들이 점령하고 있었다.58) 여기에 남쪽에서 밀려오는 패잔병들도 이곳에 자릴 잡았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고, 남한에서 가장 큰 피해지역이 되게 한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왜 이들 교회가 인민군의 표적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염산면의 기독교회가 우익활동에 앞장섰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또한 이들은 지주계급도 아니었다. 그러나 좌익은 근본적으로 기독교를 친미 이승만 세력으로,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를 무신론 집단이라고 이해했다. 염산면에서 기독교 박해는 이런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흥미 있는 것은 현재 염산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1호로 지정되었고, 야월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제20호 기념사적지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6) 전남 신안지역의 개신교 피해와 문준경

전라남도는 한국전쟁 기간에 가장 민간인 피해가 많았던 지역이다. 그 중 가장 많은 지역이 영광이고, 그 다음이 영암, 신안 순이다. 신안 지역의 피해는 문준경으로 대표된다. 한국전쟁이 남성 중심으로 진행되어 여성의 이야기는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문준경은 이 지역의 기독교 중심인물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 과정 가운데 희생된 인물이다.59) 이 지역의 기독교는 문준경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대표적인 진리교회와 더불어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문준경의 이야기는 한 많은 조선 여인의 이야기이다. 문준경은 암태면의 양반집에서 태어났고, 지도면의 양반집으로 18세에 시집을 갔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는 32살 때 남편이 새 아내를 맞이함으로 조선의 “슬픈 여인”이 되었다. 이 슬픈 여인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성결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시집 식구와 함께 신안군 증도리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는 이 지역의 섬을 돌아 다니면서 섬 곳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섬마을 교회의 어머니가 되었다.

신안군 도서지역 선교는 1907년 남장로교 목포지부 선교사 맹현리(매컬리) 선교사가 시작하였다. 그는 비안도에 장로교회를 개척하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선교를 확장해 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섬에는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60) 증동리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문준경은 “이곳은 오래 전에 장로교회에서 와서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전도를 듣지 않고 핍박할 뿐이어서 할 수 없이 폐지하고 말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61) 장로교가 중심이었던 지역이 문준경을 정점으로 성결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신안군 도서지방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좌익 사상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가 시작되면서 신안군 암태도에는 대대적으로 간척 사업이 진행되면서 신흥지주가 생기게 되었고, 그 가운데 문재철이 있었다. 문준경은 문재철과 같은 수곡리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 문재경과 같은 항렬이다. 1923년 조선에 사회주의가 등장하면서 암태도에는 유명한 소작쟁의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1920년대 중반과 후반까지 이어졌다.62) 문준경은 이 시기에 시집을 떠나 목포로 가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심각한 사상적인 혼란 가운데 있었다. 성결교회는 강력한 반공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문준경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목포 북교동교회의 장석초 목사는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줌으로서 공산주의의 혁명적 평등에 대항하고자 하였다.63) 문준경 역시 자신의 재산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일제 말 한국교회는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기독교를 친미세력으로 간주해서 박해하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성결교회를 일본 천황제도에 대립하는 단체로 간주하였다. 일본은 1면 1교회 정책을 결정하여 여타 교회들을 폐쇄하였고, 성결교회는 반국가단체라며 강제 폐쇄시켰다. 문준경의 증도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빼앗긴 증도교회는 이 지역의 경방단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신안의 도서지역에는 일본이 미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일본군 1개 연대를 배치해 두었다.64)

해방 후 이 지역의 상황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고 복잡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이 지역사회는 여러 방향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서태석을 중심으로 계속 좌익의 활동을 전개해서 공산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다른 하나는 박복영을 중심으로 온건한 입장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어 갔다. 박복영은 기독교인으로서 교회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학교사업을 열어갔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중심인물인 문재철도 문태고등학교를 세워서 실력양성운동에 앞장서고 있다.65) 이런 가운데 목포에서는 이남규가 독립촉성국민회 지부장을 맡았고, 입법의원을 거쳐서 전남지사가 되었다. 이남규는 도지사가 되어 지역교회를 순방하면서 격려하였다. 박복영은 무안에서 우익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66) 문준경은 이런 시대의 변화와 함께 경방단에게 빼앗겼던 예배당을 다시금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7월 하순 인민군이 이 지역 전체를 점령했으나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하였고, 대신 과거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좌익들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사실 좌익들은 일제 말 경방단에서 활동하며 예배당을 빼앗았던 세력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이들은 문준경에게 다시금 예배당을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내려오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좌익세력은 증동리교회에 인민위원회 간판을 붙이고, 사택은 인민위원장이 거처지로 사용하였다. 문준경과 백정희는 그들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문준경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고, 이것이 발각되어 내무서에 연행되었다. 또 다른 죄목은 이곳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양도천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반동분자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결국 본격적인 조사를 받기 위하여 9월 28일 목포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하지만 당시 전세는 역전되었고, 이미 인민군은 퇴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문준경은 증동리에 있는 백정희와 양도천이 걱정이 되어 당시 목포에 있던 이봉성전도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월 4일 다시 증동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미 그곳에 갇혀 있던 사람들과 함께 10월 5일 처형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기독교 대표로 처형된 것이다. 그의 죄목은 “새끼를 많아 깐 암 탉”이었다. 이때 함께 처형된 사람은 20여 명이었다.

문준경은 증도교회뿐만이 아니라 섬 곳곳에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중 그가 제일 처음 개척한 교회는 자신의 남편이 둘째 부인과 함께 살고 있던 임자면 진리였다. 문준경은 이곳에서 이판일을 만났고, 이판일은 문준경의 사역의 파트너로서 진리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이판일은 그의 동생 이판성과 함께 목포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 그것은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기독교인인 것과 동시에 그의 차남이 경찰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67) 하지만 인민군은 이미 퇴각하였고, 따라서 이들은 다시 임자면 진리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10월 4일 수요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일제히 체포되었고, 그 다음 날 이판일 장로 가족 13명과 다른 교인 7명,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금 28명의 신자가 살해되어 모두 48명이 살해당한 것이다.68) 이것은 이들만의 아픔이 아니었다. 임자도 13,000명의 주민 가운데 21%인 2,700명이 한국전쟁을 통하여 사망한 것이다.

당시 이판일의 장남 이인재는 이미 결혼하여 목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해군이 임자도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인재는 안내원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군인들은 이 지역의 공산당들을 약 10명을 체포하였다. 이인재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던 문준경 전도사가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고, 책임자에게 이들을 살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뒤 이인재는 마을의 이장이 되어 부역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고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이곳 주민들은 성자가 왔다고 환영하였다.69)
 

7) 경남 울산의 월평교회 피해

해방 후 울산에는 좌우익이 중앙 조직의 하부기관으로 나누어져 활동했다. 하나의 특징은 도심에서는 우익단체들이, 변두리에서는 좌익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우익단체로는 건국청년단, 독촉국민회, 의용소방대 등이 있었는데 청년들이 주로 활동하고 지주와 상공업자 등의 지역유지들 도움을 받았다. 특히 1946년 신탁문제로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좌익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촉전국청년연맹이 조직이 되었고, 그 산하에 방어진과 언양에 지부를 두었다.70)

장성운은 “울산의 빨치산 형성”에서 울산에 좌익들이 다를 지역보다 많은 이유가 일제 강점기에 생겨난 소작인들의 불만이 해방 후에도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71) 이들의 불만에 동조하고 불을 지핀 좌익들은 해안 마을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대구 10월 폭동은 울산 좌익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여기에 호응하기 위해 방어진과 서생·언양을 중심으로 민중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72) 10월 폭동을 계기로 미군의 탄압이 강화되자 울산 좌익들은 대곡리 야산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1951년 7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보면, “6월 중 주야임에도 불구하고 가진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공개소탕에 노력한 결과 多大한 전과를 거두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소탕 작전에서 공비 62명 사살과 생포 6명 등을 사살했고, 소총 9정과 수류탄은 20개 등을 압류했다.73) 1952년 3월 8일 오후 3시, 대곡리 대곡초등학교 뒷산에 잠입한 공비 6명을 사살하고, 같은 날 상북지서에서는 능봉산 이천리 부락에 들어온 공비 4명을 사살했다.74) 이런 적대세력에 대한 일련의 소탕 작전은 그만큼 울산이 좌익들의 중요한 활동 근거지였음을 의미한다.

월평교회에서 조사로 있던 우두봉이 1948년 4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살해됐다. 월평교회 우재만 집사는 이미 지역유지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의용경찰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적대세력에 표적이 되었다. 자신이 좌익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밤에는 인근 밭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1950년 2월 25일 그가 몸이 불편해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좌익들이 들어와 그를 개머리판으로 내려치고 밧줄로 묶어 가까운 월평저수지로 데려가 인민재판한 뒤 사살시켰다. 그리고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의 동생 우성만도 붙잡혀 죽었다. 월평교회 집사 정두란, 신자 조말복과 조재년은 6월 30일 금요일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좌익들이 습격해 세 사람을 마당으로 끌어내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사살했다. 자리에 함께했던 조괄문 전도사는 강단 기도실 문으로 피신했고, 부인 정분순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기절했다가 살아났다. 총에 맞기 전에 쓰러져 있다가 살아난 우인복 학생은 후에 울산 남산교회 장로가 되었다.75)
 

8) 강원도의 장흥교회·철원제일교회 피해

38선 이북에 위치한 철원은 해방 직후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종교 박해가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철원교회 김윤옥 목사와 장흥교회 박성배 장로를 중심으로 철원지역의 기독교 청년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며 1946년 3월 반공비밀결사 단체인 신한청년회를 조직했다. 점조직을 확대해 나가며 내무서를 습격하는 등 반공운동을 전개하다가 40여 명이 보안서로 끌려갔다. 적대세력들은 1946년 8월 25일 새벽 5시 철원군 내무서원을 중심으로 장흥 1리를 포위하고 가택수색에 나섰다. 마침 철원제일교회는 지방사경회가 열리고 있었고, 마지막 새벽기도회를 드리는 중이었다. 기도회가 끝나자 적대세력들은 김윤옥 목사, 장흥교회 박경룡 목사, 이해성 집사와 박성배 장로를 포함한 청년 30여 명의 청년과 도합 40여 명을 포승줄에 묶어 연행하였다. 그들은 배후 인물로 박경룡 목사를 지목했다. 3일간의 심문 뒤에 관련이 없음을 확인한 보안서는 그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어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떠났다. 박경룡 목사는 일제 말부터 1920년에 설립된 장흥교회를 담임하면서 1945년 10월 한국에서 최초로 대한수도원을 세웠다.76) 그러나 그 모든 사역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연금생활을 하기도 했던 유재헌 목사가 1946년 3월 간사이성서신학교 동창들이 있는 철원에 왔다가 수도원운동에 합류했다. 박경룡 목사와 함께 수도원 운동을 성장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그 역시 수도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유재헌 목사는 무신론의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적룡과 사탄으로 규정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부각하고, 공산주의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런 유재헌 목사의 시각은 대한수도원의 구국 신앙의 토대가 되었고, 철원지역에서 1946년 3월 조직된 신한청년회의 반공운동과 자유민주주의 운동에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77) 유재헌 목사의 자리를 전진 전도사가 이어받았다. 유재헌 목사가 대한수도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원산중앙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전진 전도사를 만났다. 유재헌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은 전진 전도사는 그를 따라 대한수도원에 합류했다. 그 뒤에 유재헌 목사가 떠나간 빈자리를 전진 전도사가 이어 받았다.

눈여겨볼 인물은 철원제일교회 부목사 김윤옥이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병조의 아들이다. 독촉중협 임원인 이시영은 그를 철원으로 파견하고 이남 지지운동을 전개하는 임무를 맡겼다. 김윤옥 목사는 교인들에게 반공사상을 주입하고 민주정부를 지지하도록 독려하며, 대한수도원의 전진 전도사에게 행동 지침을 전달하였다. 당시 신한청년회는 총 46명의 회원으로 구성됐으며, 대부분 철원 동송읍과 갈말읍에 거주하며 장흥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체포된 회원 중에서 옥사 7명, 도피 중 사살 2명, 피랍 2명이고, 고문 후유증으로 다수가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는 월남했다.78) 또한 장흥교회 박경룡 목사 후임으로 부임한 서기훈 목사는 철원에 대한청년단을 조직했다. 그는 고문으로 선임된 그는 온갖 위기 속에서 살아남았다가 1950년 12월 정치보위에 붙잡혔다. 그리고 1951년 1월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하기 전날인 8일 암소고개라는 골짜기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보인다.79)

 

IV. 한국전쟁 시기 개신교 피해 분석과 성격

1. 한국 기독교 피해분석

한국전쟁 중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은 처참하였다. 북한이 3개월간 남한을 점령했다가 본격적으로 퇴각하던 1950년 9월 말을 전후로 가장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다.80) 기독교인들이 좌익세력에 의해서 탄압을 받은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첫째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공산화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가운데서 일부 신자들이 우익에 가담하여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정치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분명한 반공사상을 가졌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유물론이다. 이런 생각은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받아 들이고 있다. 이런 입장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좌익에게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충남 병촌, 완주 동상, 신안 임자 등의 신자들을 보면 이들은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집단학살을 당했다. 특별히 병촌교회와 진리교회는 성결교회에 속하는데, 이들은 기독교의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말세에 나타나는 붉은 용의 세력이라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병촌교회의 김주옥 집사에게 “신자라 사상이 완고하니 너는 사상문제”로 죽어야 한다며 사형을 판결했다. 전북 완주의 마재교회(현 신월교회) 박용순의 아들 박상락은 당시 14세 나이였다. 그는 그때 적대세력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집사까지는 모두 죽였다”라고 하며 아픈 마음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둘째로 기독교인들은 각종 우익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들에게 반공은 곧 애국하는 것이고, 국가를 위한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인민군이나 좌익들과 대척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중앙 독촉국민회만 아니라 지역 독촉국민회에 대거 참여하며 중요한 임원을 맡았다. 또한 청년단원으로 활동하거나 반공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행동이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애국활동으로 확신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기독교인들에 호의적일 수 없었다. 북한군이 내려와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기독교인들을 회유와 협박했으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그 모든 것을 거부했다. 전북 익산 황등교회의 변영수 장로는 익산의 대동청년단장이었으며, 전북 완주 봉상교회의 오기영 장로는 이 지역의 독촉국민회 인사였다. 전북 완주의 마재교회 주일학교 교사이면서 소방대장이었던 박용순 집사, 소방부대장이며 대동청년단 대장인 박복수, 동상면장인 김태환 집사도 다른 신자들과 함께 9월 27일 신월 괴비소에서 살해당했다. 9월 10일 김제 내무서에서는 만경교회 교인들의 동태를 조사하다가, 12일 최정렬 집사(신학생), 곽옥진, 류금식, 송은숙 청년은 “면내에 조직된 반공혁명단”에 가입하였다는 명목으로 9월 27일 전후에 전주 형무소에서 살해됐다.81)

셋째로 좌익들은 월남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이었고, 그들을 박해했다. 북한 정권의 기독교 활동의 방해와 핍박을 피해 많은 기독교인은 월남을 택했다. 특히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으며 보수적인 신앙을 지켰던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권의 방해에 조선민주당을 결성하고 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 소군정 하에서 각종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정권을 대적하기 어려웠다. 천주교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반공산주의 입장이었던 교황 비오 13세의 영향에 따라 반공주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세워 모든 기독교를 통합하려는 시도에 보수적인 목회자들과 천주교는 가입을 거부하고 수난을 받거나 월남을 택했다. 그들의 경험은 남한교회가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남한의 좌익 세력은 월남 기독교인들을 무척 싫어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월남 기독교인들을 적발하고 그들을 공격했다. 전북 완주 삼례의 임광호와 김주현은 월남자로서 피해를 당했으며, 문준경의 경우도 그가 월남한 양도천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넷째로 예배당 사용문제를 놓고 기독교와 인민위원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인민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여 남한을 공산주의화하려고 했을 때, 이들은 기독교 예배당을 자기들의 사무실이나 강연 장소로 사용하려고 했다. 전남 신안 증도교회는 일제 말에는 일제에 교회를 빼앗겼으나 해방 후 다시 되찾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기간에 다시 교회는 인민위원회로 사택은 그들의 주거지로 변했다. 전북 완주의 마재교회(현 신월교회)의 김성녀 집사는 예배당을 공산군이 본부로 사용하고자 할 때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 이유로 전주교도소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9월 27일 퇴각하던 적대 세력들에 의해 신자들과 함께 신월 괴비소로 끌려가 집단살해됐다. 김제 만경교회의 경우에도 좌익들은 예배당 건물을 시시탐탐 노렸다. 교회를 좌익의 사무실로 사용할 경우 거기에는 예외없이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시진을 걸아 놓았다. 이런 일들은 전국의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섯째로 기독교는 미국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친미세력으로 간주되었다. 한국전쟁은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이 참전하였고, 이 전쟁은 공산주의자들과 미국의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미제의 앞잡이라고 주장했다. 대구에서 피란을 가던 이영식 목사가 좌익에게 체포된 이유가 목사는 미제의 스파이로 간주했다. 전북 완주 동상 마재교회의 김성녀 집사도 선교사와 알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하였다. 이들은 신자가 많은 지역을 “미국촌”이라고 부르며, 집중적으로 감시하였다.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현 백산중앙교회) 오병길 전도사는 인민재판에서 10월 19일 미국과 내통하는 스파이로 판결받고 창으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다. 특별히 이것은 북한이 미국의 폭격으로 완전히 붕괴된 다음 더욱 강화되었다.
 

2. 한국 기독교 피해성격: 반공정신과 이웃사랑의 이중주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강력한 반공주의적인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인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반대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복음도 실천해야 한다.

우선 한국 기독교는 단지 소극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와 싸웠다.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독촉국민회나 대동청년단과 같은 기존의 정치단체 외에도 스스로 반공 정치단체를 만들어 직접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그중에 몇 가지 경우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 철원은 38선 이북에 속하였다.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철원의 기독교인들은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연계하여 신한청년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서울의 독립촉성국민회 이시영은 그와 잘 알고 있던 33인 중의 한 사람인 김병조의 아들 김윤옥 목사를 철원에 파견하였다. 그는 철원제일교회의 부목사로 일하면서 장흥교회 박성배 장로를 포함하여 많은 청년과 함께 1946년 3월에 46명의 회원으로 신한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 단체의 비밀이 노출되어 그들은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 옥사한 사람이 7명, 도피하다가 사살된 사람이 2명, 피랍된 이가 2명이었다.82) 이후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가운데 대한수도원을 창설하여 기독교 구국운동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사건 이후 좌익세력들이 경주로 밀려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 5일 밤 12시를 기해서 밀려오는 좌익과 기존의 좌익이 합세하여 내동면의 우익세력을 제거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경주 구정교회의 청년들은 이곳의 YMCA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47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여기에 맞섰고, 결과적으로 이곳에서는 좌익 폭동은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이곳 경주 내동면에는 구정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되었고, 이 결사대는 독촉의 한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구정교회는 이 지역의 우익의 중심이 되었다.83)

1950년 한국전쟁 가운데 전북 김제 만경교회와 죽산면 대창교회 등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좌익과 싸운 모습을 보았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에서도 유엔군이 진격해 오자 적극적으로 환영하다가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수동적인 반공보다는 상당한 부분 적극적으로 반공 활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쟁 가운데 한편으로는 대한민국과 자유를 위해서 싸워야 했지만, 동시에 억울한 죽음을 피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다. 여기에 그 몇 가지 경우만 예를 들겠다.

제주 4·3사건 당시 조남수 목사의 경우 토벌대장 문형순과 협상하여 300명의 인명을 살렸고, 150차례의 선무활동을 통하여 그 외에도 많은 인명을 구했다. 이같은 중재 화해의 노력은 여순사건에서도 드러난다. 널리 알려졌듯이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해자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손양원 목사는 인민군에게 살해되었다.

한국전쟁 가운데 기독교공동체는 가능하면 복수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일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충남 병촌의 경우 가해자를 용서하고 복수하지 않았다. 전북 정읍 두암교회의 경우도 가해자를 찾아가서 용서하고 그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 같이 신앙생활하였다.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전남 임자면 진리교회이다. 이곳에서 피살당한 이판일의 아들 이인재는 해군이 이곳에 진격하여 보복할 기회를 주었는데, 이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 동네의 이장이 되어 분열된 마을을 하나로 회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위에서 철원지방의 신한청년회 사건을 언급하였다. 원래 신한청년회 회원들은 나중에 대한청년단이 되었는데 9·28 수복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게 되자 이들에게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좌익을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해당 지역에 공산당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유족들이 100여 명에 달하였다. 대한청년단원들은 이들을 장흥교회 앞 공회당에 모집하고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장흥교회의 서기훈 목사는 청년들에게 자신은 “십자가의 사랑”을 가르쳤다고 말하면서 신자가 이렇게 행동하면 자신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로 장흥교회 신자였던 대동청년단원들은 여기에서 보복을 멈추었고, 서기훈 목사는 보복당한 좌익의 가족들을 방문하며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였다. 얼마 후 1·4후퇴 때, 이곳을 찾아온 좌익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 우익을 복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전세가 바뀌어 좌익이 38선 이북으로 밀려나게 되자 다시 서기훈 목사는 인민군들에게 체포되었고, 1951년 1월 8일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훈 목사는 끝까지 사랑으로 행동하려다가 처형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 기독교의 행동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반동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물리력으로 훼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의 반공 입장은 분명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가능한 대로 그들을 사랑으로 포용해야 하며,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적대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조남수, 손양원, 이인재, 서기훈과 같은 분들은 분명한 반공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좌익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자세는 이념으로 분열된 한국사회를 하나로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84)

 

V. 본 연구의 기여 및 발전적 제언

지금까지 한국전쟁 전후로 적대세력에 의한 기독교 박해와 피해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역사적 배경과 그에 따른 실례를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연구로 다음과 같은 점들에 기여했다고 본다.

1. 본 연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밝힐 수 있다. 해방공간은 민주공화국을 세우려는 세력과 인민공화국을 세우려는 세력이 서로 피나는 투쟁을 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자유 대한민국을 세우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각종 우익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기독교가 대한민국 건국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다.

2. 본 연구는 한국전쟁 전후의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을 해방 직후부터 통시적으로, 공시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공산주의에 의한 기독교 박해를 보다 근원적으로 조사하고자 했다. 이 결과에 의하면 한국전쟁 전후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는 친미, 반공세력으로 보고, 이를 제거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된 행동에 기안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적대세력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것으로 보인다.

3. 본 연구는 일반학계의 연구와 기독교계의 연구를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 기독교인의 피해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일반학계는 기독교 박해에서 종교적인 요소를 간과하였으며, 기독교학계는 이것의 정치적인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박해 원인으로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을 수호하려는 측면과, 종교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는 순교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4. 본 연구는 구체적인 사례를 선정하여 기독교 피해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해방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제적, 국가적 좌우의 갈등이 각 지역 단위까지 확산하였음을 확인했으며, 아직도 그 갈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기독교는 종교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로 공산주의를 반대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친미 반동세력으로 규정하고 박해하였다. 아울러서 각 지역에서 교회들이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반공노선과 더불어서 서로 화해하고 치유하려는 노력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5. 본 연구는 지금까지 각종 자료에 나타난 피해자 명단을 수집하여 종합적으로 제공함으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정부자료, 교단자료, 피해 교회자료, 개인 연구 등에서 각각 산발적으로 산재한 자료들을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나로 종합하였고, 가능한 대로 개개인의 인적 사항도 명기해서 앞으로의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본 연구 및 조사의 목적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기독교의 피해 상황을 개략적으로 연구하여 그 역사적 배경과 구체적 사례, 그리고 피해자 명단을 작성한 것이었다. 따라서 본 연구 및 조사는 그 출발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한국전쟁 전후의 기독교 피해는 한국 현대사의 진실을 밝히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주요한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현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보도연맹이나 여순사건과 같은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가운데서 한국 기독교의 피해도 이에 못지않게 조사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한 것을 국가가 외면한다면 이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를 간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2.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와 기독교사의 학제 간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을 한국사와 한국교회사를 이해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사회학이나 지역사 관련 연구자와 함께 이 연구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래해서 한국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내적인 긴장 관계를 이해하면서 이것이 한국 정치사와 지역사와 관련하여 조사 연구해야 이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3. 전국에 수많은 피해 교회 가운데 몇 개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강원도 철원의 경우는 해방 직후 기독교와 좌우의 갈등, 충남 병촌의 경우는 신분간의 갈등, 마을간의 갈등, 이념적인 갈등이 복합적으로 내포되었으며. 전북 완주와 전남 영광의 경우는 인민군이 퇴각 이후에 미수복지구로 남아있었고, 전남 신안의 경우는 피해 이후의 좌우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경북 경주의 경우 대구사건 이후 기독교와 좌익의 갈등을 보여 주고 있다.

4. 현재 한국 기독교의 피해 상황에 대해서 정부, 교단, 개인 자서전 등 많은 자료가 있다. 이런 자료들을 모두 종합해서 이것을 정리하는 서지적인 연구 및 조사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까지 연구의 장점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특별히 많은 기독교인이 한국전쟁과 관련된 자서전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런 것들을 모아서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5. 기독교 순교자 관련 단체들에 대한 조사 및 활동 상황도 조사할 필요가 있다. 현재 각 교단별로 순교자기념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이들의 활동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피해 교회들은 각종 기념관을 만들어서 이 당시의 피해를 알리고 있다. 우선 정부는 개교회나 교단들이 이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6. 국가가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희생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각 교단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순교자 기념사업을 지원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의 피해는 해당 단체들의 자체적인 사업으로 국한되어 있다. 이 당시 기독교의 피해는 종교적일 뿐만이 아니라 국가적이기 때문이다.

7.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구술자료를 남기는 것이다. 이미 많은 분이 작고했지만, 아직도 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 그들과의 면담을 통해서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자료로 남겨야 한다.

8. 한국전쟁 가운데 피해사례만 아니라 서로 화해하고 치유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본 연구는 이미 한국 기독교가 피해를 최소화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밝히고,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일부 사례일 뿐이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조사가 필요하다. 아울러서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던 사례들이 있다. 이런 연구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9. 피해자 가족의 상황을 조사하고, 일본 징용자나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자와 같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을 해야 한다. 현재 정부는 일본에 의한 피해와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에는 많은 관심과 함께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미약하다. 피해자 유가족들과 면담한 결과 전쟁 이후 이들의 삶은 매우 비참했으며, 자신들의 아픔에 대한 국가권력의 무관심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0. 이 같은 연구는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해방공간에서 좌우 투쟁이 있었고, 한국전쟁 과정에서 자유민주국가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분명해졌다면 이제는 그 범주 안에서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많은 억울한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합당한 조치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주(註)

1) 김남식, 『남로당 연구』, 455. 
2) 국사편찬위원회, “명령-반동분자 취급처리에 관하여,” 『북한관계사료집 16』, 215-216.
3)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114. 여기에는 독촉국민회 기독교인 명단이 있다. 
4) 대한민국건국10년지 간행회 편, 『대한민국 건국 10년지』 (경향신문사, 1958), 1052.
5) 2021년 11월 17일 윤석규 증언. 
6) 『미군정 정보보고서Ⅳ』, 252. 윤석규의 증언에 의하면 서북 청년단원은 이 지역에 자리잡고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7) 최태육은 개전 직후 이 지역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단 학살 당했다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 쿠키뉴스 2010년 6월 24일 자를 인용하고 있는데, 해당 기사에는 보도연맹이 나오고 있지 않다.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424, 각주 1310 참조. 
8)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159.
9) 김광동, “한반도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 179-180.
10)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424-425.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238.  
11) 2021년 11월 17일 병촌교회 담임목사 이성영 증언.
12) <동아일보>, 1950.11.20. 이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상태는 비행기를 몰고 성동면 하늘을 돈 적이 있고, 대규모의 학살 이후에 이곳 사람들이 서울로 가서 그를 직접 잡았다고 주장한다. 2021년 11월 17일 윤석근 증언. 
13) <기독신문>, 2019.7.16.
14) 전병호, “맥커첸 선교사의 놀라운 전도력,” 「기독교사상」 676(2015), 207-227 참조. 
15) 박상락, 『아직도 마르지 않는 눈물』 (신앙생활사, 1999), 75-76.

16) 『한국 기독교순교자 기념관 데이터베이스(미간행)』 참조.
17) 정진석, 『6. 25전쟁 납북』 (기파랑, 2006), 230-232. 납북인사 가족 협의회 DB.
18) 김남식, 『남로당연구』, 459; 이태, 『남부군』 (두레, 2919), 281-282. 
19) <관보>, 1951.9.24.
20) <대구매일>, 1952.4.9., 『자료대한민국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DB).
21) 『미군정 정보보고서 Ⅰ』, 180, 195.
22) 『미군정 정보보고서 Ⅱ』, 344; 『미군정 정보보고서 Ⅲ』, 33, 43.
23) 『미군정 정보보고서 Ⅱ』, 344.
24) 『미군정 정보보고서 Ⅲ』, 186.
25)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열전』, 314. 김헌곤은 23명의 희생자를 낸 전북 정읍의 두암교회 윤임례 잡사의 손자다. 가족 7명과 친척 15명이 1950년 10월 26일 살해됐다.
26) 김헌곤 편, 『한국교회순교자열전』, 305-307.
27) 김헌곤 편, 『한국교회순교자열전』, 314.
28) 이를 밝힌 홍성근은 정연행 전도사의 손자로 당시 초등 4학년이었고 직접 목격하거나 들은 내용이라고 한다. 2021.10.6. 오후 3:30 통화.
29) 김헌곤 편, 『한국교회순교자열전』, 311.
30)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2010), 36.
31) 김방서, 『흑암의 세계(미간행』 (1980), 5; 이재근. “‘교회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과 김제지역의 개신교,” 「한국 기독교와 역사」 54(2021), 218-219. 
32) 이윤정, “한국전쟁기 지역사회와 경찰활동: 전라북도 김제군을 중심으로” (성신여대 박사학위논문, 2018), 28.
33) 이은선, “배은희목사의 서울·전북지역 정치활동,”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활동』 (선인, 2018), 330.
34) 이은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조직과 기독교,” 「한국 개혁신학」 55(2017), 211-217.
35) 『미군정 정보보고서Ⅱ』, 277.
36) 『미군정 정보 보고서Ⅲ』, 757.
37) 『미군정 정보 보고서Ⅳ』, 356.
38) 김방서가 일기 형식으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흑암의 세계(미간행)』에 기초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인민군 치하에서 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39) 만경교회, 『교회록(미간행)』 참조. 
40)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69-382; 이재근. “‘교회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과 김제지역의 개신교,” 222. 
41)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45, 360-362, 379; 이재근. “‘교회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과 김제지역의 개신교,” 223-224.
42) 김방서, 『흑암의 세계(미간행)』, 14; 이재근. “‘교회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과 김제지역의 개신교,” 224. 
43)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열전』, 261.
44) 본 연구의 93페이지부터 기록된 희생자 명부 참고.
45)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124.
46) 박정석, “전쟁과 폭력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기억,” 『전쟁과 기억』 (한울 아카데미, 2010), 47-49.
47) 박정석, “전쟁과 폭력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기억,” 49. 
48) 『미군정 정보보고서 Ⅲ』, 277.
49)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133.
50)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136. 
51)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순교비의 사회적 종교적 역할,” 『전쟁과 기억』 (한울 아카데미, 2010), 225. 
52)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161; 보도연맹 사건과 6·25 민간인 희생자의 상관관계는 보다 깊이 연구할 주제라고 본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이 경남 1551명, 경북 1438명인데 비하여 전라도는 전북 54명, 전남 438명, 충남 273명이다.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사람이 많은 경상도 보다 보도연맹사건 희생자가 적은 전라도가 민간인 희생자 숫자가 많다는 것은 이 둘과의 상관관계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53) 김경학은 “인민군이 진격해 오자 경찰과 우익인사들은 퇴각하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학살한다.”고 주장한다. 김경학, “전쟁과 폭력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기억,” 『전쟁과 기억』 (한울 아카데미, 2010), 51. 그러나 윤정란은 지역인사와의 면담을 통해서 보도연맹 사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148, 각주 91.
54)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97. 
55) 김경학, “전쟁과 폭력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기억,” 17-25.
56) 김헌곤 편저, 『한국교회 순교자열전』, 207-208. 기독교인으로 독촉광주지부문교부장에 원창규가 있는데, 그가 원창근과 관련이 있는 인물인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은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조직과 기독교,” 264. 
57) 전남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희생관련 최종결과 보고서(전남 영광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 64, 467;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연구,” 427-428. 윤정란은 이런 주장은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현장 조사를 통해 당시 그런 환영대회를 열 상황이 못된다는 것이다.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146. 윤정란은 아마도 이 환영대회가 염산면에서 일어난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환영대회는 영광읍에서 일어났고, 여기에 신자들이 참여한 것이다.
58) 김석학, 임종명 공저, 『광복 30년』 3(전남일보사, 1975), 312;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137.
59) 본 논문의 문준경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박명수, “한국 근대사와 문준경,” 「성결교회와 신학」 35(2016)에서 가져 온 것이다. 문준경에 대한 전기로는 이현갑, 『순교자 문준경』 (도서출판 청파, 1990)가 있다.  
60) 김수진, 『예수께서 오신 아름다운 섬: 비금도 기독교 100년사』 (도서출판 진흥, 2008) 참조.
61) 문준경, “후증도교회성전건축긔,” 「기쁜소식」 (1937년 7/8월), 27.
62)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편찬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참조;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정병준, “암태도 소작쟁의의 주역의 세 가지 길: 서태석, 박복영, 문재철,” 「한국 민족운동사 연구」 51 (2007); 박찬승,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과정,” 「한국 근현대사 연구」 54 (2010) 참고.
63)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 『성결교회 인물전』 2집 장석초 편 참조.
64) 김수진, 『예수께서 오신 아름다운 섬: 비금도 기독교 100년사』 참조.
65) 정병준, “암태도 소작쟁의의 주역의 세 가지 길: 서태석, 박복영, 문재철,” 참조.
66) 박복영은 한국전쟁 중에 아내와 7명의 자녀를 잃었다. 정병준, “암태도 소작쟁의의 주역의 세 가지 길: 서태석, 박복영, 문재철,” 307. 자세한 내용은 정양규, “독립투사를 박복영 옹을 찾아서,”(하) <삼남교육신문>, 1970.7.20.
67) 이다니엘 편, 『생명의 불꽃: 현대교회의 순교자 이판일 장로의 신앙과 순교사』 (도서출판 요한: 1996), 53, 120. 
68)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274. 
69)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275. 
70) 장성운, “울산의 빨치산 형성,” 「울산학 연구논총」 제15호(2020), 61.
71) 장성운, “울산의 빨치산 형성,” 65-66.
72) 울산대학교, 『울산청년운동과 김진수』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7), 20.
73) “공비소탕공훈서표창,” <동아일보>, 1951.7.10. 이 작전에는 울산경찰서를 비롯한 산청경찰서와 사천경찰서가 투입됐다. 
74) “공비 11명 사살, 울산서 하루에,” <동아일보>, 1952.3·11.
75)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열전』, 321-323.; 장성운, “울산의 빨치산 형성,” 96-97.
76) 유재헌 목사는 1945년 10월 장흥교회 성도들이 순담에 기도실을 짓고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한국에 첫 기도원이 탄생했다. 조선혜, “십자가의 사람 서기훈 목사,” 『동부연회 순교자열전』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320.
77) 조선혜, “십자가의 사람 서기훈 목사,” 322-323.
78) 조선혜, “십자가의 사람 서기훈 목사,” 323-327.
79) 조선혜, “십자가의 사람 서기훈 목사,” 330-335.
80) 김광동, “한반도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 192.
81) 이외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전북 군산의 원당교회와 해성교회를 세운 정연행 전도사는 옥구군애국부인회 회장과 전북여전도회 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군산을 점거한 4사단 공산당은 원당교회를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정연행 전도사에게 “예수 믿지 말고 여성위원장”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거절하자 일제 강점기에 공산주의자들을 개종시켰다는 명목으로 9월 28일 정연행 전도사 일가족과 친척을 포함한 신자 21명을 집단살해했다. 전북의 두암교회도 김용은 전도사의 농민대상 반공교육이 문제가 되어 10월 26일 유아를 포함해 26명의 신자가 살해됐다.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참조. 
82) 조선혜, “십자가의 사람, 서기훈목사,” 『동부연회 순교자 열전』, 323-326.
83) 『구정교회 60년사』, 109-127.
84)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모습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용문산기도원을 만든 나운몽은 한국전쟁 시기에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인민군 소대장이 조용히 다가와 자신의 어머니가 전쟁터에 나가서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라고 해서 석방시켜 준다고 하면서 통행증을 발급해주어 석방되었다고 한다. 나운몽, 『살기도 싫고 죽기도 싫었다』, 207-209; 부흥사 이성봉의 경우 목포에서 체포되었는데, 자신을 체포한 사람이 처형 직전에 자신이 과거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석방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생명의 말씀사, 1993), 106-107; 그러나 많은 경우 공산주의자들은 위에서 손양원, 정연행, 서기훈 목사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의 사랑을 원수로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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