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목회·신학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②
박명수 교수 논단
2022년 10월 19일 (수) 11:20:56 박명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본 연구는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연구책임자 박명수)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2021년 연구한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탄압과 학살연구] 연구중 개신교에 관한 부분을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3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필자 주>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①  

박명수 / 서울신대 명예교수

   
▲ 박명수 교수 

II.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박해의 역사적 배경


4. 대한민국의 건국과 그 저항: 단선반대운동

소련은 미소공위를 통해서 친소적인 임시정부를 세우고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김구와 같은 반소인사를 임시정부에 참여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 주도하에 자유롭고, 독립된 민주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미국은 이런 정책을 완성하기 위해서 더 이상 미소공동위원회 체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1947년 여름 제2차 미소공위 동안에 반탁인사들을 배제하는 임시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같은 해 가을에 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반도에 보통선거를 통해서 민주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을 결의했다. 소련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1947년 1월 이 선거를 위해서 내한한 유엔임시위원단의 방북을 거부하며 유엔의 한반도 전체 선거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엔은 2월에 열린 유엔소총회를 통하여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고, 다음에 북한도 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 단독선거문제는 남한의 정치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원래 우익이었던 김구는 단독선거는 반대하고 김규식과 함께 남북지도자회의를 시도하였다. 반면 독립촉성국민회는 이승만과 함께 단독선거를 지지하였다. 많은 우익단체가 이승만과 김구를 지도자로 모셨는데, 김구가 단독선거를 반대하자 여기에 실망해서 김구를 비판하고, 이승만을 지도자로 선택하였다. 독립촉성국민회는 더 이상 김구를 지도자로 모실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이승만의 노선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김구는 1948년 3월 월남민이 모인 대회에서 연설단에서 추방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통하여 통일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헛된 환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촉국민회와 기독교인들은 단독선거를 지지하였다.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진행되는 상황에 이르자 북한은 대대적인 반대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사실 북한은 이미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정식으로 출범하였으며, 유엔에 한국 문제가 상정된 1947년 가을에는 헌법을 만들고, 군대를 정비하여 1948년 3월에 정식으로 헌법을 공포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렇게 북한은 한편으로는 북한에 단독정부를 만드는 한편, 남한에서 진행되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을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김구와 김규식을 남북지도자회의로 불러내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게 만드는 한편, 소위 2.7 투쟁을 통해서 남한에서 대대적으로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남한의 좌익들은 “남조선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반대 전면투쟁위원회”을 만들고, 친일파 숙청, 무상몰수 무상분배, 인민위원회에 권력이양, 조선인민공화국 건설 등을 외치며 전국적으로 농성을 시작하였다. 서울에서는 철도파업, 경남에서는 부두노동자 파업, 경북에서는 45개소에서 5만 5천 명의 시위 등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폭동이 일어났다.1) 이것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남한에 공산국가를 만들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개입으로 이런 폭동은 성공하지 못했고, 대부분 사전에 발각되어 한국 경찰에 의해 제압되었다. 북한도 2·7투쟁은 실패였다고 판단하였다.2)

유엔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32:2로 남한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반대도 거셌다, 전북에서는 5개 군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나 경찰관 3명, 관공리 1명, 양민 1명 폭도 19명 합계 25명이 사망했다.3) 이어서 3월 1일에는 전남지역에 폭동이 일어나 민간인 24명, 경찰 18명, 우익청년단 19명이 사망하였다. 이런 일들은 경남과 경북에도 일어났다, 단독선거에 대한 반대는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1948년 5·10선거를 전후해서 좌익들은 최선을 다해서 투쟁을 벌였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와의 마찰도 일어났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북 안강지역에서는 대구 10월 사건 이후 좌우익의 싸움이 있었다. 좌익은 경찰의 진압으로 산속으로 숨어서 투쟁을 지속적으로 했다. 이 싸움은 5·10선거를 앞두고 다시 재현된 것이다. 좌익 세력은 5월 안강지서를 방화하고,4) 대동청년단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심만길을 죽이고, 이어서 5월 25일 수요일 저녁 예배를 마친 육통교회로 찾아와 심능양 장로에게 교인들 명부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였고, 이것을 거부하자 그를 살해하였다.5) 이런 상황을 보고 심능양의 아들 심의진은 총을 소지하고 경찰대, 서북 청년단등과 함께 대동청년당의 단장으로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희생자가 생겼다.6) 좌익은 여기에 대한 복수로 6월 10일 다시 몰려와서 심의진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그는 도망쳤다. 그 후 심능양의 유족들은 이곳을 떠났다. 안강지역의 기독교 지도자이며, 우익의 중심인물은 심능양 장로는 좌익으로 의심받는 손병윤을 구해주기도 했던 도량이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좌익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2·7투쟁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제주 4·3사건이다.7) 제주도는 미군정이 제일 늦게 실시된 지역이다. 해방 직후 제주도는 좌우익이 합작하였지만, 점점 좌익이 강해져 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미군정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은 제주도에 있던 좌익과 해방 후 일본에서 들어온 조선인들이 여기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좌익이 강했다는 증거는 1946년 가을에 실시한 입법의원 선거에 잘 나타났다. 당시 전국에서 좌익이 입법의원에 당선된 것은 제주도가 유일했다. 당시 미군정은 입법의원 선거에 이어 지방의원 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이런 기회에 제주도를 인민위원회가 주도하는 지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 1월 조직을 재정비하고,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1947년 3월 1일을 기해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다.8)

제주 4·3사건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1948년 2·7의 단선단정 반대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것은 남로당 전남지부를 통하여 김삼룡에게 전달되었다. 김삼룡은 전투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읍면별로 약 30명씩 모아서 유격대를 조직하였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총 규모가 4,000명에 이르는 인민유격대를 갖추고 있었다.9) 이들이 4월 3일을 기해서 단선단정을 통해서 새로운 민주국가가 남한에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친일경찰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군과 새로 태어날 나라를 부정하고, 북한의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반란군이었다. 이들은 “인민공화국 세상이 목전에 가까왔으며, 제주도는 조선의 해방구로서 전 도민이 가장 잘 살게 되었다”고 선전하였다.10) 4월 말까지 20여 차례의 공격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경찰이 4명이 죽었고, 경찰에 의해서 25명이 죽었다. 곧 바로 조선경비대가 투입되었으며, 반란군들은 약간 주춤하였다. 하지만 5·10선거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들의 공격은 강화되었고, 선거가 실시된 주간에, 50건의 시위와 소요, 방화, 우익진영 사무실과 집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63개의 마을과 3곳의 관공서가 공격당했다. 좌익과 우익 모두 14명이 죽었고, 우익 조직원과 경찰 가족 20명이 죽었다.11) 하지만 5·10선거가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에는 약간의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 당시 제주도는 기독교선교가 전국에서 가장 약한 지역이었다. 해방 후 제주도에는 3명의 목사가 있었다. 이들은 조남수, 이도종, 강문호 목사 등이었다. 조남수는 해방 직후 우익의 입장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지만, 좌익과의 투쟁에 나선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신자들을 보살필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도종은 1948년 6월 심방을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가 인민유격대에 잡혀 그들의 굴에 끌려가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제주 4·3사건 동안에 살해된 사람은 17명이 된다. 대부분은 인민유격대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나 일부는 국군의 작전 과정에서 사살된 사람도 있다.12)

조남수 목사 역시 제주 4·3사건 당시 중요한 일을 감당했다. 1948년 말 국군의 토벌 작전 중 마을 사람들 전체가 다 인민유격대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몰살당할 상황에 이르렀다. 조남수 목사는 토벌대장 문형순을 찾아가서 이들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미 주모자들은 제주도를 빠져나갔으며, 현재 잡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문형순은 1948년 11월 15일 혐의를 받고 집합한 약 5, 6천 명 앞에 나서서 자수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 결과 약 300명이 자수하였다, 이들은 구제되었다. 이후 조남수 목사는 인근지역을 다니면서 150여 회에 걸쳐서 선무활동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약 3,000명을 구제할 수 있었다, 조남수는 토벌대를 설득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려내는데 기여했다.13)

제주 4·3사건 가운데 이 지역의 기독교가 특히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갖고 행동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남수는 그의 4·3사건에 대한 자서전에서 4·3사건은 제주도의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 일으킨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출발을 반대하려고 일으킨 운동이며,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군과 서북청년단의 과도한 행동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주도의 기독교는 이런 입장을 견지했다고 보인다.

사실 제주도의 수많은 인명피해는 1948년 4·3사건 초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10월 11일 국군이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세우고, 본격적인 토벌을 선포하고 소위 유격대를 초토화하는 과정에서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면서 발생하였다. 이미 이 당시에는 김달삼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탈출하여 지도부가 공백인 상황에서 그런 과격한 토벌을 할 필요가 있었는가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혹독하게 취급한 것은 커다란 과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은 북한의 단정 반대운동에 호응하여 대한민국의 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정부는 제주도에서 강력한 토벌작전을 시작하면서 여수에 있는 14연대에게 제주토벌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군 14연대는 여수를 근거지로 해서 1948년 5월에 만들어진 국방경비대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군부대가 되었다. 이들에게 10월 19일을 기해서 제주도로 출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정부는 당시 육지의 군대을 차출하여 특별사령부를 조직하여 제주도의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국군 14연대에는 좌익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 군대에는 좌익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 국군은 좌익들을 군대에서 색출하고자 했고, 따라서 14연대의 좌익들도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제주도 출병의 명령이 내리자 14연대 좌익들은 이번 기회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것이다. 여기에 중심인물은 14년대 인사를 담당하던 지창수 특무상사였다.

지창수는 14연대의 동료들과 함께 먼저 무기고를 탈취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장교들을 사살한 다음에 여수시내를 향하였다. 아무런 준비가 없던 여수는 일순간에 14연대의 좌익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이들은 곧 이어 순천을 공격하였고, 20일 오후에 장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진압군의 일부가 이들과 합류하였고, 그 힘을 모아 22일에는 전남 동부지역의 6개군을 장악하였다. 원래 여수·순천지역은 우익이 강하고 좌익이 약했으나, 5·10선거를 전후로 좌익이 강력한 반대세력을 형성하였다. 반란군이 10월 20일 이 지역을 정복하자 이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재건되어 반란군과 함께 우익인사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여수지역을 인민위원회가 접수하였음을 선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반미·반이승만을 선포하며, 무상몰수·무상분배의 공산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친일 경찰을 처단한다고 선언하였다.14) 우리는 여기에서 여순사건의 본질을 보게 된다. 그것은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반대하고 남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것이다.

인민위원회가 했던 행동은 바로 우익인사의 척결이었다. 당시 순천에는 일제말 신사참배를 거부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큰아들 동인은 순천사범학교, 작은아들 동신은 순천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서 철저한 신자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면 안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순천사범학교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에 찬탁과 반탁사이에 상당한 투쟁이 있었고, 이들은 이철승이 만든 전국학생총연맹에 가입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반란군이 들어오자 그 지역의 대동청년단과 연합하여 이들과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1월 21일 총살을 당한 것이다.15) 우리는 여기에서 전형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반공의 입장을 갖고 대한민국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손양원 목사가 시무하는 애양원교회에서는 부흥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손양원과 같이 신사참배반대로 옥고를 치룬 이인재 목사는 손양원에게 아들의 순교를 감사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고, 손양원은 이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 안계선을 구출하여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다. 당시 안계선은 수복 이후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있었다. 이같은 손양원의 행동은 많은 사람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손양원은 분명히 공산주의는 반대하지만, 그들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자세였다. 사실 한국교회는 반공 입장이지만 가능한 대로 그들을 살리려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제주 4·3사건 때 조남수의 행동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얼마 후 한국전쟁 이후 퇴가할 때, 손양원을 사살하고 말았다.

여순사건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과 당시 한민당과 경찰을 중심으로한 우익세력 간에 갈등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순천에는 한민당 계열의 김양수와 경찰의 우익세력과 독촉계열의 황두연과 기독교의 우익세력이 있었다. 김양수는 이 지역의 유지며, 미국 유학을 다녀온 명망있는 지주이지만 황두연은 순천장로교회의 장로이며, 선교사 병원에서 서무과장으로 신사참배 반대로 박용희와 손양원과 함께 옥고를 치룬 경력이 있다. 하지만 5·10선거에서 이 지역의 지주이며, 대표적 유지인 김양수가 기독교장로 출신 황두연에게 패배하였다.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하는 당일 황두연은 농지개혁을 선전하기 위해서 순천에 내려왔다. 그런데 일단의 우익세력이 그를 반란군에 협조했다고 무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황두연은 선교사 크레인의 집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결국 이것은 나중에 밝혀져 무고가 들어났지만 이 당시 우익세력 내에서도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6) 황두연은 서민과 기독교인들을 지지기반으로한 우익이지만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기독교신앙의 입장에서 온건하게 이해하려는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여순사건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다. 당시 광주검찰청 순천지청의 차석검사가 박찬길이었는데, 그는 원래 이북출신으로 조만식의 제자였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온 반공주의자이지만 모든 것을 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런 박찬길은 당시 순천에서 경찰이 좌익에 대해서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을 막았고, 여기에 반감을 품은 경찰은 그를 “적구(赤狗)검사”라고 불렀다, 마침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경찰은 그에게 인민재판의 재판장을 지냈다는 혐의를 씌워 10월 23일에 총살을 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박찬길은 반란기간에 인민재판장을 하지 않았다. 결국 유족이 이 사실을 검찰에 알려서 나중에 혐의는 벗어났지만, 박찬길을 처형한 경찰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17)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반공주의자였지만 반공을 내세워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5. 북한정권의 수립과 기독교 박해

해방 직후 북한 기독교인들은 북한 사회의 중심부에 있었다. 특별히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일제와의 투쟁경력과 아울러서 미국 유학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면 새로운 나라는 기독교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일본 당국도 자신들의 패전 이후 연합군의 진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는 조만식 장로, 평북 자치위원회는 이유필 장로, 황해 건국준비위원회는 김응순 목사가 선출되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환영하며 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이 북한에 진주하였고, 소련은 이들의 세력을 공권력으로 제압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를 만들도록 하였다. 만일 이런 소련의 강제가 없었다면 북한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18)

소련의 공산주의는 원래 종교를 아편으로 간주하고 박해했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민족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정교회를 인정했고, 미국이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기 때문에 종교 박해를 많이 완화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술적인 차원일 뿐 본질은 여전히 반종교적이었다.19) 이것은 북한에 소련군정을 실시하면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상당히 길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도 초기에는 공존을 생각해 보았지만 곧 바로 그 저의를 알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945년 9월 평북에서는 한경직과 윤하영을 중심으로 사회민주당을 만들어 공산주의에 대처하고자 했으나 실패하였고, 그 여파로 11월에는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이런 과정 가운데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청년·학생들은 월남하였다. 평남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11월 3일에 조선민주당을 만들어서 북한 전체를 통하여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주축을 이루었다. 하지만 조선민주당은 반탁의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조만식은 소련의 압력으로 당수를 사퇴하였고, 상당수의 지도자들은 1946년 초 월남하였다. 결국 북한에서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동거는 깨지고 말았다.

1946년은 보다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갈등이 일어났다. 1946년 3·1절은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일이다. 김일성은 이날 모두 모여서 행사를 하고자 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은 장대현교회에서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조만식의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북한 당국과 기독교는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이것은 해방 후 기독교와 북한 당국의 첫 번째 마찰이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3월 5일부터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시행되었고, 그 대상에는 종교도 포함되었다. 북한에서 상당수의 기독교인은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들은 토지를 빼앗겼다. 이들 중 상당수는 월남하였다. 1945년의 월남이 주로 지도급과 학생들이었다면 이제는 그 대상이 일반신자들에게로 확대되는 양상이었다.

더 강력한 반대는 1946년 11월 3일에 있었던 인민위원회 선거였다. 사실 이 인민위원회 선거는 1946년 2월 임시로 세운 인민위원회, 즉 공산주의 정부를 정식으로 세우는 날이었다. 남한으로 친다면 1948년 5·10선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날은 주일이었고, 북한 기독교는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북한 기독교는 이 반대가 종교적 이유라고 주장했지만, 북한 정권은 단지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북한 정권은 기독교의 도전으로 이해했다.20)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기독교는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먼저 평양의 목사들은 10월 24일과 25일 밤에 비밀히 모여서 선거 거부를 분명히 했으며, 10월 26일 장로교의 연합노회장은 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찾아가서 기독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고, 같은 날 개신교 대표 8명이 김일성을 방문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김일성은 “북한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민주개혁을 방해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였다. 여기에 소군정과 김일성은 본격적인 대처를 위해 강량욱을 중심으로 기존의 교회와 구분되는 “기독교 분리파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다음 날인 10월 27일 기독교도연맹준비위원회로 발전하였다.22) 이들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선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조직적인 선거거부 운동에 북한이 친정권적인 단체를 만들어서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 기독교의 반대는 여전했다. 북한 기독교는 선거거부 운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자신들은 11월 3일 자정이 지난 다음에 선거에 참여한다고 발표하는 한편, 참여해서 당시 단일 후보에 찬반(흑백)투표에 반대투표를 할 것을 종용하였다.

소련과 김일성은 항상 자신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전하였다. 1946년 4월 19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종교를 믿는다는 미명아래 숭미사상을 전파하는 것은 반대했을 뿐입니다.”고 말했다.23) 이어서 11월 3일 선거를 앞두고 김일성은 북한의 종교 문제에 대한 교시를 발표하였다. “종교인들은 선교사들을 숭배하는 그릇된 사상을 없애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종교도 국가와 인민의 리익에 복종해야 하며, 우리 민족의 이익을 위한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조선사람이 믿을 수 있는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24) 북한은 항상 자신들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한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25)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의 기독교가 공산주의에 충성하지 않으면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선거가 끝난 며칠 후 김일성은 강양욱에게 “기독교인들 중에서 애국주의 교양을 잘하여 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건국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무슨 교양 단체를 하나 내오는 것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26) 이런 가운데 북한 당국은 친공세력을 구체화하였고, 선거가 끝난 11월 28일 정식으로 북조선 기독교도연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조선중앙연감』 1949년 판에 의하면 이 연맹은 1. 인민의 애국열을 강조하여 건국사업에 협력, 2. 민주조선 건국에 해독적인 죄악과 항쟁하고, 3.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위한 노력, 4. 기독교발전을 위해 노력 등을 결의했다.27) 하지만 이 조직은 실제로 많은 북한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1946년 11월 선거 이후 북한에서는 기독교와 공산세력이 북한 기독교의 향방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선거가 끝나고,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가 조직되었다. 이때 임시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정식으로 단독정부가 세워졌다. 이어서 1947년 3월에는 면리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완전한 인민정부가 완성되었다. 이런 가운데 북한 기독교는 본격적인 반공투쟁을 시작하였다. 1947년 4월 초에 장로교 5도 연합회는 비밀리에 모여 노동당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반공투쟁을 시작하였다. 오도연합회가 집행부라면 기독교면려청년회는 행동대였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북한은 오도연합회 회장 김진수와 지도부를 체포하였고, 4월 24일에는 기독교면려회를 해산시켰다.28)

이런 상황에서 1947년 4월 27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2,000여 명이 모여 평양시내연합신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기독교 청년단체를 해산한 것에 항의하였다. 28일 이 집회에서 장로교청년면려회의 지도자 김두영은 기독교면려청년회를 해산한 것을 비판하면서 “김진수를 잡아간 것은 북조선기독교를 잡아간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에 대한 박해에 항의하였다.29) 이어서 평양에서는 다수의 집회가 열렸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의 가두시위도 진행되었다. 4월 29일부터 열린 창동교회 집회 직후 뿌려진 전단에는 북한의 해방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이루어진다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오도연합회장 김진수 목사 등 지도부를 체포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 만들어진 단체가 기독교자유당이다. 5월 초 평양신학교 강당에서 장대현교회 목사이며 오도노회 부회장이었던 김화식 목사와 감리교 남산현교회 목사이며 서부연회장이었던 송정근 목사 주도로 창당을 준비하였다. 그 후 이들은 남한과 연결하여 미소공위에 참여하여 북한의 사정을 알리기를 원했다. 아울러서 자체적인 논의를 거쳐 1947년 6월 12일 평양의 한 교회에서 기독교 자유당 창당 준비 결정을 내렸고, 김관주와 김백선 등을 대표로 선정하여 6월 14일 소련 민정청에 등록하였다.30) 이들의 목적은 1. 정당으로 조직, 2.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3. 청년조직의 복구 등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 단체가 인민위원회의 정책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고, 등록을 거부하였다. 결국 북한 기독교는 미소공의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북한에서 반공운동이 일어나자 북한당국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김화식, 송정근과 같은 지도자들은 체포되었고, 김두영 같은 청년지도자들은 월남하였다. 5월 30일 김두영은 김봉서와 함께 월남하였고, 장준하의 안내로 김구를 만나고, 또 이윤영과 같은 조선민주당 인물도 만났다. 그리고 한경직과 함께 미군정의 버치를 만나기도 하였다.31) 버치는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위 중에 평양에 가서 북한에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당시 장로교 목사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는 반면에 감리교의 송정근은 미소공위대표가 평양에 오기 직전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버치는 7월 2일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송정근 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송정근은 버치와의 면담 후에 자신이 다시 체포될 것을 알지만 이 면담은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그의 아들은 증언했다.32) 김화식의 경우 그의 아들이 유명한 음악가 김동진으로 북한 당국이 미소공위 환영대회에서 연주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김화식은 자기 아버지 석방을 조건으로 연주에 응했으나 미소공위 후에 이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버치는 면담 후 자신의 보고서에서 평양에 남아 있는 유일한 반공산주의적인 민주세력은 장로교이며, 여기에 근거해서 민주적인 정치운동을 해야 한다고 단언했다.33)

1947년 여름 이렇게 시련을 겪은 북한 기독교는 다시금 한국 문제가 유엔에서 논의된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되었던 기독교자유당 설립을 다시금 추진하였다. 아마도 북한 기독교인들은 제2차 미소공위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협상은 결렬되었고, 앞으로 이 문제를 유엔에서 다루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북한 기독교는 유엔이 주도하는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독교자유당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기독교자유당을 준비했던 김화식, 송정근, 김관주, 신석구 등이 모여 당수에는 평신도인 고한규 장로를 내세우고 11월 19일 창당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창당 하루 전인 18일에 이들은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창당은 불발로 끝났다. 김양선은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만 약 40여 명이 된다고 주장한다.34)

이렇게 되자 북한당국에서는 1947년 가을에 가서야 다시 기독교도연맹의 활성화를 논의하였다.35) 당시 북한에서 공산주의는 기독교에 깊이 침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상층부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목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부 장악에 노력하였다. 특히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평양에서 호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창설될 당시 북한에는 약 20만 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참석한 사람은 85,118명에 지나지 않았다.36) 그 후 북한당국은 김익두를 참여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1949년 2월에 가서야 각 지역의 기독교도연맹이 모여 기독교연맹 총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김익두, 부회장에 김응순을 세우고 조직을 완료하였다.37)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에는 김익두, 김응순 외에 조희렴 등 북한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참가하고 있으나 상당수는 강요에 못 이겨 행동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 당국은 장로교 오도연합노회나 감리교 남부연회 대표를 구속하고, 장로교노회나 감리교 연회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38)

북한 공산 당국이 기독교를 붕괴시키려는 작전은 점진적이다. 북한 인민위원회는 일차적으로 예배의 자유는 허락하지만, 종교교육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제한하였다. 이들이 취한 정책은 일요일에 학생들을 학교로 부르는 것이다.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생각했던 주일학교 학생들은 학교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결국 등교 거부로 이어지고, 상급학교 지원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 김관주 목사의 아들인 김명혁은 자신이 남한으로 월남한 이유를 북한 당국이 일요일에 학교로 부르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북한 당국은 학생들의 주일활동을 방해함으로써 주일학교교육을 근절시키고자 했다. 또한 기독교인의 자녀는 적대계급으로 분류되어 상급학교 지원에 제한을 받는다. 조만식의 가족이 그를 북한에 두고 월남한 것은 자녀 교육문제 때문이다. 북한은 모든 계급을 핵심계급, 동요계급, 반동계급으로 구분하는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반동계급에 속하며, 따라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39)

북한의 공산당국은 북한 기독교의 경제적인 기반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1946년 3월에 실시된 토지개혁은 교회에도 많은 타격을 주었다.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에 따르면 제 4항에 “5정보 이상으로 소유한 성당, 승원, 기타 종교단체의 소유지”가 몰수 대상으로 명시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불교, 천주교, 개신교 재산을 몰수하였다.40) 이런 과정을 거쳐 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들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북한은 기독교를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북한 당국은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설교할 수 없도록 금지시켰고, 각 노회나 지방회별로 기독교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회원에서 제거한다고 결의했다. 더 나아가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하나로 만들었다. 북한당국은 1949년 6월 평양신학교의 교사를 몰수했고, 성화신학교도 마찬가지로 몰수하고자 했다. 이것은 북한 당국이 기독교도연맹을 통하여 두 학교를 통합하여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한 것이다. 감리교는 여기에 반대했지만 결국 1950년 3월에 두 학교는 강제 합병되었다. 명칭은 평양신학교로 결정하였고, 교장은 장로교의 이성휘, 부교장은 송정근(성화신학교의 이사장이었음)이 맡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김응순이 교장이 되었다.41) 이렇게 북한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파제도는 와해되고, 기독교도연맹이 중심이 된 새로운 애국적 기독교가 만들어졌다.

이 당시 북한에서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연맹 가입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기독교자유당 사건, 신학교 통합사건 등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기독교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요시찰 대상이 되었고, 북한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연맹에 가입한 사람들도 이것을 피해 가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당국은 기독교도연맹에 반대했던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연맹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불순세력으로 낙인찍었다. 기독교도연맹 부의장이며, 평양신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응순은 “6·25 동란이 일어나자 소위 예비[검]속 검거선풍이 일어났는데, 기독교 목사 중에서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이, 미국 갔다 온 이, 자녀가 월남한 이 등을 검거하여 신학교에도 교장 이하 몇 분이 검속되었다.”라고 회고했다.42) 6월 24일 평양에서만 남부교회의 이학봉, 동평양교회의 허천기, 신현교회의 이유택, 신암교회의 김길수, 신학교교장 이성위 등이 일제히 검거되었다.43) 홍만춘은 북한에서 자기가 확인한 숫자만 장로교 105명과 감리교 27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 명단을 제공하였다.44)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놀랍게도 북한 기독교는 환호를 불렀다. 과거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여 패배한 것처럼, 북한은 미국에 패배할 것이라는 마음에서다. 원산에서 어떤 목사는 통일 이후의 선교 대책을 계획하기도 했다.45)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만에 서울은 함락되었다. 이것은 북한의 엄청난 승리였다. 북한지역에서는 대대적인 서울함락경축대회가 열렸다. 실망한 기독교인들은 함락경축대회에 동원되었어야 했다. 함락 다음 날인 6월 29일 원산중앙교회에서는 서울함락경축예배를 드리고, 북조선기독교도연맹 부위원장인 조희렴 목사가 설교했다. 여기에서 조희렴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인민군의 조국해방을 위한 전투를 [하나님이]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는다”고 설교했다.46) 하지만 그다음 날 원산 보위부는 조희렴을 비롯하여 이 지역의 교역자와 교인들을 검거하였고, 여기에서 조희렴 목사와 권의봉 목사, 천주교 신부도 함께 살해당하였다.47)

한국전쟁의 발발로 북한교회는 거의 그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이미 예비검속으로 상당히 많은 목사가 이미 검거된 상황이었다. 당시 북한의 교회는 주일예배는 가능했지만, 그 외의 다른 행사는 금지된 상황이었고, 주일학교도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 상당수의 교회가 예배를 인도할 인도자가 없었다.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자체적으로 임시해산을 선언하였다. 당시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하던 김세진 목사는 7월 9일 새벽예배를 마친 후 긴급 당회를 열어 자유가 오는 그날까지 교회를 임시해체하기로 결의하였다.48) 이것은 단지 연화동 교회만의 일이 아니었다.
 

6. 대한민국의 수립 이후의 남한사회와 개신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과 더불어서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승만은 5월 30일 제헌국회 개회식에 기독교 목사 이윤영에게 기도를 요청하였고, 7월 14일에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에는 원래 선서문에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취임선서를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이승만의 기독교적인 태도에 지지를 보냈다. 아울러서 이승만은 새로 출발하는 대한민국의 수호를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附屬)하자는 불충한 사상(思想)을 가지고 공산당(共産黨)을 빙자하여 국권(國權)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49)다고 하며 반공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 8월 15일에 진행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 그는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하거나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으니, 어떤 불충분 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말할 것도 없이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며 경계했다.50) 이것은 과거 미군정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런 이승만은 정부수립 직후 국방경비대를 국군으로 개편하고,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한 제주 4·3사건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10월 초에 대대적인 소탕을 위해서 육지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고, 이런 과정에서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신생 이승만 정부로서는 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계기로 남부지역에 있던 좌익세력과 군대의 숙군작업이 진행되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한에서 호응하는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비록 1948년 대한민국은 출범하였지만, 이 나라는 취약국가였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군사력에 비해서 이승만의 남한 정부가 가진 군사력은 허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의 퇴각은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필사적으로 막아 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미군은 1949년 6월 말로 일부 고문단을 제외하고 모든 군대를 퇴각시켰다.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 정부와 함께 위기의식을 가졌다. 6월 서울의 모든 기독교(천주교 포함)는 서울운동장에 모여 미군 퇴각반대 시위를 벌였다,51)

한편 중국에서는 1948년 장개석의 국민당이 모택동의 중공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고, 1949년에는 중국이 완전히 공산화되었다. 중국의 공산화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중국에서 추방당한 많은 선교사가 한국으로 건너와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이에 따라 미국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들은 하나가 되어서 공산주의를 방어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52) 중국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선교사들의 내한은 한국교회의 반공 전선을 더욱 강화시켰다.

1949년 3월에 벌어진 언더우드 부인 살해사건은 당시의 남북관계 및 기독교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3월 17일 오후 3시경 좌익 청년들이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부인 사택에 모윤숙을 포함한 약 20여 명의 교수 부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침입하여 언더우드 부인을 살해했다. 원래는 모윤숙을 목표로 삼았는데 우발적으로 언더우드를 살해했다고 알려졌다. 언더우드는 기독교인이자 미국인인 언더우드 부인을 살해함으로써 남한의 좌익이 미국과 기독교에 어떤 입장인지 보여주고자 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53) 정부수립 이후 북한은 끊임없이 미국과 기독교에 적대적인 행동을 지속해 왔다.

한국 기독교의 반공전선은 1950년 초 진행된 구국전도운동으로 강화되었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는 여순사건으로 지리산 일대에 인민유격대가 상당히 넓게 퍼져있었다. 1949년 말 전라북도 남원의 기독교는 서울교회에 이 지역에 와서 전도와 선무활동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대규모의 전도집회를 계획하였다. 특히 이 집회에는 당시 미국에서 새롭게 부상하던 부흥사 밥 피얼스를 초청하여 전국을 순회하여 약 한 달 반 동안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이것은 1950년 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 집회에 초청을 받았던 밥 피얼스는 당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했다.54)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 기독교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중국 기독교의 몰락과 북한 기독교인들의 월남을 본 미국 선교사들은 남한의 기독교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6·25남침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한국전쟁 직전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장로교 장로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만일 미국이 한국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자유를 찾아 월남한 북한인들을 공산주의에 다시 넘겨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55) 이것은 미국, 반공, 기독교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7. 6·25 남침 이후의 인민공화국 치하의 서울의 개신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기독교서회 사무실에서 서울 시내 목사들이 모여 대책을 의론하였다. 한경직을 비롯한 월남한 목사들은 서울 사수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주로 월남한 이북 출신 목사들은 파란을 떠났고, 이남 출신 목사들은 서울에 남아 있었다. 아마도 월남한 목사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고, 이남 출신들은 그 강도가 약했다고 본다. 목사 대부분은 피란을 가지 못했고, 그들의 시련은 매우 심각했다.

인민군이 서울에 도착하자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환영대회가 열렸고, 이어서 약 4,000명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다. 그중에는 대구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최문식도 있었다. 최문식은 나중에 종로 2가 기독교서회 건물에 기독교문화원을 만들고,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를 장악하는 공작을 도모하였다.56) 월남 기독교인들은 거의 피란을 떠났고, 이남 출신들은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교회는 7월 첫 주는 예배를 드렸으나 그 다음부터는 점진적으로 중지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도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었으나 그것은 예외에 속하였다.57)

6월 28일 서울의 함락 이후 서울의 인민공화국화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각종 인민대회를 통하여 공산주의 지지선전을 이어갔고, 인민위원회와 각종 기관을 만들어서 인민공화국 체재를 확립하며, 동시에 인민재판을 실시하여 반동을 색출하는 작업을 펼쳤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장악하려는 시도도 시작되었다.

이런 시도는 기독교민주연맹을 통해서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1947년 초 김창준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그가 월북한 다음부터는 잠잠했다가 다시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등장한 것이다. 기독교민주연맹은 위원장 김창준, 총무 박성채, 장로교담당 최문식, 감리교담당 최택(최병헌 목사의 손자), 그리고 실무는 당시 경동교회 신자이며 서울시 사무국장으로 종교문제를 담당하던 김욱이었다. 7월 초 중앙감리교회에서 기독교민주연맹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김창준과 이만규가 참석하였다. 김창준은 북한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이 연맹에 가입해야 신분상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강조하였다.58) 기독교민주동맹은 인민군 치하 전역에서 시도된 것 같다. 개성의 경우 처음 점령당했을 때, 보위부에서 내사를 시작하였고, 목사들에게 기독교민주연맹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면서 이 같은 시도가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민주연맹이 시도했던 첫 번째 일은 인민군환영대회 개최다. 서울의 경우, 기독교민주연맹은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교역자들을 모아 서울시의 교회들을 동원하여 인민군환영대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활동한 사람은 한국전쟁 직후에 출옥한 최문식과 일제 말 감리교혁신교단의 교단본부 주사였으며, 월북한 종교교회 장로 이만규의 사위인 심명섭 목사였다. 소극적인 서울의 교역자들을 강박하여 7월 10일 YMCA 강당에 기독교지도자 약 300명이 모여 환영대회를 열었다. 원래 유호준 목사가 사회를 보기로 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고, 김종대 목사가 환영사를 낭독하였다. 여기에는 이만규가 내빈석에 배석하였다. 조향록 목사는 이것을 한국 기독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오점이라고 평했다.59)

다음으로 이들은 교역자대회를 열어 공산주의를 재교육하여 소위 “민주적 기독교”를 만들려고 하였다. 서울에서는 이만규의 사위 심명섭의 주도로 중앙교회에서 강연회를 열었는데 강사는 이만규였다. 이만규는 여운형의 측근으로 월북하여 교육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인민공화국 국민이며 동시에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하고, 결코 인민공화국은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으며, 공화국에 협조한다면 신분을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연설이 끝난 다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기독교민주연맹이 발행하는 연맹증을 발부하였다. 이것은 인민공화국 치하에서는 다소간 유용하기도 하였다.60)

인민위원회 보위부는 주요 목사들을 호출하여 사상을 검증하고 전향을 유도하였다.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송창근 박사는 보위부에서 며칠 동안 사상 검증을 받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친미주의자인가 하는 점이었다. 정동교회 김인영은 보위부에서 며칠 동안 미국 선교사와의 관계를 심문받았다. 감리교 박설봉 목사에게는 기독교민주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와 미군 철군을 반대한 이유 등을 물었다.61)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통제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자술서를 쓰도록 하는 것이다. 당은 기독교민주연맹을 통하여 자술서를 쓰도록 했는데, 장로교는 최문식, 감리교는 김책이 담당했다. 자술서에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진술하라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 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자술서를 통해서 과거 미국과 이승만을 도운 것을 반성하라는 뜻이다. 표면적으로는 진술을 통하여 새로운 인민공화국 종교로 거듭나라는 것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이들을 옥죄기 위함이었다. 자술서는 교파별로 받았는데, 나중에는 교역자의 납치와 학살에 활용하였다.62)

한국전쟁 가운데 인민군과 교회의 갈등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예배당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예배당은 신성불가침의 장소였다. 하지만 인민군은 예배당을 자신들의 정복물로 생각하였다. 특별히 이들에게 교회는 매우 유용한 건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공산당은 미군이 교회를 폭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교회에 군수물자를 숨기기도 하였다. 영락교회가 그런 경우였다. 지방에서는 예배당을 인민위원회로 사용하거나 공산주의 강연장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주요 갈등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건물 문제였다.

해방 이후 서울의 기독교가 겪은 가장 큰 고통은 1945년 8월 23일부터 시작된 서울시 주요 교역자 체포 및 납북 사건이다. 8월 21일에 열렸던 신도궐기 대회 다음에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지 기독교민주연맹을 만들고, 교역자들에게 공산주의를 강연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신자들이 북한정권을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열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남한 신자들의 궐기대회는 인민위원회의 기대에 못 미쳤다. 아마도 북한은 남한의 기독교를 친공적인 단체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집회를 마친 뒤 이들이 내린 결론은 기독교는 반동단체로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8월 23일부터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고, 많은 목사가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한국 기독교순교자기념관의 자료를 보면 8월 23일 체포된 목사는 김경종(후암교회), 김동철(서소문교회), 김삼석(참위 구세군), 김영주(새문안교회) 등이 있다.63)

그러나 북한의 납북정책은 또 다른 차원을 갖고 있다. 해방 이후 북한은 지식인들을 적대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식인이 월남하였다. 따라서 북한이 남한을 정복하자마자 이들은 남한의 인재들을 납북시키려 했다. 납북자 대상에 기독교 지도자들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남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납북시키려고 한 것은 북한정권과 갈등 관계에 있는 기존 기독교 지도자들 대신에 남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북한의 기독교를 친공 기독교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세계에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선전하려고 한 것 같다.

8월 23일에 일어난 한국 기독교지도자 납북은 당시 한국 기독교의 중심 인물들을 납북시키려는 대대적인 계획이었다.64) 북한은 자신들의 국가건설목적을 위해서는 남한의 주요 인사들을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체포하여 북한으로 납치하였다. 10월부터 시작되는 퇴각 과정에서 보여준 박해는 방어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박해와는 구분된다. 김양선은 8월 23일 납북된 사람이 장로교 21명, 감리교 19명, 성결교회 9명, 구세군 2명으로 밝히고 있다.65) 여기에는 한국교회의 중심인물들이 많았다. 여기에는 한국 기독교협의회 총무 남궁혁, 한국신학대학 학장 송창근, 감리교 감독 김유순, 양주삼, 서울신학교 교장 이건, 성결교총회장 박현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납북은 남한 기독교를 와해시키고, 북한에 새로운 친공 기독교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착각이다. 위의 인물들 가운데 북한정권에 협조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8. 인민공화국 초기의 남한과 개신교의 박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한 날, 김일성은 내각비상회의에서 “전체 인민들은 --- 간첩, 파괴암해분자, 불순이색분자들과의 투쟁을 강화하여 그들을 모조리 적발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것은 소관기관인 내무부와 정치보위부에 시달하였다. 다음 날인 6월 26일 김일성은 방송 연설을 통해서 남한의 공산주의 세력이나 빨치산을 대상으로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66) 이것은 남한의 지하세력에게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이 김일성의 지령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남한에서 좌익세력의 중심은 1945년 가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인민위원회 세력이라는 것과 이들이 싸우는 반동세력은 각종 우익세력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이 언급한 반동세력 가운데는 친미적인 성향을 가진 기독교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이 지시는 좀 더 구체화하여 7월 중순에 각 지역에 “전직 전과 불량자, 악질종교 등”을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악질 종교에는 기독교가 포함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에 기독교인의 숙청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지시사항이 된다.67) 이런 지시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이런 학살은 대부분 제대로 된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소위 반동 처리에 법적인 절차를 지키라는 명령은 1950년 11월 23일에 내렸다. 내무상 방학세가 각 도 내무부방, 정치보위부장에게 내린 지령에는 “반동분자를 취급 처리함에 있어서 일부 지방 일꾼들은 법적 근거도 규명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고려없이 난폭한 방법으로 처단하는 사실이 적지 않음으로 앞으로 이를 단속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는 내용이 실렸다.68) 이것은 북한당국이 공식적으로 불법적으로 잔혹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좌익에 의한 테러는 퇴각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불순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북한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벌써 기독교 세력을 의식하였다. 이것은 기독교 목사들의 예비검속에서 잘 드러난다. 이미 평양에서 그런 사실이 있었다. 한국전쟁 직전 38선 부근의 강원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강원도 금화교회의 목사이자 조선민주당 김화군 대표였던 한사연 목사는 6월 24일 토요일 예비검속되었다.69)

1950년 6월 24일, 한국전쟁 발발 전날 밤이었다. 이미 금강산 전기철도로 수 많은 탱크와 대포가 남쪽으로 실려간 뒤였다. --- 막 잠자리에 든 한 목사를 누군가 불러 깨웠다. 회의가 있다고 했다. 공산당은 회의를 좋아했다. 한 목사는 사나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자정을 한시간 쯤 앞둔 늦은 밤이었다. 이튿날, 금성교회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한 목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한사연 목사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강원도 통천 협곡 지역에서 목회하던 이풍운 목사도 예비검속을 받았다. 그는 그 지역의 인민위원장으로부터 도피를 권고 받았지만, 교회 때문에 거부하고 체포되었다.70) 춘천의 천주교 신부도 예비검속으로 고난을 받았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경계가 상당히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이 피란을 떠났고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피란민에 대한 경계는 좌우가 다 같았다. 우익은 피란민 가운데 첩자가 있어서 후방을 교란하기 때문에 사상을 검열하였고, 좌익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해방지역을 떠나 남한으로 피란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 성경책을 소지한다는 것은 우익에게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증거였고, 좌익에게는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반동분자라는 증거였다. 후에 용문산 기도원을 세운 나운몽 장로는 피란을 가다가 검문과정에서 국군은 성경을 발견하면 통과시켰고, 인민군은 반대로 성경을 발견하면 미국의 스파이라고 하면서 취조를 당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쟁 시기에 기독교인의 사회적 위치를 분명하게 대변해 주는 것이다.71)

인민군은 기독교인들을 대적자로 간주했다. 해방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이후에는 대구에서 맹아시설을 만들고, 대구형무소의 형목으로 수고하던 이영식 목사(나중에 그는 한국사회사업대학을 만들고, 이것은 현 대구대학이 되었음)는 전쟁이 일어나자 피란을 떠났다. 그러다 전선이 막혀 결국 인민군에게 잡혔다. 그의 죄목은 3가지였다. 첫째는 반동 정권의 형목이었다는 것, 둘째는 기독교인이니까 우익분자라는 것, 셋째는 선교사와 활동했으니 미 제국주의의 주구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가 처형되려는 순간에 대구형무소에서 그에게 은혜를 입은 좌익이 그를 살려 주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죄목에서 인민군이 기독교를 보는 근본적인 시각이 드러나고 있다.72)

피란을 떠나지 못한 기독교인들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인민공화국의 기독교 박해는 남한을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시작되었다. 이들의 일차적인 업무는 반동 세력을 제거하고 인민공화국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이 목표는 각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좌익세력들과의 협조 아래서 진행되었다. 이것은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재건으로 이어졌다. 해방 이전처럼, 도당 위원장은 직접 중앙에서 임명하였고, 그 외에 군, 면, 리 단위의 위원장은 해당 도, 시 위원회가 정하게 하였다. 이 내용은 7월 14일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의 지시로 각 하부조직에 전달되었다. 이들은 토지개혁과 의용군 모집, 그리고 각종 사건공작 등에 집중하였다.73) 대한민국 세력에 억눌려 있던 이들은 인민공화국 시대가 오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은 기독교를 친공산화하려고 했고,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제거했다.

전북 완구군 삼례읍 구와리는 해방 직후부터 좌우의 대립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1946년 7월에는 좌익이 침투하여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려고 하자 우익이 반발하여 싸움이 일어났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찰, 헌병만이 아니라 미 6사단 1개 소대와 중화기 분대가 파견되었고, 그 결과 조선인 50명이 체포되었고, 시민 12명과 경찰 2명이 다쳤다.74) 1948년 2월 이 지역에서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8,000명이 동원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75) 1948년 7월에는 이 지역에서 압수한 북조선 지령서에 의하면 머지않아 단독정부를 파괴하는 인민군이 내려와 남로당과 합할 것이며, 모든 반동분자를 조사하라고 명시되어 있다.76)

이 지역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1948년 3월 임광호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임광호는 원래 이북 출신으로 만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해방 후 고향인 황해도 신천에 돌아왔다가 박해를 피해 월남하여 삼례교회 목사의 소개로 이곳에 부임한 것이다. 그의 열심있는 목회는 우익세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와리의 좌익과 우익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임광호는 좌익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 동네 하리로 가서 백한나의 집에 천막을 치고 1950년 새롭게 개척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권했지만 교회가 건축 중이어서 갈 수가 없었다. 7월 10일경 그는 좌익에 의해 구금되었고, 7월 20일경 어디론가 끌려간 다음에는 소식이 끊겼다.77) 인민군이 전주에 도착한 것은 7월 20일이었다. 같은 지역 후정교회의 김주현 목사도 체포되어 7월 26일 처형되었다. 김주현 목사의 경우도 이북에서 월남한 목사였다.78) 좌익 세력이 강한 지역에 자리잡은 교회는 좌익에게는 매우 위험한 세력이었다. 특별히 좌익세력에게는 이북 출신의 기독교 성직자의 출현은 매우 염려할 만한 사건이라고 본다. 이들의 처형은 인민군의 퇴각기가 아닌 상황에서, 그리고 특별히 이들이 우익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처형된 것은 좌익들은 처음부터 기독교 세력을 적대세력으로 간주했음을 알게한다.

익산의 황등교회는 신문물의 중심지였다. 황등교회는 기독교 신앙으로 지역사회를 새롭게 만들었다. 군산 예수병원에서 일하던 계원식 장로가 세운 교회로 이 지역 우익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배재학당 졸업생인 변영수 장로는 일제시대 민족운동으로 감옥을 다녀온 경력의 소유자로 해방과 더불어 익산의 대동청년단장을 맡아서 일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반동으로 몰려 1950년 8월에 처형당했다. 계원식 장로의 며느리이자 황등교회 계일승 목사의 아내인 안인호도 처형당했는데, 그 이유는 남편이 미국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에 미국 스파이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79) 이것은 인민군들이 기독교를 자신들과 대립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북 완주 하리와 익산 황등의 경우 인민군의 패배가 확정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인민군 패배와 관계없이 기독교 세려은 우익·친미세력으로 간주되어 처형된 것이다.
 

주(註)

1) 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게, 1984), 306-307.
2) 박병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264-267.
3) “전북 5군 대폭동,” <동아일보>, 1948.2.29.
4) 김상숙, “한국전쟁 전 대구경북지역의 민간인학살사건의 실태와 특징,” 「대구사학」 102(2012), 20.
5) 김동수, 『심능양 장로 순교사』 (리북스, 2016), 83-94.
6)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연구,” 358.
7) 박명수, “1948년 유엔 소총회의 남한 총선거 결의와 그 의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43-1(2021), 45.
8) 박명수, “1947년 3·1절에 나타난 임정법통론과 인민혁명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9-1 (2017), 33-74. 참조.
9) 『주한 미군사 3』, 제 4장 경찰과 공안 3절, 경찰과 국가적 사건, 제주 사태의 원인과 영향 (한국사 DB)
10) 조남수, 『4·3 진상』 (관광 제주, 1988), 53-54.
11) G-2주간정보 요약 제140호, 1948년 5월 14-21일, 7쪽
12) 박용규, 『제주기독교회사』 (한국 기독교사연구소, 2008), 485.
13) 조남수, 『4·3 진상』, 141-142; 허명섭, “4·3사건과 제주 기독교,” 『해방공간과 기독교 1』 (선인, 2017), 305
-307.

14) 김용삼, 『대구 10월 폭동,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백년동안, 2014), 177-178.
15) 이철승, 『전국학련』 (중앙일보·동양방송, 1976), 345.
16) 임송자, “제헌의원 황두연의 생애와 순천지역활동,” 「남도문화연구」 35 (2018), 39-78 참조.
17)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탄생』 (선인, 2009), 323-329.
18) 박명수,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기독교의 역할,” 『대한민국 건국과 기독교』 (북 코리아, 2015); 박명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만식,” 「한국 기독교와 역사」 41호(2014), 37-76; 박명수, “해방 직후 신의주 기독교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건국투쟁,” 「숭실사학」 43(2019), 253-285.
19) 신동혁, “2차 세계대전과 소련정부의 종교정책,” 「슬라브학보」 19-2(2004) 참조.
20) 여기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박원홍,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1946.11.3.)와 북한 개신교의 대응”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참조.
21) 「쉬띠코프 일기」 1946년 10월 26일 자.
22) 윤경섭·유호열, “1946-1947년 북한 보수 개신교 세력의 정치 참여,” 「북한학보] 43-1(2018), 157-158. 그러나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이전부터 있었다고 본다. 원래는 북조선기독교연맹이라고 하려고 했지만, 단체 가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신자 개인별로 가입하도록 기독교도연맹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유관지, “해방 이후 북한교회사에서 강양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연구” (호서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3), 85.
23) 유관지, 김흥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강량욱목사전기,” 「기독교사상」 715(2018년 7월), 188.
24) <평양신문>, 1987.6.24, 27.; 김흥수 편, 『해방 이후 북한교회사: 연구, 증언, 자료』 (다산글방, 1992), 525.
25) 현재 일부 학자들은 한국전쟁 기간에 기독교의 박해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6) <평양신문>, 1987.6.24., 27.; 김흥수 편, 『해방 이후 북한교회사: 연구, 증언, 자료』, 526.
27) 『조선중앙연감』 (평양: 1949); 장병욱, 『6·25 남침과 교회』 (한국교육공사, 1984), 62에서 재인용.
28) 박명수,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 (북코리아, 2015), 250.
29) 이 모임에는 당시 북한을 방문하고 있던 장로교선교사 블레어가 참석하였다.
30) 윤경섭·유호열, “1946-1947년 북한 보수 개신교 세력의 정치 참여,” 170-171.
31) 박명수,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 250-251.
32) “Leonard N. Bertsch to General Brown, Protestant Leaders in North Korea,” 정용옥·이길상 편,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사 자료집』 9 (다락방, 1995), 643-645.
33) “Leonard N. Bertsch to General Brown, Protestant Leaders in North Korea,” 643.
34)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 (예장 교육부, 1956), 64.
35) 장병욱, 『6·25 남침과 교회』, 57-63.
36)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연감』 (조선중앙통신사, 1949), 86-87; 유관지, “해방 이후 북한교회사에서 강양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연구,” 52에서 재인용.
37) 김광동, “한반도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 169.;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북한교회사집필위원회, 『북한교회사』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650.
38) 북한연구소,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평안북도편』 (북한연구소, 1990), 539.
39) 박명수,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 299; 챨스 암스트롱, 『북조선의 탄생』 (서해문집, 2006), 124.
40) 변진홍, “박한 ‘참묵의 교회’와 공산주의,” 『해방 후 북한교회사』 (다산글방, 1992), 92.
41) 고성은, “해방 이후 평양에 설립된 성화신학교의 역사,” 「한국 기독교와 역사」 43(2015), 308.
42) 김응순, 『항부소전』 (인천보합교회), 36. 아직 이 예비검속의 규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명림은 예비검속자가 8명이었다고 주장하는데(박명림, 『한국 1950년 전쟁과 평화』 (나남신서, 2002), 619-623. 필자는 이것보다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각종 기독교 문헌들은 예비검속의 숫자가 상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으로 더욱 자세히 연구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43)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29.
44) 홍만춘, “북한 정권 초기의 기독교와 강양욱,” 『북한』 (1990년 2월); 김흥수 편, 『해방 이후 북한교회사: 연구, 증언, 자료』, 370-371.
45) 이진구 목사의 진술(1979. 10. 6);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05에서 재인용.
46) 한준명 목사의 증언(1980. 8. 29);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27에서 재인용.
47)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28. 국군이 북진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공산당은 이곳에서 대략 집단학살이 발생하였다. 그 규모는 적게는 550명에서 많게는 1,200명으로 추산된다. (이신철, “6·25 남북전쟁시기 이북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 「역사와 현실」 54(2004), 160 참조.
48) 김세진, 『꺼져가는 등불처럼』 (교문사, 1976), 269-270; 장병욱, 『6·25공산남침과 교회』, 229-230.
49) “정·부통령 취임사,” <조선일보>, 1948.7.25.
50) “대한민국정부수립 선포 겸 광복 3주년 기념식(2),” <서울신문>, 1948.8.18.
51) “Communism Can be Stopped,” The Missionary Standard (January 1950), 8, 18; 박명수, “엘마 길보른과 전후 한국교회의 재건,” 「길보른 논총」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16), 43.
52) “구국전도의 해,” 「활천」 (1950년 5월); Harry A. Rhodes and Achibald Campbell,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Vol. II. 1935-1959 (Seoul: The Prebyterian Church of Korea Depattment of Education, 1965), 244.
53) 홍이표, “언더우드 부인 저격사건의 진상과 의미,” 「한국 기독교와 역사」 35(2011), 181-218 참조.
54) 박명수, “한국 월드비전(World Vision)의 배경과 창립과정,” 「한국교회사학회지」 58(2021), 51-102 참조.
55) “덜레스 미 국무장관 고문, 극동시찰 후 귀국 성명을 발표,” <부산일보>, 1950.7.4.; Kai Yin Allison Haga, “An Overlooking Dimension of the Korean War”, 329-330에서 재인용.
56) 김춘배, 『대한기독교서회 약사』 (대한기독교서회, 1960), 37;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26.
57)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02.
58)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19.
59)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08.
60)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20-223.
61)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31.
62) 장병욱, 『6·25 공산남침과 교회』, 213-217.
63) 『한국 기독교순교자기념관 데이터베이스(미간행)』 참조.
64) 이신용, “6·25 전쟁시기 북한의 민간인 납치동기와 특징에 관한 연구” 참조.
65) 김양선, 『한국 기독교해방 10년사』, 88.
1)『김일성 저작전집』 6권(조선노동당 출판사, 1980), 8;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25 (국사편찬위원회, 2003), 452-453.
1) 『김일성 저작전집』 6권(조선노동당 출판사, 1980), 8;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25 (국사편찬위원회, 2003), 452-453.
66) 김광동, “북한군과 좌익에 의한 양민학살 규명과 명예회복 필요,” 74에서 재인용.
67) 『김일성 저작전집』 6권, 8;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25,, 452-453.
68)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16 (국사편찬위원회, 2003), 215-216.
69) 함광복, 『할아버지, 연어를 따라 오면 한국입니다』 (도서출판 Eastward, 2007), 301. 최태육, “신앙과 신념의 사람, 한사연 목사,” 『동부교회 순교자 열전』,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엮음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214), 278에서 재인용.
70) 이영빈·김순환, 『통일과 기독교』 (도서출판, 고난과 함께, 105-107. 최태육, “신앙과 신념의 사람, 한사연 목사,”278.
71) 나운몽, 『살기도 싫고 죽기도 싫었다』 (애향숙 출판부, 1996), 192-193; 199-202.
72) 감부열, 김윤국 역, 『한인 심중의 그리스도』 (가남사, 1981), 11.
73) 김남식, 『남로당 연구』 (돌베게, 1984), 448.
74) 『주한미군 일일보고서』 제 1권 (1946년 7월 12일), 606.
75) <동아일보>, 1948.2.19; 김남식, 『남로당 연구』, 306.
76) <동아일보>, 1948.7.13. 임창희,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임광호전도사” 「활천」 560-7(2000). 임광호 전도사의 아들인 임창희의 증언에 의하면 와리에서는 매일 밤 북한과 무선접촉을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2020년 11월 15일 전화 인터뷰.
77)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토비아, 2020), 239-241.
78) 『한국 기독교순교자기념관 데이터베이스(미간행)』 “김주현” 항목 침조.
79) 김헌곤 편,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223. 

 

박명수 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통합 ‘세습 허용’, 교인 80%
전광훈 씨 허위사실 유포, 1천5
“이단 규정 표준, 한국교회 제시
장경동 목사, 전광훈 씨를 돕고
안식일주의자는 이러나 저러나 죄인
장경동 목사, 전광훈 씨를 돕고
“귀촌 정착과 목회를 지원합니다”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