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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①
박명수 교수 논단
2022년 10월 17일 (월) 15:01:58 박명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본 연구는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연구책임자 박명수)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2021년 연구한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탄압과 학살연구] 연구중 개신교에 관한 부분을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3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필자 주>

박명수 / 서울신대 명예교수

   
▲ 박명수 교수 

   Ⅰ. 서론

 1. 연구목적 및 필요성

한국전쟁 시기 개신교는 소위 “적대세력”의 중요한 공격대상 중의 하나였다. 대표적인 피해지역의 하나인 전남 구림지역의 구림편찬위원회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공산 유격대의 공격대상을 “우익 쪽에 가까운 군경가족이나 인공치하에서 반동으로 모함을 받았던 사람과 기독교 신자”1)라고 규정한다. 즉 군경가족, 반동 유지와 더불어 기독교 신자들이 적대세력의 주요 공격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정근식 교수도 한국전쟁 당시 “좌익 테러의 대상은 여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나 기독교 교회가 포함되었다”라고 주장한다. 2)

한국전쟁에서 기독교의 피해문제는 박찬승 교수에 의해서도 지적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마을의 갈등구조를 신분/계급 간의 갈등, 친족/마을 간의 갈등, 종교/이념 간의 갈등의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하지만 그는 처음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연구는 많았으나 세 번째 문제에 대한 깊은 연구는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더 구체적인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한국 기독교는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와 더불어 공산주의를 한국 기독교에 대한 박해 세력으로 생각하고 신사참배 거부와 반공 이념으로 인한 순교를 대대적으로 강조해 왔다.4) 천주교는 긴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으며, 여기에 한국전쟁 기간에 발생한 순교자도 포함된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한국전쟁에서 납북되거나 학살당한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신앙을 기념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기간에 대한 민간인 피해를 조사했지만, 기독교인들의 희생문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간한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의하면 적대세력에 의해서 희생당한 조사에서 주로 경찰, 공무원, 교사, 각종 우익단체라는 범주로 설명하고 있지만, 기독교나 교회 피해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충남 논산 병촌, 전남 영광 야월, 전남 임자도와 같은 대표적인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도 적시되지 않았다.5)

한국 기독교는 한반도에 공산주의가 등장하는 1920년대부터 반공의 입장을 분명하게 유지하였다. 이것은 기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기독교인에게 널리 퍼져있었다. 이런 기독교 입장은 공산주의와 마찰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정치에 대해서 두 그룹의 입장이 있었다. 하나는 정치 참여파이며, 다른 하나는 정교분리파다. 전자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많이 기여했지만, 후자는 교회 재건과 신앙을 우선했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 그룹은 다 같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익의 공격을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왜 지금까지 정부가 주도하는 피해자 조사에서 기독교가 제외되었는가를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인 피해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종교적인 측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의 경우 독립촉성국민회나 대동청년단과 같은 우익단체에 참여하였고, 그 결과 이들은 좌익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따라서 피해 원인을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조사자들은 이런 기독교인의 피해를 정치적인 범주 안에 분류해 버린다. 그러나 이들이 왜 이런 우익단체에 참여했는가를 볼 때 결국 이들의 신앙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그들은 정치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둘째, 정치와 관계가 없는 기독교인들의 피해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로 피해받을 때 정치와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의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근본적으로 반공주의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반공주의는 좌익의 활동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지만, 내재된 반공의식으로 인해 그들 역시 피해를 받았다. 이런 기독교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의 피해는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들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 본 역사적 연구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본 연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첫째, 한국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봄으로써 왜 이들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우익에 가담하여 활동한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의 입장에서 반공을 지지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둘째,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 기독교인들의 상황과 명단을 수집하여 앞으로 진행될 연구의 기초로 삼고자 한다. 사실 한국 기독교는 몇 가지 차원에서 이런 작업을 진행하였다. 1. 각 교단별 피해자 조사, 2. 각종 피해를 수록한 수난사 저서, 3. 순교자기념관에 제출된 여러 문서 등이 그 대표적이다. 본 연구 및 조사는 이 외에도 다양한 자료를 수입하여 개인별, 교회별, 지역별, 피해사례를 작성하려고 한다.
 

2. 선행연구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한국전쟁을 통한 민간인 집단학살에 관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다. 하지만 이런 연구에서 기독교 피해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다룬 학문적인 연구는 윤정란의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으로 생각한다.6) 윤정란에 의하면 염산면의 기독교인들은 친일 세력도, 지주 세력도 아니었다. 단지 좌익들의 인민혁명에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물리적으로 공격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방해 세력으로 보았다. 윤정란은 비슷한 시기의 다른 연구에서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 달라고 촉구하는 동시에 이 문제가 극히 단순화되어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전락할 것을 염려하였다.7) 최근에 윤정란은 “한국전쟁과 전남지역 기독교 연구”에서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서 구술사적 연구, 마을의 근현대사 연구, 마을의 갈등 요인 연구, 기독교인들의 기록의 재검토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8)

김광동은 한국전쟁과 기독교에 관련해서 좀 더 포괄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을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수호하려는 건국 세력과 이것을 방해하려는 공산 세력 사이의 갈등이라고 규정하고, 따라서 한국전쟁에서 집단학살에 대한 연구가 좌익에 의한 집단학살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주로 우익/민족 세력과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9) 김광동은 2010년 “한반도에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전쟁 당시 한국 기독교의 피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공산주의의 종교 말살 정책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10)

한국전쟁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는 최태육에 의해서 진행되었다.11) 그는 우선 기록 문제를 들고 있는데, 기독교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이 주로 신앙과 반공의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한국전쟁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그는 공산주의의 기독교 박해는 오히려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기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태육은 그 후, 이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남북 분단과 6·25 전쟁 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였다.12) 이 논문은 지금까지 이 주제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기독교인의 탄압과 박해를 연구하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이 반공의 입장에 서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을 통해서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가 받은 피해가 객관적으로 밝혀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최근에 김득중, 임송자, 주철희는 기독교인의 박해 문제를 지역의 정치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기독교의 관계는 단지 지역 정치를 뛰어넘는다. 정근식은 “한국전쟁과 공동체의 기억”에서 “전쟁 후에 교회를 다니는 것은 사상을 보증받는 핵심적 피난 방식”이었다고 주장한다.14) 한국전쟁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인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박찬승이 지적한 대로 한국전쟁 전후의 기독교 박해를 연구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례 연구는 필수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박찬승의 『마을로 간 전쟁』은 사례 연구의 본보기와 같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당진 합덕 천주교에 대한 사례 외에 개신교에 대한 것은 없다. 현재까지 구체적인 사례 연구는 윤정란의 전남 영광군 염산면과 이재근의 전북 김제지역에 대한 연구다.15) 따라서 앞으로 이런 사례 연구는 좀 더 많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윤정란은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과거에는 그 기원에 대한 거대담론이 주 주제였지만 소련문서가 발굴됨에 따라서 한국전쟁을 북한과 소련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제 주요관심이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미시적인 접근이 환영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지역 간의 갈등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남북의 두 국가권력,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국제 권력이 존재하지 않다면 “만약 그러한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을 주민 간의 갈등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충돌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16) 이런 점에서 “전쟁에서 부분은 전체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라는 경구는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17)

본 연구는 이런 기존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전쟁에 나타난 기독교의 탄압과 학살을 좀 더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정치, 종교, 사상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3. 연구방법

본 연구는 일차적으로 문헌조사 방법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출판물을 통해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최근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내용도 참고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일부 지역에 대해서는 본보기 형식으로 방문 조사를 하려고 한다. 가능한 몇 장소를 선정하여 현장 방문을 통하여 지역의 생생한 이야기를 청취함으로 문헌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통시적인 연구방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즉 한국전쟁의 기독교 피해를 해방 직후부터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피해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예견된 사건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본 연구는 공시적인 연구방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즉 한국전쟁 가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시대에 일어난 다른 사건과 관련지어 살펴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앙에서 일어나는 일과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연결고리를 찾음으로 사건 총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기존의 여러 분야의 연구를 함께 살펴보는 학제간 연구를 진행하려고 한다. 현재 일반학계는 한국전쟁 전후의 피해문제 연구에 있어서 종교적인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독교계는 지나치게 순교자 담론에 매몰되어 사실확인에 미흡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 두 영역을 종합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II.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박해의 역사적 배경


1. 해방 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운동과 공산주의의 도전

개항 이후 일부 한국인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정치제도를 수용해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꿈을 가졌다. 이런 한국인들의 꿈은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더욱 분명해졌고, 이것은 3·1운동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발표되었고, 그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못 박아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정치제도가 서구 민주국가의 제도와 같은 임을 밝혔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는 새로운 이념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전 세계의 공산화 계획에 따라 한반도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연해주와 상해에 있는 한인들과 접촉한 공산주의는 1920년대 중반 한반도에도 공산주의 사상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한반도에서는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세력과 공산주의 국가(인민공화국)를 지향하는 두 가지 세력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단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개항 이후부터 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 일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이 싸움은 공산주의자인 박헌영이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박헌영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을 따라서 기독교를 부르주아의 핵심 세력으로 보았고, 이런 반동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공산혁명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공산주의를 경계하고, 이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비도덕적인가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단지 이론적인 논쟁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현실적으로 기독교의 부흥 집회를 방해하기도 하였고, 기독교의 부흥사들을 미신에 사로잡힌 자라고 공격하였다. 이런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은 만주나 연해주 같은 곳에서 더 과격하게 나타났다. 특히 연해주에서 선교하던 감리교의 김영학은 러시아 공산 세력에 의해서 강제노역을 당하다가 세상을 떠났다.18) 이런 소문은 당시 국내에도 널리 전해졌다. 이것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만일 공산주의가 집권하게 되면 기독교가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은 기독교 못지않게 공산주의에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어서 공산주의의 활동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매우 열심히 활동했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가 너무 심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특별히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타협하거나 지하로 들어가서 잠적하여 버렸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는 결코 공개적으로 대중화되지 못했다.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생각은 소수의 공산주의 운동으로 그쳤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1941년 11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기독교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은 기독교를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분리해 일본에 종속시키고자 힘을 기울였다. 1940년 대부분 선교사는 한국에서 퇴각하였고, 미국 영사관은 폐쇄되었다. 일본은 기독교를 서양 종교에서 벗어나 동양 종교로 만들려는 신학적 작업을 하였고, 한국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에 종속시키는 일을 추진했으며,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을 미국의 스파이라고 규정하여 활동을 제한시켰다. 일본은 종전 직전 미군의 진주시에 기독교가 미군과 내통할 수 있는 세력으로 간주하여 기독교인들을 일체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일제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한국 기독교가 가장 친미적인 세력으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감시했다.

이 당시 일본은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과 소련은 이미 1941년 태평양전쟁 시작 전에 일소중립조약을 맺고 있었다. 일본이 중국, 그리고 미국과 전쟁을 위해서는 소련의 중립이 중요했다. 특별히 전쟁 말기 일본은 소련의 중재를 기대하고 있었고, 그 중재 대가로 영토 일부분도 소련에 이양하고자 했다. 당시 소련은 일본과 조선에 각각 대사관과 영사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마지막까지 소련에게 일본과 미국 사이의 중재를 요청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19)

일제 시기 한국 기독교는 일본 제국주의와 갈등구조를 갖는 동시에 공산주의와도 대립각을 세웠다. 사실 1920년대 이후 서구의 여러 나라가 공산주의와 맞서는 가운데 파시즘으로 경도되었다. 일제 말 한국 기독교에도 이런 경향이 있었다.20) 하지만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맞서는 동시에 파시즘의 일종인 일본 군국주의와도 맞서야 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미국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반대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이 반공을 명목으로 독재국가가 되는 것도 반대했다. 이것은 195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의 이승만에 대한 거리 두기와 유신체제 내에서의 민주화운동으로 표현되었다.
 

2. 해방 직후 건국투쟁: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그리고 독립촉성국민회

해방 직후 처음 몇 주간은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흥미 있는 기간이다.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였지만, 아직 연합군은 함경북도의 일부(소련군의 진주) 외에는 아직 진주하지 않은 상태였다. 소련군 사령관이 평양에 도착한 것은 8월 26일이며, 미군이 인천에 도착한 것은 9월 8일이다. 이 당시 전국에는 각 도 단위의 건국준비위원회(혹은 자치위원회, 이하 건준)가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는 총독부 산하 각도가 각 지역별로 조선인을 내세워 구성하게 했지만, 상당수는 각 지역에서 자치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 당시 건준의 책임자들을 보면 기독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평안남북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위원장은 우익 기독교인들이었다. 서울은 원래 민족주의자 송진우에게 부탁하였으나 거부하자 사회주의자 여운형이 맡게 되었다. 함경남북도, 경상남도가 좌익에 속했고, 좌우가 합작한 곳도 있었다. 이것은 해방 직후 한반도의 정치적인 지형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명망있고, 온건한 인물들 가운데서 위원장을 찾았고, 여기에 합당한 인물들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많았다.21)

우익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나라는 중경의 임시정부를 모태로 해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와 비교하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익 사회주의자들은 일제 말 지하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인민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22)

하지만 이런 구도는 얼마 가지 못해서 전환되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 처음에는 여운형과 안재홍이 함께 건준을 만든 것처럼 되었지만 곧 바로 안재홍이 빠지면서 좌익 일색이 되었고, 서울의 건준은 9월 초 인민공화국을 만들고, 스스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은 점점 세력을 확대하여 각 지역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원래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대표로 존재하던 각 지역의 건준은 상당한 부분 좌익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인민위원회는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 미군이 진주하지 않은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과 일본 등지에서 귀국한 사람들에게 인민위원회와 좌익단체들은 이들이 활동하기 좋은 장소였다. 이들은 당시 젊은이들을 모아서 치안대를 만들고, 이것은 방해하는 경찰 세력들을 공격하였다. 해방 후 한국사회를 정밀하게 관찰한 그레고리 헨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23)

청년단체의 시대가 한국에 도래했다. 청년단체의 대부분이 정치적이고 선동적이었는데, 처음에는 주로 좌익의 성향을 보였다. 그 가운데 몇 개는 활발한 지하활동을 하고 있던 조선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들 단체는 처음에 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8월 15일 이후 수 주 일간 존재했던, 작은 정부라고 해야 할 것을 움직였던 치안대의 일부로서 결성되었다. 이들 젊은이들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무기들을 닥치는 대로 수중에 넣어서 경찰서를 점거하고, 순찰하고, 기부를 강요했으며, 분쟁에도 개입하여 권력의 길을 추구하였다. 가장 폭력적인 단체는 조선민주청년동맹이었다.

이렇게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지적할 것이 있다. 원래 좌익이 인민공화국을 만들었을 때, 그 목적은 새로 진군하는 미군으로부터 조선의 정부로 인정을 받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이런 좌익의 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건준에 참여했던 많은 우익 기독교인들은 건준에서 탈퇴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좌익은 건준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익 민족주의자들로 시작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로 귀결되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진주했지만 그렇다고 미군이 당장 남한지역을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의 진주는 상당한 기간을 걸쳐서 이루어졌다. 당시 남한을 점령한 군대는 미 24군단이었는데, 3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하지와 함께 9월 8일 인천에 도착한 것은 미 7사단(경기, 강원, 충청)이며, 그 다음에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전라도 지역과 경상도 지역에는 각각 다른 6사단과 40사단이 진주하였다. 따라서 실제로 군 단위까지 미군이 행정접수를 완료한 시기는 1946년 2월 경이었다. 이때까지 수개월 동안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각 지역에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1945년 가을 남한의 정국은 미군이 언제 진주하는가에 달려있었다. 서울에는 미군이 9월 9일에 도착하였고, 많은 한국인은 미군정과 관련된 일에 취직하고 협력했다. 그리고 10월과 11월에 걸쳐서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이 있었고, 따라서 이들을 환영하는 물결이 크게 요동쳤다. 이런 상황에서 9월 8일에 좌익이 만든 인민공화국은 점점 관심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것은 1946년 초에 일어난 반탁운동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서울의 각 정(동)의 유지들의 협조로 이루어진 반탁대회는 서울을 우파의 중심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하지만 지방은 그렇지 못했다. 각 지방에는 먼저 전술부대가 등장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였고, 그 다음에 민정부대가 등장하여 일본 당국으로부터 행정을 인수하였다. 민정부대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45년 12월 말이며24), 군단위까지 확대를 완료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전라남도의 경우 1946년 2월에 가서야 각 군 단위까지 민군정 부대가 도착하였다. 이것은 이 지역의 좌익들에게 충분하게 자기들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도착한 미군정 부대는 인민위원회가 이미 정부 행세를 하고 있었으며,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들을 압수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25) 해방 이후 감옥에 있던 사람들과 해외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거주할 곳과 생계수단을 찾고 있었는데, 일본인들의 재산은 이들에게 좋은 대상이 된 것이다. 미군은 해당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은 이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미군정의 무력 앞에서 이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늦게 도착하는 지역은 대부분 인민위원회가 어느 정도 유사정부로 자리 잡고 있었고, 미군이 늦게 도착한 제주도나 군단위의 시골 인민위원회의 경우에 더 잘 나타난다. 이미 몇 개월 동안 작은 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인민위원회가 미군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 배경이다. 원래 인민위원회는 미군으로부터 행정기능을 인수받으려 했다. 이것을 위해서 황급하게 인민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미군은 진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미군정 이외의 어떤 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했으며, 11월에는 정식으로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시했고, 이들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에서 “국”(國)자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1945년 늦가을부터 이듬해 초까지 자신들을 정부로서 활동하고자 하는 인민위원회와 이것을 거부하는 미군정 사이의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인민위원회에 맞서는 새로운 단체가 등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귀국해서 만든 독립촉성중앙회이다. 이승만은 10월 중순 귀국하여 조선의 모든 정당을 포괄하는 단체를 만들어 수권 능력을 갖춘 단체임을 과시해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고자 노력했다. 이승만은 우선 서울에서 이 운동을 시작했지만, 곧 전국적으로 확대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원래 이승만은 이 단체가 좌우익의 모든 단체와 그리고 중경의 임시정부까지 포괄할 것을 구상하였다. 하지만 좌익과 임시정부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독립촉성중앙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졌다. 이승만은 귀국하고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저조한 것을 보면서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지금도 독립촉성에 기여해야 함을 강조하였다.26)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초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좌익들이 들어와 자기들의 목적대로 인민위원회로 개편하려 시도하고,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탈퇴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국가의 정치문제보다 해방 후 기독교 재건 문제가 눈 앞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한국 기독교는 다시금 건국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 39명 중 우파 24명, 좌파 15명인데, 이 중에서 기독교인들은 우파에서 9명이다. 이것은 우파의 43%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 인구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라고 말할 수 있다.27)

이은선의 연구에 따르면 독촉중협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은선은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전모를 밝힐 수 없지만 “경남에서는 YMCA가 참여하였고, 경북에서는 기독교 연합과 안동의 이원영과 김광연 목사가 참여하였으며, 전남에서는 보성의 황보익 목사, 목포의 이남규 목사, 강진의 차래진, 해남의 송봉해 등이 참여하였다. 충남의 경우에 충남지부장 남천우 목사와 논산과 예산 지부장들이 기독교인들이었고, 충북은 구연직 목사가 중요 인물로 활동했고, 인천에서는 김영섭 목사가, 이천에서는 김동욱 목사가 활동하였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독촉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는 이승만의 호소에 응답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설명한다.28)

현재로선 각 지역의 교회가 독립촉성중앙회에 얼마나 가담하였는지 정확한 통계가 없다. 그러나 1946년 초 군산에서 열린 장로교 군산노회는 해방 후 어지럽던 정국을 하루속히 안정시키고, 독립된 나라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 조선독립촉성기독교협의회 지부를 군산노회에 설립하고, 각 교회에 가입하도록 권고할 것을 결의하였다.29) 아마도 이런 일들은 다른 노회에도 상당수 많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독촉중협의 활동은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민위원회에 도전이 되었다. 경남 포항의 인민위원장은 포항에는 오직 하나의 조직, 즉 인민위원회만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독촉중협은 해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0) 아직 독촉중협은 인민위원회나 그 방계조직, 농민단체, 노동조합, 청년단체 등 보다 약세였지만 목사, 지주, 기자, 교육자와 같은 유지들이 참여하여 점점 세력을 확산해 가고 있었다.31)

한국 기독교가 초교파적으로 건국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1945년 11월 말 정동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남부대회였다. 이것은 38선으로 북한에 있는 교회가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부대회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남한의 모든 교회가 모여서 당시의 정국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신탁통치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해방 이후 어떤 국가를 지향하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함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남부대회가 열리고 있는 같은 기간에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소위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우익 3영수 환영예배를 드렸다. 이 세 사람은 이곳에서 다같이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면서 한국 기독교와 건국 운동을 함께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독립촉성기독교협의회가 탄생하였다.

해방 후 민족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자신들의 정치를 위한 중요한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조차도 귀국과 동시에 교회에 나가며 기독교인을 자처하였다. 김구는 귀국 뒤 첫 번째 정치적인 행동인 반탁운동을 펼치는데 교회를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1945년 말 모스크바 외상회의가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김구는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고, 그 첫 번째 협력 대상을 교회로 삼았다. 사실 김구는 전국의 목사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또한 많은 기독교인도 김구의 주장에 동의하여 반탁운동에 나섰다. 반탁운동은 좌익의 대중적인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45년 말 각 지역에서는 새롭게 정국을 장악하려는 미군정과 여기에 대항하는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서로 맞서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는 독립촉성선전총본부였다, 1946년 초 이 단체는 전국에 약 40명의 선전대를 파송하여 각 지역에서 반공 강연을 하게 하였고, 1월 10일을 기준으로 약 80개의 지방조직을 완료하였고, 1월 말까지는 여기에 30개를 추가할 예정이었다.32) 아마도 당시에 진행되던 기독교청년연합회의 활동도 이와 비슷하였다. 이들은 기독교 남부대회가 열리고 있을 때 재조직되었는데, 주요 업무는 전국을 순회하며 반공 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영남지방에는 강원용과 조향록, 호남지방에는 윤판석, 경기지방에는 맹기영과 이명하 등이 참여하였다.33) 이들은 지방 순회를 하면서 각 지역에 우파조직을 만드는데 협력하였다, 예를 들면 이들이 경주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우익단체가 만들어졌다.34)

미군의 진주는 한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선교사의 자녀였던 윔스는 1945년 9월에 쓴 보고서에서 미군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데 가장 긍정적인 요소는 선교사들을 통한 미국의 이미지라고 주장했다. 한국인에게 중국, 일본, 러시아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헌신으로 미국은 좋은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로 미군이 각 지역에 주둔했을 때, 그들을 환영한 곳은 교회였다.35) 아울러서 미군은 상당수의 도지사를 기독교인 가운데서 임명하였다.36)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친미 세력으로 간주되었고, 여기에 도전하는 인민위원회와 대립각을 갖게 되었다.

1946년 2월 이승만의 독촉중협선전총본부와 김구의 반탁총동위를 합하여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었다. 이 독촉국민회는 우익을 대변하는 최고 단체였다. 이 단체는 정당이 아니며, 여러 단체가 모인 우익 국민운동협의체였다. 이것은 한민당과는 성격이 다르다. 한민당은 지주들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지만 독촉국민회는 여러 단체가 모인 국민운동협의체였고,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대거 가입하였다. 특히 건국준비위원회에 처음부터 활동했던 인물들이 독촉국민회에 가입하였고, 이승만과 김구라는 뚜렷한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건국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였다. 1946년 4월 10일 독촉국민회 전국도지부장회의가 열렸을 때 경기를 제외한 7개 도의 대표 가운데 4개 도의 대표, 즉 충북 구연직, 충남 남상우, 전북 배은희, 전남 이남규 등이 기독교인이었다. 특별히 이 지방조직의 핵심 인물은 전북의 대표자인 배은희였다.37)

1946년을 전후해서 각 지역 인민위원회는 세력이 약해지고 독촉중앙회나 독촉국민회가 세력을 얻는 기간이었다. 전라남도의 경우, 군단위에서 인민위원회가 해체된 것은 1946년 2월이었다.38) 그리고 1946 봄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는 기울기 시작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1946년 4월 소위 남선순행을 시작하였고, 순행하는 지역에서 독촉국민회가 새롭게 설립되거나 인민위원회를 독촉국민회로 개편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지역마다 이승만의 영향은 절대적이어서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들었고, 이것은 각 지방에서 우익세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39) 이런 과정을 통해 독립촉성국민회는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축출하고 강력한 우익단체로 자릴 잡았다.

1946년 5월 초,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끝났다. 소련은 이승만과 김구 같은 신탁통치 반대자들은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대표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으로 많은 사람은 소련이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을 가로막는 세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되었다. 독촉국민회를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었고, 여기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성토가 이루어졌다.40)

이은선의 연구에 따르면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독촉국민회 임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0%에서 40% 정도를 차지한다고 주장하였다.41) 이은선은 다른 연구에서 서울의 8개 구 가운데 4개 구의 지부장이나 부지부장이 기독교인이었음을 밝혔다. 경기도는 24개 군 가운데 6개 군, 강원도는 11개 군 가운데 4개 군, 충남 15개 군 가운데 2개 군, 충북 11개 군 가운데 2개 군, 전북 17개 군 가운데 5개 군, 전남 23개 군 가운데 6개 군, 경북 24개 군 가운데 5개 군의 지부장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42) 물론 이 연구는 제한된 자료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상당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3. 대구사건: 박헌영의 비합법적 투쟁과 우익세력의 형성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에 진행된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해체과정에서 남한의 좌익은 지지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과거 유사정부 기능을 했던 인민위원회는 미군의 진주로 그 힘을 잃었다. 특히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전했기에, 각 지역에서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울러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들이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통해 유사정부의 역할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 좌익들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라는 좌익 연합전선을 만들어서 우익단체인 민주의원과 대립각을 세웠다. 민전은 북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유사한 남한의 대표적인 좌익 단체다.

하지만 남한에서 좌익의 위기는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다음이었다. 미군정은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던 상황에서 박헌영과 좌익의 활동을 묵인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내세워 좌우합작을 시도하였고, 우익과 좌익의 극단적인 세력을 멀리하였다. 특별히 박헌영의 공산당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정판사 사건을 통해서 박헌영을 옥죄기 시작하였고, 아울러 여운형과 박헌영을 분리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박헌영은 남한에서 활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비밀리에 월북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박헌영은 소위 비합법적은 투쟁이라고 불리는 신전술을 꺼내 들었다. 원래 박헌영은 좌우합작에 대해서 특별한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으나 7월 중 북한을 다녀와서 그의 입장이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그는 남한의 투쟁과 북한의 지원이 결합하면 남조선을 공산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43) 이 시기에 스티코프는 박헌영에게 남한에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라고 지시하였다. 스티코프의 전략은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를 미군정과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스탈린에게 보고하였다.44) 미국은 좌우합작을 통해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데 반하여 박헌영과 소련은 보다 강력한 투쟁을 주장하였다. 이런 박헌영의 강경정책에는 당시의 국제정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만주에서는 장개석의 군대가 모택동의 군대를 제압해서 모택동의 군대는 압록강을 넘어 북조선에 와 있었다. 이정식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남한에서 박헌영으로 하여금 무력투쟁을 일으켜 미국에 타격을 입히고, 그러면 미군의 공격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보았다.45)

박헌영은 해방 직후에는 미국과의 타협을 통해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면 이제는 투쟁을 통해서 공산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박헌영은 민전을 장악하고, 소위 ‘민전 5원칙’을 제시하였다. 1.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2. 북한식 토지개혁 실시, 3. 친일파 척결, 4.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권력이양, 5. 입법기관 창설반대 등이다. 다시 말하면 미군정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만든 인민위원회가 권력을 이양받아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박헌영의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아울러서 얼마 가지 않아서 박헌영은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등을 합하여 남로당을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좌익의 결속을 강화하여 하나의 투쟁전선을 형성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여운형은 이런 남로당 조직에서 탈퇴하였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를 원했지만, 이것은 그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이 같은 박헌영의 전략은 1946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9월 철도노조의 파업을 시작으로 10월 대구 추수봉기, 서울대 국대안반대투쟁, 1947년 제주 3·1사건 등은 1946년 여름에 만들어진 박헌영의 신전술에 의존한 것이다. 박헌영은 이런 강력한 반미운동을 통하여 미군정을 약화시키고, 1947년 3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소련의 발언권을 높이려고 하였다.

1946년 10월 대구폭동은 해방 이후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대구사건은 원인적인 상황과 본질적인 요소를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대구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식량배급과 경찰의 폭정이다. 식량배급은 당시 미군정이 정책의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자 이것을 막기 위해서 경찰이 농촌에서 강제로 공출함으로 농민은 불만이었고, 도시의 굶주린 시민들은 쌀 배급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런 불만은 경찰과 미군정에게 표출되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박헌영의 신전술을 추종하는 좌익세력들이 개입하여 미군과 남한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상황 가운데서 대구사건은 발생하였다. 당시 소련은 박헌영에게 강력한 투쟁을 요구하며,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런 과정에서 좌익들은 친일경찰 척결뿐만 아니라 북한식 토지개혁, 정권의 인민위원회 이양등을 강력하게 요구하여46) 이들이 원하는 국가는 자유민주국가가 아니라 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식량배급과 친일경찰 척결을 넘어서는 공산국가 건설운동인 것이다.

10월 1일 발생한 대구폭동은 곧 진압되었으나 10월 3일부터 이 폭동은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곧바로 경북 일대로 확산되었고, 10월 초순에는 충청도, 10월 하순에는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그리고 전라도까지 확산되었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경찰서와 우익인사들을 공격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도 대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가 나타났다.

박헌영의 신전술을 통한 무력투쟁은 우익으로 하여금 커다란 경계심을 갖도록 했다. 미군정은 경찰로만 좌익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우파 청년단체들을 육성할 필요를 느꼈다. 그 결과 1946년 10월 하지의 승인 아래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민족청년단을 만들었다. 상당히 많은 우파 청년단체들은 대부분 좌파의 폭력행위에 대해서 자위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한국 기독교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바로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였다. 서울대학교에서 국대안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영락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베다니 학생회를 만들어 신앙운동과 반공운동을 병행하였다.47) 하지만 국대안반대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구사건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대구사건의 사태를 보고 경악하였다. 그는 “그 사상이 얼마나 혼돈하며, 그 질서가 얼마나 문란합니까? 저 영남 사건의 잔인무도한 참상을 보시오. 우리 민족에게 그 포악성과 잔인성이 있었던가요? 스스로 전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를 가지고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합시다.”라고 독려하였다.48) 이런 배경에서 1946년 11월 30일 종로 YMCA에서 서북청년회가 만들어졌다.

좌익과 기독교의 싸움은 대구 인근의 안강읍에서도 나타났다. 대구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10월 3일 안강에 도착해서 이 지역의 우익의 집에 방화를 시도하였고, 좌익 주동자 70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좌익을 모두 석방해 주었다. 그런데 10월 29일에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안강경찰이 폭도와 공모했다고 그 지역의 미군에게 신고하였다.49) 여기에는 안강제일교회의 목사 심응섭과 장로 김진수가 가담하였다. 이들은 1946년 봄부터 독촉국민회를 조직하고, 이것을 근거로 활동하였다. 당시 같은 교회의 장로 심능양은 이 지역 국민회 회장이었고, 조카 심만길은 대동청년단 육통지부의 선전부장이었으며, 그의 아들 심의진은 국민회 청년조직인 독촉청년회의 지역 책임자였다. 이들은 외지에서 나온 경찰들과 함께 지역에서 활동하던 좌익들을 색출하는데 앞장섰다. 여기에서 독촉국민회와 청년회, 그리고 기독교와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50)

비슷한 사례는 경주 내동면에서도 나타난다. 내동면은 해방 직후부터 반공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1945년 초 겨울 서울에서 기독교청년연합회의 엄요섭 목사가 내동면 구정교회로 내려가 시국강연회에 참여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우익단체를 표방하였다. 당시 구정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이여진은 당시 활동하던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 정당이라고 강조하면서 기독교와는 대립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1946년 4월 이승만은 남선순행을 떠났을 때, 그곳에 “국민회”를 조직하였다.51) 여기에서 기독교인, 이승만, 그리고 반공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구정교회는 해방 직후 우익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지역 국민회 반절 이상이 구정교회 교인이고, 이들은 해방 직후 이 동네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좌익과 싸웠고, 10월 폭동 당시에는 47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고, 무장하여 폭동을 일으킨 세력과 맞서 싸웠다. 10월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 이 지역의 좌익의 두목인 최병호로부터 협상하자는 연락이 왔으나 구정교회 교인들은 타협을 거부하였다. 결사대는 이 지역의 좌익을 토벌하러 온 경찰과 힘을 합하여 이 지역의 좌익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52) 이런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도 있었다. 
 

주(註)

1) 구림지편찬위원회, 『호남명촌 구림』 (경인문화사, 2006). 박승옥, “구림마을은 어떻게 화해를 하고 있는가?” 「제노사이드 연구」 4(2008), 261에서 재인용.
2) 정근식, “지역 정체성, 신분투쟁, 그리고 전쟁기억: 장성에서의 전쟁경험을 중심으로,” 「지방사와 지방문화」 7-1 (2004), 376. 
3)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게, 2010), 25-40.

4) 한국 개신교의 순교에 관한 기록과 연구는 상당한 분량을 갖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수난에 대한 대표적인 저서는 김춘배의 『한국 기독교수난사화』 (성문학사, 1969), 오영필의 『성결교회수난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71), 윤춘병의 『한국감리교수난 100년사』 (기독교대한감리회본부교육국, 2003), 아현중앙감리교회의 『6.25와 한국 감리교회 순교자』 (아현중앙감리교회, 2006) 등이 있다. 현재 한국 기독교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한국전쟁 가운데 희생자는 손양원 목사와 문준경 전도사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상규, “해방 이후 손양원의 생애와 활동,” 「한국 기독교와 역사」 35(2011), 219-250, 박명수, “문준경 전도사와 한국 근대역사,” 「성결교회와 신학」 35(2016), 150-168 등이 있다.
5)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2010) 참고. 특히 각 장의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사건을 참조하라.
6) 윤정란, “한국전쟁기 염산면 기독교인 학살의 원인과 성격,” 「한국 기독교와 역사」 20 (2004), 119-150.
7)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순교비의 사회/종교적 역할,” 『전쟁과 기억』 (한울, 2005).
8) 윤정란, “한국전쟁과 전남지역 기독교 연구,” 「남도문화연구」 40(2020), 226-227.
9) 김광동, “북한군과 좌익에 의한 양민학살 규명과 명예회복 필요,” 『북한』 (2007. 11), 76.
10) 김광동, “한반도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 『6·25 전쟁의 재인식』 (기파랑, 2010).
11) 최태육, “6·25 전쟁시기 기독교인 희생사건 기록문제,” 「한국 기독교와 역사」 37(2012), 155-180.
12)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목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13) 임송자, “여순사건과 순천지역 좌우 세력의 갈등,” 「역사학연구」 73(2019), 165-204,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 2009), 410;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948, 여순항쟁의 역사』 (흐름, 2017).
14) 정근식 외, 『구림연구: 마을공동체의 구조와 변동』 (경인문화사, 2003), 258.
15) 이재근, “‘교회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과 김제지역 개신교-,” 「한국 기독교와 역사」 54(2021), 195-232.
16)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56.
17) 이신용, “6·25 전쟁시기 북한의 민간인 납치동기와 특징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담론과 정책」 6-2(2013), 16에서 재인용.
18) 고성은, “‘시베리아 눈꽃’으로 피어난 ‘시베리아의 순교자’, 김영학 목사,” 『동부연회 순교자 열전』, 기독교감리회동부연회 엮음,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29-98.
19) 하세가와 쓰요지, 『종전의 설계자들: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메디치, 2019) 참조.
20) 김명섭, “공산주의대 파시즘의 관념충돌과 기독교: 조선/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선택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 논총」 39-1(2017), 179-214. 참조. 김명섭은 일제하 국내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파시즘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 당시 이승만, 김규식과 같은 해외의 한국 기독교 정치가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으며, 이것은 한미관계의 구조 속에서 기본골격이 유지되었다고 본다.
21) 자세한 내용은 박명수,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와 기독교의 역할,” 『대한민국 건국과 기독교』 (북 코리아, 2015) 참조.
22) 박명수, 『건국투쟁,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백년동안, 2015) 참조.
23) 그레고리 헨더슨,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 2013), 271.
24)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369.
25) 『주한미군사』 1권, VI. 지방점령, 전술부대의 군정 (한국사 DB).
26) <자유신문>, 1945.11.20.
27) 장금현,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기독교,” 『해방공간과 기독교 1』 (선인, 2017), 151.
28) 이은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지방 조직과 선전총본부의 활동,” 『한국개혁신학』 57 (2018), 273
29) 『조선야소교장로회 군산노회 제6회 회의록』, 27-28;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96.
30) 통일원, 『미군정 정보보고서 Ⅰ』 (휘문인쇄사, 1992), 756.
31) 이상훈,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 국가건설운동,” 「학림」 30호, (2009), 19-22.
32) <동아일보>, 1946.1.11.; 장금현,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조선기독교단 남부대회와의 관계,” 188.
33) 윤판석, 『천성을 듣는 사람』, 239.
34) 조향록, “좌익 단체와의 정면대립,” 『천성을 듣는 사람』, 209-210, 212.
35) Clarence N. Weems Jr., “Korea and the Provisional Goverment,” 『OSS 재미한인자료』 (국가보훈처, 2001).
36)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활동』 (선인: 2018) 참조.
37) 이은선, “독립촉성국민회와 기독교,” 『해방공간과 기독교 1』 (선인, 2017), 175.
38) G-2 Periodic Report, HQ 6th INF DIV, Chonju, Korea (주한 미 제 5사단 정보 참모부 일일보고서), 『지방미군정자료집』 제2권, 85.; 박찬승, 『마을로 간 전쟁』, 100.
39)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은선, “이승만의 남선 순행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조직 확산과 기독교,” 「성경과신학」 86(2018), 141-175.
40)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이영식, “해방정국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의 국민대회연구,” 「역사신학 논총」 37(2020), 162-208.
41) 이은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기독교,” 「한국교회사학회지」 46(2017), 324.
42) 이은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조직과 기독교,” 「한국개혁신학」 55(2017), 193.
43) Radio, TFGOG 451, CG USAFIK to CINCAFPAC, 040720/2, 4 Aug, 1946, AG files; 『주한미군사 2』 2장 정치와 사람들, 2. 좌익의 권력투쟁, c. 박헌영과 여운형의 대결(한국사 DB).
44) 『쉬띠꼬프 일기, 1946-1948』 (국사편찬위원회, 2004), 1946년 9월 28일자. 여기에서 쉬띠코프는 자신들의 주장이 완전히 관찰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할 것이며, 미군정과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할 것을 협상할 것을 지시하고 있고, 10월 1일에는 북한에서는 남조선의 투쟁을 돕기 위해서 북한인민들이 2시간씩 더 일을 하여 그 임금을 후원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45) 이정식,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 후사』 (경희대출판문화원, 2012), 59.
46) “대구 십일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 참조.
47) 김치선, “베다니 학생회,” 「만남」 259(1995. 8).
48) 박명수, “해방 후 월남기독교인들의 국가건설운동과 영락교회 청년회의 탄생,”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19), 259.
49)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Report of Angang Area Disturbances” (1946. 11. 14), 『미군정기정보자료집: 시민소요, 여론조사보고서』 1권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5) 참조.
50)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135-136.
51)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144.
52) 구정교회, 『구정교회 60년사』 (구정교회, 1984),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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