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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협회 이유빈 씨 사상의 성경적 접근
1999년 03월 01일 (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예수전도협회 이유빈 씨의 사상과 관련하여, <교회와신앙>은 이미 98년 11월, 12월호 두 차례에 걸쳐 보도한 바 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며, 반드시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 죄의 면면을 드러내야 한다는 이씨의 '공개 죄 자백' 사상의 문제점을 집중 분석한 것이다. 본 호에서는 이러한 이씨의 사상에 대한 교계 신학자들의 견해를 싣는다. 이씨의 '공재 죄 자백 사상'이 성경적으로 어떠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보다 세밀히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편집자 주>

오광만 교수

<교회와신앙>은 지난 11월호(1998년 11월: 110~135)에 실은 "예수전도협회 이유빈 씨의 공개 죄자백 사상" 기사에서, 최근 한국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죄 고백과 자백(하나님을 향한 것과 사람들을 향한 것) 사이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신앙 생활의 문제와 혼란을 지적하였다. 이 견해는 주로 한 선교단체의 이유빈 씨의 개인적인 성경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하나의 교리화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그 글에서 이유빈 씨가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죄 사함과 관련된 성경 구절이 성경 해석의 가장 기초적인 단어의 의미 정하기나 문맥 연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성경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죄 고백에 대한 이유빈 씨의 견해가 현 상황에서 사뭇 강한 어조로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고 이에 적절히 대처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필자는 여기서 이유빈 씨의 공개 죄자백 사상이 나오게 된 중심 성경 구절 중의 하나인 요한일서 1:5~10을 주해하여 그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죄와 죄의 고백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를 제시하려 한다.
 
1. 죄 사함에 대한 이유빈 씨측의 견해

이유빈 씨가 주장하는 신자들의 죄 사함에 대한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1) "교회의 거룩함은 사함받은 거룩함에서 오는 것이며"(p. 120), 죄사함받음의 증거는 "죄의 자백"에서 얻는다. 이 첫번째 지적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한일서 1:9의 본문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측할 만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설명에서 요한일서 1:9 본문에 대한 이유빈 씨의 이해는 사실 해당 본문의 의미와 전혀 동떨어진 것임을 드러내었다.

이유빈 씨측은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 사함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사함받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사함 받은 결과로서 죄를 자백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사함 받을 때 내 속에서 죄책감이 떠나게 된다고 지적한다(p. 125). 여기서 자백이란 고백과 다른,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죄 드러내 놓는 공개적인 자백을 의미한다(p. 128). 이렇게 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는 '전도'에 있다. 전도란 "자기가 구원받은 죄인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며(p. 121), "내가 용서받고 사함받은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며(p. 122), 또 각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나의 복음"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p. 124).

이유빈 씨의 이러한 생각은 주로 요한일서 1:5~9에 근거한다. 그는 공개적인 죄자백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해당 본문을 인용하여 본문에 등장하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과 엄연히 구별된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공개적인 자백으로 해석해 버린다(p. 123). 그리고 계속해서 죄 자백을 해야 사람이 다시는 죄로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과(p. 132), 떳떳해지고 죄책감이 없어진다는(p. 133), 실용적인 혜택과 결과까지 그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2. 죄 자백(고백)에 대한 요한일서 1:5~10의 가르침

이유빈 씨의 사상은 그가 자기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든 성경 구절(요일 1:5~9; 요 13:5~10; 사 6장; 히 10:22, 12:4)을 잘못 주해한 데에 그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본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요한일서 1:5~10을 중심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a. "고백"과 "자백"의 차이가 있는가?
우리말 사전에는 "고백"을 "숨긴 일이나 생각한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함"으로, "자백"을 "자기가 저지른 일이나 죄를 스스로 고백함"으로 각각 정의하였다.2) 또한 요한일서에 사용된 호모로게오(ομολογεω)의 의미에 대해서 Bauer-Arndt-Gingrich는 promise, agree, admit를 기조적인 의미로 제시하지만, 이 세 의미는 성경에서 사용된 예가 없는 경우이고, 성경의 예로서는 confess와 declare, acknowledge를 제시하였다.3)

Louw와 Nida는 의미론적으로 이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여 세 가지 용례를 언급하였다. 첫째는 "공공연히 대답하라는 강요나 고소자에 답변하면서 강한 선언을 하다"(declare), 둘째는 "어떤 사실을 공적으로 시인하다. 종종 이전에 행한 나쁜 행위와 관련하여 그런 사실을 시인하다"(admit와 confess), 셋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을 공적으로 표현하다"(profess) 이다..4)

Furst는 ομολογεω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어떤 것을 고백(confess)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요한일서 1:9의 해당 단어를 죄를 고백하고 인정한다는 그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와 연결시켰다. 이 단어의 의미와 관련하여 공언하는 사람은 사실에 직면하여 그것을 숨기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고 하여, 이 단어가 법적인 의미가 두드러지는 단어인 것을 강조한다.5)

위의 예에 의하면, 소위 "고백"과 "자백"의 엄격한 구별이 우리 나라 말에서나 헬라어 단어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이며, 적어도 혼용되어 사용된다. 그렇다면, 문제의 자백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늘어놓는다는 의미를 가지는지는 단어의 의미 확정에서는 찾지 못하므로 이 단어가 사용된 성경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죄의 고백(또는 자백)이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 아니면 반드시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과, 이와 아울러 이유빈 씨가 주장하듯이 고백과 자백(하나님을 향한 것과 사람들을 향한 것)을 구별하여, 고백(전자)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 이전에 발생하는 것이고 자백(후자)은 죄 사함을 받은 증거로써 발생하는 것이냐 이다.

b. 요한일서 1:5~9
1) 본문의 배경.
본문은 신약의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당대에 발생한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요한 서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요한 서신의 문제는 전통적인 사도들의 교훈과 상관없는 교훈을 가르치는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서신을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주로 영과 육의 이원론적인 경향을 지닌 초기 영지주의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대표적인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요일 2:22, 4:1~2, 15, 5:5~9).6) 또한 이들은 그들의 이원론적인 경향 때문에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도들의 전승에 충실하지 않았으며(2:26~29, 1:1~4), 독자들과 함께 교회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나 결국 이 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과 상종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공동체를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2:19).

이단들은 이원론에 근거하여 자기들은 영적으로는 구원은 받았으며, 몸으로 하는 어떠한 일도 영(靈)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국, 죄의 존재나 자신의 죄성에 대하여 부인한 사람들이다.7)이들은 현재 "완전함"에 도달했음을 주장하는 완전주의자들이고, 이 내용은 본문 1:6, 8, 10에 반영되었다.8)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자기들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들의 행동 사이에 커다란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9) 그들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워했다(2:9, 11, 3:17). 요한은 이들을 '형제를 죽인 가인'에 비유하였다(3:12, 15). 이들은 반법주의적 경향을 지닌 초기 영지주의 자들이었다.10)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요한은 독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줄 필요가 있었다. 요한은 이들의 주장과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여, 혼동 속에 있는 독자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표준이 무엇이며(1:1~4), 이단들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그들의 죄는 사함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어(1:7, 9) 진리와 영생이 있음을 가르치고(5:13),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빛 가운데 행하라"(1:5)고 권면하여야 했다.

이 주장을 위해 요한이 즐겨 사용한 표현은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모토를 빌어 그들의 논리의 맹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루려는 본문과 관련해서는 조건문("만일 … …라고 말하면서 … 하게 행동하면")이 사용되었다(1:6, 8, 10, 4:20).11) 이 조건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신자가 아니라 이단자들의 신행(信行)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요한은 자기의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교훈하기 위해서도 조건문-귀결문을 사용한다(1:7, 9, 2:1). 그러므로, 본문은 이단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조건문-귀결문(6, 8, 10절)과 독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권면을 위한 조건문-귀결문(7, 9절. cf. 2:1)으로 되어 있다.12)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도록 하자.

2) 1:5의 "빛 가운데 행하면"
요한이 맨 처음 그들에게 전해 주는, 사도들의 교훈과 일치하는 소식은 "하나님이 빛이시다"는 사실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은 빛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시 104:2, 119:105, 39:6, 27:1).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도 빛으로 알려지셨다(요 1:9; 8: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요일 4:8), 영이시고(요 4:24),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신 것과 동일하게 그분의 어떠하심을 가리키는 말이다.13)

그래서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알리신다는 계시적인 면을 가리킨다고 이해될 수도 있지만,14) 여기서는 요한이 6, 7절에서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이 도덕적인 의무를 표현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언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도덕성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빛 가운데서 행할 것(걸어다닐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곳이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빛이신 하나님을 소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빛은 하나님의 찬란하심과 그분의 신실하심, 그리고 그분의 순결함을 특히 강조한다(시 104:1, 2).15) 하나님의 도덕성은 그분의 본성이신 빛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다.16) 하나님은 절대적인 도덕의 완전함을 소유하셨다는 의미에서 빛이시다.17)

빛이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참 빛이 세상에 와 있는데도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악한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요 3:19~21; cf. 12:35, 46). 여기서 선한 사람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으로 소개되었는데, 진리는 빛처럼 도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누구나 빛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빛 안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리는 사람이 아는 것뿐만 아니라 행하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바울도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5절에 기록된 말을 한 요한의 의도는 도덕적 무관심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 윤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이 이단들에게는 무시되어졌다. 요한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다시 수사적인 표현으로서, 그들의 주장과 행동의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2:9).
 
3) 1:6, 7의 "빛 가운데 행하면"과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6절의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는 5절의 내용에서 추론하여 내린 결론이다. "만일 우리가 하고"의 구도는 거짓 교훈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다.18) 즉, 이들은 교회를 박차고 나가, 자기들이 행하는 어떠한 행동도 영혼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빛이신 하나님과 상반되는 윤리적으로 어두움에서 행동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주장과 모순이다. "행한다"는 말은 "걸어다닌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 양식을 표현하는 히브리적 표현 방식이다(사 2:5; 잠 8:20).19) 이들은 겉으로는 어두움 가운데 있더라도 영적으로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20)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는 육체적인 도덕성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의미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오류와 죄의 어두움 속에서 행동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그들의 행위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거짓임을 증명한 셈이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와 상관없는 사람이다."21)

그러나,22) 우리가 윤리적으로 빛 가운데서 행하면, 그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므로,23)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사람이다. 즉, 여기서는 표리(表裏)가 부동한 사람(5절)과 표리가 동일한 사람(6절)을 대조한다. 이단자들은 그들의 행동으로써 사실은 그들이 진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였고,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까지라도 거짓인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자신도 거룩하여(cf. 마 5:48), 그가 믿고 주장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사람인 것을 드러낸 사람이므로,24) 그 결과 그런 사람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사죄함을 받는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에게는 사죄만이 아니라 죄로 인한 온갖 더러운 것에서 계속해서 깨끗케 하신다. 여기에 사용된 "모든 죄"(πασηs αμαρτιαs)는 단수형으로서 이것은 사람의 총체적인 죄성(man's sinful nature in general)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5) 이 부분 역시 앞의 문맥의 연속으로서 하나님과의 사귐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스토트는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요한은 빛 가운데 행함은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은 죄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빛이 거룩함을 의미한다면,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정직하게 사는 것뿐만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 순결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죄를 깨끗케 한다는 것은 고의적인 죄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지은 모든 죄 또는 우리의 타락한 성품의 오염으로부터 깨끗케 함을 의미한다." 26) 그러한 깨끗함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빛 가운데서 걸어다니면" 하나님께서는 그분과의 사귐에 금이 가게 하는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효인 것이다.27)

이런 의미에서 누구나 자기가 죄인인 것을 속일 수가 없다.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28)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그 사람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심지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규정한(롬 3:10, 23)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1:8, 10).
 
4) 요일 1:9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제 우리의 핵심 본문을 주해할 차례가 되었다. 본문은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이다. "죄의 자백"을 권면하는 요한의 가르침은 이단들이 죄에 대한 곡해된 견해를 가지고 자기들은 "죄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 죄와 상관없이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답이다. 여기서 요한은 이 문단(1:5~10)의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빛 하에서 "그리스도인과 죄" 주제를 적극적으로 다룬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것은 앞의 8절과 대조를 이루는 교훈을 전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이 때문에 "그러나, 만일" 이라고 이해해야 한다.29)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는 실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참회로써 자기의 죄를 시인(ομολογεω)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장애물을 치우시고 사람들을 그분과의 사귐 속에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대의이다.30) 결국,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죄와 빛 가운데 생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31)이단들은 이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는 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하는 말인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ομολογεω하면"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본성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acknowledge)하는 것을 의미한다.32) 이것이야말로 그릇된 주장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며, 여전히 죄를 짓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것은 명령이다.33) 이 사실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죄함을 얻는다. 칼빈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자백이 하나님께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백하는 사람의 마음의 신실함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34)

이 자백이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귀결절에 나오는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이다. 이것은 죄 자백에 대한 근거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에 있음을 설명하는 말이다.35)여기서, 우리는 죄 자백의 이중적인 단계를 찾아볼 수가 없다. 단 하나의 행위만 있는 것이다. 진리를 곡해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죄의 사실을 부인하든지(6~8, 10절), 아니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처럼 죄를 시인하든지(7, 9절) 둘 중의 하나이다.36)

마샬은 본문의 조건문이 하나님과 관련 있는 행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본문 하반절의 귀결절과 관련하여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내놓고 사죄를 구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3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반드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38)

그러나, 이 본문에는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명기되지 아니하였다. 웨스트코트는 이 고백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39) 그러나,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죄를 위한 고백과 사죄함의 증거로써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공개 자백은 아니다. ομολογεω가 세례(마 3:6)나 안수식(딤전 6:12), 신앙고백(롬 10:8) 등 공적인 경우에 여러 사람 앞에서 어떤 사실을 시인하고 공언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행위는 하나의 의식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행해지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고백 시에 자기 속에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 털어놓는 예는 없었다.40)

이 점에 대해서 슈나켄부르크는 본문을 "독자들에게 일반적인 의미로서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각의 구체적인 죄를 고백하라는 요구"라고 지적하고는 속죄일에 죄를 고백하는 예인 구약의 레위기 5:5, 6을 인용하지만, 레위기의 경우, 그 구체적인 죄에 대해서는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고 구체적인 죄를 지었음을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지적한다.41) 슈나켄부르크는 계속해서, 사죄하시는 분이 (언약에)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에게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사죄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회중이나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이 거기 서 있거나 뒤에서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교회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회중 앞에서 자기가 죄인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풍습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본문이나 심지어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라는 말이 있는 야고보서 5:16을 근거해서라도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42)

이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언어의 사용례를 들어 설명하는 브라운도 슈나켄부르크의 견해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 ομολογεω가 신약의 총 26회 사용 중에서 40%가 요한의 글에 사용되었는데(요한복음에 4회, 요한일서에 5회, 요한이서에 1회), 적어도 요한일서에서는 ομολογεω 동사가 공공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과 관련되었음을 지적한다(2:23; 4:2, 15).43) 그러나, 1:9에서처럼 죄를 자백하는 공적인 시인에서,44) "요한의 공동체가 예배 때든 성례가 베풀어지는 상황에서나 공중이 죄를 인식할 수가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이유빈 식의 고백과 자백의(하나님을 향한 것과 사람들을 향한 것) 이중 회개를 가르쳐 주는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다. 본문은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자기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모순된 행동을 하는 이단들을 겨냥하여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께 죄를 자백함으로써 사죄를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친다.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2:2), 죄를 사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며(히 10:19),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3. 마치는 말

죄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를 믿는 기독교에 있어 특징적이고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고, 모든 불의와 더러운 것에서 깨끗함을 얻고 또 얻는 과정에 있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며,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며,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다. 이런 죄인에게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에 동참하는 길이 마련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 이런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해서 우리를 정결케 한다는 것과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혜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렘 31:34)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에 따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하셨다(히 9:14). 그래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만 의존하여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월간<교회와신앙> 99년 3월호)


<주>
1) 이유빈 씨의 견해는 <교회와신앙> 1998년 11월호에 실린 기사에 의존했으며, 이 항목에서 언급되는 쪽 수는 같은 책에서 나온 것이다.
2)한글학회 지음, <우리말 큰 사전> 서울: 어문각, 1992.
3)Bauer-Arndt-Gingrich,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University Press, 1957), p. 568. 이 사전은 해당 단어가 법적, 종교적, 도덕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특히, 종교적, 도덕적 의미를 지니는 confess에 요한일서 1:9의 의미를 분류해 놓았다.
4) Louw &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United Bible Society, 1988). declare의 의미(p. 413); profess의 의미(pp. 419, 420); admit와 confess의 의미(p. 420).
5) D. Furst, "Confess," in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1. ed. by Collin Brown (Grand Rapids: Zondervan, 1975), p. 344. 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O. Michel, TDNT: 5 (Grand Rapids: Eerdmans, 1967), p. 207을 보라. "We admit that we are sinners and disclose specific sins in confessions."
6) F.F. Bruce, The Epistles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70), pp. 15~16.
7) John R. Stott, The Epistles of John, Tyndale (Grand Rapids: Eerdmans, 1980), p. 74.
8) Ruth B. Edwards, The Johannine Epistle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p. 101.
9) Ibid., p. 102.
10) Stott, p. 74.
11) 이것은 헬라어 εαν가정법으로 되어 있다. 이 조건문은 사도의 가르침과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문제를 제기할 때 사용된다. Raymond E. Brown, The Epistles of John (Garden City: Double Day, 1982), pp. 197, 231~236. 이와 비슷하게 그들의 주장을 ολεγων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2:4, 5, 9, 10, 11).
12) Brown, pp. 236~241.
13) 네 경우 모두 주어의 성질을 표현하는 서술적 기능을 지칭하기 위해 관사가 사용되지 아니하였다. 관사가 없는 명사의 '성질' 또는 특질 표현에 대해서는 Brown, p. 195; Brooke, The Johannine Epistles, ICC (Edinburgh: T & T Clark, 1912), p. 11을 보라.
14) Stott, p. 70.
15) Glenn Barker, 1 Joh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ed. by F. E. Gaebelein (Grand Rapids: Zondervan, 1981), p. 309.
16) Rudolf Schnackenburg, The Johannine Epistles (Kent: Burns & Oates, 1992), p. 74; F. F. Bruce, p. 41.
17) Stott, p. 70.
18) Stephen S. Smalley, 1, 2, 3 John (Waco: Word, 1983), 21; Stott, p. 73.
19) Brown, p. 197.
20) Stott, p. 74.
21) Schnackenburg, p. 77; cf. Bruce, p. 42.
22) 7절 앞에는 6절의 주장과 대조하기 위해 접속사가 있다. 6절의 조건문은 이단자들의 주장을 표현한 것이라면, 7장의 조건문은 요한의 가르침을 표현한 것이다.
23) John Calvin, The First Epistle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74), p. 238.
24) Smalley, p. 23.
25) Smalley, p. 24. Barker는 "죄"가 단수형으로 사용된 것이 죄 행위(sinful acts)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기 위함에 있다고 지적한다. 깨끗케 함은 사죄의 결과이지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Barker, p. 311).
26) Stott, p. 76. 이 설명에 의하면, 소위 자백 교리는 자기가 짓고 고백하는 죄에 대한 언급만 있지만, 본문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지은 모든 죄와 죄의 오염으로부터도 깨끗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7) Schnackenburg, p. 79.
28)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하면(εαν ειπωμεν οτι αμαρτιαν ουκ εχομεν)(8절)이 개인적으로 죄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εαν ειπωμεν οτι αμαρτιαν ουκ ημαρτηκαμεν)은 실제로 죄를 지은 사실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이단자들의 입장을 논박한다. Bruce, pp. 44, 45; Stott, p. 76.
29) Smallkey, p. 30.
30) Barker는 이번에는 7절과는 반대로 "죄"가 복수형(αμαρτιαs)으로 표현된 것이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죄 있음(our sinfulness)을 분명히 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Barker, p. 312.
31) E. Earle Ellis, The World of St.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84), p. 86.
32) Schnackenburg, p. 81.
33) 마샬은 9절 처음 시작이 8절과 마찬가지로 εαυ 조건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8절과 대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하고는, 본문이 조건문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명령" 또는 :의무"를 암시한다고 지적한다. I H. Marshall, The Epistles of John(Grand Rapids: Eerdmans, 1978), p. 113
34) Calvin, p. 241.
35) 하나님께서 미쁘시고(신실하시고, faithful), 의로우시다(just)는 말의 뜻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Brown, pp. 209~211을 보라. 거기서 Brown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셨다는 것과 심판을 행하시는 데 의로우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36) William Loader, The Johannine Epistles (London: Epworth, 1992), p. 11.
37) Marshall, p. 82
38) Smalley, p. 30.
39) B. F. Westcott, The Epistles of St.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66), p. 23.
40) F rst, p. 346.
41) Schnackenburg, p. 82. 맹세를 잘못하여 하나님께 허물이 있는 경우를 보여주는 레위기 5:5, 6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속건제를 드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은 이 이외에는 일반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구약을 실천했던 구약의 후기 역사나 중간기 상황에서도 재판을 하는 당국자들 앞에서 가공할 만한 죄가 알려졌다고 하더라도 "나의 허물로 인한 나의 죽음이 속죄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Sanhdrin, 6.2c).
42) Schnackenburg, pp. 82~83. 본문이나 야고보서 5:16, 그리고 요한일서 5:16은 구체적인 상황이 다르며, 또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43) Brown, p 208
44) 불트만은 ομολογειν ταs αμαρτιαs가 성경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음을 중시하면서, 이것은 "회중이나 또는 지도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개인의 죄를 하나님께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R. Bultmann, The Johannine Epistles,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73), p. 21.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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