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신앙> 이신성 기자】   근대철학은 인식론에 초점을 맞췄다. 즉, 인간의 인식의 근원과 방식을 고찰하고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가운데 근대철학은 이성을 신뢰하는 합리론(rationalism), 감각적 경험을 강조하는 경험론(empiricism), 이성과 경험을 종합하려는 관념론(idealism)으로 발전했다.
 

* 도대체 경험론은 합리론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

▲ 현재의 국기인 유니언 플래그(Union Flag).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섬의 국기를 조합한 것이다. 나무위키 ‘영국’ 갈무리.

합리론은 인식의 확실성의 근거로 인간의 이성만을 강조했다. 이들은 인간 안에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이성, 즉 본유 관념(innate ideas)이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본유 관념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생득 관념(生得 觀念)이라고도 번역된다. 합리론은 유럽 대륙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발전했기에 흔히 ‘대륙의 합리론’이라고 부른다.

본래부터 인간 안에 관념이 있다고 보고 그 관념으로부터 인식이 시작된다고 여긴 합리론과 달리, 경험론은 경험을 통해서만 관념을 갖게 되고 무엇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경험론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감각으로부터 관념이 생기고 인간의 인식이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인식에 있어서 경험을 강조한 철학적 사조가 영국에서 발흥했기 때문에 흔히 ‘영국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47)은 잉글랜드 출신이었으며,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도 잉글랜드에서 출생했다.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아일랜드,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스코틀랜드 태생이다.

이러한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가 근대 서양철학의 올레길과 둘레길 여덟 번째 코스이다.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던>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사고의 원천이 감각이라고 주장했으며,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산출된 의식의 요소들의 조합과 변형으로 인해서 인간의 기억과 사고가 유출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그를 경험론의 창시자로 보곤 한다. 다만 그가 인식에 있어서 감각적 경험을 언급하고 강조하기는 했지만, 철학적으로 자신의 인식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로크와 버클리, 그리고 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 ‘감각’(sensitivity)의 철학, 존 로크

로크는 합리론자들이 강조했던 본유관념(생득관념)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동일률이나 모순율과 같은 논리와 관련된 것들은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사람에게 주입되는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크의 주장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지식은 인간 이성이 아니라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로크에 의하면 인간이 태어날 당시에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는 ‘빈 서판’ 혹은 ‘백지상태’(Tabula rasa)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경험을 통해 얻은 관념으로 지식을 쌓아간다. 인간은 오직 경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지식을 얻는다는 말이다.

▲ 존 로크, 다음백과 갈무리

이렇게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만 유래된다고 주장한 로크는 그러한 경험을 외적 경험과 내적 경험으로 구분했다. 외적 경험은 감각을 통해서 얻는 지식이고, 내적 경험은 반성을 통해서 얻는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반성이라는 것은 정신의 사고 활동을 의미한다.

그는 감각 경험을 통해서 생기는 인식과 관련된 것들이 단순관념이고, 이러한 단순관념들이 정신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복합관념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복합관념은 단순관념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순관념은 감각경험으로부터 유래되기 때문에, 경험이 없이는 어떠한 관념도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무튼 로크는 인간은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을 만들고 이러한 관념들이 인간의 지식과 인식의 근거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로크는 인간이 경험하는 대상이 인간의 감각과 반성을 통해서 관념을 만들게 하는 어떤 성질이 있다고 주장했다. 운동, 길이, 형태 등 대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제 1성질이라고 불렀고, 색, 소리, 맛, 향처럼 감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을 제 2성질이라고 불렀다. 그는 제 1성질은 인식과 대상이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재적이고, 대상과 정확하기 일치하지 않는 제 2성질은 현상적이라고 설명했다.

로크에 의하면 제 2성질인 단맛만으로는 그 대상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바나나, 사과, 배 모두 단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색깔로도 대상을 확실히 알 수 없다. 노랗다고 해도, 그것이 망고인지 바나나인지 확인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감각은 반성을 통한 복합관념을 통해서 인식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특별히 제 1성질인 형태나 길이가 들어가야 확실히 인식대상을 알 수 있다. 즉 단맛을 내면서 겉은 노랗고 무엇보다 기다란(!) 과일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이 바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로크는 이렇게 감각 경험으로부터 유래된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또한 그 대상의 성질을 제 1성질과 제 2성질로 나누었으며 이것을 통해 보다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다고 봤다.
 

* ‘지각’(perception)의 철학, 조지 버클리

▲ 조지 버클리, 위키백과 갈무리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외부의 사물은 지각하는 존재와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크는 외부의 사물의 성질을 구분했지만, 버클리는 로크의 제 1성질과 제 2성질의 구분을 비판했다. 로크는 운동은 제 1성질로, 색은 제 2성질로 구분했는데, 버클리는 ‘운동하지만 색이 없는 물체가 있을 수 없다’면서 제 1성질과 제 2성질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제 1성질이나 제 2성질은 모두 인간의 주관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버클리는 로크가 외적 대상이 가진 고유한 속성이라고 강조했던 성질은 버리고 모든 인식의 근거로 ‘관념’만을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 대상들의 모든 것은 성질이 아닌 관념 안에서만 인식될 수밖에 없다.

버클리가 물질적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점이 중요하다. 로크는 관념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감각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감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외부의 물질적 실체를 가정했다. 이와 달리 버클리는 그런 대상이 되는 물질적 실체는 없고 오직 정신적 실체만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관념의 발생 원인은 비물질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지각한 것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인간 외부에 있는 물체의 존재보다는 그 물체를 지각하는 인간에 의해서 그 존재가 파악된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지각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현재 지각하지 못하는 나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지각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가족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버클리는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외부에 무엇인가 존재할 수 있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신이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버클리가 영국의 주교였다는 점에서 신을 인식의 기초로 전제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적인 면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경험하기 어려운 신이라는 대상을 인식의 기반으로 상정함으로써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론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 철저한 경험 철학, 데이비드 흄

▲ 데이비드 흄, 위키백과 갈무리

흄은 철저하게 경험론적 주장을 한 사람이다. 로크는 감각과 반성을 통해 관념을 가지게 된다고 했고, 버클리는 지각을 통해서 관념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이와 달리 흄은 인상(impression)이 인간의 관념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유래(산출)되는 인상과 관념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다만 인상과 관념이 어떻게 차이가 있냐는 질문에, 인상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얻게 되는 생생하고 강력한 것이고, 관념은 인상의 복사물로 원본보다 흐릿하고 희미하다고 설명했다. 흄이 관념을 강도나 선명성으로 구분하고 인상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로크와 버클리보다 생생하고 강력한 경험을 추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합리론을 수용한 사람은 모순율이 인간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본유관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흄에 의하면 이러한 모순율은 경험적으로도 얼마든지 이해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결혼한 총각’이라는 모순된 말 역시,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총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경험할 때 그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무튼 흄은 인간의 사고는 철저하게 경험에 종속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인상이다. 그는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인상 안에서만 유의미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흄은 철저하게 경험을 강조했고,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인상에 기반한 관념이 아니라면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특별히 인과율 같은 것은 허황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든지 경험에 의해서 다른 인상을 얻을 수 있고 다른 관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구를 칠 때 노란색 공을 쳐서 빨간색 공을 맞추면 당연히 빨간색 공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끼리 부딪치면 공은 움직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흄의 주장에 따르면 노란색 공으로 빨간색 공을 쳤어도 빨간색 공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빨간색 공이 엄청 무겁거나 노란색 공이 너무 가벼우면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란색 공이 빨간색 공을 쳤을 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지만, 당점을 위로 주면 빨간색 공을 따라 앞으로 가기도 하고, 당점을 아래로 주면 오히려 빨간색 공과 반대 방향인 뒤로 올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은 당구를 칠 때 당점의 인상을 가지게 하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인상과 관념을 가지고 당구를 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 대상이 ‘인접’해 있고, 하나의 대상이 다른 것에 비해 ‘시간적으로 선행’할 때, 그리고 하나의 대상에 다른 하나가 뒤따르게 되어 둘 사이에 ‘계기’가 성립할 때 보통 두 대상 사이에 필연성이 있다고 여긴다. 흄은 이런 필연성에 대한 생각 자체가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인접이나 선행, 계기 등의 인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니 이것들이 ‘습관화’되어 마치 필연성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적인 도출물이지 경험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철저한 경험을 강조한 흄의 철학 때문에 이후 철학자들은 보다 더 엄격하고 치밀하게 인식의 근원에 대해서 연구하게 됐다. 이러한 연구의 대표 주자가 칸트이다.
 

* 경험주의적 사고 속에서 크리스천은?

합리론은 모든 인간은 동일한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봤다. 이와 달리 경험론은 모든 인간은 동일한 감각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감각적 능력으로 경험한 것이 관념이 되어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고, 후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또한 심리적 불안으로 인해서 제대로 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지리적 차이로 인해서 다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도 없다. 또한 먹는 음식에 따라 경험 자체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서울 강남에서 교육받는 친구들과 섬마을 분교에서 교육받는 친구의 경험 자체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정의 경제력에 따라서 인터넷이나 책을 접하는 경험의 차이는 결국 인식의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어떤 친구는 물고기를 먹어본 경험이 없고, 다른 친구는 소고기를 먹어본 경험이 없을 때 어떻게 똑같은 인식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경험주의적 사고는 너무 순진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똑같은 경험을 한다는 단순한 가정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경험하는 것이 다르고, 따라서 그런 경험에서 형성되는 관념이 다르고, 결국 이것은 인식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경험주의적 사고는 이처럼 개개인의 경험이 다르다는 점을 어떻게 극복하고 보편화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합리론에서는 모든 사람에게는 본유관념(생득관념)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경험론은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더군다나 경험론이 강조하는 경험이라는 것은 전체 세계, 모든 사물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겪은 아주 작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 추천도서 <영국 경험론>과 <계몽시대의 철학 18세기의 철학자들>

예를 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까마귀의 숫자는 기껏해야 몇 마리 안 된다. 예외적으로 어느 지역에 가서 수천 마리의 까마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전 세계에 있는 까마귀를 다 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경험주의적 사고는 이런 우리의 일부분의 경험을 가지고 전체가 그런 것처럼 판단한다. 즉, 모든 까마귀는 다 검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전 세계의 99%의 까마귀를 보고 그 까마귀가 모두 검다는 것을 확인했어도, 나머지 1%의 까마귀가 검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아직 100%를 다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다 경험하지도 않고서 섣부르게 결정짓는다면 경험론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경험주의적 사고는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경험한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 전체는 이럴 것이라고 결론을 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경험한 교회와 목회자의 숫자를 보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의 교회는 썩었고, 모든 목회자는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뉴스에 나오는 몇몇 교회와 몇 사람의 목회자의 모습이 전체 모습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사고가 만연한 세상 가운데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생활하여야 할까? 우리는 일부의 경험을 가지고 일반화하는 오류를 벗어나야 한다. 난폭운전하는 대형 덤프트럭을 몇 번 봤다고, 모든 덤프트럭은 난폭운전을 하고 나쁘다고 결론을 내버리면 안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일부 경험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 크리스천은 나의 경험은 일부일 뿐이고, 아직 경험하지 않은 부분이 더욱 크다는 점을 염두하며 보다 유연하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추천 도서

F. 코플스톤, 이재영 옮김, <영국 경험론>(서광사, 1991)
I. 벌린, 정병훈 옮김, <계몽시대의 철학 18세기의 철학자들>(서광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