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홍 , 신천지
전체기사 | 상담제보 | 후원신청 | 배너달기
> 뉴스 > 이단&이슈 > 이유빈(예수전도협회)
       
예수전도협회의 공개 죄자백 사상과 관련한 인간의 사죄와 구원에 관한 신학적 성찰
1999년 03월 01일 (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윤철호 교수(장신대 조직신학)

이유빈이라는 사람이 예수전도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공개 죄자백' 사상을 주장하면서 기성교회와 신학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언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관련하여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의 빛에 비추어서 회개와 죄용서함에 관하여 몇 자 써 보려고 한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의 죄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왜곡에서 비롯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이요, 하나님보다 자기와 세상을 더욱 사랑하는 정욕이다. 이러한 죄의 본질은 구약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에 분명히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의 죄의 행위 속에 불순종과 불신앙과 교만과 정욕이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죄는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관계의 왜곡과 소외를 초래하였으며, 인간 사이의 관계의 왜곡과 소외현상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왜곡과 소외의 필연적인 귀결로 나타났다. 범죄 이후의 아담과 하와의 책임 전가와 그 후의 가인의 살인과 그 후의 홍수의 심판을 초래한 인간사회의 극심한 도덕적, 영적 타락의 기사는 이러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죄악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죄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죄의 회개와 용서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도 이에 상응한다. 인간의 죄는 본질적으로 사회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실재이기에 앞서서 신학적인 실재이다. 즉 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죄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회개와 자백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은총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죄용서와 구원의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신 것은 그분이 바로 이 하나님의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의 길을 보여주시고 몸소 그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다. 어떻게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는가? 그것은 우리편에서의 어떤 도덕적 선행이나 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에 의해 궁극적으로 현시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인 섬김의 삶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안에 궁극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우리의 복음의 내용이며 진리 자체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이며 대속적인 사랑을 통하여 죄인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값없이 화해되며 구원을 얻는다. 이 구원에 요청되는 전제는 우리의 진정한 마음으로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칭의와 구원은 은총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온다. 죄인된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말은 구원이 인간이 어떠한 선행이나 공덕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으로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진정한 회개와 믿음은 구체적인 행동과 삶 속에서 표현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를 회개한 후에 보여준 행동의 서약은 우리의 회개가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전환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야고보 기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상 믿음과 행동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분리할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과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자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죄용서함과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통하여, 이 은총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이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만일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이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자백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하거나 그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럴 경우에 우리는 다시금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공개 죄자백' 사상의 문제점은 바로 다시금 이 율법주의로 떨어질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의 죄를 다른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백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며 때로는 필요할 경우가 있다.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혔을 때, 그 잘못을 입으로 고백하고 용서함을 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보상까지도 약속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회개의 자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사함의 결과로서 그리고 그 죄사함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의 동기로서 나타나는 것들이지, 그것들 자체가 죄사함을 얻기 위한 조건이나 원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이 그러한 행위들에 의존한다고 믿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구시대의 율법주의의 사슬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자녀답게 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면 하나님의  자녀로 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구약의 십계명과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이며 기독교의 복음과 율법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위와 삶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죄와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동기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 응답이요 헌신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공개 죄자백' 사상이라는 율법주의적 요구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도 많으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그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매번 일일이 다 공개적으로 자백할 수 없을 만큼 허다한 허물과 죄를 짓고 살아간다. 누구도(아마도 이유빈 씨 자신도) 자신의 죄와 허물을 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다 공개적으로 자백하며 살지는 더욱 못할 것이 분명하다. 율법주의는 결국 인간의 두려움과 절망과 심판을 초래한다.

물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공개적으로 죄자백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감사와 감격의 동기를 가지고 인간 공동체 안에서 덕을 세우고 자기로 인하여 해를 입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상해주기 위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고 하면서 인간 공동체 안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로 인하여 해를 당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외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의 사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섣불리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며 그것은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필자는 조심스럽게 그러한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자백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진정으로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상하며 인간관계의 회복을 가져오는 것 외에,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는 행위가 갖는 목회 치유적인 유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에 그 죄가 진정으로 용서함을 받았는지 확신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우리의 회개가 철저하지 못한 때문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회개와 믿음이란 때때로 상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일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어떤 죄에 대하여 회개를 했다고 하면서도 동일한 죄에 대한 회개를 반복하여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회개 이후에도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여전히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의 고해성사는 이러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여주는 하나의 목회 치유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비록 비밀스러운 형식으로지만 신부에게 자기의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고 또 그 자백에 대한 사죄의 선언은 신부의 입을 통하여 직접 들으며, 또한 사죄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구된 참회와 선행을 통하여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하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을 돕기 위한 목회 치유적인 제도이지 우리의 죄용서함과 구원의 은총을 위한 신학적인 전제나 조건은 아닌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이러한 선의의 제도가 자칫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적 관계를 통한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의 확신을 약화시키고 나아가서는 다시금 율법주의적인 행위와 공로사상으로 우리를 잘못 인도할 위험성과 현실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보도된 바를 통하여 판단해 볼 때 이유빈 씨의 문제는 단순히 '공개 죄자백'이라는 사상에만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사상 전반에 나타나는 독선적인 배타주의에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에게는 극단적인 반문화주의적 불신과 기성교회와 신학에 대한 일방적인 적대감이 있는 것 같다. 그는 기성교회의 예배갱신 프로그램들은 마귀의 속임수이며, 성경공부는 도구화 프로그램이며, 교회 전도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화이며, 신학교는 심령을 죽이는 오늘날의 신학을 가르치며, 스포츠나 체육대회는 성령 없는 육신적 오락싸움이며, 기성교회의 전도신학은 인간의 방법이며 자신의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기성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또 걱정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신학적인 실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역사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갖는 이중적인 모순 때문이지 교회의 본질 자체의 문제 때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불행하게도 교회는 종종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와 구조선의 역할을 해오면서 동시에 인간의 불의하고 어두운 현실을 개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서 타락된 모습을 보여주곤 하였다. 그래서 어거스틴 이래로 이른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구분하여 사고하는 다소 이원론적인 신학전통이 있어왔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개혁은 이 땅의 가시적 교회를 떠나서 불가시적인 천상의 교회로 가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이 땅의 가시적인 교회는 모두 사탄의 세력이라고 정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의 피로 값 주시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쉽사리 교회를 정죄하거나 떠날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분의 몸되신 교회를 사랑하여야 한다. 비록 이 땅의 보이는 교회가 타락하고 왜곡되었을 지라도 그것은 교회를 정죄하고 떠날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자신이 지고 교회를 사랑하고 섬겨야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되며 종교개혁자들이 신자의 어머니라고 부른 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여야 한다.

끝으로 신학함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신학함에 있어서 특별히 양자택일적인 이분법적 사고나 자기의 입장을 절대화시키는 독선적인 배타주의는 금물이다. 신학함이란 흑백논리로 단번에 판가름나는 과제가 아니며, 유한하고 상대적인 자기의 관점의 한계성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의 상호비판적이며 건설적인 대화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열려진 영성을 필요로 한다. 복음은 단순하지만 복음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신학의 과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복음이 구체적으로 체화되는 형태는 다양한 인간의 역사적 현실과 경험과 이해와 사고의 지평 안에서 다양하며 또한 미래의 지평을 향하여 열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기독교 신학의 다양한 전통들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 수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신학함에 대하여 지극히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단견을 가지고 싸잡아 정죄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진실되고 겸손한 신학도의 영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세가 아니다. 공개적인 신학함의 장에 있어서 참으로 요청되는 '공개 죄자백'의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정죄하고 자기의 의를 인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독선적인 배타주의의 죄일 것이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독선적인 교만을 회개하고 자백한다면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하시고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죄와 허물 많은 나의 경우에서처럼.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3월호)

교회와신앙의 다른기사 보기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최근 많이 본 기사
JMS 정명석, 징역 30년 구형
이재록, 신옥주 등 자칭 남신 여
사이비종교 소재 영화 <원정빌라>
교회 AI(인공지능) 도입, 52
기억함의 사명을 실천하는 이성만
교인 10명 중 4명 ‘명목상 기
주의 날은 안식일인가 주일인가?
   <교회와신앙>소개걸어온길만드는 사람들광고안내후원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교회와신앙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아01814  /  등록일자 2011년 10월 28일 / 발행일 2011년 10월 28일
이용약관 / 발행인 : 장경덕 /  편집인 : 최삼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봉식
서울 종로구 대학로 19, 303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  /  Tel 02-747-1117 Fax 02-747-7590
E-mail : webmaster@amennews.com
Copyright 2005 교회와신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ame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