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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의 예루살렘, 애니(ANI)를 가다(2)
최은수 교수의 역사 현장 탐방
2022년 02월 11일 (금) 14:02:06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교수

 “내가 애니를 둘러 보면 볼수록, 애니에 대하여 연구하면 할수록, 나에게 점점 커져 가는 것은 애니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다”(커 포터 Kerr Porter)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포터(Porter)의 표현은 애니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이자 경탄일 것이다. 그런 애니의 잠재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쌓인 정신적, 영적 유산은 측량하기 곤란할 정도이다.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들을 종합해 볼 것 같으면, 애니의 역사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의 흔적들, 즉 아르메니아의 고대 국가였던 우라투(Urartu) 왕국의 잔재들과 불을 숭상하던 고대 근동의 조로아스터교와 연관된 유적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애니의 교회 관련 건축물들과 애니 주변의 지형을 묘사한 지도 

애니에 관한 기록이 아르메니아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가 대략 5세기 어간이다. 이때는 아르메니아가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100년 이상이 지난 무렵이었다. 이 당시 애니는 일부 지역의 언덕 위에 견고한 성곽을 구축한 모습이었다고 아르메니아 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7세기 경 이슬람 사상으로 무장한 아랍족들의 확장으로 아르메니아는 기존의 체제가 붕괴되는 시련을 맞이하였다. 아르메니아에게 닥친 거국적인 시련은 국교인 기독교에 바탕을 둔 민족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메스롭의 주도로 탄생한 아르메니아 고유의 문자를 기반으로 유무형의 유산들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조명자 그레고리의 철학과 정책대로 강력한 교육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과 민족적 정기를 공고하게 다졌다. 특별히 아르메니아의 이런 시련은 인류 역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겼던 애니가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는 전주곡이 되었던 셈이다.

   
▲ 옛 명칭으로는 알렉산드로폴(Alexandropol)이고 현재는 규므리(Gyumri)에 세워진 아숏 3세의 기마상 

아랍족들의 확장으로 시련을 겪었던 아르메니아는 한 세기 어간에 잃어버렸던 주권을 되찾게 되었다. 비록 지방 귀족들의 발호로 중앙집권화 된 정치체제는 확립하지 못하였을지라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르쯔루니(Artzruni) 왕조와 바그라티드(Bagratid) 왕조를 중심으로 구심점을 마련하였다. 애니가 중세 시대에 역사의 무대에 우뚝 서서 세계적인 조명을 받게 된 데는 바그라티드 왕조의 형성과 발전이 절대적이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른 사람들

애니(ANI)와 바그라티드 왕가는 불가불리의 관계일 정도로 밀접하다. ‘바그라티드’라는 말의 어원을 찾다 보면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른’이라는 의미가 눈에 띈다. 이 어원이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바그라티드 가문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바그라티드 왕가의 사람들은 왕과 왕비 등 모든 왕실 가족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받들어 섬기는데 헌신하였다. 그들은 크고 작은 교회들, 수도원들, 학교들, 그리고 기독교 관련 건축물들을 지어서 봉헌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 아숏 3세가 세웠던 성곽의 흔적들 

현재 터키의 동부 아나톨리아 전 지역,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이란의 일부, 이라크의 일부 지역 등을 아우르는 대 아르메니아(Greater Armenia) 영토에 산재한 교회당과 수도원들 다수가 바그라티드 왕조의 사람들이 앞장서서 일구어낸 유산들이다. 중세 시대에 여타의 나라들과 같이, 아르메니아의 바그라티드 왕가가 봉헌했던 수 많은 교회들과 수도원들이 예배의 장소, 학교, 사회복지 기관, 각종 회의장, 병원 등의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위대한 국가의 구심점이 되었다. 바그라티드 왕가의 군왕들 가운데서도 애니를 중심으로 아르메니아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인물들은 세 명이다-아숏 3세(Ashot III), 셈밧 2세(Smbat II), 그리고 가직 1세(Gagik I).
 

자애로운 통치자, 아숏 3세(Ashot III, 953-977 재임)

   
▲ 자애로운 왕인 아숏 3세의 성곽 근처에서 발굴된 가난한 자들의 주거지. 적어도 애니에는 무주택자가 없었다 

아숏 3세는 애니를 실크로드의 명소이자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장소로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아르메니아 국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교차로로써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곳으로 간파하여 애니를 새로운 수도로 낙점하였다. 아숏 3세의 천도 계획은 향후 전개될 애니의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위대한 시작이 되었다. 그는 애니 강과 악후리안강 사이에 위치한 애니의 지정학적 위치가 왕국의 수도를 방어하고 번창시키는 데 있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왕국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애니가 코카서스의 예루살렘, 실크로드의 예루살렘이 되는 과정에서 든든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아숏 3세는 비잔틴 제국을 도와서 메소포타미아에 산재한 이슬람 세력들을 약화시킴으로 애니가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바그라티드(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른)라는 이름이 함축하고 있는 뜻이 매우 고귀하기는 하지만, 왕실의 사람들이 대를 이어 예외 없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어 섬긴 점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들의 끝을 모를 헌신에 유구무언이 될 수밖에 없고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 애니에서 바라본 아라갓산의 위용. 현재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 중 하나이다 

왕국의 수도를 애니로 옮겼던 아숏 3세는 기존에 있던 소규모의 성곽을 확장하여 중간중간에 7개의 타워들로 구성된 외곽을 완성하였다. 각 타워에도 교회가 있어서 거룩한 도성을 방불케 하였다. 아숏 3세의 성곽을 중심으로 초기의 건축물들이 들어섬으로써 구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할 것 같으면, 초기의 성곽들과 근접한 곳에서 발굴된 주거지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집들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 주거지에서 발굴된 생필품들에서 부유한 상인이나 예술가들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애로운 군왕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숏 3세가 애니에 거주하던 가난한 시민들을 배려하여 주거지를 마련했던 점은 신앙심에 바탕을 둔 그의 심성을 여과없이 드려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애니로 들어온 그 어떤 사람들도 무주택자로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애로운 왕은 이런 작은 배려뿐만 아니라 애니가 대 아르메니아의 수도답게 기념비적인 건축물들로 도성을 채워 나갔다. 그의 왕비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사나힌(Sanahin) 수도원과 헤그파트(Haghpat) 수도원의 건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유유히 흐르는 악후리안강과 그 물소리도 애니의 생명력을 증거하고 있다 

아숏 3세가 도읍을 애니로 옮겨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성곽을 수축하고 수 많은 건축물들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애니에서 바라보는 모든 지역이 대 아르메니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동일한 곳에서 바라본 현재의 모습은 구슬픈 아르메니아의 아리랑이 연상될 정도로 애잔하다. 악후리안강이 흐르는 소리는 성지를 잃은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의 통곡과 눈물로 보이니 말이다. 게다가 동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 또한 애니를 거쳐갔던 무수한 증인들의 함성소리로 들린다. 지난 번 글에서 애니에 산재한 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묘사했던 것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나 여전히 동일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거룩한 도성 애니의 생명력을 외치는 증인들의 선포로 느껴진다. 비록 애니(ANI)의 진정한 후계자들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저 멀리 국경 너머에서 잃어버린 성지를 애달프게 바라볼 뿐일지라도, 그들 또한 돌들이, 바람이, 강물 소리가 크게 외치며 증언하는 거룩한 도성의 실존을 알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아니 위대한 소망을 가지고 애니를 바라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강대국들에게 패할지언정 굴복하지 않았고, 빼앗길지언정 그 정신과 유산을 잃지 않았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의 기상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런 견지에서, 필자가 처음에 가졌던 슬픈 감정은 어느새 기쁨으로 변하여 맑고 푸른 하늘, 선명한 아라갓산의 위용, 그리고 영산이자 노아의 방주가 도달했던 아라랏산의 웅장함을 소망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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