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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남장로교 파송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실존적 이해 1
최은수 교수 논고
2021년 12월 29일 (수) 13:31:11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시작하는 말

 지금까지 미 남장로교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들을 볼 것 같으면, 거의 대부분이 통시적으로 호남 선교의 흐름을 기술하는 경향들, 특정 인물들에 대한 선교지 활동 중심, 그리고 그들의 신학적 배경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 하다. 현재까지 여러가지 미진한 연구 분야에 대한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개진되어 왔지만, 한국에서 미국에 있는 원사료에 접근하기가 용의치 않았고, 다양한 제한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여전히 연구자들을 기다리는 주제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미 남장로교의 한국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그것은 미 남장로교의 호남선교를 통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역의 열매들이 맺어졌는데, 과연 그 선교사들이 가졌던 특이점이 무엇이길래 이런 역사적인 결과들이 도출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들은 그들이 당시 학생자원운동, 부흥운동, 그리고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임박하고 긴급한 시대적 요청 등에 주목하며 나름대로 그들의 헌신과 그 열매들에 대한 동기와 요인들을 규명코자 하였다. 필자도 이런 큰 흐름의 경향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을 이해할 때, 미국 전체를 말할 때는 자칫 미 북장로교의 입장에서 보기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내전인 남북전쟁을 계기로 한 나라지만 여전히 두 나라라는 정체성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 남장로교의 호남선교와 관련해서는 이런 일반적인 연구 경향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미국 남부라는 독특한 정체성과 시대적 정황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살펴보는 것이 더 올바른 역사 서술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미 북장로교는 ‘양키’로 불리던 ‘유니언’(Union) 군대가 남북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자신들의 전쟁 명분이 힘을 받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미 북부 즉 유니언 진영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였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의 미 북장로교와 패배한 남부의 미 남장로교의 상황은 극명하게 갈렸던 것이 사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미 남장로교 파송 7인의 개척 선교사들을 포함한 초기 선교사들의 실존적 위치, 즉 그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코자 한다. 필자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로, 미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그 엄청난 결과에 대한 관점보다는, 그들 개인이 살아 왔던 삶의 자리를 실존적으로 바라보면서, 한 인간으로서의 인생 여정에 주목코자 하는 데 있다. 둘째로, 한 인간으로서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희노애락의 삶을 살았던 그들이 호남이라는 역사적 정황에서 획기적인 선교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요인들을 사실코자 하는 데 있다.

먼저, 미 남장로교 초기 선교사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인 미 남부의 상황을 남북전쟁과 전후 복구과정에 맞추어 서술하는 가운데, 특히 전쟁 이후에 나타났던 각종 사회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삶의 자리에서 살았던 미 남장로교 파송 초기 선교사들이 그런 현실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견지했는가를 그들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중심으로 기술코자 한다. 특히 그들이 항상 질병과 죽음이라는 삶의 현실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신앙과 신학에 근거하여 기술함으로 이 글의 두 가지 목적을 어느 정도 충족코자 한다.
 

남북전쟁과 전후의 실존적 자리에서 살았던 미 남장로교 초기 선교사들

노예제 폐지 문제로 촉발된 전쟁은 연방을 지지하는 북부와 연방 탈퇴를 감행한 남부 사이에서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9일까지 장장 4년 27일에 걸친 내전이었다. 미 남장로교 파송 7인의 개척선교사들을 포함한 초기 선교사들은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던 무렵이나 직후에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전쟁의 참상과 전후의 어려운 상황들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살았다.

남북전쟁 기간 동안에 남자 백인 인구의 13-18퍼센트가 사망하였다. 역사가들의 추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수십만 명의 생명들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미 남장로교 파송으로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았던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선교사의 외가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다. 남북전쟁의 영웅이 된 그녀의 외삼촌 아브람 반스 풀커슨 대령이 전쟁 중에 전사하여 온 가족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전쟁 직후에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부친이 소천하였고, 매티 테이트 선교사의 부친 또한 전쟁 후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데이비스 선교사나 매티 테이트 선교사 모두 비슷한 시기에 모친을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미 남장로교 파송으로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가정에서 부모들이 거의 모두가 전쟁 당시와 전후의 고통들을 감내하였다. 가장인 남자들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거나 전쟁 지원 사역을 직접 감당하였으므로 남부군 총사령관인 로버트 리 장군의 항복이 주는 심리적인 박탈감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들은 양키 정권의 요구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하여 절망하였고 노예제 문제 때문에 전쟁을 치뤘는데 흑인 노예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대신 자신들이 양키 정권에 종속되는 노예의 신세가 되었다는 자괴감이 편만하였다. 남부의 입장에서 보면, 남부의 시민들이 자유를 찾아 이민을 택했고 온갖 난관들을 극복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었는데 갑자기 자신들의 재산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며 북부 즉 양키의 정책을 수용하라고 하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북부는 노예 해방을 통한 인권을 강조한 반면, 남부는 인권에 동의 안 하는 바는 아니지만 재산권과 인권이 불간불리에 있었기 때문에 ‘재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사실 양측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봉합하지 못한 책임은 고스란히 정치가들의 몫이었는데 말이다.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는 노예들을 해방시켜야 했으므로 ‘재산’의 상실에 대한 박탈감이 엄청났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재산은 하루 아침에 사라졌고, 그나마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의 가치는 폭락하였다. 당시 남부의 부동산 가치는 전쟁 전보다 67퍼센트가 하락하였고, 동산의 가치는 92퍼센트까지 급락하였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가장들은 안도의 감정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건사할 수 없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남부의 경제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장들은 황폐화 된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큰 난관에 부딪히기 일 수 였다. 가장들이 생계를 위해 운영했던 모든 사업들이 엉망이 되어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막막함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사업은 파산의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엄청난 채무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가장들이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현실로 인하여 그들은 심리적으로 불안감, 자괴감, 절망감, 두려움, 초조함, 적대감 등을 표출하며 외상 후 스트레스 같은 증상들을 보이기도 했다.

가장들이 사업을 접고 취직이라도 해야 하는데 전쟁에서 패한 후 남부의 경제가 피폐해진 관계로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남부 전체에 걸쳐 사회적 절망과 불안이 팽배하였다. 남부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폭넓게 확산되어 일상이 된 듯한 사회적 경제적 불안에 대하여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부모 세대의 정서적, 정신적 불안과 스트레스들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재산을 잃고 사업을 정리하고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빈곤으로 치달았고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들을 양산하였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된 가장들의 정체성과 존재감이 격감되면서 가정 폭력과 같은 문제들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면서 애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어 갔다.

비록 여자들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들은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며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초조를 일상으로 삼아 생활 전선에서 사투를 벌였다. 전후에 수 많은 남자들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 되면서 가장을 잃은 여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 못지않은 처절한 삶을 감내하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흑인 노예들을 통해 노동력 문제를 해결했던 농장주들은 전후에 자유를 얻은 흑인 노동자들에게 적정한 임금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경제적 부담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가장인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재산 가치의 하락, 노동자들과의 임금 협상과 관리에 서툴러서 곤혹을 치루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흑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던 여성들은 자신이 직접 그 힘든 노동을 감당했으며 어린 자녀들까지 노동의 현장에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 매티 테이트의 부친이 소천한 후 그녀는 가사 일을 거의 도맡아 했으며 오빠인 루이스 테이트는 모친을 도와 육체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북전쟁이 패배로 끝난 후에 남부지역에서는 이러한 힘겨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흔한 풍경이었다.

전쟁의 패배,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사회 경제적 위기 등 총체적인 문제들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재산까지 잃어버린 사람들 가운데 너무나 큰 충격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서 격리되기도 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극단적인 압박으로 말미암아 불안, 절망, 우울증의 증세를 보인 여성들도 정신병원으로 보내져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중에서도 자살을 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미 남장로교 파송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이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아니면 그 직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어린시절에 경험했을 정서적 심리적 문제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다분하지만, 아직까지 그 연령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 결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세 살 무렵에 부친을 잃었고 매티 테이트 선교사는 사춘기 무렵에 부친을 떠나 보냈다. 초기 선교사들은 어려서부터 미 남부의 전통적인 문화와 전후에 마주한 급격한 사회 변화의 한복판에서 살아갔다. 그들도 패배감, 절망감, 공허함, 공포감, 허탈감, 우울감, 상실감, 극한 슬픔, 소망 없음, 자책감, 죄의식 등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킨 남부만의 감성적 분위기에 젖어 갔다.

남북전쟁과 전후 복구과정을 거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전쟁 혹은 그 후유증으로 죽어갔고 다양한 질병에 걸려 고통을 당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유명을 달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양키로 불린 북부군의 승리로 인하여 수많은 남부군이 포로가 되었는데 그들의 상당수가 ‘피의 플럭스’라는 병에 걸려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매티 테이트와 루이스 테이트의 모친도 이 병에 걸려서 10년 넘게 고통을 겪다가 두 남매가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소천하였다. 특히 남북전쟁 후에 피폐해진 남부의 상황이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과 피의 플럭스와 같은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위생관념의 부재, 의료제도의 부실, 감염 예방의 실패 등이 복합된 결과였다. 패배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사회 경제적 스트레스와 그와 연관된 각종 정서적 심리적 정신과적 문제들, 질병으로 말미암은 고통, 그리고 죽음 등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알고 공감하는 것과 온몸으로 직접 체득하고 경험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미 남장로교 파송으로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남부의 분위기와 정서를 온몸으로 체득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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