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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여성 조명자 국가를 가다(7)
최은수 교수의 코카서스 조지아 역사 현장 탐방
2021년 10월 18일 (월) 15:53:59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난 기독교 정신

먼저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세계 최초의 여성 조명자 국가인 조지아는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민족적 정체성으로 잘 다듬어져서 오랜 세월 동안 시련을 이겨낸 조약돌처럼 더욱 빛나는 모습을 견지하였다. 조지아 사람들은 아랍계 이슬람의 흥기와 확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아보와 같은 인물을 배출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슬람 가문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이삭과 요셉 형제도 조지아 출신의 기독교도인 모친의 영향으로 자신들이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공개한 후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아랍계 이슬람이나, 몽골의 압박으로 밀리고 밀려서 조지아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십만여 명의 순교자를 남긴 이슬람계 호라즘 제국 모두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 포도  생산지로  유명한  카케티  지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시그나기  성벽. 수많은  침략자들이 이  루트를  통해  몰려오기도  했다. 저  멀리  구름  너머로  코카서스  산맥이  펼쳐져  있다.

실크로드에 산재한 수 많은 나라들과 종족들이 순식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조지아의 저력은 더욱 빛나고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슬람 제국들은 조지아 기독교인들을 처참하게 도륙하면 그들이 공포감에 휩싸여 더는 저항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듯 보였던 조지아인들 조차도 비밀리에 기독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조지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 사도들, 사도들과 동급으로 생각하는 세계 최초의 여성 조명자, 그리고 민족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희생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신앙의 후손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자신들의 목숨과 같이 여겼음이다.
 

눈-물로 다듬어진 세 번째 조약돌: 이슬람계 사파비드 제국(이란)의 박해와 추방

   
▲ 조지아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문양. 잘려나가고  손상된  모습  속에서  조지아의  기독교 정신을  말살하려고  시도했던  이슬람  제국들의  만행이  보이는  듯 하다


신앙으로 수놓아진 민족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솔선수범한 지도자들

17세기 초에 이란 즉 페르시아 계열의 사파비드 제국(Safavid Empire) 하에서 조지아를 포함한 코카서스 지역이 큰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조지아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민족적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1616년에 데이빗 가레자(David Gareja)의 사막 지형에서 6,000명의 조지아 저항군들이 기독교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지아 교회 역사는 이들 모두가 순교하였다고 기록할 정도로 조지아인들의 저항이 신앙과 직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 저항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귀족 등 지도자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앞장 섰다. 당시 조지아의 왕이었던 루아르삽 2세(Luarsab II) 또한 1622년에 목이 잘려 죽는 순간까지 민족의 신앙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 조지아  교회와  국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었던  이슬람  제국들의  흔적이  수도인 트빌리시  구시가에  남아  있다. 트빌리시  온천지대에  자리잡은  이슬람  사원

당시 섭정왕후였던 케데반(Ketevan) 여왕이 사파비드 제국 압바스 황제의 무자비한 살육으로부터 조지아인들을 보호하고자 자진하여 인질이 되었다. 케데반 여왕이 인질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지아인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압바스 황제는 보복의 차원에서 불에 달군 인두로 그녀를 처참하게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이 때가 1624년이었다. 동년에 압바스 황제는 조지아 기독교의 수장인 에브데모즈(Evdemoz) 총대주교도 참수하였다. 이는 압바스 황제조차도 타협을 모르는 조지아의 정신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9명의 커클리드제(Kherkheulidze) 형제들

   
▲ 1625년  마랍다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  세워진  기념  교회. 이  전투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9,000명이  순교하듯이  전사했다고  조지아  교회  역사는  기록하였다

1625년 여름에 조지아인들은 테이므라즈 1세(Teimuraz I) 왕의 진두지휘하에 사파비드 제국과 일전을 치뤘다. 조지아 교회 역사는 이것을 마랍다(Marabda) 전투라고 명명하였다. 압바스 황제의 처사, 즉 케테반 여왕을 인두로 지져서 죽였고 조지아 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총대주교를 참수한 일 등에 대하여 조지아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하게 분노하였다. 그 중에서도 커클리드제 가문은 아홉명의 형제들을 위시하여 그들의 어머니와 누이도 전장에 함께 하였다.

2만 명으로 구성된 조지아 군대는 기독교적 민족 정체성을 위해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압바스 황제의 군대조차 처음에는 조지아 군대의 분기충천한 모습에 당황했을 정도였다. 조지아의 테이므라즈 1세는 9명의 커클리드제 형제들에게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도록 했다. 조지아 교회의 역사는 이 때의 전투가 굉장히 격렬하였고 새벽에 시작된 전투가 밤 늦게까지 지속되었다고 기록하였다.

   
▲ 마랍다  기념  교회에  안장되어  있는  커클리드제  가문의  아홉  형제들, 어머니, 그리고  누이

조지아인들이 사력을 다해서 싸웠지만, 압바스 황제의 군대는 숫자도 많았고 체계적인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급조된 조지아 진영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지아인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저항함으로써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압바스 황제에게 각인시켰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고 9,000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조지아인들은 왕과 귀족들을 포함하여 모든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 포도  생산지로  유명한  카케티  지역의  한  포도원. 포도즙을  짜서  이런  항아리에  보관한다. 역사적으로  고통과  억압  가운데  살았던  조지아인들의  영혼을  적시는  신령한  음료  역할을  했다. 이것이  신이  내린  물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 이후 테이므라즈 1세 왕을 중심으로 조지아인들은 대규모 정규전보다는 게릴라식으로 전술을 바꾸어 지속적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결과적으로 압바스 황제도 테이므라즈 1세 왕의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신앙과 민족의 자주권이 확립되고 지속되는데 있어 9명의 커클리드제 형제들의 용맹함이 큰 역할을 했다고 조지아 교회 역사는 적고 있다. 현재 커클리드제 가문의 순교자들은 마랍다에 세워진 기념교회 묘지에 안장되어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그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 조지아  기독교의  심장과도  같은  므츠헤타의  모습.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조지아인들은  변함없이  우직하게  신앙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노예로 팔려간 조지아인들이 이란의 기독교 역사가 되다

마랍다 전투에서 승리한 압바스 황제는 조지아인들이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추방하여 이란(페르시아) 사파비드 제국의 노예로 만들었다. 본토에서 추방되어 하루 아침에 노예로 전락해 버린 조지아인들은 타지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이란 사파비드 제국을 여행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게멜리 카레리(Giovanni Francesco Gemelli Careri)는 이란에 살던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케레리는 조지아 사람들이 이란 사회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듯 행세하였지만, 조지아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결코 잊지않았다고 기억하였다. 이탈리안 여행자는 조지아인들이 이슬람과 기독교 관련 신앙고백들을 별도로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상황에 따라 이슬람 신앙고백들을 읊조리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인 신앙고백을 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압바스 황제는 조지아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시키려고 했지만, 카레리의 증언대로, 이란의 핵심부로 팔려간 조지아인들이 그 땅의 교회 역사를 이어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란의 기독교 역사도 뿌리가 깊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이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였고 사도들과 복음전도자들의 수고로 회심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생명력을 그 땅에서 이어갔다. 이란의 기독교인들은 아랍계 이슬람의 도전 앞에서도, 몽골의 침략의 와중에서도, 강력한 이슬람 제국의 서슬퍼런 칼날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강력한 신앙의 생명력을 계승 발전시켰다. 더군다나 사파비드 제국의 반기독교 기조 속에서도 오랜 전통을 간직한 본토의 교회와 더불어 압바스 황제가 노예로 데려온 수십만 명의 조지아 기독교인들이 면면히 흐르는 이란의 기독교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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