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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여성 조명자 국가를 가다(4)
최은수 교수의 코카서스 조지아 역사 현장 탐방
2021년 07월 21일 (수) 14:33:02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더운 물, 뜨거운 물(Warm Springs)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트빌리시(Tbilisi)

  이전 글에서 다루었던 눈이 녹아서 흐르는 눈-물, 여성 조명자 니노의 샘물(조지아의 실로암 연못), 그리고 신의 한 수인 포도와 관련된 물 등은 모두 차가운 물(Cold Water)로 풀어본 교회 역사였다. 이번에는 차가운 물 대신 더운 물, 뜨거운 물을 중심으로 코카서스 조지아 교회의 역사를 바로보고자 한다. 조지아의 청정 자연과 고풍스러운 역사의 흔적을 음미하려는 방문자들이 가장 먼저 발을 드디게 되는 곳이 트빌리시 국제공항이다. 이 공항에서부터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 대하여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된다.

   
▲ 더운 물, 뜨거운 물이라는 뜻을 가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그리고 메테히 교회 경내에 세워진 바흐탕 고가살리(바흐탕 1세) 왕의 기마상. 바흐탕 1세의 기마상이 구시가에 있는 온천들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트빌리시의 단어 뜻과 유래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조지아 교회 역사에서 교회를 받들어 섬겼던 제왕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왕의 업적은 단연 돋보인다. 하루는 바흐탕 1세가 삼림이 우거진 곳에서 사냥을 하다가 자신의 사냥용 매가 꿩과 함께 뜨거운 물에 빠져서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바흐탕 1세가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곳에 매료되어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도시를 건설해 나간 것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시작이었다. 그의 아들인 데이치(Dachi) 왕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공식적으로 수도를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로 옮겼다.
 

   
▲ 메테히 교회와 바흐탕 1세의 기마상. 므츠바리 강을 끼고 절벽위에 건축되어 전경이 장관이다. 가끔 메테히 교회 주변으로 돌풍이 강하게 불어서 방문자들의 낙상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더운 물처럼 뜨거운 삶을 살았던 바흐탕 왕

바흐탕 고르가살리 왕, 즉 바흐탕 1세는 조지아를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 진정한 자주 국가의 위상을 갖도록 ‘뜨거운’ 열정을 불살랐다. 당시의 정황상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흐탕 왕은 불을 섬기는 신생 페르시아 제국과 기독교권인 비잔틴 제국 사이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신생 페르시아 제국은 불을 섬기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조지아가 326년 한 여성 조명자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세계 최초의 국가적 위상을 만천하에 공포하였지만 대국인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종교적 간섭을 받는 상태였다. ‘뜨거운 물’을 좋아하는 바흐탕 1세는 세계의 패권을 다투던 양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주적 국가와 교회의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뜨거운 눈물과 뜨거운 피흘림으로 헌신하였다.
 

   
▲ 메테히  교회와  바흐탕  1세의  기마상에서  바라본  나리칼라  요새와  구시가지


뜨거운 이슈 하나, 단성론과 양성론의 대립

콘스탄틴 대제가 324년에 소집했던 니케아 종교회의는 세계 최초의 국제 기독교 연합 모임이었다. 이 종교회의는 명실상부하게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이정표였다. 아울러 얼마전까지만해도 박해를 피해서 카타콤이나 지하 동굴이나 한적한 곳을 찾아 도망다니던 각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이 황제가 마련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한 곳에 모였던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이런 모습만 보면 단순히 격세지감을 느끼며 갑자기 변한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한번 그런 달콤한 맛을 들이면 쉽게 떨쳐내기 쉽지 않을 정도로 중독성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 뜨거운  물, 더운  물의  뜻을  가진  트빌리시답게  구시가지에  있는  온천지구. 바흐탕  1세가  사냥을 하다가  자신의  매와  그  매가  잡은  꿩이  함께  뜨거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계기로  트빌리시가 조지아의  수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콘스탄틴 황제가 신앙이 좋아서 진정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까? 일면 맞는 말이지만, 그 뒤에는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우여곡절 끝에 동방을 지배했던 니시니우스 황제를 제압하고 명심상부한 일인 황제 시대를 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라는 인물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며 성부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교리를 설파함으로써, 기껏 통일시킨 로마 제국이 이 문제로 두 동강이 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래서 니케아 종교회를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하고 통일된 기독교 교리를 통해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고 보다 쉽게 제국민들을 다스릴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통일된 교리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 듯 보였으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제국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데 있어 발목을 잡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모두 완전하다는 양성론과 신성만 있다는 단성론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 바흐탕  1세의  재위  기간에  신생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양대  구도를  잘  보여주는  지도. 흑해(Black Sea)와  카스피해(Caspian Sea) 사이에  위치한  코카서스  조지아는  거대한  양대 제국의  전략적  완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지정학적  구도였다.

당시에 5대 교구가 로마 제국 내에 있었는데,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 등이다. 각 교구별로도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324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이 문제는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를 통해 양성론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단성론을 지지하는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아서 상당히 오랜동안 교리적 대립을 하였다. 조지아 교회도 단성론과 양성론이 대립하다가 양성론으로 정리되어 갔다.
 

뜨거운 이슈 둘, 정치적 교회적 자주 독립

   
▲ 메테히  교회와  바흐탕  1세의  기마상에서  바라본  삼위일체  교회와  트빌리시  전경.

바흐탕 1세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를 대동하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기독교의 기원을 이루었던 예루살렘 방문은 왕으로 하여금 조지아 국가와 교회의 주권 확립을 위한 신호탄이었다. 당시 조지아는 정치적으로 양 제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고, 교회도 안디옥 총대주교의 영향력 하에서 종속된 상태였다. 더나아가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면서 지리적으로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서 직접 조지아의 대주교를 파송하여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마이클(Michael) 대주교는 신생 페르시아 제국의 조로아스터교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성과를 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마이클 대주교는 정치와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월권을 자행함으로써 조지아 국민들로부터 큰 반감을 샀다.

   
▲ 사메바  교회, 즉  삼위일체  교회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

바흐탕 1세는 예루살렘을 다녀온 후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밉상 중의 밉상이었던 마이클 대주교를 축출한 후, 피터(Peter)를 카톨리코스(Catholicos, 총대주교)로, 콘스탄티노플 출신의 사무엘(Samuel)을 대주교로 축성되도록 함으로써 다른 주요 대교구, 특별히 콘스탄티노플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교회의 자주권을 확고히 다졌다. 바흐탕 1세는 조지아의 주요 거점에 권역별로 주교좌(bishoprics)를 설치하여 거국적인 교회 개혁을 성공리에 진행하였다. 향후 조지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임명받은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 자국의 귀족 출신 중에 신앙이 좋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총대주교직을 이어갔다.
 

마지막 뜨거운 눈물, 뜨거운 피

바흐탕 고르가살리, 즉 바흐탕 1세는 거국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조직하며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세워 나갔다. 하지만 바흐탕 1세가 교회의 기초를 확고하게 하면 할 수록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생 페르시아 제국은 정치적으로 완충지대에 있던 조지아가 기독교권인 비잔틴 제국과 밀착되어 국제 정치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신생 페르시아 제국과 조지아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보다 훨씬 더 불리한 것이었다.

   
▲ 바흐탕  1세의  뜨거운  헌신과  뜨거운  피흘림을  발판으로  조지아는  역사의  질곡을  헤쳐나왔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가  현재의  발전된  모습을  갖게  되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이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바흐탕 1세는 교회와 국가를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하다가 신생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 중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고 급기야 뜨거운 피를 조국의 땅에 흩뿌림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트빌리시 구시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주요 명소들이 있다. 그 중에 바흐탕 1세와 관련하여 굉장히 아름다운 포인트가 있는데, 메테히(Metekhi) 교회와 그곳에 세워진 바흐탕 1세의 기마상에서 바라보는 구시가는 탄성이 절로 난다. 거기서 바라보는 나리칼라 요새와 주변도 대단히 아름답다. 특별히 바흐탕 1세의 기마상이 바라보는 곳이 트빌리시 구시가에 위치한 온천지대라서 여러가지 함축하는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이렇듯 바흐탕 1세는 뜨거운 물에 매료되어 트빌리시가 조지아의 수도가 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조지아의 정치적 교회적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뜨거운 열정과 뜨거운 피를 뿌림으로 ‘더운 물, 뜨거운 물’을 주제로 한 조지아 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족적을 남겼다. 하나님이 조지아에 선물로 내린 물은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 모두 조지아로 하여금 독특한 이미지를 갖도록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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