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군인들은 요즘 영어공부에 열심이다. 군 당국이 각급 군부대에 외국어 교육, 특히 기본적인 영어교육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때 맞춰 군인들의 영어회화등을 위해 <알아두어야 할 외국말 1백가지>란 소책자도 보급됐다. 흥미 있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다. ‘손들어!’ ‘인민의 편으로 넘어 오라’ ‘고향의 처자가 그립지 않은갗 같은 전투상황에 필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주로 미군과의 결전에서 초보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지침서다. 물론 북한군이 미군에게 포위되거나 잡혔을 경우를 가정한 내용은 없다.

북한군의 이 같은 움직임은 북한사회에 불고있는 외국어 교육 열풍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대변화에 맞춰 이제는 군도 외국과의 군사교류나 외국인들과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북핵 문제 등으로 부시 행정부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지만 북·미간 관계개선을 향한 큰 흐름 속에서 영어로 무장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언젠가는 한판 붙어야 할 미 제국주의와의 전투를 원활히 수행하려면 어학실력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이 외국어 교육, 특히 영어교육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외국어 하면 주로 러시아어를 의미했다. 그러나 구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어는 91년 6월 제2외국어로 바뀌었다. 북한 당국은 우리에 비해 좀 더 일찍 외국어 정규교육을 실시한다. 우리 나이로 9살이 되는 소학교(초등학교) 4학년 과정부터 외국어가 정규과목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주당 1시간에 불과하지만 회화 위주의 실용적인 측면이 강조되기 때문에 성취도와 활용도가 높다는 게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학교에서는 주당 3시간씩 외국어를 배운다. 지난 91년부터는 영어가 외국어를 앞질러 학생들에게 더 선호되고 있는 점은 북한이 외교관계에서 지향하는 바를 시사하고 있다.

북한의 영어교육 실태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은 토플시험 성적이다.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북한 응시생들의 토플 시험 성적을 우리와 비교해보면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 응시생들의 평균점수는 700점 만점에 479점 수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같은 시기 우리 응시생들이 얻은 평균 점수인 504점과 비교하면 다소 처지나 영어교육의 역사가 짧고 저변이 아직 넓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응시생이 수만 명 수준이지만 북한은 700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자체적으로 토플 시험을 주관하는 단체가 없기 때문에 주로 동구권 국가를 통해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1∼2002학기에 미국에 유학한 북한 유학생이 113명에 이른다는 미국 워싱턴 소재 국제교육연구소(IIE)의 발표도 관심을 끈다. 물론 이들 유학생은 북한에서 직접 유학을 간 형태가 아니라 쿠바·일본 등 3국으로 유학한 후 대학간 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다시 미국으로 한 학기 또는 1년간 단기 유학한 경우거나 유엔대표부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의 자녀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 최근 북한에서 14살의 학생이 80여 권의 외국 서적과 잡지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고 있어 화제가 된 점도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노동신문> 최근호에 따르면 이 학생은 평양외국어대학 외국어학원 4학년에 재학중인 김정련 군이다. 그는 지난해부터 우리의 국립도서관격인 평양 인민대학습당 위탁번역관리소에서 고정번역원으로 일하고 있다.

4살 때 유치원을 다니며 말과 글을 배워 신문까지 해독한 김 군은 부모와 유치원 교사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어학 영재교육을 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어 9살 때 매일 1시간씩 100여 일간 집중적으로 외국어 공부를 한 그는 이듬해인 10살부터 번역을 시작한 후 현재까지 사회학·문학·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과 잡지를 번역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그를 “전문기관과 학계를 놀래운(놀라게 한) 특이한 외국어 수재”라고 전하고 있다.

영어를 주축으로 한 이런 외국어 배우기 열기를 반영한 듯 북한의 관영 중앙 TV는 하루 15분씩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주로 외국어 대학 교수의 지도로 전공학생들이 특정한 상황을 설정해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는 이 프로그램은 학생뿐 아니라 당 간부와 관심 있는 일부 주민들에게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아직 외국인 강사가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어서 발음 교육에 한계가 있고 자막처리 등이 단조로운 점은 있지만 상황설정이나 세트구성에서 서구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호텔 복무원(종업원)이나 판매원 같은 대외봉사부문 종사자들도 부쩍 외국어 회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 실제 기자가 지난해 평양 아리랑 축전에 참가했을 때 보통강 호텔 상품 판매소에서 만난 판매원들은 손님이 없을 경우 삼삼오오 모여 가격을 묻거나 길안내를 하는 내용의 영어회화를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갱지로 만든 누런 공책에 푸른색 볼펜으로 영어 문장을 빼곡이 채운 뒤 주석을 달아 놓은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북한 당국이 지속적으로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데 힘입은바 크다. 평양에서 발간되는 대중잡지 <천리마> 최근호는 대외관계의 변화에 따라 외국과의 교류과정에서 각종 문서를 이해하고 작성할 수 있는 어학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91년 전체 중학교에 영어 교육이 의무화 되면서 불기 시작한 영어 붐은 이제 사회 각 분야로 뻗어 나가고 있다.

기존의 외국어 교육이 통역이나 번역작업, 특정 외교분야에 종사하는 인력 양성을 위해 이뤄지던 것과 달리 일반 교육과정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전민 군복무제가 실시되면서 축소되기는 했지만 외국어 학원의 과정을 마친 어학 특기자는 병역특례가 주어지는 특혜까지 누렸다. 이를 통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영어가 ‘미래를 보장 받는 확실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외국어 관련 인재를 양성하는 특수학교인 평양 외국어대학은 입시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미국과의 협상에서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북측 인사들도 결국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평가다. 대미협상의 주역인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차관)이나 아태평화위원회 이종혁 부위원장 등은 외국어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다. 김정일 체제가 들어서면서 각광받고 있는 외교나 대외부문의 간부들 대부분이 탄탄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어와 함께 일본어 학습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점도 주목의 대상이다. 이는 김정일이 지난 90년 “향후 일본과의 사업이 증가할 것이므로 일본어 교육에 힘을 넣으라”고 강조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최근 들어 북한 선박에 대한 해상봉쇄 움직임 등으로 다소 소원해지기는 했지만 지난해 평양에서 북·일 정상회담까지 갖는 등 분위기에 맞춰 일본어 학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평양 외국어대학은 정원 20명에 한 학급이던 일본어과를 2개 학급으로 늘렸고, 인민대학습당은 3개월과 6개월 과정의 일본어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최근 부쩍 늘어난 서방인사들의 방북 과정에서도 북한의 영어구사 능력이 향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방북인사는 “북한측 안내원들이 예상외로 영어를 잘 하는 데 놀랐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평양 시내에 있는 영문 안내표시판에는 철자나 표현에 난센스에 가까운 오류가 나타나는 등 미흡한 구석이 있지만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의 이런 외국어 교육 열풍과 수준향상이 북한체제의 개혁·개방 움직임과 맞물려 어디까지 그 파장이 뻗쳐나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