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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목회 사역 모두 하나님 은혜입니다”
퇴임 앞두고 기념문집 <사십> 출간, 최삼경 목사∙장경애 사모
2021년 05월 13일 (목) 17:26:58 양봉식 기자 sunyang@amennews.com

어머니 기도와 성령체험이 신앙의 틀로 자리 잡아
금품수수 시비, 이단옹호론자들이 만든 거짓 프레임
 

<교회와신앙> 편집인 최삼경 목사가 37년 사역한 ‘빛과소금교회’ 퇴임을 앞두고 목회사역과 이단사역을 기념하는 <사십>이라는 책을 발간했다(책 구입 및 문의 031-571-0191 빛과소금교회). 그와 관련 최 목사의 삶에 일어난 목회와 이단연구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터뷰의 시간을 가졌다. 40년 동역자 장경애 사모도 함께했다. 최 목사를 둘러싼 이단연구 명목으로 금품수수했다는 등 여러가지 거짓되고 왜곡 이야기는 물론 그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고 소문을 믿고 회자되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은 물론 한국교회를 늘 염려하고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최삼경 목사의 사역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편집자 주-

 

<교회와신앙> 양봉식 기자】   ▲ 목회사역 40년, 먼저 축하드립니다. '40'이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의미가 매우 커 보입니다. 이번에 발간된 <사십>기념집은 자서전이나 회고록도 아닌 매우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최은수 교수가 교회사 전공답게 교회사적 의미도 부여하고 교계 여러 사람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요? 
최삼경 목사(이하 최): 전적으로 최은수 교수가 주도하고 수고한 일입니다. 역사적 평가 같은 것을 나 죽은 후에 만들아 달라고, 책 내는 것을 반대했는데 기어이 저질렀네요. 책 내자고 해도 내 성격에 하겠습니까? 최 교수가 한국교회가 최삼경 목사에게 빚을졌다며 교계 여러분에게 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 제게도 글을 부탁해서 썼습니다. 분량이 상당하던데, 출간비용도 목사님이 지불하지 않으시고 최 교수가 알아서 했다고 들었습니다. 
최: 그러게요. 뜯어말려도 고집 피우고 책 출간을 진행하길래 그럼 책 비용을 좀 내가 부담 좀 하게 해 달리고 했는데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모금해서 하겠다고 했는데, 모금 내역도 알려주지 않고 빚진 사람 만드네요. 빚지고 못사는 사람인데 최 교수에게 단단히 빚졌습니다.

▲ 최 목사님을 한국교회의 이단연구의 선구자처럼 여깁니다. 목회자이면서 이단연구가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단연구를 하게 된 동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최: 이단연구는 당시 신학교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이단연구 강의는 몇백 명의 학생들 한 데 모아서 강단에서 진행했는데, 출석 부르고 기도할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기 일쑤였죠. 이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순전히 여동생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에 유학 갔다고 돌아왔을 때, 동생이 박옥수 구원파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옥수 연구하다가 자연스럽게 이단 연구에 발을 들인 것 같습니다.

▣ 이단에 빠졌던 동생 빼내려 한 게 이단연구 계기

   
▲ 최삼경 목사와 장경애 사모. 목회 40년을 은혜로 정리한다.

▲ 박옥수로 이단 연구가 끝날 수 있었을 것인데 계속해서 이단연구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최 : 동생을 구원파에서 꺼내오려고 박옥수 측에 공청회를 하자고 했습니다. 일종의 끝장토론을 제안했는데, 막상 공청회 하자고 하던 날에 박옥수 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생은  그 후에 구원파에서 나왔습니다. 공개토론 하려고 했던 과정에서 탁명환 소장을 만났습니다. 탁 소장이 <현대종교> 주필을 맡아달라고 부탁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단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종교>에 1985년 1월부터 1987년 3월까지 3년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메인 토픽의 글을 썼습니다. 어느 때는 한 달에 두세 개의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 최 목사님의 이단연구와 당시 이단연구가 글과 어떤 차별이 있었는지요?
최 : 당시 기억하기로는 이단연구의 경우 다른 이의 이단연구를 인용하는 것이 많았다면 내가 한 이단연구는 다른 이의 연구들을 인용하지 않고 오직 나의 신학적 지식과 상식을 가지고 독자적인 비판을 했다는 것이 차별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신학의 필연성과 개연성 빨리되는 편이라 이단연구를 하는데 차별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 최 목사님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가 성령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신비적인 것은 담을 쌓고 사는 목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인 고등학교 시절에 부흥회에 참석해서 경험하신 성령체험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죠?
최 : 목사가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산교회를 다녔던 어머니와 외조모의 신앙의 유산의 열매가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내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너는 목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장래희망 란에 ‘목사’라고 적었습니다.

   
 ‘빛과소금교회’ 퇴임을 앞두고 목회사역과 이단사역을 기념하는 <사십>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남들은 이단연구와 비판이라는 날 선 글을 쓰기 때문에 신비적인 영역에 대해서 전혀 문외하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부안읍에 있는 교회에서 개최한 부흥회 참석을 했다가 소위 말하는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했던 부흥회는 새벽, 낮, 저녁 하루 세 번 집회를 했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인 토요일에 마지막 예배 때에 새찬송가 32장 ‘주 예수 이름 높이여 다 찬양하여라’라는 찬송가 2절을 부를 즈음에 제 가슴에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주께서 당한 고난을 못 잊을 죄인아”를 부르는 순간 ‘나는 주님의 고난을 못 잊을 죄인이구나, 주님은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나를 꼬꾸라지게 했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내 죄를 보고 울었습니다.

▲ 그 체험이 목사님의 신앙의 전환점이 되셨겠네요?
최 : 그렇죠, 성령의 불을 받고 한참을 기도하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세상이 달라져 보이더군요. 하늘의 조각구름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말라버린 들풀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때부터 3km 정도 되는 당상교회에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때 체험으로 고등학교 3학 때에도 학교 책이 많아 미어터지는 책가방에다 성경책을 넣고 다녔습니다. 불 받아서 남의 예배당 들어가 기도하고 학교를 오가면서 산골짜기에 들어가 가랑잎 모아놓고 무릎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받은 성령체험은 신앙의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 성령님의 역사는 초대교회 이후 지금도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 어머니 기도와 성령체험이 신앙의 밑바탕

▲ 어머니의 기도와 그때 체험이 신학의 길로 인도한 모양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교에 들어갔었지요?
최 : 1969년에 총신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잘했는데, 입시 정보가 부족했던 때라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서야 신학교 입학 시험과목에는 수학은 없고 국어와 영어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공부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 신학교 때는 형편이 어려워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최 : 지금도 그렇지만 신학생 대부분은 가난합니다. 학교 다닌 때 적당한 옷이 없어 고등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고 다녔더니 동기생인 김종학이 고등학생이냐고 묻는 일도 있었습니다. 안수를 받은 교단이 예수교장로회 합동 전서노회입니다. 1981년 10월 9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니까 그때부터 40년 동안 목회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 빛과소금교회에 부임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던데, 원래 최 목사님 소속 교단이 아니었잖아요?
최 : 그렇죠. 당시 퇴계원교회였습니다. 퇴계원교회는 예장통합 교단이었고 나는 합동교단 소속이었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몇 군데 교회에서 교육부 전도사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가정교사(당시에는 대학생들이 가정교사로 들어가 살기도 했음)로 들어간 집의 가족들이 예장통합 소속인 휘경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집 가족들이 출석하는 휘경교회에 주일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휘경교회에서 신학생인 나를 눈여겨 보고 있다가 유년부 교육부 전도사로 사역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울공대 안의 공대인교회를 맡아 새벽예배는 물론 정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일학교 고등부 교사로 있던 아내를 만났습니다.

▲ 연예 사건이 있었군요. 하나님 섭리가 계셨던 모양입니다. 빛과소금교회 부임은 결국 휘경교회가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최 : 그렇게 된 셈이지요. 당시 퇴계원교회에 주일 강단이 비어 있어 설교하러 간 것이 지금까지 담임목사로 있게 되었습니다. 1985년 6월 마지막 주에 설교했는데 성도들이 맘에 들었는지 그해 7월 14일에 부임하였습니다. 합동교단 소속이라 통합 교단의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1년 동안 청목과정을 밟았습니다.

   
▲ 최삼경 목사와 장경애 사모. 빛과소금교회 본당에서..

▲ 최 목사님의 이단연구를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는지요?
최 : 이단연구를 잘해서라기보다는 당시에 이단 연구가 다운 연구가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현대종교>의 이단 문제 접근은 저널리즘 차원에서 현장의 도덕적인 문제를 폭로하는 쪽이었습니다. <현대종교>에 게재한 내 글은 신학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교회와신앙>도 이런 방향으로 이단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차별화된 이단 전문 잡지로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수학을 좋아했고 그것이 논리적인 글을 쓰는데 모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적 접근은 폭로식이고 또 신학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컨텍스트를 모르게 됩니다. 이단 연구가는 자기 연구의 절대성 내지는 우선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연구가 무조건 옳다라는 도그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목회와 신학의 균형을 가지고 이단 문제를 다루면 건강한 이단연구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속에 신학자, 목회자, 교계 언론, 총회 정치도 그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단연구는 물론 다른 사역의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은 그분의 물음입니다. 이단 연구가도 주님 사랑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 교회 사랑이 이단연구와 목회사역 병행 비결

▲ 최 목사님은 이단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목회자로서는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두 가지 사역을 병행하는 데는 쉽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최 : 목회자적 이단연구가 건강한 이단연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건강이라는 측면은 편향적이지 않고 이단 연구가들이 할 수 있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돈에 매이지 않아 깨끗하다는 점입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단연구로 먹고사는 목사라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교회와신앙>에서 월급 같은 사례비를 전혀 받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후원을 합니다.

이단연구는 매우 험한 일입니다. 고소 같은 법정 시비를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포기해야 할만큼 어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목회와 이단연구를 병행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한 목회하는 사람이다 보니 목회적 입장에서 이단을 연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목회자로 이단연구 어려운 것은 두 가지 병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은수 교수가 목회와 이단연구 40년 기념집 <사십>에서 미국교회나 한국이나 영국이나 이단연구 이만큼 잘한 사람 없다고 하더군요. 목회자로 인정받고 싶었는데 이단연구에서도 인정을 받은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 최삼경 목사

▲ 교회 성도들이 이해를 해주지 않으면 이단연구가 어렵지 않았나 싶습니다. 최 목사님의 이단연구에 대해 시비하며 항의하던 사람들이 교회까지 쳐들어왔던 적이 여러 번 있었잖아요?
최 : 늘 이단들이 내 목회 무너뜨리려고 데모를 했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인테넷 상에도 온갖 거짓말을 도배해서 나를 공격하는 영상이 돌아다닙니다. 신옥주, 윤석전 측 교회가 쳐들어온 적도 있습니다. 신옥주의 경우는 만난 적도 없고 비판한 적도 없는데 4개월, 16주 동안 데모를 했습니다. 경찰 55개 중대 와서 막았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런 일을 당해도 성도들이 참고 격려해주고 이단 대책을 함께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의 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주변에서 목회와 이단 사역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도 목회 역시 성공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단 분석에서도 차별된 것도 있고, 목회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는지요?
최 : 한국교회는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적인 정서가 강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오지 않고 감성적입니다. 내 이단 연구가 그것을 넘어서 합리적이고 분석적인이었던 점이 어필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목회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주일 설교준비에 2,30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화요일이 되면 머릿속에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를 준비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메모하고 준비합니다. 완성된 설교를 다시 수정하고, 저장하고, 어떤 경우 24번의 수정본이 생긴 적도 있습니다. 그런 덕분에 너무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 장경애 사모님은 최 목사님이 이런 분주한 삶에 박한 평가를 해 주실 것 같습니다.
장경애 사모(이하 장): 남편은 오직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와 관계된 것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설교준비에 투자합니다. 그러다보니 자다가 하는 잠꼬대도 설교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설교에 온 힘을 쏟습니다. 해외 여행을 가도 돌아가서 해야 할 설교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때로는 여행을 즐기지 않아서 "왜 이곳에 왔느냐? 집에서 설교준비나 하고 있을 것이지"라고 핀잔을 준 적도 있습니다.

▲ 사모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현상은 아니지만, 목회자로서는 교인들에게 매우 좋은 태도 같네요.
장: 일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사람이고, 심지어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일종의 일 중독 같은 삶이라서 아내로서는 그다지 환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편의 이런 모습에 소외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지 나중에 천국 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재주 많았던 장경애 사모의 목회 동역

   
▲ 장경애 사모

▲ 최 목사님과 사십년의 동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는 멘트 같네요?
장: 최 목사는 이미지가 매우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속정이 무척이나 많은 사람입니다. 눈물도 많고 동정심도 많아 오히려 이걸 역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내게 “최목사는 감나무에 감이 열리면 동네 사람들 불러 놓고 감나무에 올라가서 흔들어 떨어진 감 주워가라고 할 사람이다”라며 하실 염려하실 만큼 남 돕는 일은 정말 잘합니다. 누가 아파서 울면 더 먼저 아파하고 5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가는 사람이고, 10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100원을 주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물론 일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푼수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 장 사모님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생활에서 잘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 암송도 잘하고 중학교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장: 중학교 때 자그마한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아동부에서 봉사했습니다. 서무교사로 아이들 출결, 요절암송, 헌금, 인도, 생일 등을 담당했습니다. 가르치는 교사는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설교대회도 나가고, 고등학교 때는 3년 내내 1등을 했습니다.

▲ 당시에 숙대 교육학과에 입학하지 않고 신학을 해서 목사를 했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장: 하하, 워낙 성경에 열심하다 보니 성경퀴즈 대회에 고등부 선생님이 “이번만은 나가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가면 다른 아이들이 기가 죽어 안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가지 않을 것인데, 그때는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서 일을 냈습니다.

졸업하고 교직생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결혼을 사유로 그만두었습니다. 목사 아내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서원을 한 적도 없었는데, 하나님의 운명(destiny)이었나 봅니다.

▲ 최은수 교수가 ‘장경애 사모의 생애와 사역’에서 사모님의 사역을 가정사역, 교회사역, 이단사역, 작가사역으로 나누었더군요. 잘 분석한 것 같습니다. 아마 가정사역의 경우 장 사모님이 쓴 글을 인용한 것 같은데, 거기에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 이야기였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끝마무리가 매우 여운이 있던 글입니다.
장: 당연히 기억합니다. 아마 그 글은 내 삶을 빗댄 글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 “온달과 평강처럼 죽을 때까지 자신을 시골뜨기 바보에서 위용있는 장군으로 만들어준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더 사랑하고 사는 부부도 많다”라는 대목은 최 목사님과 장 사모님 이야기 같습니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언제나 헬퍼인 아내가 있죠. 그게 성경적일 수도 있습니다. 헬퍼란 능력이 많은 더 나은 존재이기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아내는 단순히 내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능력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장: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자신을 키워준 아내에게 작은 빚을 갚으려는 빚진 자의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는 부부도 있을 것입니다. 가정사역에 대한 최 교수의 분석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 보통 교회에서 사모의 역할은 있는 듯 없는 듯 남편 목사의 내조만 강조하기도 합니다. 장 사모님은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사역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장: 학교 교사도 한 적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성경공부 가운데 한 가지를 맡기도 했습니다. 초기에는 여성에 초점을 맞춘 강의를 했지만, 가정에 대한 관심을 교회 사역에 맞춰서 가정교육에 관한 강의을 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준비해서 강의했습니다. 교회 소그룹 강의도 많이 진행한 편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교육부 교사 세미나 부부문제, 자녀 교육 등을 커리큘럼을 짜서 강의했습니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한 강좌 내지 두 강좌를 해 왔습니다.

▲ 장 사모님은 강의만이 아니라 설교 잘 하는 최 목사님의 숨은 조력자이자 글 잘 쓰는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장: 뭐,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남편의 설교준비 과정에 항상 협력합니다. 설교에 필요한 자료 수집, 예화 정리는 물론 좋은 글귀를 찾는 등으로 도왔습니다. 같은 본문으로 한 유명한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 읽고 남편에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또 글쓰기를 좋아해서 여러 편의 글을 쓰고 있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발표하지 않은 글도 많이 있습니다.

▲ 그동안 소개된 사모님 글을 보면 미사여구 같은 화려한 수사적인 글보다 솔직 담백한 편입니다. 목사 사모니까 참아야 한다는 인내보다 힘들면 힘들다. 짜증나면 짜증난다, 남편과 싸웠다, 같은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글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장: 이번에 낸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수필집의 제목처럼 목사의 아내는 남편이 없습니다. 늘 분주한 남편에 대한 내 생각입니다. 내겐 목자도 없습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남편이 목사잖아요. 늘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이 목회자 가족입니다. 내 인생의 모토 중에 하나가 ‘솔직하자’입니다. 솔직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팔려 가는 당나귀’의 교훈을 늘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잘못되거나, 악이 아닌 경우에는 주관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생활을 할 것을 늘 다짐하곤 했습니다.
 

▣ 이단연구 금품 수수, 이단옹호론자들이 만들어낸 프레임

   
▲ 최삼경 목사와 장경애 사모의 40년 사역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 최 목사님은 옳다고 하면 좌우(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비판한다는 말을 합니다. 세간에서조차 주목을 받고 비판을 했던 명성교회 세습 문제를 보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구요.
최 : 나더러 날카롭고 비판만 일삼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정의문제는 비판과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옳지 않으면 사람을 가지리 않고 그 자리에서 지적합니다. 가족이라고 옳지 않는 소리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딸내미가 “외동딸은 다들 오냐오냐 하는데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보다”고 투정한 적이 있습니다. 옳지 않은 사람을 두고 원수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관계는 관계이고 옳고그름은 별개입니다. 옳지 않은 사람이라도 웃으면서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고 같이 여행을 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홍정길 목사님이 내게 최 목사처럼 험하게 살아온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험하게 살면서 자기를 지켰는냐고 묻더군요. 세 가지로 답변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은혜이고 둘째는 늘 기도하면서 목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부패를 통째로 싸잡아 비판하고 자기 위치는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문제가 있지만 전체는 아니며, 교회의 지체라는 점에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을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목회자 심정으로 한국교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곧 나 자신입니다. 셋째는 교회 안에서 이단옹호자들이 하도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잡히지 않으려고 달리다 보니 더 경각심을 가지고 나를 지켰나 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 이단옹호자들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단시비와 관련한 돈을 요구했다는 주장은 물론 갖가지 소문을 내서 괴롭히고, 그런 영상도 인터넷상에 돌아다니고 있구요.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 : 그동안 130여 회나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단연구가로 알려지다보니 무슨 이단시비가 일어나면 모두 내가 조종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에 집중하다 보면 전혀 알 수 있는 이단시비도 내게 화살을 돌리더군요. 신옥주가 교회에 데모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동안 이단을 옹호하여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수많은 모함을 하고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교회와신앙>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교회와신앙>의 실제적인 간여를 한 것은 이인강 씨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가 물러나면서입니다. 지금은 <교회와신앙>의 상임이사와 편집인을 맡고 있지만, 재정을 후원할 뿐 여전히 사례금을 받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이단연구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문제가 금품유혹입니다.

내게 잘못된 것이 있나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경각심이 됩니다, 교회에서 사례금을 받은 것으로 충분한 데 굳이 <교회와신앙>에서 이중으로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떡하면 한국교회 이단연구에 유익이 될까 고민하는 입장에서 일을하는데, 이단옹호자들처럼 이단해제를 빌미로 금품수수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이단연구해서 먹고 사는 줄 알지만 오히려 이단연구는 밥벌이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사역일 뿐입니다.

▲ 최 목사님이 사역해온 <빛과소금교회>의 성장사를 보면 초기 아주 작은 숫자의 성도였는데 지금은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 : 맞습니다. 초기 150명 남짓했던 성도가 지금은 재석교인이 3천 여명입니다. 개척교회 수준에서 대형교회 수준의 성도가 출석하는 성장을 했지만,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목회는 뒷전이고 이단연구로 먹고사는 목사로 오해합니다. 나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단연구가 이전에 목회자입니다. 나를 음해하려는 사람들은 내가 돈에 환장한 것으로 거짓말하지만, 이단연구를 빌미로 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터넷을 통해 <교회와신앙>에서 근무했던 사람의 개인적인 실수를 내가 한 것처럼 포장해서 유포하고 있습니다.
 

▣ 진리에는 타협없어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사람

▲ 최 목사님처럼 호불호(好不好)가 선명한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주변의 좋지 않은 잘못된 소문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왜곡된 내용을 그대로 믿기 때문인듯합니다. 댓글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심각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우울증을 앓는 연애인도 있던데 어떻게 견디시는지요?
최 : 어떤 사람은 집요하게 자신이 운영하는 언론으로 나를 호도하고 심지어 돌아가신 아버지는 물론 가족까지 건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로 인해 견딜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는 말씀을 읽고 울기도 했습니다.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이 오해하고 한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바르게 진실을 알아준다면 아홉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열 사람이 다 나를 오해해도 한 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시면 그 하나님 바라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최근에 했습니다.

나의 진정성 때문에 나를 시기하고 음해하는 사람이 있어도 여전히 <교회와신앙>을 지지하고 기도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합니다. 이단 연구하면서 신학적, 윤리적 그리고 논리적 학문성을 가지고 일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단옹호자들이 나를 미워하는 데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흔들고 털어도 먼지 나는 게 없어서 다른 사람의 흠을 가지고 내가 한 것인 양 포장하는 것입니다.

▲ 퇴임을 앞두고 교회 후임과 함께 교회 사역 정리를 어떻게 하시는지요? 또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최 : 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후임자를 구할 수 있어서 기쁘고 교회에 분규가 나면 사회에 교회 재산을 환원하도록 성도들이 흔쾌하게 동의해준 것이 매우 기쁩니다. 은퇴 후에 교회에서 마련해준 집도 내가 죽은 후에 이단연구를 위해 <교회외신앙>이나 교회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퇴임 후에는 신학교에 사용될 만한 책, 이단연구에 길잡이 되는 책, 학문성 첨가하는 책을 쓰고자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삶의 길, 지혜의 길, 용기의 길, 물질의 질을 다 투자해서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말 <빛과소금교회> 성도들에게 무조건 너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이단연구나 교회에 와서 데모하는 이단들을 참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나 때문에 성도들이 희생을 많이 했습니다. 내 몸이 아프지 않으면 병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이단 문제는 교회에 발생하지 않으면 이단연구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전제 아래에 교회가 부흥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더 부흥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떤 권사님 내게 이단연구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묻기도 했습니다. 나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처남도 누군가가 해야 되지만, 우리 집 식구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단연구의 길이 쉽지 않은 길이고 잘해도 본전 찾기가 어려워서 그럴 겁니다.

▲ 그런 점에서 장 사모님이 최 목사님의 이단연구 사역으로 인해 힘들었을 법합니다.
장: 맞죠. <교회와신앙>에 동참할 때도 반대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온 것처럼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비판 버릇이 삶에서도 묻어나거든요. 그게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겠다는데, 말려도 소용이 없어요. 남편이랑 싸우기 싫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속앓이야 많이 했습니다.

▲ 목회의 아쉬움이나 못하신 말씀해 주세요.
최 : 전도사 시절에도 부목사 때는 십자가의 길과 담임목사 된 뒤의 십자가의 길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다윗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실수가 있는 것처럼 나와 다르면 틀렸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내게 틀린 것을 고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전 교회를 떠나 한 번 재출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양지가 바뀌고 환경에 따라서 자기가 한 번 또 비약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큰복이라고 봅니다. 이 복을 후임자가 받았다고 봅니다. “나는 끝나는데 당신은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이 쉽지 않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점에서 후임자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 40년의 사역을 내려놓는 것이 섭섭할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 아들에게 세습해 준 목사님이 내게 “내 아들에게 물려준 것도 섭섭한데 남에게 물려준 것이 얼마나 섭섭하나?”고 묻더군요.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그렇고 섭섭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삶의 지혜, 경험이 한국교회에 조금이라고 유익하다면 계속해서 그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얼마만큼 허락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에게 가시를 없애 달라고 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것처럼 내 가시는 바울의 가지보다 적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가시를 없애시지 아니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교만해지니까 그러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고난당하면 하나님 내게 뭘 더 원하시는가?”라는 말을 합니다. 그동안 두 가지 사역하느랴 필설로 설명이 안 되는 고생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경제적인 것만 해도 30년 동안 적자였습니다. 자식들에게 속옷 제대로 못 사입히고 산 것처럼 지내다가 37년이 교회 재정이 흑자 전환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형을 보내주고 지팡이를 들려준 것처럼 내 목회사역에서 공급, 위로의 지팡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은퇴 후에 편안하게 쉬라 하면 쉴 수 있지만, 여전히 교회의 불의한 세습 문제나 이단 문제로 피 터지게 싸워야 할지 몰라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또 하나는 대못을 박은 사람에게 용서받고 또 용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 때문에 시험에 든 사람에게 케익도 보내고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달라고 해서 오해를 푼 적이 있습니다. 살면서 죽음 앞에 세 번 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들었던 세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첫째는 미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고 가자, 그리고 세 번째는 딸과 아내가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죽을 줄 알고 보험을 들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다 은혜입니다.

편안해서 타락하는 것보다 고난 중에 겸손하는 것이 백번 났습니다. 마지막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앞으로 몇 개월 남은 사역 잘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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